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

수필/서정 수필 2020. 11. 20. 10:13

내려갈 때 보았네

 

  가장교에서 유등천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능소화 덩굴이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다. 7월 하순부터 꽃봉오리들이 조롱조롱 맺히기 시작해서 어느 날 아침 무심코 바라보면 이 줄기 저 줄기에서 적황색 화려한 꽃등들이 피어난다. 아내와 함께 유등천변 산책길로 내려가다가 나는 문득 그 불쑥불쑥 솟아나는 꽃들이 아내가 내뱉는 볼멘소리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온 지 어느덧 40여 년, 아내라고 어찌 불평이 없었겠는가.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만 매달리는 남편 때문에 혼자 그 억센 아들 둘을 키우다시피 한 아내. 그런 속에서도 아내는 한 마디 불평조차 없이 긴 세월 인종의 자세로 견디어 왔다.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화려한 능소화의 몸짓 뒤편에 숨은 멍든 꽃잎, 벌레 먹은 꽃잎, 시든 꽃잎들이 마치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고 숨겨온 아내의 아픔처럼 눈에 들어왔다. 저런 아픔들을 끌어안고 아내는 그 오랜 시간을 견디어온 것이었다. 나는 시조 한 수가 선명한 그림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다물고

  참다 참다

  터져버린 볼멘소리

 

  귀담아

  듣다 보면

  송이송이 진한 아픔

 

  아내여, 긴 세월 견딘

  인종忍從 벗어 버렸구나.

                               엄기창, ‘능소화전문

 

  치매를 앓기 시작한 후 아내는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참지 않고 쫑알쫑알 불평을 잘도 말한다. 가슴에 콕콕 와 닿는 그 말들이 송알송알 피어나는 능소화 꽃송이 같다. 치매로 인해 원래 지니고 있던 신념이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늙어가면서 그동안의 삶에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단하던 인종의 자세가 깨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오히려 아내의 그런 태도가 반갑다. 이제는 아내나 나나 길다면 긴 인생길에서 내려오는 길로 한참은 내려왔다. 황혼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 서로를 인식해 할 말도 못하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선생님의 그 꽃이라는 시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그 소중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결혼 다음해 겨울 첫 아이를 낳고 돌처럼 차가웠던 셋집 단칸방에서 아이만은 따뜻한 곳에 누이려고 몸살 앓던 아내의 아픔. 보리밥이 먹고 싶다고 조르는데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안 가고 뻗대다가 아내를 울리고 말았던 철없는 세월. 그 젊은 날에는 왜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도 아픈 것들도 보지 못하고 있다. 봄꽃들의 다정한 속삭임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여름날의 무성한 녹음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가을날이 되어서야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단풍의 현란한 몸짓에 멈춰 서서 한참을 감탄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유등천 산책길을 걸으며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걷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는 아내가 잡는 손을 창피하다고 뿌리쳤었는데 요즈음은 오히려 내가 아내의 손을 틀어잡는다. 그리고 벤치에 함께 앉아 올라가는 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두루미며 청둥오리며 물총새들의 삶을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 이제야 나는 웃음 뒤에 숨은 아내의 아픔도 슬픔도 말갛게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모양이다.

  아내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꽃 이름을 몇 번을 가르쳐 주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에도 가르쳐준 꽃 이름을 또 다시 물어본다. 나는 내려가는 길에서야 이제 철이 들어서 열 번을 물어도 활짝 웃으면서 가르쳐준다.

  “여보, 이거 무슨 꽃?”

  “금계국

  “, 금계국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천 번을 물어봐도 짜증내지 않고 기꺼이 가르쳐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요즈음 돌부처나 십자가가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두 손을 맞잡으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딱 지금만큼으로 30년만 가게 해 주세요

 

 

posted by 청라

계영배戒盈杯

수필/서정 수필 2019. 10. 7. 10:58

계영배戒盈杯

 

  등산길에 한 친구가 K선생님 소천 소식을 전했다. 약간 시끄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니 그렇게 건강하고 열정적이던 분이 왜 갑자기?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는 것 같았다. 노욕老慾이 그 분을 망쳤을 것이다.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으면 조용히 쉬면서 못다 한 학문 연구나 하실 것이지, 다 늦게 웬 사립전문학교 총장을 한다고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송사訟事에 휘말려 갖은 고통을 겪었으니 강철 같은 그분의 정신력으로도 아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몸을 망친다. 나는 문득 계영배戒盈杯의 교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계영배戒盈杯란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 어느 한도 이상 따르면 술잔 옆에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든 잔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춘추오패春秋五覇하나인 제환공齊桓公군주의 올바른 처신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려고 늘 곁에 놓아두고 마음을 가지런히 했던 그릇(欹器)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리기도 했다. 순자荀子에서 보면, 후에 공자孔子가 제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적당할 땐 술이 새지 않다가 지나치게 채웠을 때 술이 새는 이 잔을 보고 제자들을 둘러보며,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한다며 이 그릇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는 온 세상을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말랐던 논과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고, 시들거리던 초목도 기운을 차려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푸르고 싱싱하게 한다. 그러나 이 비가 지나치게 내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면 오히려 이 땅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젊은 시절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기운도 능력도 떨어질 때가 되면 지나친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술을 어느 한도 이상 채우면 술이 새도록 만든 잔처럼 욕심이 지나쳐 몸을 망칠 때쯤이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자기 처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2019. 10. 7

 

 

 

posted by 청라

비창悲愴

수필/서정 수필 2019. 1. 3. 06:05

비창悲愴

 

  일요일 아침 빈 배낭에 물병 하나 달랑 집어넣고, 단장 짚고 현충원 둘렛길을 걸었다. 산하山河는 뿌연 속진俗塵에 잠겨있다. 억새꽃 하얗게 덮인 길을 걷노라니 먼지에 덮인 세상이 마치 조화弔花처럼 생기가 없다. 내려다보는 계곡은 비석의 바다다. 나라를 위해 바친 목숨들이 비석으로 서있는 곳. 하고 싶은 간절한 말들도 꽃으로밖에 피울 수 없는 곳. 나는 망연히 바라보다 그 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병 ○○○의 묘. 무엇을 지키려다 어느 골짜기에 쓰러진 영혼인고? 죽음의 의미가 한없이 퇴색한 세태라서 질펀히 깔려있는 묘비들이 더욱 슬프다. 저들은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 것이다. 5월이면 철쭉꽃 영산홍꽃으로 밀어올리는 짙붉은 분노. 10월이면 억새꽃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하얀 한숨. 나는 주머니에서 오늘 처음 들고 온 새 손수건을 꺼내서 닦을 것 하나 없는 비문碑文을 닦고 또 닦아냈다. 문득 내 오랜 교직의 길에 아끼던 제자 장덕현 군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비석을 닦는다.

마모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묘지 앞에 심어진

시들지 않는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

 

흘러가는 세월 따라 흐르다 보면

모든 것은 삭아서 희미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파래지는

이끼 같은 슬픔도 여기 있다.

 

지하에 묻혀있는 영혼들의 외침이

한 송이씩 영산홍꽃을 피워 올리고,

향기처럼 떠도는

핏빛의 외로움

 

비석을 닦는다.

 

아픔의 찌꺼기 굳은살로 박혀있는

비문을 하나씩 짚어가며 닦다가 보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릴 듯하다.


                                   장덕현-‘현충원에서

 

  제36회 통일문예제전에서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던 시다. 정말로 비문을 한 자 한 자 짚으며 닦다가 보니 마모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시들지 않은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이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파래서 시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싱싱해지는 이끼 같은 슬픔, 과연 누구를 지키려고, 무엇을 위해 청춘의 꽃다운 목숨을 장렬하게 산화한 것일까.

  고귀한 목숨 값이 노란 리본에 가려져 한없이 작아진 요즈음, 폐기廢棄한 것도 없는데 전략적 미소 한 방에 저고리 바지 다 벗고 벌러덩 누워 모두 주려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슬픔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울컥 하는 감정 속에 차이콥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悲愴 악상이 떠올랐다. 묘비墓碑의 바다가 주는 장중함과 우울함, 그리고 그 아래 영혼들이 느끼고 있을 패배감과 절망이 11월의 삭막한 하늘처럼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명하니 앉아 하염없이 어깨를 떨 수밖에 없었다.

 

 

2019. 1. 3

posted by 청라

희생지犧牲枝

수필/서정 수필 2018. 12. 12. 10:27

희생지犧牲枝

 

 

  정원수로 가꾸기 위해 소나무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원 둥치의 직경이 굵고 키 작은 소나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소나무 재배업자들은 소나무를 단기간에 굵게 키우고 싶어 한다.  줄기의 단면적은 그 줄기를 통해 왕래하는 물질들의 통과 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소나무를 빨리 굵게 키우기 위해서는 수관 부를 크게 키워야 한다. 수관 부를 빨리 키우려면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키워야 하는데, 원 둥치의 비대를 위해 당분간 키우고 있는 가지, 그 것이 바로 희생지犧牲枝이다.

  소나무가 완성목이 되기 전에 이 희생지犧牲枝는 반드시 잘려나갈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우거진 풀과 다른 나뭇가지들과 격렬한 전쟁을 치른다. 세상의 주역이 아님을 알면서도 불평 없이 원 둥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희생지犧牲枝. 그러기에 희생지犧牲枝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거룩하다.

  내게는 형님이 한 분 있었다. 6.25사변 중에 두 분의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와 열여섯 살 차이의 아버지 같은 맏형님만 집안을 지키고 계셨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사변 통에 북한군의 총탄에 부상당한 왼손을 잘 못 쓰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힘든 농사일은 형님께서 처리하셨다.

  내가 어릴 때의 우리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대부분의 농촌 청년들은 꿈을 찾아 도시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건너 마을 누구는 서울로 갔고, 장다리골 누구도 대전에서 큰 상점 점원으로 취직하여 출세를 했다는 소문이 부러웠던 그런 시절이었다. 형님의 꿈도 대도시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고 한 번 살아보는 거였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형님도 서울 큰 공장에 취직해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배움은 적었지만 원래 똑똑하고 성품이 좋았기에 주인에게 인정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갑자기 아버지께서 크게 편찮으셨기 때문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골로 내려온 형님은 실망하지 않고 산밭을 일구시었다. 기구도 변변치 않아 괭이와 삽만으로 완만한 산의 경사면을 파고 또 파시었다. 늘 형님의 손바닥은 피가 맺혀 있었고, 허리는 나이에 비해 일찍 구부정해지셨다. 계단밭을 만든 후 복숭아 묘목을 심어 과수원을 만드셨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키우셨다. 그 때부터 우리 집안의 형편이 좀 피었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형님의 그 따뜻한 말씀을.

  내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주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몸부림칠 때였다. 집안 식구 다 굶겨 죽이려 한다고 부모님은 요지부동이셨다. 나는 밭을 매다가 호밋자루를 놓고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은 따라 울면서도 그 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때 형님이 말씀하셨다. 자기가 좀 더 고생하겠노라고.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느냐고

  형님의 희생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합격하여 소망이던 교직에의 꿈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내가 놓은 다리로 동생들도 쉽게 건너가서 한 사람은 육군 중령으로 퇴역하였고, 막내는 삼성중공업 부장으로 퇴임하였으며 조카들도 줄줄이 대학에 가서 마을에서 대학 졸업생이 가장 많은 집안이 되었다.

  형님은 집안의 희생지犧牲枝였다. 나를, 아우들을, 집안을 살찌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셨다. 형님이 없었으면 우리 집안의 덩치가 이만큼 건강하게 굵어질 수 있었을까. H.G. 보운은 양초는  자신을 소비해서 남을 밝게 해준다고 했으며, 톨스토이는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며,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라 했다. 일찍 가셔서 보은할 길 없지만 희생지犧牲枝를 볼 때마다 형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2018. 12. 12

한밭수필12(2020)

posted by 청라

진짜 부부

수필/서정 수필 2018. 5. 26. 09:33

진짜 부부

 

 

  송 교장이 오늘 따라 모임에 늦었다. 매 번 먼저 나와 기다리던 사람이 20분이나 늦게 나왔기에

  “아니, 자네도 늙었나 보네. 이렇게 늦는 걸 보니

 하고 농을 건네니

  “어머님 모시고 서울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네. 노인양반이 어찌나 끈질기던지.”

  “무슨 소린가?”

  “아버지 말이야. 평소엔 어머니를 잘도 구박하고, 싸우고 하던 양반이 의사선생이 괜찮다는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별별 데 다 검사하라고 졸라서 늦었다네.”

  송 교장 말을 듣다 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따듯한 것이 차올랐다. 그래 부부란 저래야 되는 것이다. 평소엔 삶의 재미로 자글자글 싸우다가도 어려움에 처하면 몸이 부서져라 달려들어 도와주는 것. 나의 반쪽이 고통스러우면 나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그 것을 해소하려 온 힘을 다하는 것.

  잔잔한 감동에 취하다 보니 또 다른 어떤 부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K교장선생님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다. 늦게 상처를 한 후 자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여 년 연하의 여자와 재혼을 했다. 새 부인이 교장선생님께 정말 잘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의 아쉬움을 달래며 행복하게 살기를 빌었다.

  그런데 그 분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두 번이나 수술을 하고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데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새 아내의 태도가 돌변해 교장선생님을 구박한다는 것이다. 내 후배가 찾아갔을 때도 교장선생님이 병원에 다녀왔다고

  “아니, 늙은이가 빨리 형이나 따라갈 것이지 병원에는 왜 가? 쓸 데 없이 돈만 없 애고.”

  하면서 구박을 했다는 것이다. 죽을 것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1%의 소망이라도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이 아닐까? 그 여자가 만일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면 애들의 아버지요 평생의 반려자의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고 말았을까. 마음의 반을 접어 내 반쪽의 몸에 끼워놓고 아픔도 기쁨도 함께하는 것이 진짜 부부가 아닐까.

 

    부부

 

나는 언제나

마음의 반을 접어서

아내의 마음 갈피에

끼워놓고 산다

더듬이처럼 사랑의 촉수를 뻗어

심층 깊은 곳에 숨겨진

한숨의 솜털마저 탐지해 내고

아내의 겨울을 지운다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면서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추고

내가 넘어지면 아내가 일으켜주고 

천둥 한 번 울지 않은

우리들의 서른다섯 해

사랑하고 살기만도 부족한 삶에

미워할 새가 어디 있으랴.

 

  요즘 들어 아내가 자주 손이 저리다고 한다. 특히 잠을 잘 때 그 증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아내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하면 나는 잠결에도 자동적으로 아내의 팔을 주무른다. 목뼈에 협착증세가 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내의 손을 주물러주다 보니 옥처럼 곱기만 하던 손이 참 많이도 상하였다. 한복을 한다고 늘 바늘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주름살로 가득 앉은 손에 온통 바늘로 찔린 자국이다. 아내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손가락에 반창고가 흥부네 이불처럼 기워져 있다. 어느 날 그 손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일을 갖는 것이 몸은 고되어도 마음이 행복하단다. 등을 두드려주다 어깨를 만져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야위었다. 더듬이 한 끝 아내의 몸속에 남겨두고 관심을 쏟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2018. 5. 26

 

 

posted by 청라

기다림의 장미

수필/서정 수필 2018. 1. 21. 12:23

기다림의 장미

 

 

  만허재滿虛齋 울타리에 빨간 장미 한 송이가 피어있다. 아직 4월도 중순을 조금 넘겼는데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리 서둘러 피었을까? 무엇을 기다리느라 목을 길게 빼고 하염없이 집으로 올라오는 고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처연한 모습이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과 같다. 나는 장미의 외로운 그림자가 동편으로 길게 늘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만허재滿虛齋는 엄기환 화백의 화실이었다. 엄 화백은 먼 친척 아우였는데 무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는 회학리 골짜기에 집을 짓고 거기서 그림을 그렸다. 폭포 위에 나무를 엮어 수간교를 걸치고, 폭포 옆에 황토방을 만들어 정취 그윽한 세상을 꾸며놓았다. 어느 가을날 초대를 받아 그 황토방에서 하루를 유숙留宿한 일이 있는데, 밤새도록 폭포소리가 창문을 두드려 나는 산의 일부가 된 것이나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하였다. 새벽에 이름 모를 새소리가 나를 불러 방문을 열고 수간교에 오르니 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계곡은 신비로운 자태를 더욱 빛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 한 수가 튀어나왔다.

 

  옷깃에 묻어 온 속세의/ 근심 몇 올이/ 아침 햇살에 안개처럼 풀리고 / 힘들여 벗지 않아도/ 때처럼 벗겨진 욕심慾心 말갛게 씻겨/ 풀꽃으로 피어나는 만허재滿虛齋에서 보면/ 저기 보이지 않는/ 허공虛空/ 무슨 울타리라도 있는 것일까! / 마을에서 산 따라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모든 소리들이 걸러지고 닦여져서/ 딴 세상 같은 고요……. // 수간교秀澗橋를 건너다/ 문득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무성산은/ 산의 커다란 마음을 조금씩 녹여/ 만허폭滿虛瀑으로 흘려보내서// 천둥 같은 소리로 노래할 때나/ 가는 한숨으로 잦아들 때나/ 인생의/ 차고 비움도 만허재滿虛齋에 서면/ 폭포 소리에 녹아/ 물안개로 떠돌아라.

 

  정말 여명 무렵 수간교에 서서 잠에서 깨어나는 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인생의 차고 비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서 산 따라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마치 보이지 않는 허공에 속세와 갈라놓는 울타리라도 있는 듯 욕심마저 말갛게 씻겨 풀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멀리 떠오르는 해를 이고 있는 무성산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일찍 일어난 아우가 인사를 건네온다.

  “형님, 한숨도 못 주무신 모양이네요.”

  그렇다. 나는 정말로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잔 것 같다. 폭포가 부르고, 새소리가 부르고, 풀꽃들이 속삭이는데 어찌 코를 골며 단잠에 빠져들 수 있겠는가.

 

  아우의 그림 중 나는 특히 설경雪景을 그린 그림을 좋아했다. 아우는 기암절벽에 신선이 노니는 관념 산수보다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주로 그렸는데, 그의 설경에서만큼은 관념산수觀念山水의 신비한 멋이 담겨 있었다. 그가 그린 설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아이의 말간 동심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랬다. 그의 성품 또한 동심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랬기에 그의 그림 중 설경을 그린 것이 더욱 빛났던 것이 아닐까.

  내가 고향에 가서 아우에게 귀향보고를 하면 아우는 만사제폐하고 달려왔다. 우리는 마곡사에 가서 산채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모두 떠난 고향에서 전화만 하면 달려와주는 아우가 바로 내게는 고향이었다. 우리나라의 화단 현실이 각박해서 아우도 젊은 시절엔 고생을 아주 많이 했었는데, 나이 들면서 그림이 알려지고,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해서 형편이 좀 낳아진 편이 되었다.

  한 번은 공주에서 전시회를 가진 일이 있었는데, 부시장, 판사, 검사를 비롯한 공주의 모든 유지들이 참석해서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소탈하고 사교성 있는 성품이 큰 역할을 했겠지마는 그것보다는 그의 실력이 점차 인정받는 증표라 생각되어 아우의 앞날을 기대하게 되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그 일만 없었더라면 아우는 틀림없이 한국 화단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을이었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하루의 할 일을 구상하고 있는데 고향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은아버님 놀라지 마세요. 기환이 아저씨 돌아가셨다네요.”

  나는 너무 놀라 휴대폰을 툭 떨어뜨렸다.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휴대폰을 들어

  “? , ? 엊그제 점심 같이 먹었는데 별 일 없던데

  사흘 전쯤 제자들 전시회를 시청 갤러리에서 한다기에 y시인과 같이 참석해서 축하해주고 점심을 같이 먹었다. 어디 아픈 데가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제자들하고 괴산으로 스케치 갔다가 술 취한 채 자기 방으로 갔는데 다음날 낭떠 러지 아래서 발견됐다네요. 죽은 채로

  그제야 완전한 그림이 그려졌다. 제자들 전시회를 마치고 축하 겸 경치 좋은 곳으로 스케치를 갔을 것이다. 저녁에 얼큰하게 술들을 마시고 각자의 방으로 갔을 것이다. 술이 과한 아우는 바람을 쐰다고 밖으로 나갔을 게다. 아우의 방 창문 뒤가 낭떠러지고 그 창문이 부서져 있었단다. 다음날 아침 계곡물에 반쯤 잠긴 채 사망해 있었단다. 나는 아우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놈의 술이 아까운 화가의 죽음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어디로 갔는가. 아우의 다정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영정 위의 사진만 빙그레 웃고 있었다.

 

  지난 가을 아우가 산으로 간 뒤 만허재滿虛齋 는 빈집이 되었다. 혼자 사는 장미는 궁금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겨우내 추위 속에서 빈집을 지키던 덩굴장미 한 가지는 4월이 되자 서둘러 울타리 위로 기어올라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리곤 하염없이 목을 길게 빼고 고샅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만 살짝 불어 지푸라기만 날라도 엄 화백 발자국이 아닐까 움찔움찔 놀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점차 비어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농촌의 슬픈 현실이 아닐까.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인가

  서둘러 담 위로 기어 올라와

  고갤 길게 내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저 불타는 갈망

  빈 골목길 회오리바람에

  검불만 날려도

  온몸 떨면서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지난겨울 혼자 살던 할아버지

  산으로 가고

  대문 굳게 닫힌 울안

  빈 집 속의 적막으로 봉오리 부풀려

  한 등 눈물로 켜든 저 짙붉은 외로움.

 

 

2018. 1. 21

충청예술문화20185월호

posted by 청라

엄마의 마음

수필/서정 수필 2017. 11. 18. 14:35

엄마의 마음

 

 

  추석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아들이 정자 앞 언덕에 앉아있었다. 나를 보더니 죽는 얼굴을 한다.

  “아빠, 성묘 못 가겠어요. 회사 일이 바빠 어젯밤 늦게까지 일했더니 너무 피곤해요.”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겨우 참았다. 자식이 설 때도 방안에 누워 잠들어 버려가지곤 은근슬쩍 성묘를 빠지더니 이젠 아주 버릇이 붙어버렸다. 하긴 성묘 길이 험하긴 험했다. 아버님은 무슨 심술로 선산 맨 꼭대기가 꼭 마음에 든다고 하셔서 명절 때마다 낙엽 쌓인 비탈길을 오르느라고 아들, 손자들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야단법석을 떨게 만드셨을까. 평소에도 산에 같이 가자면 기겁을 하는 큰아들에게 좀 부담이 되기는 될 거였다. 나는 못마땅한 모습을 들킬까봐 고개를 돌렸다.

  성묘 갈 사람들이 모두 봉고차에 탔는데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느 방을 차지하고 누워있을 터였다. 저보다 더 어른들도 모두 나오고 아이들도 빠지지 않고 나왔는데 아들 혼자만 자릴 비우니 애비로서 동생, 조카, 손자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나이 사십이 가까워오는데 철이 들어 주위를 두루 살피면 얼마나 좋을까. 과한 욕심인 걸 알면서도 마음 한 편이 좀 씁쓸했다.

  봉고차를 타고 화전 산소 성묘를 마치고, 선산 산소를 두루 돌아 내려오는데 손자가 쪼르르 쫓아왔다. 저러다가 넘어질까 봐 겁이 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아빠하고 막 싸웠어요.”

  “?”

  “할머니가 아빠 성묘 안 갔다고 막 혼냈어요. 아빠도 막 대들었어요.”

  기어이 터질 것이 터진 모양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둘 다 불이었다. 더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조그마한 불만에도 쉽게 활활 타올랐다. 아내는 조상들의 음덕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자기 사업이 잘 되는 것이 모두 조상들의 덕이라고 생각하며 그 고마운 마음을 시집 식구들에게 잘 하는 것으로 갚으려고 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요즈음 아들 사업이 잘 안 된다고 하니 성묘 가서 조상들에게 좀 간절하게 빌어보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주위도 안 돌아보고 막 퍼부었을 것이었다.

  “사람 참 조금만 참지

  나는 마음속으로 아쉽게 생각했으나 아내 성격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 맞불을 놓아버린 아들도 원망스러웠다. 평소에도 은근히 엄마를 못마땅해 하더니 드디어 한 건 터뜨려버렸군.

  거실로 들어가니 집안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내 눈치를 본다. 나도 소리를 지를까봐 모두 겁내는 눈치였다. 뚱하니 앉아있는 아내의 등을 한번 두드려주고 아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누워있다 일어나 앉는 아들을 보고

  “아들, 좀 참지

  아들은 아무 말도 않고 눈물만 흘렸다.

  “네 아들딸이 오늘 아빠 보고 무얼 배웠겠어. 자식들 교육은 말보다 행동으로 하는 거야.”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요즘 사업도 안 되어 속상해 죽겠는데 엄마가 여러 사람 있는데서 막 욕했단   말이에요. 나 이제 창피해서 큰집 어떻게 와.”

  아들은 얼굴을 감싸고 뛰어나갔다. 둘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참 막막했다. 가장이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자리다. 불화가 있을 때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이 양쪽을 쫓아다니며 잠잠하게 가라앉혀야 하니 말이다.

  점심 먹고 시골에 계신 장모님께 모두 들르기로 했는데 이 분위기로는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나는 살며시 아들에게 다가가 제 가족들을 데리고 대전으로 먼저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라 일렀다. 처가로 가는 차 안에서 아내는 이제 아들로 생각도 않겠다느니, 절대 말도 안 하겠다느니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며칠 지난 아침이었다.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거실 분위기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문간에 있던 아들내외의 결혼사진 액자가 거실 맨 안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여보, 이거 왜 이리 들여놨어?”

  “사진이 문간에 있으면 아주 재수가 없다네요. 성용이 그래서 사업 안 되는지 몰 라.”

  아들로 생각도 안하겠다고 몇 번이나 소리 지르더니 사진이 문간에 있으면 재수 없다고 들여놓는다. 그래 저것이 바로 엄마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자주 부딪치면서도 늘 걱정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저것이 바로 엄마의 마음이다.

  어이없어 허허 웃으면서도 나는 아내의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2017. 11. 17

posted by 청라

머리에서 가슴 사이

수필/서정 수필 2017. 2. 7. 09:28

머리에서 가슴 사이

 

 

 음력 8월 열 사흘 달빛이 밝았다. 달은 롯데 백화점의 동편 하늘에 둥그렇게 떠올라 도시의 모든 불빛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온 도시를 제 세상인 양 밝히고 있었다. 모처럼 만나 저녁 식사와 곁들여 수다를 떨다가 일어선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남사장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하다.

  “아니 남 사장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완전 꽃처럼 폈는데

  “엄 선생님 저 이번 추석엔 서울 동생 집으로 차례 지내러 가요. 동생이 퇴직하고 제사 가져갔  어요.”

  남 사장의 남동생은 경찰서장까지 지낸 경찰 고위직에 있는 인물이었다. 너무 바빠서인지 아니면 기독교를 믿어서인지 평생 외아들인 동생 에게만 정성을 쏟은 부모님의 제사도 몰라라 한다고 남 사장은 늘 푸념을 하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굶길 수 없어 장녀인 남 사장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자주 동생 욕을 하였다.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제사 가져갈 생각을 다 했을까?”

  나의 물음에 남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였다. 그동안 출가외인인 큰누나가 부모님 제사를 지내서 늘 목에 무엇이 걸린 것처럼 답답했단다. 그래도 직장이 서울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데 제사 지내러 서울 집에 가기도 그렇고 해서 나 몰라라 했다는 것이다. 늘 머리 속에서는 제사를 가져오라 하는데 가슴 속에서 거부해서 실행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공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제일 먼저 이성이 시키는 대로 누님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자식이 제 마누라랑 와서 찔찔 울면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배길 수가 있어야지. 얄 미워서 평  생 안 보고 살려고 했는데

  말하는 남 사장의 표정이 보름달보다도 더 밝다. 평소엔 자주 우울한 얼굴을 했었는데 마음속의 근심이 모두 해소된 모양이었다. 남의 며느리로서 시집에서 친정 부모 제사 지낸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남 사장 동생도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차가운 이성은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뜨거운 감성은 내키지 않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늘 살밑에 가시가 박힌 채로 살아가는 듯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머리에서 말하는 바른 소리를 가슴이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인 60cm, 어떤 사람은 평생 이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몸이지만 유리된 채 괴로워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머리에서 가슴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정신적으로 좁혀서 늘 머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2017. 2. 7

posted by 청라

YES의 삶과 NO의 삶

수필/서정 수필 2017. 1. 13. 17:45

YES의 삶과 NO의 삶

 

 

  지난 연말 서울용산역 근처의 식당에서 소중회모임이 있었다. ‘소중회란 내가 1976년 경 울진군 기성면 해안부대에 근무했을 때 같이 근무했던 중대장 소대장들의 모임이다. 대령으로 예편하신 중대장님과 이 소위, 대위로 예편한 후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김 소위와 나 네 쌍의 부부가 1년에 한 번씩은 꼭 만나 정담을 나눈다. 대화 소재는 주로 당시의 부대 얘기와 바다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그날따라 중대장님이 미국에 사는 외손자 자랑을 하셨다. 얼마나 총명하고 예의바른 지, 미국에서 무슨 상을 받았는지 자랑하다가 문득 꺼낸 ‘YES의 삶과 NO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내 귀에 쏙 들어왔다. 딸네 집에서 열흘 넘게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할아버지로서 손자에게 무언가 교훈을 주고 싶어서 손자를 불렀단다. 무릎을 꿇고 공손한 자세로 앉아있는 손자에게

  “얘야, 할아버지가 네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너는 ‘YES의 삶과 NO의 삶에 대해 알  고 있느냐?” 했더니

  “YES의 삶은 긍정적인 삶을 가리키고, NO의 삶은 부정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요?”

  또랑또랑하게 대답하더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예뻐서 손을 꼭 잡아주며

  “그렇지. YES의 삶 즉 긍정적인 삶을 살면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 일 평생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고, NO의 삶 즉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면 모든 사람 들에게 배척받는 사람이  되어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다. 너는 꼭 긍정적 가치관 을 기본으로 해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    며 살아라.”

  다음날 아침 국제전화에서 손자가 하는 첫 마디가

    “할아버지, YES” 해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단다. 그 말 속에는 충분히 할아버지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아들었고,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성찰해 보았다. 나는 과연 YES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행복과 평안을 주는 존재인가. 다행히 나는 현재의 삶이 더없이 행복하고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NO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모든 일의 가장 좋은 면에 눈을 돌리는 습관은 연간 1천 파운드의 소득보다도 가치가 있다.” 라고 말했다. 세상의 올바른 가치를 장려하고 남의 잘못도 잘 끌어안아주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YES의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삶은 엉망인데도 남의 잘못만 꼬집고 갈등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면은 보려고도 않고 가장 어둡고 추한 부분만 바라보며 세상을 온통 불행하고 어두운 곳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NO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얼마 전 친구가 술자리에서 정색하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기창아, 사람을 미워하니 마음속에 저절로 지옥이 생기더라.”



 

「문학사랑120(2017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그믐달

수필/서정 수필 2016. 12. 2. 11:00

그믐달

 

 

 목요 합평회에 참석하려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하늘을 가로질러가던 그믐달이 갤러리백화점 피뢰침에 죽지를 꿰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을. 마치 창공을 날던 새가 꼬치에 박혀 피를 흘리는 듯 애처로워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왜 갑자기 고향 산 돌무덤에 피어있던 도라지꽃이 떠올랐을까. 7, 8월이면 형님의 돌무덤에 피어 어머니 가슴에 박힌 대못을 확인시켜주던 그 꽃. 자줏빛 꽃잎이 별모양으로 벌어져 바람에 파르르 떨던 도라지꽃. 나는 도라지꽃만 보아도 눈 감고 멀리멀리 돌아가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였다.

 

  형님은 6.25 민족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17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한다. 우리 집은 마을의 맨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집 옆으로 논이 조금 있었고, 그 너머로는 넓은 개울이 펼쳐져 있었다. 개울 건너 마곡사로 올라가는 도로가에 형님 친구네 집이 있었다. 그 날의 얘기를 하실 때마다 어머니 눈에서는 늘 장맛비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하고 친구 몇 명이 흥생이네를 갔었단다. 비가 올락 말락 그믐처럼 깜깜한 밤이었지.”

  얘기는 이제 막 시작인데 어머님은 벌써 목이 메었다.

  “아들이 오지 않아 밤늦게까지 기다리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막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글    세 개울 쪽에서 형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니.”

  세상 모든 어머니의 육감은 자식을 위해선 특히 발달하였는지 멀리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아들의 소리란 걸 금방 알았단다. 신발도 신지 않고 형님이 듣게끔 마주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막 개울가에 다다르니 형도 비명을 지르던 채로 가슴에 와서 폭삭 안겼단다. 그리고는 그대로 실신했단다. 다음날 깨어나 헛소리를 하면서 배를 잡고 뒹굴더니 저녁 무렵 눈을 감았단다.

  “옥현이가 데려간 거여. 육시랄 놈들.”

  형님이 건너오던 개울에 오리나무보라는 깊은 둠벙이 있었고 형님 친구 옥현이란 사람이 어린 시절 빠져 죽었단다. 어머니는 늘 그 옥현 형 혼령이 가장 친하던 형을 데려갔을 거라며, 같이 들 놀러가서 형만 혼자 밤길로 보낸 형님 친구들을 원망하였다. 때로는 남자의 잠자리는 무거워야 한다.’고 교육시켰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남자는 아무데서나 잠자면 안 된다고 형들을 닦달했기 때문에 혼자 밤길을 오다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병원에 한 번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내가 태어난 것은 그 해 9. 나의 출생은 어둡고 막막한 우리 집 분위기를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었단다. 나의 웃음에 얼어붙었던 마음들이 녹고, 집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단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우리 집에 희망을 품고 온 천사였다. 어린 시절 늘 착하고 인사성 바르다고 칭찬을 받으며 자랐고, 초등학교 때 공부도 늘 1등이었으며, 6년 동안 줄곧 반장을 맡았었다. 그러나 늘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한숨이었다. 내가 우등상장을 타와도, 검정고시 합격 증서를 갖다 드려도 어머니는 늘 입으로는 웃으셨지만 눈은 젖어있었다. 형님의 죽음은 어머니 가슴에 박힌 대못이었다. 평생 동안 빠지지 않을 질긴 대못이었다. 어머니의 큰 슬픔에 같이 아프면서도 나는 나의 뛰어남이 인정받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리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은근히 마음속으로는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소나기가 한 줄금 시원하게 내린 날 아침이었다. 산밭에 들깻모를 모종한다고 어머니랑 누나랑 밭으로 가고 있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잘 안 다니던 샛길로 접어들었는데 작은 고개를 넘어서자 어머니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칫거리셨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허뚱허뚱 걸어가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감겨있었다.

  “엄니, 왜 그래요? 어디 아퍼요?”

  “저기, 저어기.”

  나는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위 가에 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자줏빛 도라지꽃이 한 송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7월의 산속은 짙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기, 뭐요? 뭐땜에 그래요?”

  “네 형, 네 형 묘

  나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였구나. 어머니의 가슴에 피멍으로 남아 평생 한 번 활짝 웃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지 못하게 한 곳이. 어머니의 눈에 눈물 마를 새가 없게 만든 곳이 저 곳이구나. 나는 어머니가 산밭에 갈 때마다 멀리 돌아가던 비밀을 그 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님은 내 의식 속에 작은 못으로 남아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릴 때마다 신나게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신 형님에 대한 애잔한 마음은 덩달아 따라와 나의 예민한 곳을 찔러댔다. 아마 갤러리백화점 피뢰침에 걸려 파르르 떠는 낮달을 보고 갑자기 형님이 떠오른 것은 그 긴 하늘 반도 가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그믐달의 운명에서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유일한 그늘이었다. 나는 갑자기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시조 한 수를 읊조리고 있었다.

 

  돌무덤에 도라지꽃

  일찍 죽은 형님 영혼

 

  어머니 가슴 속에

  대못으로 박혔더니

 

  꼬치에 심장을 꿰어

  파르르르 떨고 있네.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흥얼거리다가 아직도 비극으로 남아있는 형님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종장을 바꿔보았다. 창공에 / 아픔을 삭혀 / 밝혀놓은 등불 하나.


  종장을 바꿔놓으니 형님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조금은 낳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창백한 낯으로 파닥거릴 그믐달을 생각하면서 형님의 다음 생애엔 창창한 온 하늘을 다 가는 초승달로 태어날 것을 빌면서, 이젠 툭하면 뛰쳐나와 가시처럼 아픈 곳을 찔러대던 형님에 대한 작은 못을 빼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2016. 12. 2

문학사랑2017년 봄호(119)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