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술잔에
들국화 한 송이 띄웠다

아! 가을 냄새

술 마시고
나는 가을에 취해버렸다

인생 뭐 별거 있는가
웃으며 살면 그만이지

넘기 힘든 고개도
한 발 한 발
넘다 보면 정상이라네

찌푸려 살지 말고
가을이 오면
그냥 단풍이 되세


-‘이 가을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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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창 시인

“네 번째 피우는 이 시집에서 한 송이 시라도 살아남아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시에 꽂히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환한 꽃을 피워줬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대전시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자인 청라(淸羅) 엄기창 시인. 그가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자신의 네 번째 시집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도서출판 이든북)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1부 사랑의 미학, 2부 둥치에 핀 꽃, 3부 춤추는 산하, 4부 그리움에 날개 달아 등으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는 ‘사금파리’, ‘이 가을에’, ‘슬픔을 태우며’, ‘서낭나무’, ‘계룡산’, ‘솔숲에서’, ‘어떤 시’, ‘삶의 스승’ 등 76편의 작품이 길공섭 동구문화원장, 1976년 초임지였던 부여 남성중학교 시절 제자인 송양용 한전 대전충남본부 과장 등 7명의 지인이 찍은 운치 있고 멋들어진 사진과 어우러져 시사집(詩寫集, Poem&Photo)의 풍미를 풍긴다.

‘세한도에 사는 사내’에선 시인의 염결(廉潔)의식과 연민(憐憫)의식, 자족(自足)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엄기창의 시에서 염결의식은 지금까지 발표한 시인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시적 지향이랄 수 있다. 시인은 세속성을 순백의 고결함으로 변화시키려는 갈망을 드러낸다. 그 갈망은 세상을 향해 있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지극한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국어교사로 남성중·갈산고·대전고·한밭고·충남고·대덕고·유성고·둔산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고 2014년 정년퇴임한 그는 “퇴임을 하고 무료한 날이 많아지면서 내게 시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고희(古稀)를 넘어 시를 소개받고, 시를 쓰는 즐거움에 암마저 나았다’는 한 시인의 말을 들으며, 시가 어떤 사람의 삶에는 밝은 등불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 시에 꽂히면 삶에 꽃이 핀다”라고 말했다.

1952년 충남 공주 태생인 시인은 공주영명고, 공주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고, 1973년 월간 ‘시문학’ 주최 제1회 전국대학생 백일장 장원을 차지한 후 197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그간 시집 ‘서울의 천둥’(1993), ‘가슴에 묻은 이름’(2004), ‘춤바위’(2014),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2016) 등을 펴냈고, 호승시문학상, 모범공무원상 국무총리상, 대전문학상, 하이트진로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정훈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