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에서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걸어온 길을 돌아가 본다.

 

커피 향 속에는

그리움이 녹아있다.

 

손잡고 멀리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서니

참으로 덧없는 세월

 

몇 번씩 우려낸 녹차 맛처럼

우리의 사랑은

밍밍해지고 말았는가.

 

돌아온다는 당신의 말은

내 일기장에 쌓이고 쌓여

낙엽처럼 뒹굴고 있다.

 

처음 만났던 그 커피숍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면

 

기다림도 때로는

행복이 될 수도 있다.

 

 

2017. 9. 1

posted by 청라

낮달

낮달

 

 

너무 밝은 세상이 때로는

절망이 되는 것을 알았다.

 

화장을 지운 민낯으로

넋 놓고 앉아

눈물의 바다에 떠 있었다.

 

, 사랑을 불태우고서

삭정이만 남은 여자야

 

해가 기우는 쪽으로

시간의 추를

좀 더 빠르게 돌려주고 싶었다.

 

 

2017. 8. 18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3

산나리꽃3

 

 

못나서

숨어 피는 건 아니다.

 

산의 적막이 익을 대로 익어

폭죽처럼 터질 때에도

 

네 웃음은

새벽에 눈뜨는 별을 닮았다.

 

재촉할 줄도 모르고

불평할 줄도 모르는

그냥 서서 반짝일 줄만 아는 사람.

 

어떻게 산은 그렇게도

진한 사랑을

남모르게 배어서 키워 왔을까.

 

산의 마음 가장 안쪽에서

네가 부르면

내 삶의 등에 반짝 불이 켜진다.

 

 

2017811

posted by 청라

산울림이야

산울림이야

 

 

초록이 눈 시린 날

고향 산에 가면

꿈결인 듯 울려오는

따오기 소리

, 산울림이야

 

노을이 꽃물 드는

회재 넘을 때

금방 오마 던지고 간

새빨간 그 말

, 산울림이야

 

201785

posted by 청라

꽃과 나비

꽃과 나비

 

 

깨어진 보도블록 사이에

뽀얀 새살이 돋아났다.

 

민들레 볼을 비벼

보조개처럼 피워낸

하얀 꽃 한 송이

 

자동차 경적소리

칼날 휘두르며 지나가도

나비는 꿈쩍도 않고 앉아있다.

 

가녀린 꽃과

나비 날개가 감싸 안은

세상의 흉한 상처

 

 

2017729

 

posted by 청라

계룡산

계룡산

 

 

계룡산아!

속으로만 나직이 불러도 계룡산은

언제나 내 영혼 속에서 살아난다.

계룡산 보다 더 높은 산은 많지만

더 따뜻한 산은 없는 것 같다.

뾰쪽한 끝은 갈고 갈아

둥글게 하늘을 쓰다듬는 산봉

틈만 나면 박치기로 불을 지르는

양남兩南의 칼날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충청도 사람들의 마음 같지 않느냐.

골골마다 속으로 키워낸

투명한 물소리를 사방으로 내려 보내

세상의 갈증을 씻어내면서

충청도 사람들이 외로울 때

언제 어디서나 부르면

어머니 같고, 누님 같은

계룡산은 그 큰 품을 열어 꼬옥 안아준다.


 

2017. 7. 14

대전문학2017년 가을호(77)

posted by 청라

사금파리

사금파리

 

 

깨어진 것보다 더 아픈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움큼의 그리움만 채워도 흘러 넘쳐서

밤이 되어도

별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조각 난 사랑 감쪽같이 붙여보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갈 사이에 묻혀 

변하지 않았다고 반짝거려도

닿는 것 모두 베어버릴 날 세운 이 몸으로는

당신 가까이 갈 수는 없다.

 

 

2017. 7. 4

2017년 가을호(121)문학사랑』 

posted by 청라

고가古家 이야기

고가古家 이야기

 

 

그 오래 된 집에

젊은 주인이 들어서면서

오백 년 묵은 향나무는 갈 곳이 없어졌다.

 

나이테마다 어려 있는 역사의 향기도

세월의 아픔을 감싸 안은 둥치도

톱날 아래 무참히 잘려나갈 운명이 되었다.

 

새 주인은

옛날 냄새나는 것들 모두 치워버리고

팬지, 데이지, 베고니아로 화사하게 집안을 꾸미겠단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모두 버림받아야 되는 것일까.

향나무 그 옆 꽃밭에 베고니아를 심고

옛날과 지금이 조화롭게 어울리면 안 될까

 

금방 잘려나갈 줄도 모르고

뒤틀린 손발 끝에 힘차게 새싹을 밀어올리는

향나무를 보며

 

주인이 바뀔 때마다

하나씩 잘려나가는 옛날의 굵은 줄기들 너머

잔가지처럼 가늘어져만 가는 나라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017. 5. 17

posted by 청라

그믐달

그믐달

 

 

하늘은

은장도 하나 파랗게 날 세워

무얼 지키고 있나.

 

지킬 것 하나 없는

지상의 마을

 

부엉새만 어둠을 운다.

posted by 청라

봄날

봄날

 

 

아파트 정원엔 봄꽃이 다 졌는데

태화산 골짜기에 와 보니

봄은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

사진에 담아 가 무얼 하려는가.

산은 붓으로 그리지 않아도

마음에 향기로 배어 있는 걸

새 소리 몇 소절에 꽃은 아직 피고 있어서

문득 내 인생의 봄날에

음각으로 도장 찍힌 사람을 생각하며

그냥 산이 되어 보았다.

기다림은

삶의 옷자락에 찍혀지는 무늬 같은 것

비웠다 생각하면 언제나 지우다 만

색연필자국처럼

초록으로 일어서는 당신,

신열처럼 세월의 갈피에

숨어 있다가

고향에 오면 끓어오르는 봄날이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