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고개

시/제3시집-춤바위 2011. 11. 10. 09:36

마티고개

 

 

속이 뻥 뚤려

시원하지?

 

물으면

 

버려진 길 더 야윈 고갯마루

목 길-어진

느티나무 꼭대기에 

 

한사코 매달린 늦가을

기다림 하나……
.

 

 

201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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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平寺

시조 2011. 10. 13. 13:06

永平寺

 

엄 기 창

 

 

바라밀경 한 소절이

구절초로 눈을 틔워

 

목탁木鐸 소리 한 울림에

한 송이씩 꽃을 피워

 

장군산

골짜기 가득

퍼져가는 저 범창梵唱 소리

 

 

201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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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푸념

시/제3시집-춤바위 2011. 9. 2. 14:50

교사의 푸념 

 

아침에 교문을 들어설 때에

“안녕하세요?”

인사 한 마디에 꽃등처럼 환해지는

하루의 예감

 

아이들 웃음을 마시며 사는

나의 예순은

아버지의 예순보다 이십 년은 아름답다.

 

어느 화단에 가면

우리 아이들보다

더 빛나는 꽃이 있으랴.

 

“이놈들!”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위엄을 부려 봐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에

결국은 허물어지는 내 안의 성城

 

울타리 밖에 빙벽을 철판처럼 세우고도

가슴 속엔 불꽃을 심어 키우며

“선생님, 아파요.”

얼굴만 찡그려도 가슴이 덜컥하는

나는 천생 선생인가보다.

 

2011.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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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시조 2011. 7. 16. 08:09

소나기 

 

당신이 왔다 가니 도심都心이 맑아졌네.

 

시루봉 산정山頂이 이웃처럼 가깝구나.

 

번개로 찢어버리고 다시 빚은 세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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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시조 2011. 7. 1. 22:11

봉숭아

 

비 온 후

우우우

꽃들의 진한 함성

 

팬지, 데이지, 사루비아

화단의 앞줄에 서고

 

봉숭아 뒷방 할머니처럼

풀 사이에 숨어 폈다.

 

 

모종삽에

담뿍 떠서

맨 앞줄에 세워본다

 

남의 땅에 혼자 선 듯

잔가지가 위태하다.

 

제 땅을 모두 잃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꽃!

 

201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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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부음 오던 날

시조 2011. 5. 24. 07:36

누님 부음 오던 날

 

            엄 기 창

 

 

조팝꽃 지고

여울 울어

봄 하루 시들던 날

 

회재고개

비탈길로

누님의 부음 넘어와

 

빈 고향 초록 들판에

가랑비를 뿌리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다 가시고 없는 집에

 

누님이

좋아하던

앵두 혼자 익어간다.

 

짙붉은 앵두 빛깔에

넘쳐나는 서러움.

 

 

201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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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變身

시/제3시집-춤바위 2011. 5. 22. 09:16

변신變身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오월, 상수리나무

목청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서는

물안개처럼 몽롱한 연둣빛 속살이

언뜻언뜻 보인다.

 

단풍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산기슭 올라가는 바람의 꽁지에서는

빛살의 창을 모두 거두고 서해로 투신하는

태양의 열정이 타오르고

 

겨울!

눈보라 몰고 가는 바람의 날개에서는

죽음보다 더 깊은 침묵의

하얀 정적,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바람에는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201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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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을 2

시/제3시집-춤바위 2011. 5. 15. 11:31

빈 마을

2


 

장다리골엔 봄이 왔어도

장다리꽃이 피지 않는다.

 

아이들 웃음소리 묻어나던

공회당 깃대 끝엔

찢어진 깃발처럼 구름 한 조각 걸려있고,

 

사립문 열릴 때마다 문을 나서는 건

허리 굽은

바람…….

 

장다리꽃 기다리다 지친

나비는

움찔움찔 떨면서 경운기 뒤를 따라간다.

 

뒷산 산 그림자 멈춰 서서

시간이 늦게 흐르는 마을,


201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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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을

시/제3시집-춤바위 2011. 4. 24. 07:43

빈 마을

 

심심한 까치가

호들갑스레 울다 간 후

 

느티나무 혼자 지키고 선

빈 마을의 적막,

 

바람의 빗자루가

퀭한 골목을 쓸고 있다.

 

사립문 굳게 닫힌 골목의

마지막 집에


하염없이 머물다 가는

낮달의

창백한 시선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

살구꽃 꽃등은 타오르는데…….

 

2011. 4. 24

 

 

 

 


posted by 청라

대보름달

시/제3시집-춤바위 2011. 2. 20. 22:19

 

대보름달



껍질을 깎을 것도 없이

날 시린 바람의 칼로 한 조각 잘라 내어

아내의 생일상에 올려놓고 싶다.


한 점 베어 물면

용암처럼 뜨겁고 상큼한 과즙(果汁)이 솟아나리.


이순의 문턱에서

검버섯으로 피어난 속앓이를 씻어줄

대보름달 같은 웃음을 보고 싶다.



2011. 2. 18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