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절제와 응축으로 피어난 생명 탄생의 신비

                                           엄 기 창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序曲」 전문

 

  위의 시 「아침 序曲」은 1974년 월간「時文學」지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백일장’에 장원으로 선정되어 『時文學』지에 초회 추천을 받은 시이다. 내가 붓을 꺾지 않고 지금까지 시의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침 序曲」의 장원 입상이 그 때 마침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내 자신에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序曲」에서 용기를 얻어 이 날까지 탈선하지 않고 꾸준히 시를 썼고, 부족하지만 두 권의 시집도 상재하였다. 이 시 이후에 태어난 시들은 이 시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 시의 자식들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당신의 대표 시가 무엇이오?”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침 序曲」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태화산의 새벽 숲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맑고 신선하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나는 공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선생님이 사시던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숲길을 거닐면서 태화산의 새벽 숲에 매료돼 버렸다. 햇살이 번지기 전의 차갑도록 청신한 공기와 막 잠에서 깨어 “찌르르 찌르르” 울고 있는 나지막한 새들의 울음소리. 어둠 속에 잠들었던 새 생명이 여명 앞에 실체를 드러내어 약동하는 생명 탄생의 신비를 나 혼자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숲에서 벌어지는 생명 탄생의 모습을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참신한 시를 쓰고 싶었다. 이 세상 그 어느 생명보다 은밀하게 태어나 새벽 숲에 햇살처럼 번져가는 생명을…….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수요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시를 보는 안목과 시를 쓰는 실력도 많이 성장하였다. 그 때 나는 드디어 오래 간직했던 기억의 창고에서 그 때 그 마곡사의 새벽 숲에서 느꼈던 생명 탄생을 훔쳐보던 감흥을 시로 형상화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조재훈 선생님은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작품 해설 「절제와 스밈의 시학」에서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재훈 선생님의 평대로 이 시는 극도의 응축과 절제를 통해 만들어진 여백 속에 너무도 정갈하고 신선하여 신비하기까지 한 태화산 새벽 숲에 태동하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가)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나)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다)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라)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위의 (가)~(라)에서 ‘音’, ‘노래’ 등은 ‘생명’을 상징하는 시어들이다. (가)에서는 이미 만들어져 악보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고, (나)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의 목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 (다)에서는 가장 곧고 성센 가지를 골라 생명이 태동하는 모습을 (라)에서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더 이상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언어의 절제 속에 당시 심사위원장이셨던 김남조 선생님께서 “생경할 정도로 참신한 이미지와 그를 받쳐 주는 탄탄한 구조가 너무 아름다워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으로 선정하였다”는 말씀대로 생명이 탄생하는 숨막히는 순간을 투명하게 그려내었다.

  서정주 선생님은 생명 탄생의 신비를 지켜보는 감흥을 그의 시 「국화옆에서」에서 “노오란 네 꽃잎이 필랴고/ 간밤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라고 노래하셨고, 이호우 선생님은 그의 시조 「개화」에서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고 노래하셨다. 고요한 새벽 숲, 새의 목 너머에 숨어있던 새로운 생명이 소리로 튀어나와 햇살처럼 평화롭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는 감흥을 나는 너무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일까!

  나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의 벽에 이 시를 시화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마다 읊조리며 기도한다. 어린 시절 태화산 새벽 숲에서 보았던 새 생명의 태동과 그로 인한 평화가 이 시로 인해 우리 집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평화를 주기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