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은 천직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9. 5. 10. 23:00

[여론광장] 교직은 천직

2016-10-12기사 편집 2016-10-12 06:03:06대전일보 > 오피니언 > 여론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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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원한 스승 의미 퇴색 교사들부터 깊이있는 반성해야

 

전통적 유교사회에서는 군(軍), 사(師), 부(父) 일체라 하여 임금과 부친에 비할 만큼 스승을 존중하였다. 또한 당(唐)나라 승려 도선(道宣)의 저작 '교계신학비구행호율의(敎誡新學比丘行護律儀)'에는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고 하여 스승의 존엄성을 부각시켰다. 이는 사승 관계가 지식만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관계가 아니고 스승의 사상과 철학, 삶의 태도마저 물려받던 우리 조상들의 교육적 모든 것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교육을 담당하는 교체계 속에서 자리잡아온 유산이 아니었을까.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점점 변모되기 시작하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요즈음에 와서는 완전히 비틀린 채로 정립된 듯한 느낌이 든다.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제자를 찾아보기 어렵고, 교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학부모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학교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기자, 정치가들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겉으로만 교육을 걱정한다는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냉소 속에 학교는 점차로 오그라들고, 섬처럼 고립되었다. 

교사들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이 있는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2000년대 이전만 해도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교사들은 참으로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정말로 선생으로 살고 싶었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교직을 선택한 많은 교사들은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도 사범대학을 지망하였다. 정말로 선생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 교직을 선택하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교사가 되었다. 이 때는 교사 임용고시도 없었고 국가에서 발령을 내주었던 시절이라 임용시험 공부에 연연하지 않고, 책을 읽고, 사상을 토론하며 인생을 살찌우는 준비과정을 거쳤다.

60대 이상의 교사 중엔 집안이 어려운 학생에게 학비를 몰래 내주거나 자취하는 방값을 대어준 사람이 다수 있을 것이다. 장기결석 하는 학생 집에 10리도 넘게 걸어가서 학업을 포기할 위기에 처한 학생을 구해낸 경험이 있는 교사도 있을 것이다. 휴일만 되면 파출소로 문제 학생을 인계받으러 가서 저녁을 사주며 눈물로 호소한 교사도 있을 것이다. 어쩌다 하나 장학생 신청이 들어오면 까다로운 추천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자기 반 학생에게 주고 싶어서 소리 지르며 싸우던 것이 당시 종종 있었던 교무실 풍경이었다.

당시의 교사들에겐 학생들을 진정으로 위하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이 있었다. 자습 감독비는 고사하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되는데 그렇게 늦게 보내면 어쩌냐는 학부모의 호통을 들어가며 학생들을 위해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살았던 순수하고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밥을 싸오지 못하는 제자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즐겁게 양보하던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진정을 몰라주는 제자에게 매질을 하고도 같이 붙들고 울 수 있었다. 1년 내내 회초리를 맞고 졸업한 제자가 원망하지 않고 평생 스승을 찾아와 감사를 드리는 일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의 젊은 교사들에게서는 제자를 위해 진정을 바치려는 사람이 매우 드문 것 같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식과 능력은 옛날보다 더 우수해졌지만 알파고처럼 차갑게 가슴 식은 교사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학생도 학부모도 사회도 정치가도 심지어 교육 당국마저도 교사 편에 서서 응원해주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사회에서 교사들은 살고 있다. 교사를 품고 있는 이 세상은 교사를 존중해주지도 않으면서 몇만 명 중의 한 사람이 이상한 행위를 하면 교사가 그럴 수 있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정말로 모범을 보여야 할 국회의원들은 수많은 부정을 저지르고도 정의의 길에서 저희들은 쏙 빠지고 학생이 진정으로 고마워 주는 꽃 한 송이만 받아도 범법자로 몰아붙인다.

이런 실망스런 세상에 살더라도 좀 더 의연하게 살아가자. 아침에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부은 학부모가 있더라도 그 자식인 학생은 미워하지 말자. 하는 행동마다 미운 학생이 있더라도 그 학생에게 더 사랑을 쏟아보자. 아무리 귀찮은 일이라도 제자를 위한 일이라면 거부하지 말고, 내게 얼마쯤 손해나는 일이 있더라도 제자에게 이익이 된다면 망설이지 말자. 내 그림자를 짓밟더라도 웃으면서 진정을 보내보자. 

교사는 영원한 스승이고 교직이 바로 당신들의 천직이니까. 

엄기창 시인·대전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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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하나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7. 1. 1. 11:10

더 큰 하나

 

 

  “엄 시인, 나 좋아 죽겠어요.”

  토요일 오후였다. 대학 캠퍼스엔 늦가을이 깊어져 나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서있고, 쥐꼬리만 한 햇살이 내려 비치는 불안한 날이었다. 문학축제장에서 만난 김 시인의 얼굴엔 즐거움이 흘러 넘쳤다.

  “뭔데요? 같이 좀 좋아합시다.”

  “아 글쎄 그 년이 지 애비 얼굴에 똥칠을 했지 뭐예요. 부녀가 같이 쪽박 차게 생겨서 나 요새 아주 살 맛 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통령 부녀 얘기다. 대통령이 실정을 해서 나라가 잘못되면 그게 즐거운 일인가. 어지럽고 시끄러워서 경제 상황도 나빠지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참 별 우스운 나라 다 있다고 비웃고 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창피해 죽겠는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게 좋아할 일인가.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일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시인! 어느 나라 국민이오?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해서 나라가 부강해져야 그게 좋아할 일이지, 잘못해서 이렇게 개판이 되었는데, 아니 그게 그리 즐겁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정상적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대로 경제인들은 경제인들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할 일 완수하여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바른 방향으로 씽씽 돌아가야 그게 즐거운 일 아닌가. 나라가 안정되고 살림이 풍족해져서 이웃을 칭찬하고 서로가 격려하는 아름다운 풍속이라야 그게 좋은 일 아닌가. 그런데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도탄에 빠졌는데도 국회의원도 언론도 법관들도 국민들도 신나 죽겠다. 적의 실수로 얼음판이 깨져서 얼음판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익사하게 생겼는데도 적이 물에 빠지는 것만 보고 좋아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대통령은 무능한 게 가장 큰 죄다. 조금쯤은 독재를 하더라도 국민들 모두를 자신의 품에 안고 번영의 길로 끌고 갈 사람이라야 진정 대통령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복이 없다. 요 근래 나오는 대통령마다 국민들 제각각의 생각들을 하나로 녹여내어 큰 역량을 이끌어내는 용광로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의 시진핑이나 아베마저 부러워하고 있는 실정이니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대통령만 탓할 일도 아니다. 국민들이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같은 일이라도 추구하는 바가 극과 극이니 대통령도 어느 장단에 춤을 추겠는가. 보수와 진보는 정치가들이 대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나누어놓은 이념에 불과하다. 보수라고 낡은 질서만 고집하고, 진보라고 어디 실패한 나라인 북한에 편향된 사고를 고집하겠는가. 보수들은 수구적이기만 한 사고들을 개선하고 진보들은 지금까지와는 차별화된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찬란한 비전을 확립하여 애국심이라는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내어 더 큰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가들이 다음의 대권을 위해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자꾸만 갈등을 부추기려 하겠지만 현명한 국민들아 놀아나지 말자. 늙은이들은 어떻고 젊은 놈들은 어떠하다고 서로 욕하지 말자. 이 나라의 할아버지 할머니요 손자손녀가 아닌가. 전라도는 어떻고 경상도는 어떻다고 서로 헐뜯지 말자. 한 피를 물려받은 한 형제 한 자매 아닌가.

  우리들의 생존을 보호해주는 이 나라, 우리 후손들이 영원토록 살아갈 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더 큰 하나의 밑거름이 될까 이것 하나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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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의 사색 채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 분노한 20... 멍청한 노인들 탓에 경로사상이 무너졌다.” 라는 제목 밑에 박근혜 선택적 복지라서 표를 줬다고??? 나잇살 처먹을 만큼 처먹고도 아직 덜 당했냐!” “그리 당하고도 젊은이들 앞길 가로막는 노인들... 그냥 일찍 뒈져라....” “20, 노인에게 절대 자리 양보하지 마!”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주세요.” “기초노령 연금 제도 폐지를 원합니다.” 등등의 노인들에 대한 갖은 험담이 실려 있었다. 할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버지 없고,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 없으니 이 글을 올린 젊은이나 그 밑에 서명한 사람들도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올리고 어찌 편안한 얼굴로 그 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를 위해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볼품없이 허옇게 꺼진 연탄재이지만, 그래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를 때는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불덩이였던 존재, 자신의 몸을 다 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데워줬던 연탄이 재로 변하여 구석에 쌓여져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이 마치 오늘날 노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 있게 하는 말이지만 이 시대의 노인들은 국가로부터 보상받고 젊은이들로부터 공경 받을 자격이 분명히 있다.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아오고 6.25 후의 참담했던 폐허를 이만큼 가꾸고 일궈온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어린 시절엔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었고, 나라는 필리핀, 아르헨티나 심지어는 북한보다도 경제적 여건이 형편없었다. 산은 헐벗을 대로 헐벗은 민둥산이었으며 전국의 도로망과 항만시설은 발전의 고동을 울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공장을 세우고, 길을 내었으며, 산에 나무를 심고,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여 가옥 개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다. 자식들과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 일할 곳만 있으면 청탁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까마득히 우러러보던 유럽의 여러 나라보다도 잘 사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정치적 의견이 좀 다르다고 뒈지라고? 멍청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지 말고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달라고? 민주주의가 바로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보완되고 협조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제도가 아니던가? 6.25를 겪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잔악함을 경험한 노인들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혁신의 기치 아래 다시 시작하는 진보보다 안정된 상태에서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보수를 더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국을 위해 아직 벽돌 한 장 올려놓은 적 없는 젊은이들은 온몸을 불태워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허연 재로 남아있는 연탄재 같은 노인들을 발로 찰 자격이 없다.

 

                             <금강일보> 2015년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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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의 사색 채널>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진다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한비자의 외저설 죄상편(储說·左上篇)에 보면 상행 하효(上行下效)’라는 말이 나온다.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이 본받는다.’ 또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뜻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춘추오패(春秋五霸) 한 사람인 제환공(齐桓公)은 평소 보라색 옷을 즐겨 입었다. 이에 조정 대신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제나라 도읍은 온통 보라색 천지가 되었고, 보라색 옷감 가격은 껑충 뛰어 보라색 비단 한 필의 가격이 흰색 비단 다섯 필의 가격과 맞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제환공이 대신(大臣) 관중(管仲)을 불러 말했다.

  “보라색 비단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으니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게그러자 관중이 입을 열었다.

  “아뢰옵건대 폐하께서 먼저 보라색 옷을 멀리하고 보라색 옷 입은 사람들을 멀리 하옵소서

  다음날 조회에 참석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환공이 좋아하는 보라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때 제환공이 갑자기 손으로 코를 막더니

  “보라색 옷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가까이 오지들 말거라.”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조정은 삽시간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은 저마다 입고 있던 옷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날부터 대신들은 모두 보라색 의상을 벗고 전에 입었던 옷들을 도로 꺼내 입었다. 그 후로 백성들도 더는 보라색 옷을 찾지 않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제나라 도읍에서는 보라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어 옷감과 물감 가격도 다시 안정되었다.

  요즈음 눈만 뜨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정치인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제환공처럼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이 본받도록 실천하는 사람들은 보기 어렵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원, 법관과 같은 지도층의 행동이 바르지 않으니 국민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다. 늘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구를 뽑아놔도 다 똑같아. 뽑을 사람이 없어.”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들이 항시 읊조리는 절망적인 말이다. 정말 뽑을 사람이 없다. 누구를 시켜놔도 제 당과 자신의 이익에만 민감하고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진충보국하는 정치가는 없다. 새로운 사람을 선택하고 기대하지만 지나고 보면 늘 그 타령이다. 왜 그럴까? 바로 정치가들의 텃밭인 국민들 자체가 정치가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비리에 침을 튀기며 분노하지만 국민들 하나하나가 불의한 큰 이익 앞에서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고? 이오십보 소백보다.

  정치인들 욕만 하지 말고 국민들 모두 스스로의 행동을 정화하자. 누구를 뽑아놔도 깨끗하고 진정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게 텃밭을 닦아놓자.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지는 것이.  


                                                                         <금강일보> 2015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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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의 사색 채널>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견리사의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이라는 말씀은 원래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안중근 의사님의 유묵(遺墨)으로 더 유명해진 말이다. 이익을 보면 먼저 의로운 재물인가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치라는 이 말은 이익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고, 이익을 위해서는 국적을 바꾸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큰 교훈이 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자주 안부를 물어오던 제자에게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없어 직장으로 전화를 했더니 보직해임 되어 나오지 않았단다. 하도 기가 막혀 이유를 물었더니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단다. 본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영 받지 않는다. 자식 놈이 그런 일을 당한 듯 궁금하고 속상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소식을 알 만한 그의 친구들에게 다섯 번짼가 전화를 걸었더니,

선생님, 걔 돈 먹고 잘렸대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고놈이 괘씸했지만 참고 연유를 물어보니 옛날 돈을 조금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보직해임이 되었단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한동안 세상을 다 잃은 듯 넋을 잃고 있었다.

  교직생활 초기에 시골 면 소재지 고등학교 아수라장의 분위기 속에서 열정을 다하여 키워낸 금쪽같은 제자였다. 어수선한 면학분위기 속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서울 근교의 명문대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고, 경찰 간부시험에 합격하여 총경까지 승진한 제자였다. 정의롭고 봉사심이 많아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제자였다. 대전에 와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등 자랑스러운 제자들을 수없이 길러냈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 엉겅퀴처럼 스스로 자란 제자이기에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작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허무하게 앞길을 망친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이로움이 눈앞에 있을 때 과연 의로운 이로움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평소에 더없이 청렴하고 깨끗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재물이 눈앞에 있을 때 의로운 재물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기보다 과연 이걸 먹고 걸릴까 안 걸릴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다가 설마 걸리겠어.’하고 꿀꺽 삼켰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요즈음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도 견리사의(見利思義)의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뇌물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그들은 한 번의 잘못 판단으로 전도양양하던 정치생명도 끝장이 나고, 그들을 신뢰하던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국적을 버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견위치명(見危致命)의 교훈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눈보라 치는 만주벌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은 자신의 목숨이 귀한 줄 몰랐던 분들일까. 나라가 있어야 생존권이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자신의 발전과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선구자들이다. 국민들 모두 양심이 살아있어야 나라가 번창하고, 나라가 건재해야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행복마저 지켜진다는 것을 깨닫고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금강일보> 2015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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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4. 3. 08:53

<청라의 사색 채널>

 

나를 따르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19742월 말 ROTC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보병학교에 입소하였다. 소정리역에서부터 구보를 하여 훤히 동트는 새벽 상무대에 도착했을 때 연병장에 새까맣게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불길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를 감동하게 했던 것은 보병학교에 걸려있던 부대 구호였다. “나를 따르라!” 이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도 이 구호를 썼는데 이것은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앞장선다는 뜻이며, 가장 위험한 선봉에 지휘관이 모범을 보인다는 뜻이다. 이 구호 속에는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부하들보다 먼저 튀어나가는 용기와 부하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하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자신에 대한 강한 신뢰가 담겨있다.

  보병학교에 도착했던 첫날 떠오르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전율케 했던 이 구호는 내 평생 삶의 구호가 되었으며, 소대장을 할 때도, 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교직자로 교단에 서 있을 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소대장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교사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항시 아쉬워하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어째서 이러한 구호 하나 마음속에 담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 전 김영란 법(부정청탁 방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이 통과되었을 때 나는 한없는 기쁨 속에서도 씁쓸한 마음 한 자락 들고 일어남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들 누구나가 생각해도 가장 큰 부정의 소지가 있는 정치가, 국회의원에게는 이 법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었다. 관민유착의 고리를 끊는다는 관피아 방지법에서 관의 핵심이 되는 사람들의 목에 줄이 없는데 이 법이 무슨 큰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은 뒤로 빼면서 부하들에게만 진격 앞으로!” 한다면 누가 적진을 향해 돌진하겠는가.

  이제 국회의원의 국민 지지도가 17%에서 까딱거리게 되었음을 인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우리 국회에서 합의라는 민주주의의 꽃은 찾아볼 수 없다. 자신들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정책이 관철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강하게 반대하던 사안들도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교환조건으로 찬성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은 장외투쟁을 하다가도 국회의원 봉급 인상이나 연금 책정 같은 법안은 모두 참여하여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정치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당의 이익보다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김영란 법 같은 지뢰밭도 솔선해서 앞장서고, 자식들 군대도 앞장서서 보내야 한다. 여당 대표는 차기 대선주자 같은 것 인식하지 말고 대통령이 옳게 국정을 꾸려가도록 그림자처럼 도와줘야 하고, 야당 대표는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국가와 국민에 이익이 되는 일에는 박수쳐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위험한 곳에 자신이 앞장섰을 때, 큰 이익을 양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를 따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목소리가 우렁찰 때 국민이 의심 없이 믿어주고 밀어주며 뒤를 따르는 것이다


                                                                          <금강일보> 2015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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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잣대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3. 6. 09:03

<청라의 사색 채널>

 

이중잣대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아일랜드의 어느 항구 도시의 사창가에 두 명의 수병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 목사 한명이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사창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병들은 위선자라고 목사를 비웃었다. 잠시 후에 랍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역시 주위를 살핀 후에 사창가로 들어가자 수병들은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비웃었다. 잠시 후에 카톨릭 신부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사창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병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세상에. 어떤 가엾은 매춘부가 죽어가나 봐.“

이 이야기는 '엉뚱한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목사나 랍비, 신부 모두 타락한 성직자들인데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인 아일랜드 사람들은 카톨릭 신부만 유난히 후한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위와 같은 이중잣대가 심해지고 있는 듯하여 씁쓸할 때가 많다.

얼마 전 추석명절에 고향엘 내려갔을 때 이야기다. 그 때 정부 고위 관리 아들의 병역 비리 문제로 사회가 들썩이고 있었는데, 형님 친구 한 분이 뉴스를 보고 몹시 흥분하여 심한 욕설을 하였다. 평소에 그 분의 인품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음에 다시 고향에 갔을 때 아침 일찍 그 분이 우리 집엘 찾아오셨다. 내 아우가 현역 중령일 때였는데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싸들고 와서 한다는 말이 여보게, 내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있는데 좀 편한 데로 갈 수 없는가?”

위의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의 일엔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일에 관해서는 너그럽기 마련이다. 얼마 전 국무총리 인준에 관한 청문회를 시청하다가 질의하며 호령하는 그분들은 과연 얼마나 청렴하고 깨끗한 분들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다. 자신의 주머니를 뒤집으면 더할 수 없는 먼지가 나올 텐데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게 소리를 지를까. 자신의 부정은 부정이 아니고 남의 부정만 과연 부정일까.

요즈음 정당 정치에서도 이런 모습은 확연히 나타나는데, 여당에서 내놓은 정책은 일단 반대부터 하고 깎아내리는 야당들이 자신들이 여당이 되었을 땐 그런 작태를 일삼는 야당의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다시 야당이 되었을 땐 승산이 없으면 국회야 정상적으로 돌아가든 말든 민생이야 어떻게 되든 장외 투쟁이나 하고.

오랜 교직생활에서 경험한 사실인데 때로는 교사 학부모가 다른 직업의 학부모보다 더 모질고 무서울 때가 있다. 자신은 교직 현장에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담임에게 요구하며 요구가 달성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불평하고 괴롭힌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이중잣대를 잘 표현한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냉정할 일은 나에게도 냉정하고, 나에게 관대할 일은 남에게도 관대하면 안 될까? 때로는 나에게 적대적인 세력일지라도 잘하는 일은 칭찬해주고 더 잘 되게 밀어주는 사람이 많은 사회, 이중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바로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금강일보> 2015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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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나라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1. 30. 14:54

<청라의 사색 채널>

 

풀의 나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지난 가을 계족산 등산길에 칡덩굴에 둘러싸여 힘겨워하는 교목(喬木)을 본 일이 있다. 수령(樹齡)이 꽤 오래 된 낙엽송 나무였는데 칡덩굴이 친친 감고 올라가 둥치는 보이지도 않고 칡 잎사귀만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던 나무의 꿈은 시들어가고 있었으며, 풀의 공격에 의해 나무의 권위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 나무를 보며 무성한 민주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켜져야 할 소중한 가치들이 점차 무너져가는 우리나라가 생각나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

 

김수영의 시 의 일부이다. 이 시는 오랜 역사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시이다.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 폭력화되었을 때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억압자들의 폭력에 고통을 받아온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투쟁을 통해 바람의 대립적 역사를 종식시키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참으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자유가 지나치게 범람(氾濫)하다 보니 권위(權威)있는 것들은 모두 다 적대시하여 말살시키려는 의식이 팽배(澎湃)해져서 참으로 안타깝다.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 서야 되고, 교육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현장에 가보면 나이 든 학부모님들이 교육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신규 여선생님에게 반말 비슷하게 하는 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자기 자식이 회초리라도 맞고 오는 날이면 갖은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여 항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식들이 있는 곳에서 담임선생님의 욕을 과하게 하는 부모님도 계시다. 교사들의 권위를 깔아뭉개놓고는 교내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보호해달라고 한다. 학부모님, 학생, 그리고 사회가 교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힘을 실어줘야 그 힘으로 자녀들의 안전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왜 모르는 것일까.

언젠가 취객(醉客)에 의해 파출소가 부서지고 경찰들이 다쳤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치안을 지키기 위해 박봉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민중의 지팡이를 부러뜨려놓고 폭력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때로는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부르는 사람이 있다. 정책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욕들을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런 것일까? 풀들만 무성한 풀의 나라엔 하늘 향해 솟아오르는 나무들의 꿈도 없고 땅 한 평 더 차지하려는 풀들의 질시(嫉視)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살기 좋은 풀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권위는 모두 힘을 모아 지켜줘야 한다.   


<금강일보> 2015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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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기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1. 24. 09:30

<청라의 사색 채널>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기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내가 K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그 곳에서 만난 교장선생님은 확고한 교육철학을 가지신 분이셨다. 학생들을 처벌로 교육하기보다 훌륭한 학생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큰 상을 줌으로써 모든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학생 상을 제시해주고, 모든 학생들이 그 학생을 닮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계셨다. 시골의 작은 학교라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아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불평에도 굳건히 버티시면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셨다.

  벚꽃이 교정에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학생과 교내 계를 맡고 있던 나는 아침 교문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복장불량 학생들만 따로 모아 한쪽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놓았다. 기분 좋게 출근하시던 교장선생님께서 그걸 보시더니 불같이 화를 내셨다.

  “엄 선생, 즉시 교장실로 와요.”

  벌을 받던 아이들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평소에 온화한 성품이셨기에 별 일이야 있으려고 하고 큰 걱정 없이 교장실에 갔다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나고 입이 퉁퉁 부어 나왔다. 교장선생님의 그런 따뜻한 배려심도 모르고 학생들은 계속 말썽을 일으켰고, 나도 한동안 교문에 절대 안 서는 것으로 반항도 했지만, 교직에 오래 서 있으면서 그 때 그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 내 가슴에 나도 모르게 이식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잘못을 꼭꼭 짚어주는 것도 교사가 할 일이지만, 때로는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을 하고 세상에 나와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학교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남의 잘못을 먼저 발견하여 지적해주면 인간관계를 해치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중에는 사물을 보는 기본이 부정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있고 긍정에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최복현 선생은 마음을 열어주는 편지중에서 남의 좋은 점만 찾다 보면 자신도 언젠가는 그 사람을 닮아가서 남의 좋은 점을 말하면 자신도 좋은 말을 듣게 된다고 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판단의 기본이 부정에서 출발하여 비판만 하는 사람은 주위를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느새 돌아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흉악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신문의 칸칸을 찾아보아도 읽어서 흐뭇한 이야기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드문 세상이다. 아들이 부모를 죽였다느니, 동거하던 여자를 죽여 토막 내어 묻었다느니 입에 담지 못할 패륜적인 이야기들만 난무하는 세상이다. 기자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굴하여 세상을 밝힐 생각은 않고 특종만 얻으려고 가장 자극적이 이야기들만 찾아 나선다. 저런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배워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겠는가.

  우리 모두 아름다운 것을 먼저 보는 눈을 가꾸자.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살게 하자.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다.


<금강일보> 2015년 1월 2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