장날

동시 2019. 1. 24. 21:02

장날

 

 

엄마가 왔나보다.

사립문이 덜컹거린다.

펄쩍 뛰어 나가보면

지나가는 바람

 

사탕 한 봉진 사오시겠지.

살구나무 위 까치는

어림없다고 깍깍깍

 

미루나무처럼 목이 길어져 바라보는

산모롱이 길 

해가 이슥하도록

아지랑이만 아롱아롱

 

 

2019. 1. 24

 

posted by 청라

사막을 일구다

 

 

사랑편지를 전했더니

사막을 보내왔다.

그녀의 답신答信은 사막의 달빛처럼

무채색이다.

내 사랑 어디 씨앗 하나 싹틔울 곳 없어

도마뱀처럼 납작 엎드려

기어도 기어도 꽃은 피지 않는다.

선인장 가시에 긁힌 바람만 몇 올

모래언덕을 헤집다 스러질 뿐.

사랑이여!

작은 생명 하나 움트지 못할

불모의 땅에 뿌리를 내려보자.

깊이 숨어있는 초록의 숨결을 모아

천둥 번개를 불러오겠다.

바삭거리는 당신의 가슴에

몇 천 번이라도 비를 퍼붓겠다.

나는 사막을 일궈

사랑 한 그루 푸르게 크게 하겠다.

 

 

2019. 1. 8

충청예술문화92(201911월호)

 

posted by 청라

간송澗松 미술관에서

 

 

일본 땅 어디쯤 헤매고 있겠지

빼어난 어깨 위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온유한 가슴에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당신의 열정

민족혼이 지켜낸 천학매병千鶴梅甁

 

! 천 마리의 학들이 날아오른다.

비취빛 하늘

편편이 날리는 구름을 뚫고

 

종소리처럼 솔향기처럼

보아도 보아도 눈을 뗄 수 없는

가녀리고도 질긴 힘이여!

 

오롯한 한 가지만 심어도 좋을

좁은 입 속에

야월 한설夜月寒雪 피어난 한 송이 매화꽃 같은

당신의 정신만 꽂아놓고 싶었다.

 

 

2019. 1. 4

시문학20193월호

posted by 청라

비창悲愴

수필/서정 수필 2019. 1. 3. 06:05

비창悲愴

 

  일요일 아침 빈 배낭에 물병 하나 달랑 집어넣고, 단장 짚고 현충원 둘렛길을 걸었다. 산하山河는 뿌연 속진俗塵에 잠겨있다. 억새꽃 하얗게 덮인 길을 걷노라니 먼지에 덮인 세상이 마치 조화弔花처럼 생기가 없다. 내려다보는 계곡은 비석의 바다다. 나라를 위해 바친 목숨들이 비석으로 서있는 곳. 하고 싶은 간절한 말들도 꽃으로밖에 피울 수 없는 곳. 나는 망연히 바라보다 그 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병 ○○○의 묘. 무엇을 지키려다 어느 골짜기에 쓰러진 영혼인고? 죽음의 의미가 한없이 퇴색한 세태라서 질펀히 깔려있는 묘비들이 더욱 슬프다. 저들은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 것이다. 5월이면 철쭉꽃 영산홍꽃으로 밀어올리는 짙붉은 분노. 10월이면 억새꽃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하얀 한숨. 나는 주머니에서 오늘 처음 들고 온 새 손수건을 꺼내서 닦을 것 하나 없는 비문碑文을 닦고 또 닦아냈다. 문득 내 오랜 교직의 길에 아끼던 제자 장덕현 군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비석을 닦는다.

마모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묘지 앞에 심어진

시들지 않는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

 

흘러가는 세월 따라 흐르다 보면

모든 것은 삭아서 희미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파래지는

이끼 같은 슬픔도 여기 있다.

 

지하에 묻혀있는 영혼들의 외침이

한 송이씩 영산홍꽃을 피워 올리고,

향기처럼 떠도는

핏빛의 외로움

 

비석을 닦는다.

 

아픔의 찌꺼기 굳은살로 박혀있는

비문을 하나씩 짚어가며 닦다가 보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릴 듯하다.


                                   장덕현-‘현충원에서

 

  제36회 통일문예제전에서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던 시다. 정말로 비문을 한 자 한 자 짚으며 닦다가 보니 마모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시들지 않은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이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파래서 시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싱싱해지는 이끼 같은 슬픔, 과연 누구를 지키려고, 무엇을 위해 청춘의 꽃다운 목숨을 장렬하게 산화한 것일까.

  고귀한 목숨 값이 노란 리본에 가려져 한없이 작아진 요즈음, 폐기廢棄한 것도 없는데 전략적 미소 한 방에 저고리 바지 다 벗고 벌러덩 누워 모두 주려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슬픔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울컥 하는 감정 속에 차이콥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悲愴 악상이 떠올랐다. 묘비墓碑의 바다가 주는 장중함과 우울함, 그리고 그 아래 영혼들이 느끼고 있을 패배감과 절망이 11월의 삭막한 하늘처럼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명하니 앉아 하염없이 어깨를 떨 수밖에 없었다.

 

 

2019. 1. 3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