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수필/서정 수필 2016. 4. 14. 08:15

사진 한 장

 

 

 막내아우가 카카오 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아우의 대학 졸업식 때 찍은 어머니 사진이었다. 아우의 졸업식 가운에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들으셨다. 무심한 표정 속에서 살풋 미소가 내비친다.

  나는 아우가 참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대학 졸업식에도 틀림없이 오셨을 터인데 졸업식 예복을 입혀 사진을 찍어드릴 생각은 왜 못했던고. 논 열 마지기 남짓의 궁핍한 시골 살림인데도 내 밑 형제들이 줄줄이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깜빡깜빡 잘도 잊는다. 아우가 보낸 사진을 보면서 나는 한참이나 눈물에 젖어있었다.

  아버지는 인정이 많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늘 칭송을 들었지만 생활에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으셨다. 놀음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으셨지만, 가을걷이가 끝나면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늘 불안해하고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시다가 어느 날 휙 하고 나가시면 봄이 무르익어 농사철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봄바람보다 흉한 소문이 먼저 집으로 건너왔다.

  “기챙이네 못살게 되었다더라.”

  소문이 건너온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우리를 재워놓고 소리죽여 우셨다. 6남매를 데리고 또 한 해를 보내실 일이 아마 막막하셨을 것이다. 실상 아버지께서 겨우내 지어놓은 빚이란 게 쌀 일곱, 여덟 가마에 불과했지만, 팍팍한 농촌 살림에 그 정도면 충분히 못살게 될 만한 빚이었다. 너그러운 아버지 성품에 딸 때는 개평 팍팍 주고 잃을 때는 고스란히 잃으시며 겨우내 먹고 자고 하였으니 그 정도의 빚은 그래도 가족들을 배려한 최대한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느 핸가는 할아버지 제삿날이 되었는데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겨우내 행방도 알 수 없이 떠도시다가 며칠 전 마을 주막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기챙아, 할아버지 제사 지내게 아버지 모셔 와라.”

  나는 밤길이 무서운데도 주막으로 내려갔다. 오래 못 본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 마작을 하시는 방문에 대고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지내야 된다고 어머니가 모셔 오래요.”

  한참 있다가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좀 기다려라.”

  30분을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열띤 사람들의 호흡소리만 넘어왔다. 아니, 겨우내 못 보고도 아들이 보고 싶지도 않나.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빨리 오래요.”

  “알았다. 거의 다 됐다.”

  날 선 내 목소리를 느꼈을 터인데도 아버지는 태평하기만 했다. 무엇이 다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한 시간을 또 기다렸다. 동생들은 자다가 쌀밥 좀 먹겠다고 억지로 일어났지만 또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자정이 다 되어가지 않는가. 나는 잔뜩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아버지, 날 새겠어요.”

  문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딱딱 마작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

  “, 안되겠다. 너희들끼리 그냥 지내라.”

  나는 열불이 나서 문을 열어젖히고 마작 판을 확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었다.

  “뭐 저런 아버지가 다 있어. 아버지가 저래도 돼?”

  돌아가는 길에 팔풍쟁이 고개로 치달리는 바람마저도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게 겨울만 되면 대책 없어지는 남편과 한평생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더구나 6.25사변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 가슴에 못 박힌 채로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14살 된 형을 묻었다는 바위 어귀에 가실 때면 어머니는 넘어지면서도 눈을 감고 걸으셨다. 자식을 먼저 묻은 모진 운명에 대해 외면하고 싶으셨으리라.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나서 집안의 어둠을 말끔히 씻어준 아들이, 더구나 초등학교 6년 동안 반장에 1등을 도맡아 한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예뻤겠는가. 그런 아들을 읍내 중학교에 보낼 수 없음을 늘 가슴아파하던 어머니였다.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가서 검정고시에 합격을 해도 고등학교에 입학시켜줄 엄두도 못 내시던 어머니. 나는 내 신세가 하도 서러워서 부모님과 같이 밭을 매다가 호미를 집어던지고 꺼이꺼이 울었다. 장학금을 준다는 고등학교도 있으니 방 하나만 얻어달라고 떼를 썼다. 밭가의 뽕나무 가지를 꺾어다 종아리를 치시던 어머니도 나를 붙잡고 우셨다.

  나는 어머니 생전에 소리 내어 웃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 웃는 모습인지도 알 수가 없다. 동생의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에 나타난 그 오묘한 표정이 웃음인지 아닌지도 나는 파악할 수 없어서 그냥 한참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이젠 웃으셔도 돼요. 그 아픈 세월에 아들을 세 명이나 석사모 씌우셨으니 어머니는 박사모를 쓰셔도 충분하다니까요.”


2016. 3. 13

문학사랑2016년 여름호(116)

<한밭수필>2016(8

posted by 청라

나이 유감遺憾

수필/서정 수필 2016. 2. 7. 09:33

나이 유감遺憾

 

 

  나는 버스를 탔을 때 자리가 없으면 젊은이들과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자리를 양보할 의사가 없었던 젊은이도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또 자리를 양보할 처지가 못 되어 앉아있는 젊은이의 마음은 한없이 불편하고 불안해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냥 손잡이를 잡고 먼 산을 바라보거나 전면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접혀지는 도로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혹시 비틀거려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지 않도록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안정감 있게 서 있으려고 노력한다.

  어느새 나도 자리를 양보할 나이에서 양보 받을 나이가 되었는가. 한두 번 사랑땜에 울고 나지도 않았는데 세월은 저만큼 가버리고 말았다. 내 나이도 가을이 되어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젊은이들을 괴롭히고 긴장시키는 내 나이에 대해 나는 유감이 많다.

  며칠 전 시내에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탔다. 가장교를 건너는데 버스가 휘청 하여 내 자세가 좀 흔들렸나보다. 앞에 앉았던 50대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저 말인가요?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나는 그 아주머니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나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바로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휴대폰을 가지고 놀던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뒤로 가버렸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제 딴엔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역전에서 내릴 때까지 뒤편에 서있는 그 학생을 보며 마음이 짠하고 불편했다. 염색은 세월을 속이는 것 같아 정말 싫지만 빨리 머리를 까맣게 물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젠가 이 버스를 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80대 할아버지는 서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은 휴대폰만 가지고 놀았다. 할아버지가 힘겹게 서서 흔들거리는데도 그 학생은 본 척도 않고 놀이에만 열중했다. 할아버지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는 애비 에미도 없냐?”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학생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후닥닥 일어나서 뒤로 도망을 갔다. 그 할아버지는 제 자리인양 얼른 앉아버렸다. 나는 속으로 뭐 저런 주책맞은 영감이 다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이 많은 것은 자랑이 아니다. 젊은이가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내 손자가 버스 안에서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있지만, 그러나 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만 편해지기 위해 학업에 지친 어린 학생들에게 억지로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그런 어른은 없어야겠다.


2016. 2. 8

posted by 청라

눈길

수필/서정 수필 2015. 7. 23. 16:04

눈길

 

 

  이른 매화꽃이 핀 지도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개화를 준비하던 꽃가지마다 탐스럽게 눈꽃을 매달았다. 어디를 바라봐도 온통 정결한 흰 색이다. 아버지 기일이라 연미산 고개를 오르면서 문득 어떤 눈길이 떠올랐다.

  간경화로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아버지는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고 우기셔서 억지로 퇴원을 하셨다. 공주에서 택시로 집엘 가던 그 때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다시 이 길을 또 올지 모르겠네.”

  애잔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그 때의 그 말씀이 이 길의 마지막이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이 길을 다시 오지 못하셨다.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담아두시려고 사방을 둘러보시던 그 때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추억이 얽힌 눈길이라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던가,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전날이 되었는데 눈이 엄청 내렸다. “천산 조비절이요(千山鳥飛絶)이요 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이라 했던 유종원의 강설(降雪)이 떠오르는 날씨였다. 교통이 모두 두절되어서 오십 리가 넘는 공주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하루 결석하고 내일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셨다. 나보다 서른네 살이 많으셨으니 당시에 쉰세 살이셨다. 큰 병이라도 나시면 큰일이기에 내일 가겠다고 물러섰지만 사나이가 한 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야한다고 앞장서셨다.

  회재고개를 올라가는데 눈보라 칼바람이 몰아쳤다. 코도 시리고 손가락, 발가락 끝이 모두 아리고 아팠다. 백분의 일도 못 왔는데 그만 들어가시라고 간청해도 대답도 않으시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아버지의 등엔 내가 먹을 쌀 한 말이 메어져 있었다.

  우성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나는 비탈진 도로에서 미끄러져 같이 붙잡고 넘어졌다. 눈 밑엔 자갈이 깔려서 무릎이 몹시 아팠다. 아버지도 아프셨겠지만 내 옷을 털어주시고 겉옷을 벗어 내 등에 입혀주셨다. 나는 눈물이 났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자식들에겐 엄격한 아버지였다. 노름을 좋아해서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늘 원망하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극한사항에 도달하자 자식을 가진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였다.

  전막 가까이서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자장면을 먹었다. 무척 시장하실 텐데도 몇 젓가락 내 그릇에 덜어놓으셨다. 나는 내 눈에도 눈물이 많음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걸핏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걸었던 눈길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끝없이 나에게 묻는다. 눈보라 칼바람 속에서 오십 리 넘는 눈길을 아들을 위해 선뜻 따라나설 수 있겠느냐고.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지극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느냐고.


<한밭수필> 제7호(2015년)

posted by 청라

운동화

수필/서정 수필 2010. 6. 27. 17:47

 

운동화


  작은 아이 생일이라고 아내가 십사만 원짜리 운동화를 선물한다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아이들은 메이커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지금까지 삼사만 원짜리 운동화에도 아무 불평 없이 잘만 지내왔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운동화가 그렇게 비싸?”

  나의 말에 아내는 입을 삐쭉하며

  “서방님, 당신은 몰라도 너무 몰라요. 운동화 삼십만 원 넘는 것도 많다네요.”

  “왜, 작은 놈 메이커 신고 싶대?”

  “말은 안 하지만 은근히 저도 그거 한 번 신어보고 싶은가봐요. 엊그제 경기가 나이키 운동화 신고 있는데 눈이 빠져라고 쳐다보더라고요.”

  나는 그동안 아이들이 비싼 신 신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비싼 신을 신으면 체육시간에 공 한 번 차는 것도 망설여질 터이고, 신발장에 신을 놓고 또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안돼”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아버님이 이런 일을 당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열한 살 때의 그 여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은 왜 그렇게 모두들 가난했는지. 일 년에 옷은 추석이나 설 때 겨우 한두 벌 얻어 입고, 신은 검은 고무신이나 좀 형편이 나은 집엔 우리가 지렁이 고무신이라 부르는 지렁이 색 고무신을 얻어 신었다. 나는 명절날 아침이면 언제나 서둘러 일어나는 대로 머리맡을 바라보았다. 머리맡에 새 옷 한 벌이 곱게 놓여있는 그날이면 하루 종일 신이 났고, 아무것도 없이 썰렁한 날이면 집안 사정을 잘 이해하면서도 심통을 부렸다. 그때의 고무신이라는 게 왜 또 그렇게 잘 찢어졌는지! 고무신에 조금만 상처가 나면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쭉쭉 찢어져서 우리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했다. 만일 학교에서 신을 잃어버리거나 새로 사준 지 얼마 안 된 새신을 찢어먹으면 집에 돌아와서 무진장 혼이 났다. 그래서 잘 안 찢어지는 운동화를 신은 부잣집 아이들이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날도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로 소를 풀 뜯기러 산으로 올라갔다.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서 풀이 많은 곳에 매어놓고 놀다가 소가 풀을 거의 다 뜯었을 때엔 다른 풀 많은 곳으로 옮겨 매면 되었다. 그늘에 누워 책을 보거나 놀 수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나에게 끔찍한 사건은 갑자기 일어났다. 소를 옮겨 매는데 소가 무엇에 놀랐는지 느닷없이 뛰었다. 나는 소를 놓치지 않으려고 줄을 잡고 뛰어가는데 갑자기 발밑에서 푸욱 소리가 났다. 줄을 놓는 지도 모르게 던져버리고 발밑을 보니 웬 등걸 하나가 신을 찢고 올라왔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나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소고 뭐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엊그제 사곡 장에서 힘들게 사다 주시면서 “오래 신어라.” 하셨는데……. 하셨는데……. 해 있을 때 집에 가면 어머님께 들킬까봐 나는 땅거미가 이만큼 내릴 때까지 소에게 풀을 뜯겼다. 얄미운 소만 터지게 배가 불렀다.

  풀이 죽어서 산을 내려오는데 저만큼서 아버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났다. 날이 어둔데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 되셨나보다. 나는 얼른 신을 벗어 등 뒤에 숨겼다. 어둠 속에서도 아들의 맨발은 잘 보이시는지,

  “신은?”

  궁금한 얼굴로 물으셨다.

  “아, 예. 저, 저, 저”

  나는 사색이 되어 그냥 얼버무렸다. 얼굴이 빨개졌을 텐데 날이 어두워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님께선 내 등 뒤를 힐끗 바라보시곤 더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사곡 장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가려는데 마루 밑에 새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어제 아침 살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장에 가려느냐고 어머니께 핀잔을 들으시더니 내 운동화를 사시러 시오리 가까운 장엘 다녀오신 모양이다. 나는 운동화를 신으려다 그냥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서러운 일도 없는데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따라 나오시던 아버님도 어머님도 서서 눈시울을 적시셨다. 나는 울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내를 얻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가장은 그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잊지 않으려 했었는데 어느새 또 망각의 바다에 묻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때로는 보아도 못 본 척하고, 자식의 가슴에 늘 가장 가까이 가슴을 대고 있어야 한다는 아버님의 교훈을.

  나는 얼른 아내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더 좋은 운동화는 없어?”

2010. 6. 27

한밭수필2010 

posted by 청라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수필/서정 수필 2008. 2. 25. 15:10
 

  내가 중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소주의 ‘졸정원’ 관광 중에 일행 중 하나가 무심코 씹던 껌을 뱉은 일이 있다. 뒤따라오던 노인 한 분이 화장지를 꺼내더니 그 껌을 곱게 싸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 곁에 다가가서

  “할아버지, 그 껌 무엇 하려고 그러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 할아버지가 무어라고 말하는데 중국말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옆에 따라오던 통역이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한답니다. ‘졸정원’이 더러워지는 것은 중국의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라고 통역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커다란 감동이었다. 문화재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화재 위에 떨어지는 작은 티끌 하나라도 줍는 저 노인의 자긍심이 모여 오랜 잠에서 깨어나 바로 거인으로 발돋움하는 중국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난 2월 11일 새벽 ‘숭례문’이 화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숭례문’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축조된 것이니 햇수로 612년이 된 건물이다. 서울의 도성 정문으로서 우리 민족의 부침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며, 서울시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병란도 피해갔으며, 일제치하에서 조선 문화의 잔재를 말살하려던 일본인들조차 보호해 주었던 민족의 자존심과 얼이 담겨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 1호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이 건물이 자연 발생적 화재도 아니고 우리 국민 중 1인의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니 참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조상들에게도 죄송스럽고, 국보 1호를 보존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부끄럽다. 이제 국민 성금이나 국고를 통해 ‘숭례문’을 재건축 한다고 하는데 겉모습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역사는 어찌 되살릴 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라 하더라도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들은 산업화 속에서도 문화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도,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도 쉽게 문화재를 훼손시키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문화재 한 귀퉁이에 낙서를 한 곳도 없으며, 기분이 나쁘다고 발길질하는 사람도 없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랭보를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문화의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오랜 역사적 유적지를 망설임 없이 옮기는 나라, 심심풀이로 문화재 벽에 낙서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작은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국보 1호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의 국민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전통을 소중하게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는 나라, 자신의 문화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


  국민들의 자부심을 남김없이 불살라버리고 조금의 뉘우침도 없는 뻔뻔한 방화범 그 노인의 얼굴을 보며, 소주 ‘졸정원’에서 껌을 주워 주머니에 넣던 그 노인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posted by 청라

말의 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5. 16. 09:00

말의 묘미

淸羅 嚴基昌
 벚꽃이 만개한 일요일. 친구하고 ‘청남대’ 구경을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기에 차를 몰고 친구의 집으로 향하였다. 봄날은 화창한데 기다리다가 차에 오르는 친구의 얼굴은 겨울처럼 흐리다.

  “이 사람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냉전 중인데 힘이 드는구먼.”

  “누구하고? 제수씨하고? 이 사람아 살아가며 부부끼리 냉전 한 번 안 해본 사람  이 있는가. 자네가 좀 양보하지.”

  “집사람 하고라면야 걱정도 않지. 며늘아이 하고 그러는데 참 불편하구만. 내보내야겠어.”

  그러고 보니 지난 3월 친구의 자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들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손자, 손녀를 보았을 때를 대비해서 집안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며느리 성격이 싹싹하다고 무던하다고 지난번에 자랑하지 않았나? 그런 며느리 하고 왜?”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느리가 화낼 만도 하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 저녁이라도 자기가 차려드린다고 일찍 퇴근하여 저녁상을 올렸더니, 국이 좀 짰던지

  “소금이 넘쳐나는 모양이구나. 네 집은 음식을 이렇게 짜게 먹냐?”

  정통으로 며느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거였다. 웬만하면 참는 이해심 많은 여자도 친정의 흉을 보면 골내는 것을 몰랐던가? 예순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여자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다니!

  판암동에서 추동 쪽으로 접어들자 길 가에 벚꽃이 무르녹았다. 벚꽃뿐만 아니라 진달래, 목련, 배꽃들도 저마다 자태를 자랑하며 산하를 온통 꽃으로 덮어버렸다. 대청호의 푸른 물과 조화를 이룬 절경을 감상하며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는가? 우리 선인들은 그럴 때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겠는가?”

  나는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옛날 어떤 며느리가 시집 온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시아버지 진짓상을 보아다 놓았다네. 시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대견하였겠는가. 자애로운 눈으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데, 첫 숟갈에 ‘딱’ 하고 돌멩이를 깨물었다네. ‘얘, 아가!’ 불안해 죽겠는데 부르시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간신히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로, ‘네……?’ 하였더니. 시아버지 한다는 소리가, ‘이 다음에는 식성대로 섞어 먹게 따로따로 놓아라.’ 이렇게 말했다네. 위축된 상태의 며느리를 감싸면서도, 앞으로는 돌멩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이렇게 따뜻하게 할 수는 없는가? ”

  “……….”

  “자네 말한 대로라면, ‘너희 집은 쌀이 부족해서 쌀 반 돌 반 섞어먹니?’하고 말하지 않았겠나. 집에 가는대로 시아버지 자존심 어쩌고 하지 말고 사과하게.”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기 속 며느리는 죄송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으로 가면서 쿡쿡거리며 웃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시아버지를 더욱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참으로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듣기 거북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 말을 잘못해서 부부간에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상사에게 미움을 받아 직장을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말을 보내면,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 건너온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전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말, 이것이 정말로 묘미 있는 말이 아닐까?    

posted by 청라

정화수

수필/서정 수필 2007. 5. 2. 09:00

정화수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전으로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문틈으로 열여드레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으스름 달빛은 온 세상에 넘실거리고, 검게 가라앉은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꼍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산 밑 장독대 앞에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를 만큼 어머니는 기도에 몰두하고 계셨다. 하얀 사발 안에 우물에서 갓 길어낸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어머님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꼭 감긴 두 눈가엔 간절한 염원처럼 맑은 달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아들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들만은 그 어렵다는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빌고 계실 터였다. 온 새벽의 경건함이 새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님 등 뒤에 둘러져 있고, 찬란한 달빛은 모두 어머님의 두 손끝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온몸이 달빛을 받아 후광에 싸여 있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오신 어머님이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나를 낳고는 겨우 웃음을 찾으시었고, 내가 등창만 앓아도 아버지 밥상에도 놓기 어려운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남가섭암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시던 어머님이다.

  나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감동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바라보았다. 잘못 움직이면 어머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깨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살금살금 방으로 뒤돌아올 때도 달빛 아래 그림처럼 그렇게 앉아 계셨다.


한밭수필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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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4. 12. 09:00

죽음의 의미

淸羅 嚴基昌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연탄가스로 죽었다. 한여름내 등 밑을 적셔왔던 습기를 없앤다고 연탄을 피워놓고 잠든 사이에 죽음의 신은 그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끌고 가 버렸다. 팔팔 뛰던 사람이 밤사이에 웃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도 못하고, 나를 보아도 반갑다 말 한 마디 못하는 한 덩어리 굳은 물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 동안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posted by 청라

보리밥

수필/서정 수필 2007. 4. 9. 09:00
 
보리밥

淸羅 嚴基昌
 집 근처에 보리밥을 잘 하는 식당이 새로 생겼다기에 모처럼 외식을 시켜준다고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아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별미로 먹는 보리밥 외식에 대체로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모처럼의 외식에 큰 기대를 가지고 따라 온 아이들은 불평이 대단하였다.

 “아빠, 왜 이렇게 꺼끌꺼끌해? 이것도 먹는 음식 맞아요?”

 “미끌미끌해서 안 씹어지고 입 속으로 막 돌아다니네. 라면 끓여 먹는 게 훨씬  낫겠다.”

 햄이나 소시지, 라면 등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에게 보리밥은 낯설고 거칠어 전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가난하였었다. 겨울이 지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은 모두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오월을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하지 않았던가. 누렇게 부황난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던 이 시절엔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뿡뿡 기운차게 방귀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점심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밥 차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엌을 기웃거려 보니 시렁에 보리쌀을 삶아 밥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 있었다. 식구들 저녁거리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시장한 판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배가 불끈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겁이 났다. 일에 지쳐서 돌아와 부족한 저녁밥에 눈을 부라리실 부모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일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쯤 되어 나는 겁에 질려 뒷논에 쌓아 놓은 짚더미에 몸을 숨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 걱정에 온 마을을 헤맨 부모님이 짚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못 견디게 그리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보리밥을 먹어가며 아이들에게 그 보리밥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마치 옛 이야기나 전설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들 자신조파 풍요에 취해 어려웠던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데, 그 시절 그 가난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과연 실감이 나는 이야길까?

 요즈음 아이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서만은 그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만큼 가슴 시린 그리운 이야기 거리는 그 때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posted by 청라

해우실

수필/서정 수필 2007. 4. 8. 09:00

해우실(解憂室)

淸羅 嚴基昌
 D 사 입구에 해우실(解憂室)이 있다. 근심이 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록빛 녹음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하게 서 있는 이 기와집에 호기심을 품고 들어서면 지린내가 코를 진동한다. 뒷간을 화장실이라 부르다 못해 이젠 해우실(解憂室) 이라고? 미화(美化)도 이만하면 극치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면 찡그린 얼굴로 황황히 들어섰던 사람들이 얼굴을 활짝 편 모습으로 느긋하게 나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이 자비로 중생을 제도하듯이 계곡 냇가에 세워진 이 작은 집 한 채가 등산객들의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고픔을 참는 고통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뱃속의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엔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설악산과 동해 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강릉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내 성격에 선생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다음 정차하는 곳까지 참기로 하였다.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자갈길에서 차가 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빙빙 돌아 처음 보는 동해의 장관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께 발견되어 울진이든가 영덕이든가 어디에서 시원하게 배설하던 그 쾌감! 나는 지금도 그곳  퀴퀴한 화장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도 우리의 소화기관과 같다. 막히면 답답하고, 풀어줘야 할 때 풀어주지 못하면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바로잡아 줄 어른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굽은 채 자라도 바로잡아 줄 선생님도 많이 줄어들었다. 잘못된 자유의 범람으로 모든 것이 서로 얽혀도 풀어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아 교통이 막히고 경제가 막히고 미풍양속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 누군가 근심 걱정이 술술 풀리는 해우실(解憂室)로 우릴 인도할 수는 없을까.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