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시조 2010. 1. 10. 09:49

 

빈집


봄 햇살 사운대도 대문은 굳게 닫혀

울안에 혼자 사는 살구꽃 꽃가지만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목청 돋워 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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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시조 2009. 12. 29. 06:10

 

빗소리


가을 산 단풍 숲을 빗소리가 씻고 있다.

선방 문 반 쯤 열고 老松 같은 노 여승이

빗소리 하나 둘 세며 마음을 비우고 있다.


비바람 쓸고 간 자리 남아있는 잎새처럼

한평생 다스려도 삭지 않는 질긴 번뇌

빗소리 날을 세워서 한 줄기씩 베고 있다.



2009.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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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봄

시조 2009. 12. 2. 11:44

보문산-봄

 

비 그치자 보문산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골안개 분칠하는 산기슭 따라 돌며

바람이 실가지마다 붉은 연지 찍고 있다.

 

회색빛 산색 속에 연초록이 묻어난다.

조용한 떨림으로 일어서는 소리들이

바위 틈, 낙엽 아래서 함성으로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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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시조 2009. 11. 4. 16:38

가을 편지


 

구봉산 산행 길에

단풍잎 하나 따서

아내의 화장대에

몰래 올려 놓았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내 가을 편지이다.

 

얼핏 연 책갈피에

내게 보낸 연서 한 장

곱게 말린 단풍잎에

배어있는 고운 정성

아내도 날 사랑한다는

홍조 어린 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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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까치

시/제3시집-춤바위 2009. 10. 23. 09:16

아파트 까치

 

늦은 아침

아이들 놀이터 벚나무 위에서

까치가 요란스레 울고 있다.

 

아파트 문은 모두 닫혀있고

유치원도 못 갈 어린애 혼자 듣다가

모래만 뿌리고 심심해서 돌아갔다.

 

맑은 아침 햇살 물고 와

자랑스럽게 울고 있는 까치야

우리 마을엔 네 울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 아무도 없다.

 

생활에 쫓기는 도회지 사람들에겐

반가운 사람이란 아예 없는데

반가운 손님 온다고 아무리 울어봐라.

 

한나절 소식 전하다 지쳐

비둘기들 사이에 섞여 모이나 주워 먹다

자동차 경적에 놀라 비명처럼 쫓겨가는

 

비둘기의 날개 너머로

너무도 눈시린 가을…….

 

200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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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

시/제3시집-춤바위 2009. 10. 6. 08:37

3m

 

당신들의 그 새벽엔

하나님도 조상들도 아무도 없었다.

새벽 산책길, 3m 간격

그것이 삶과 죽음의 거리였다.

 

길 건너 도솔산이

부르는 대로

아내는 웃으며 도로로 들어서고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15m를 날아

아스팔트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도 맑아 바라보기도 아깝던

한 송이 짓이겨진 코스모스 꽃이여

피 묻은 향기는 하늘하늘 날아

먼 길을 가고

 

남은 사람의 앞길에

가로놓인

저 막막한 사막

 

새벽 산책길, 3m 간격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였다.

 

2009.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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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되기 위해

시/제3시집-춤바위 2009. 9. 25. 22:07

산이 되기 위해

 

관음봉

꼭대기에 올랐다.

사랑, 미움 구름으로 날린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재어보던 그만큼

하늘은 더 높아졌지만

 

산 위에 다섯 자 반쯤

키를 보탰으면

입 다물고 산이 되어야지.

 

이름표를 떼고

장송 옆에 서서

내 마음 아궁이에 초록 불을 지핀다.


2009. 9. 25 

 

 

posted by 청라

여름 끝 무렵

시조 2009. 9. 12. 12:38
 

여름 끝 무렵


국화꽃 멍울 부품도

가슴 저린 일이어니

분주한 고추잠자리

이고 있는 하늘 가로

손 털고 일어나 가듯

미련 없이 가는 여름


 

잠 깬 바람 여울목에

쓸려가는 뭉게구름

흥 파한 계곡마다

돌 틈 가득 쌓인 공허

보내는 마음 허전해

눈시울 적셔보네.

.


2009.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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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터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9. 8. 30. 12:29
 

생가 터에서



안부가 궁금해서

안테나처럼

회초리 하나 쫑긋하게 내세운 밤나무


가지 끝에는

썩은 둥치의 부피만큼 머물렀던

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밤 잎으로 피어


그늘 속에

아버님 기침 소리

재주 있는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

밤 내 콜록거리던 아버님의 각혈


육이오사변 통에 약 한 첩 못 써보고

자식 둘 먼저 보낸 

피멍 얼룽이는 어머님 눈물

한숨 얽어 베 짜는 소리


연실이만 보면

가슴 설레던

무지개 추억들은 다 지워지고


웃자란 콩 포기 아래 묻히다 남은

주춧돌에 걸터앉으면

한여름이 달궈놓은 알큰한 온기처럼

 오늘을 씻어주는

그믐 빛 따스한 추억  





2009. 8. 30


posted by 청라

소래포구

시/제3시집-춤바위 2009. 8. 12. 11:40

 

소래포구


        

물 빠진 진흙 뻘엔

뿌리까지 다 드러낸 작은 목선들이

오후의 햇살 아래 낮잠을 자고


포구를 가로질러

있는 듯 없는 듯

실처럼 가느다란 철교가 하나.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오이도 가는 길을 걸으면


술 한 잔에 담아 마시는

소래포구 옛이야기 한 조각으로

가을처럼 발갛게 취할 것 같다.


아침이면 젓갈 팔러

수인선 타고 떠나던 사람들아

어물전 넘어 선술집에

눈물 젖은 푸념만 가득 남았구나.


댕구산 노루목 장도포대엔

바다를 향해 절규처럼

노을이 날린다.


2009. 8. 12

소래포구: 인천시 논현동에 있는 항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