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추억

수필/서정 수필 2007. 4. 7. 09:00

깨어진 추억

淸羅 嚴基昌
 내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울진에 가던 날엔 2월인데도 어느새 성큼 봄이 와 있었다. 먼 산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금방이라도 연초록 잎새를 토해낼 것 같았고, 오랜만에 보는 동해바다는 쪽빛으로 푸르러 있었다. 내가 울진에서 해안소대장을 하다가 제대한 지가 1976년 6월이니 벌써 30년이 지난 까마득한 옛날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그리움을 느끼면서도 젊은 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쉽게 와보지 못하였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가 기성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이 너른 바다와 마을들과 바위들의 정겨운 모습. 내 젊은 날에 보던 동해가 거기 고스란히 누워있었다. 사동을 지나면서 잠깐 멈춰 해안 바윗길을 바라보았다. 거기 바닷가 산 밑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내가 근무하던 소초(소대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나올 것이다.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은빛으로 반짝이던 하얀 백사장.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파도소리에 깨어나던 곳.

 달밤이면 이 소위(대령으로 예편)가 나를 불렀었다. 달빛이 너무 밝으니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근무하는 소대원들이 볼까 두려워 술병 하나 감추고 이소위 부대 쪽으로 갈 때면 월광이 출렁이는 바다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양 소대 근무지 중간지점의 백사장에서 만나 술 한 잔에 달을 띄워 마시며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시국 이야기도 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다시 순찰을 돌며 돌아올 때 바다와 달과 술, 그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초 아이들은 간첩이 오는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고, 중대장님(대령으로 예편)이 순찰 오시는 도로 쪽을 경계했었다. 중대장님의 오토바이가 우리 부대 쪽으로 들어오면 즉시 전화로 연락을 했고, 나는 부대원들의 근무상태를 점검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중대장님은 바둑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소초로 들어오시면 바둑으로 유혹을 했었다. 바둑판을 잘 보이도록 내무반에 놓아두고

 “중대장님, 바둑 좀 느셨어요?”

 “왜, 한 수 하자고?”

  바둑 한 번 붙으면 그 날 우리 소대 순찰은 끝이었다.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눈치 빠른 일국(당시 병장)이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계란을 풀어 라면을 끓여 왔다. 바둑의 판세는 내가 압도적이고, 그럴 때 여유를 부리며 먹는 라면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중대장님이 바둑만 두시다가 가시는 덕분에 늘 우리 소대 지적사항이 제일 적었었다.

 기성면 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척산리 가는 들길로 들어섰다. 한 번 다닌 길에 자국이 남는다면 수도 없이 내 흔적이 찍혀 있을 그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길 가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이전했는지 보이지 않고, 마을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조그마한 횟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 백사장 옆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소초로 들어가는 산길 옆 방파제 앞에서 나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옛날 조그맣던 방파제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확장되어 있었고, 소초로 들어가던 길은 뚝 끊어져 있었다. 울퉁불퉁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해변을 억지로 걸어 소초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충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초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름이면 소대원들과 수영을 하며 놀던 백사장도 파도에 휩쓸려 가서 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백사장 가 바위틈 여기저기에 어디에선가 떠내려 온 부유물들이 쓰레기장처럼 널려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에 찾아갔다가 무참히 헐리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커다란 상실감에 일어설 줄 몰랐다.

 아름다 운 추억은 아름다운대로 가슴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산에 핀 꽃은 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듯 그리운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리고,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posted by 청라

닭서리

수필/서정 수필 2007. 3. 11. 23:51

닭서리


淸羅 嚴基昌
 얼마 전 고향 친구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끼리 저녁이나 먹으려고 하니 시간 있으면 참석해 달라 한다. 일 년에 몇 번씩은 방문하는 고향이지만 도회에 나와 살면서 고향을 생각하면 늘 솔바람소리, 뻐꾸기 울음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친구들은 거의 떠나고 없지만 눈을 감으면 친구들의 얼굴은 늘 거기에 있고, 어릴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보석처럼 간직되어 있는 곳이기에, 타향의 거리를 헤매다가 외로움을 느낄 때면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늘 심심하지 않고 즐거웠다. 봄이면 얼음 풀리는 도랑에 나가 가재를 잡아 구워 먹고, 여름이면 냇물에 나가 미역을 감으면서 수박이나 복숭아 서리 할 음모들을 꾸몄다. 별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도 마냥 재미있어 깔깔거렸다. 가을이면 남의 밤나무 밑을 어정거리다 쫓겨 달아나기도 하고, 겨울이면 토끼몰이를 한다고 온 산을 헤매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겨울밤 우리 조무래기 7, 8명은 친구 집에 모였다.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그 친구의 부모님께서  부산에 가고, 남매만 달랑 남아 밤이 무섭다고 하기에 집도 보아줄 겸 신나게 놀아보자는 계획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가며 귀신 이야기도 하고, 윷도 놀고, 베개 싸움도 하다가 열 한 시가 넘어가자 입이 출출해졌다. 생고구마를 깎아 먹어도 동치미를 꺼내어 먹어도 우리들의 허기증은 가시지 않았다. 한 친구가 은밀하게 닭서리를 하는 게 어떠냐고 하였다. 아무도 망설이지 않고 재미있겠다고 눈을 반짝거렸다. 가위 바위 보로 닭을 잡아오는 행동대원을 3명 뽑고, 2명은 닭을 잡고, 나머지는 물을 끓이고 양념을 준비하는 조로 나누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지 물 끓이는 조에 뽑혔다. 행동대원으로 뽑힌 친구들이 밖으로 나간 지 한 시간쯤 지나 큰 닭 두 마리를 잡아왔다. 우리 작은 악당들은 약간의 두려움으로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며 닭을 죽인 뒤에 이미 끓여놓은 물에 담갔다가 닭털을 뽑았다. 내장을 꺼내어 간이나 콩팥 등의 먹을 수 있는 내장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으슥한 땅에 묻었다. 무슨 요리사라도 된 듯이 마디씩 지껄이는 말들에 따라 마늘도 넣고 파도 넣고 그냥 푹 삶아 소금을 찍어 먹었다. 어설픈 요리솜씨임에도 우리들의 시장기는 순식간에 닭 두 마리를 뼈만 남겨놓았다. 새벽녘 헤어질 때 우리는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처럼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잡고 이 비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집에 돌아와 살풋 잠이 든 듯한데

 “아이고 우리 닭. 아이고 우리 닭”

 어머님께서 외치시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벌써 새벽이 되어 날이 부옇게 밝았다. 닭장에 뛰어가 보니 큰 닭 두 마리가 없어졌다.

 “나쁜 놈들, 약아빠진 놈들……”

 이제 와 생각하니 친구들이 잡아왔을 때 왠지 그 닭들이 낯익었던 듯도 하다. 그런데 우리 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 닭서리 하다가 발각되어도 자기 아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어쩌려고 하는 고 놈들의 속셈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지만 이제 공범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같이 걱정하고 있는 아들이 범인인줄도 모르고 분해 펄펄 뛰시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 고향은 쓸쓸해 졌지만, 허전할 때면 가슴 설레고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posted by 청라

개구리 울음소리

수필/서정 수필 2007. 3. 9. 22:50

개구리 울음 소리


淸羅 嚴基昌
  어린 시절 못자리 할 무렵의 봄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개구리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산 그림자가 내려와 더욱 으슥한 산 다랑이 논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개구리들은 울어대고, 건너 마을의 삽사리도 따라 울어 더욱 정취 그윽한 마을을 꾸며놓곤 하였다. 먹을 것이 귀해 늘 배가 고팠지만,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마구 밀려들어오는 개구리울음소리에 취해 있노라면 살며시 졸음이 오고, 나도 모르게 행복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대전에 정착한 뒤로 나는 20여 년 간 거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논 하나 없는 도회 한복판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에 자동차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다. 먹고사는 것은 풍족해지고 걱정거리 하나 없는 생활인데도 어린 시절 개구리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던 그때만큼 숙면에 취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어쩌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그리워 고향에 가서 하룻밤을 새워도 개구리들은 옛날만큼 울지 않았다. 한 모금 울음으로 한 무더기 자운영 꽃을 피워내던 그 때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칩 무렵 깊은 산 계곡 속의 돌을 뒤집어 개구리들을 잡아내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개구리는 더욱 줄어들고, 살아남은 개구리마저 쉽게 사람들의 눈이 뜨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1년에 하루 밤쯤 개구리 울음으로 도회의 속진(俗塵)을 닦아내던 나에게도 개구리 울음은 참으로 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농약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깊은 산 돌 속에 숨어도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개구리들을 생각하며 참으로 가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봄이 익어가던 어느 봄 일요일 날 홍성 처가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칠갑산 산자락으로 난 도로를 돌아가고 있었는데, 열려진 차창 틈으로 문득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귀를 기울여 보니 내가 개구리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착각이 아니었나 싶게 딱 그쳐 있었다. 봄 풀 향기 그윽한 도로 가에 차를 멈추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고 있었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개구리 울음 하나 지나갔다.

별똥별처럼
타버리고 다시는 반짝이지 않았다.


칠갑산 큰 어둠은
돌 틈마다 풀꽃으로
개구리 울음 품고 있지만

기침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
가슴을 닫았다.

차창을 더 크게 열어봤지만
청양을 다 지나도록 청양 개구리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개구리 울음. 유성처럼 한 번 빛나고는 다시 타오르지 않는 개구리 울음. 칠갑산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기척이라도 들릴까봐 꼭꼭 숨어있는 개구리의 두려움과 슬픔을 생각하며, 지구상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횡포가 심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인간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차창 문을 크게 열어봐도 다시는 들리지 않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모처럼의 봄나들이가 아쉽고,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것은 무슨 까닭일까.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