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하나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7. 1. 1. 11:10

더 큰 하나

 

 

  “엄 시인, 나 좋아 죽겠어요.”

  토요일 오후였다. 대학 캠퍼스엔 늦가을이 깊어져 나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서있고, 쥐꼬리만 한 햇살이 내려 비치는 불안한 날이었다. 문학축제장에서 만난 김 시인의 얼굴엔 즐거움이 흘러 넘쳤다.

  “뭔데요? 같이 좀 좋아합시다.”

  “아 글쎄 그 년이 지 애비 얼굴에 똥칠을 했지 뭐예요. 부녀가 같이 쪽박 차게 생겨서 나 요새 아주 살 맛 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통령 부녀 얘기다. 대통령이 실정을 해서 나라가 잘못되면 그게 즐거운 일인가. 어지럽고 시끄러워서 경제 상황도 나빠지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참 별 우스운 나라 다 있다고 비웃고 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창피해 죽겠는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게 좋아할 일인가.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일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시인! 어느 나라 국민이오?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해서 나라가 부강해져야 그게 좋아할 일이지, 잘못해서 이렇게 개판이 되었는데, 아니 그게 그리 즐겁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정상적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대로 경제인들은 경제인들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할 일 완수하여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바른 방향으로 씽씽 돌아가야 그게 즐거운 일 아닌가. 나라가 안정되고 살림이 풍족해져서 이웃을 칭찬하고 서로가 격려하는 아름다운 풍속이라야 그게 좋은 일 아닌가. 그런데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도탄에 빠졌는데도 국회의원도 언론도 법관들도 국민들도 신나 죽겠다. 적의 실수로 얼음판이 깨져서 얼음판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익사하게 생겼는데도 적이 물에 빠지는 것만 보고 좋아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대통령은 무능한 게 가장 큰 죄다. 조금쯤은 독재를 하더라도 국민들 모두를 자신의 품에 안고 번영의 길로 끌고 갈 사람이라야 진정 대통령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복이 없다. 요 근래 나오는 대통령마다 국민들 제각각의 생각들을 하나로 녹여내어 큰 역량을 이끌어내는 용광로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의 시진핑이나 아베마저 부러워하고 있는 실정이니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대통령만 탓할 일도 아니다. 국민들이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같은 일이라도 추구하는 바가 극과 극이니 대통령도 어느 장단에 춤을 추겠는가. 보수와 진보는 정치가들이 대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나누어놓은 이념에 불과하다. 보수라고 낡은 질서만 고집하고, 진보라고 어디 실패한 나라인 북한에 편향된 사고를 고집하겠는가. 보수들은 수구적이기만 한 사고들을 개선하고 진보들은 지금까지와는 차별화된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찬란한 비전을 확립하여 애국심이라는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내어 더 큰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가들이 다음의 대권을 위해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자꾸만 갈등을 부추기려 하겠지만 현명한 국민들아 놀아나지 말자. 늙은이들은 어떻고 젊은 놈들은 어떠하다고 서로 욕하지 말자. 이 나라의 할아버지 할머니요 손자손녀가 아닌가. 전라도는 어떻고 경상도는 어떻다고 서로 헐뜯지 말자. 한 피를 물려받은 한 형제 한 자매 아닌가.

  우리들의 생존을 보호해주는 이 나라, 우리 후손들이 영원토록 살아갈 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더 큰 하나의 밑거름이 될까 이것 하나만 생각하자.

posted by 청라

그믐달

수필/서정 수필 2016. 12. 2. 11:00

그믐달

 

 

 목요 합평회에 참석하려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하늘을 가로질러가던 그믐달이 갤러리백화점 피뢰침에 죽지를 꿰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을. 마치 창공을 날던 새가 꼬치에 박혀 피를 흘리는 듯 애처로워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왜 갑자기 고향 산 돌무덤에 피어있던 도라지꽃이 떠올랐을까. 7, 8월이면 형님의 돌무덤에 피어 어머니 가슴에 박힌 대못을 확인시켜주던 그 꽃. 자줏빛 꽃잎이 별모양으로 벌어져 바람에 파르르 떨던 도라지꽃. 나는 도라지꽃만 보아도 눈 감고 멀리멀리 돌아가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였다.

 

  형님은 6.25 민족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17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한다. 우리 집은 마을의 맨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집 옆으로 논이 조금 있었고, 그 너머로는 넓은 개울이 펼쳐져 있었다. 개울 건너 마곡사로 올라가는 도로가에 형님 친구네 집이 있었다. 그 날의 얘기를 하실 때마다 어머니 눈에서는 늘 장맛비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하고 친구 몇 명이 흥생이네를 갔었단다. 비가 올락 말락 그믐처럼 깜깜한 밤이었지.”

  얘기는 이제 막 시작인데 어머님은 벌써 목이 메었다.

  “아들이 오지 않아 밤늦게까지 기다리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막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글    세 개울 쪽에서 형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니.”

  세상 모든 어머니의 육감은 자식을 위해선 특히 발달하였는지 멀리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아들의 소리란 걸 금방 알았단다. 신발도 신지 않고 형님이 듣게끔 마주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막 개울가에 다다르니 형도 비명을 지르던 채로 가슴에 와서 폭삭 안겼단다. 그리고는 그대로 실신했단다. 다음날 깨어나 헛소리를 하면서 배를 잡고 뒹굴더니 저녁 무렵 눈을 감았단다.

  “옥현이가 데려간 거여. 육시랄 놈들.”

  형님이 건너오던 개울에 오리나무보라는 깊은 둠벙이 있었고 형님 친구 옥현이란 사람이 어린 시절 빠져 죽었단다. 어머니는 늘 그 옥현 형 혼령이 가장 친하던 형을 데려갔을 거라며, 같이 들 놀러가서 형만 혼자 밤길로 보낸 형님 친구들을 원망하였다. 때로는 남자의 잠자리는 무거워야 한다.’고 교육시켰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남자는 아무데서나 잠자면 안 된다고 형들을 닦달했기 때문에 혼자 밤길을 오다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병원에 한 번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내가 태어난 것은 그 해 9. 나의 출생은 어둡고 막막한 우리 집 분위기를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었단다. 나의 웃음에 얼어붙었던 마음들이 녹고, 집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단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우리 집에 희망을 품고 온 천사였다. 어린 시절 늘 착하고 인사성 바르다고 칭찬을 받으며 자랐고, 초등학교 때 공부도 늘 1등이었으며, 6년 동안 줄곧 반장을 맡았었다. 그러나 늘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한숨이었다. 내가 우등상장을 타와도, 검정고시 합격 증서를 갖다 드려도 어머니는 늘 입으로는 웃으셨지만 눈은 젖어있었다. 형님의 죽음은 어머니 가슴에 박힌 대못이었다. 평생 동안 빠지지 않을 질긴 대못이었다. 어머니의 큰 슬픔에 같이 아프면서도 나는 나의 뛰어남이 인정받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리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은근히 마음속으로는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소나기가 한 줄금 시원하게 내린 날 아침이었다. 산밭에 들깻모를 모종한다고 어머니랑 누나랑 밭으로 가고 있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잘 안 다니던 샛길로 접어들었는데 작은 고개를 넘어서자 어머니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칫거리셨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허뚱허뚱 걸어가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감겨있었다.

  “엄니, 왜 그래요? 어디 아퍼요?”

  “저기, 저어기.”

  나는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위 가에 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자줏빛 도라지꽃이 한 송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7월의 산속은 짙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기, 뭐요? 뭐땜에 그래요?”

  “네 형, 네 형 묘

  나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였구나. 어머니의 가슴에 피멍으로 남아 평생 한 번 활짝 웃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지 못하게 한 곳이. 어머니의 눈에 눈물 마를 새가 없게 만든 곳이 저 곳이구나. 나는 어머니가 산밭에 갈 때마다 멀리 돌아가던 비밀을 그 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님은 내 의식 속에 작은 못으로 남아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릴 때마다 신나게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신 형님에 대한 애잔한 마음은 덩달아 따라와 나의 예민한 곳을 찔러댔다. 아마 갤러리백화점 피뢰침에 걸려 파르르 떠는 낮달을 보고 갑자기 형님이 떠오른 것은 그 긴 하늘 반도 가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그믐달의 운명에서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유일한 그늘이었다. 나는 갑자기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시조 한 수를 읊조리고 있었다.

 

  돌무덤에 도라지꽃

  일찍 죽은 형님 영혼

 

  어머니 가슴 속에

  대못으로 박혔더니

 

  꼬치에 심장을 꿰어

  파르르르 떨고 있네.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흥얼거리다가 아직도 비극으로 남아있는 형님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종장을 바꿔보았다. 창공에 / 아픔을 삭혀 / 밝혀놓은 등불 하나.


  종장을 바꿔놓으니 형님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조금은 낳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창백한 낯으로 파닥거릴 그믐달을 생각하면서 형님의 다음 생애엔 창창한 온 하늘을 다 가는 초승달로 태어날 것을 빌면서, 이젠 툭하면 뛰쳐나와 가시처럼 아픈 곳을 찔러대던 형님에 대한 작은 못을 빼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2016. 12. 2

문학사랑2017년 봄호(119)

posted by 청라

사진 한 장

수필/서정 수필 2016. 4. 14. 08:15

사진 한 장

 

 

 막내아우가 카카오 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아우의 대학 졸업식 때 찍은 어머니 사진이었다. 아우의 졸업식 가운에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들으셨다. 무심한 표정 속에서 살풋 미소가 내비친다.

  나는 아우가 참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대학 졸업식에도 틀림없이 오셨을 터인데 졸업식 예복을 입혀 사진을 찍어드릴 생각은 왜 못했던고. 논 열 마지기 남짓의 궁핍한 시골 살림인데도 내 밑 형제들이 줄줄이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깜빡깜빡 잘도 잊는다. 아우가 보낸 사진을 보면서 나는 한참이나 눈물에 젖어있었다.

  아버지는 인정이 많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늘 칭송을 들었지만 생활에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으셨다. 놀음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으셨지만, 가을걷이가 끝나면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늘 불안해하고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시다가 어느 날 휙 하고 나가시면 봄이 무르익어 농사철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봄바람보다 흉한 소문이 먼저 집으로 건너왔다.

  “기챙이네 못살게 되었다더라.”

  소문이 건너온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우리를 재워놓고 소리죽여 우셨다. 6남매를 데리고 또 한 해를 보내실 일이 아마 막막하셨을 것이다. 실상 아버지께서 겨우내 지어놓은 빚이란 게 쌀 일곱, 여덟 가마에 불과했지만, 팍팍한 농촌 살림에 그 정도면 충분히 못살게 될 만한 빚이었다. 너그러운 아버지 성품에 딸 때는 개평 팍팍 주고 잃을 때는 고스란히 잃으시며 겨우내 먹고 자고 하였으니 그 정도의 빚은 그래도 가족들을 배려한 최대한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느 핸가는 할아버지 제삿날이 되었는데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겨우내 행방도 알 수 없이 떠도시다가 며칠 전 마을 주막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기챙아, 할아버지 제사 지내게 아버지 모셔 와라.”

  나는 밤길이 무서운데도 주막으로 내려갔다. 오래 못 본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 마작을 하시는 방문에 대고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지내야 된다고 어머니가 모셔 오래요.”

  한참 있다가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좀 기다려라.”

  30분을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열띤 사람들의 호흡소리만 넘어왔다. 아니, 겨우내 못 보고도 아들이 보고 싶지도 않나.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빨리 오래요.”

  “알았다. 거의 다 됐다.”

  날 선 내 목소리를 느꼈을 터인데도 아버지는 태평하기만 했다. 무엇이 다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한 시간을 또 기다렸다. 동생들은 자다가 쌀밥 좀 먹겠다고 억지로 일어났지만 또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자정이 다 되어가지 않는가. 나는 잔뜩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아버지, 날 새겠어요.”

  문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딱딱 마작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

  “, 안되겠다. 너희들끼리 그냥 지내라.”

  나는 열불이 나서 문을 열어젖히고 마작 판을 확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었다.

  “뭐 저런 아버지가 다 있어. 아버지가 저래도 돼?”

  돌아가는 길에 팔풍쟁이 고개로 치달리는 바람마저도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게 겨울만 되면 대책 없어지는 남편과 한평생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더구나 6.25사변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 가슴에 못 박힌 채로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14살 된 형을 묻었다는 바위 어귀에 가실 때면 어머니는 넘어지면서도 눈을 감고 걸으셨다. 자식을 먼저 묻은 모진 운명에 대해 외면하고 싶으셨으리라.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나서 집안의 어둠을 말끔히 씻어준 아들이, 더구나 초등학교 6년 동안 반장에 1등을 도맡아 한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예뻤겠는가. 그런 아들을 읍내 중학교에 보낼 수 없음을 늘 가슴아파하던 어머니였다.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가서 검정고시에 합격을 해도 고등학교에 입학시켜줄 엄두도 못 내시던 어머니. 나는 내 신세가 하도 서러워서 부모님과 같이 밭을 매다가 호미를 집어던지고 꺼이꺼이 울었다. 장학금을 준다는 고등학교도 있으니 방 하나만 얻어달라고 떼를 썼다. 밭가의 뽕나무 가지를 꺾어다 종아리를 치시던 어머니도 나를 붙잡고 우셨다.

  나는 어머니 생전에 소리 내어 웃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 웃는 모습인지도 알 수가 없다. 동생의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에 나타난 그 오묘한 표정이 웃음인지 아닌지도 나는 파악할 수 없어서 그냥 한참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이젠 웃으셔도 돼요. 그 아픈 세월에 아들을 세 명이나 석사모 씌우셨으니 어머니는 박사모를 쓰셔도 충분하다니까요.”


2016. 3. 13

문학사랑2016년 여름호(116)

<한밭수필>2016(8

posted by 청라

나이 유감遺憾

수필/서정 수필 2016. 2. 7. 09:33

나이 유감遺憾

 

 

  나는 버스를 탔을 때 자리가 없으면 젊은이들과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자리를 양보할 의사가 없었던 젊은이도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또 자리를 양보할 처지가 못 되어 앉아있는 젊은이의 마음은 한없이 불편하고 불안해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냥 손잡이를 잡고 먼 산을 바라보거나 전면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접혀지는 도로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혹시 비틀거려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지 않도록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안정감 있게 서 있으려고 노력한다.

  어느새 나도 자리를 양보할 나이에서 양보 받을 나이가 되었는가. 한두 번 사랑땜에 울고 나지도 않았는데 세월은 저만큼 가버리고 말았다. 내 나이도 가을이 되어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젊은이들을 괴롭히고 긴장시키는 내 나이에 대해 나는 유감이 많다.

  며칠 전 시내에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탔다. 가장교를 건너는데 버스가 휘청 하여 내 자세가 좀 흔들렸나보다. 앞에 앉았던 50대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저 말인가요?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나는 그 아주머니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나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바로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휴대폰을 가지고 놀던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뒤로 가버렸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제 딴엔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역전에서 내릴 때까지 뒤편에 서있는 그 학생을 보며 마음이 짠하고 불편했다. 염색은 세월을 속이는 것 같아 정말 싫지만 빨리 머리를 까맣게 물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젠가 이 버스를 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80대 할아버지는 서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은 휴대폰만 가지고 놀았다. 할아버지가 힘겹게 서서 흔들거리는데도 그 학생은 본 척도 않고 놀이에만 열중했다. 할아버지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는 애비 에미도 없냐?”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학생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후닥닥 일어나서 뒤로 도망을 갔다. 그 할아버지는 제 자리인양 얼른 앉아버렸다. 나는 속으로 뭐 저런 주책맞은 영감이 다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이 많은 것은 자랑이 아니다. 젊은이가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내 손자가 버스 안에서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있지만, 그러나 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만 편해지기 위해 학업에 지친 어린 학생들에게 억지로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그런 어른은 없어야겠다.


2016. 2. 8

posted by 청라

눈길

수필/서정 수필 2015. 7. 23. 16:04

눈길

 

 

  이른 매화꽃이 핀 지도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개화를 준비하던 꽃가지마다 탐스럽게 눈꽃을 매달았다. 어디를 바라봐도 온통 정결한 흰 색이다. 아버지 기일이라 연미산 고개를 오르면서 문득 어떤 눈길이 떠올랐다.

  간경화로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아버지는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고 우기셔서 억지로 퇴원을 하셨다. 공주에서 택시로 집엘 가던 그 때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다시 이 길을 또 올지 모르겠네.”

  애잔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그 때의 그 말씀이 이 길의 마지막이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이 길을 다시 오지 못하셨다.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담아두시려고 사방을 둘러보시던 그 때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추억이 얽힌 눈길이라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던가,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전날이 되었는데 눈이 엄청 내렸다. “천산 조비절이요(千山鳥飛絶)이요 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이라 했던 유종원의 강설(降雪)이 떠오르는 날씨였다. 교통이 모두 두절되어서 오십 리가 넘는 공주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하루 결석하고 내일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셨다. 나보다 서른네 살이 많으셨으니 당시에 쉰세 살이셨다. 큰 병이라도 나시면 큰일이기에 내일 가겠다고 물러섰지만 사나이가 한 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야한다고 앞장서셨다.

  회재고개를 올라가는데 눈보라 칼바람이 몰아쳤다. 코도 시리고 손가락, 발가락 끝이 모두 아리고 아팠다. 백분의 일도 못 왔는데 그만 들어가시라고 간청해도 대답도 않으시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아버지의 등엔 내가 먹을 쌀 한 말이 메어져 있었다.

  우성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나는 비탈진 도로에서 미끄러져 같이 붙잡고 넘어졌다. 눈 밑엔 자갈이 깔려서 무릎이 몹시 아팠다. 아버지도 아프셨겠지만 내 옷을 털어주시고 겉옷을 벗어 내 등에 입혀주셨다. 나는 눈물이 났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자식들에겐 엄격한 아버지였다. 노름을 좋아해서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늘 원망하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극한사항에 도달하자 자식을 가진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였다.

  전막 가까이서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자장면을 먹었다. 무척 시장하실 텐데도 몇 젓가락 내 그릇에 덜어놓으셨다. 나는 내 눈에도 눈물이 많음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걸핏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걸었던 눈길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끝없이 나에게 묻는다. 눈보라 칼바람 속에서 오십 리 넘는 눈길을 아들을 위해 선뜻 따라나설 수 있겠느냐고.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지극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느냐고.


<한밭수필> 제7호(2015년)

posted by 청라

<청라의 사색 채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 분노한 20... 멍청한 노인들 탓에 경로사상이 무너졌다.” 라는 제목 밑에 박근혜 선택적 복지라서 표를 줬다고??? 나잇살 처먹을 만큼 처먹고도 아직 덜 당했냐!” “그리 당하고도 젊은이들 앞길 가로막는 노인들... 그냥 일찍 뒈져라....” “20, 노인에게 절대 자리 양보하지 마!”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주세요.” “기초노령 연금 제도 폐지를 원합니다.” 등등의 노인들에 대한 갖은 험담이 실려 있었다. 할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버지 없고,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 없으니 이 글을 올린 젊은이나 그 밑에 서명한 사람들도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올리고 어찌 편안한 얼굴로 그 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를 위해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볼품없이 허옇게 꺼진 연탄재이지만, 그래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를 때는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불덩이였던 존재, 자신의 몸을 다 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데워줬던 연탄이 재로 변하여 구석에 쌓여져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이 마치 오늘날 노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 있게 하는 말이지만 이 시대의 노인들은 국가로부터 보상받고 젊은이들로부터 공경 받을 자격이 분명히 있다.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아오고 6.25 후의 참담했던 폐허를 이만큼 가꾸고 일궈온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어린 시절엔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었고, 나라는 필리핀, 아르헨티나 심지어는 북한보다도 경제적 여건이 형편없었다. 산은 헐벗을 대로 헐벗은 민둥산이었으며 전국의 도로망과 항만시설은 발전의 고동을 울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공장을 세우고, 길을 내었으며, 산에 나무를 심고,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여 가옥 개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다. 자식들과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 일할 곳만 있으면 청탁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까마득히 우러러보던 유럽의 여러 나라보다도 잘 사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정치적 의견이 좀 다르다고 뒈지라고? 멍청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지 말고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달라고? 민주주의가 바로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보완되고 협조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제도가 아니던가? 6.25를 겪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잔악함을 경험한 노인들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혁신의 기치 아래 다시 시작하는 진보보다 안정된 상태에서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보수를 더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국을 위해 아직 벽돌 한 장 올려놓은 적 없는 젊은이들은 온몸을 불태워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허연 재로 남아있는 연탄재 같은 노인들을 발로 찰 자격이 없다.

 

                             <금강일보> 2015년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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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의 사색 채널>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진다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한비자의 외저설 죄상편(储說·左上篇)에 보면 상행 하효(上行下效)’라는 말이 나온다.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이 본받는다.’ 또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뜻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춘추오패(春秋五霸) 한 사람인 제환공(齐桓公)은 평소 보라색 옷을 즐겨 입었다. 이에 조정 대신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제나라 도읍은 온통 보라색 천지가 되었고, 보라색 옷감 가격은 껑충 뛰어 보라색 비단 한 필의 가격이 흰색 비단 다섯 필의 가격과 맞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제환공이 대신(大臣) 관중(管仲)을 불러 말했다.

  “보라색 비단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으니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게그러자 관중이 입을 열었다.

  “아뢰옵건대 폐하께서 먼저 보라색 옷을 멀리하고 보라색 옷 입은 사람들을 멀리 하옵소서

  다음날 조회에 참석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환공이 좋아하는 보라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때 제환공이 갑자기 손으로 코를 막더니

  “보라색 옷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가까이 오지들 말거라.”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조정은 삽시간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은 저마다 입고 있던 옷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날부터 대신들은 모두 보라색 의상을 벗고 전에 입었던 옷들을 도로 꺼내 입었다. 그 후로 백성들도 더는 보라색 옷을 찾지 않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제나라 도읍에서는 보라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어 옷감과 물감 가격도 다시 안정되었다.

  요즈음 눈만 뜨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정치인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제환공처럼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이 본받도록 실천하는 사람들은 보기 어렵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원, 법관과 같은 지도층의 행동이 바르지 않으니 국민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다. 늘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구를 뽑아놔도 다 똑같아. 뽑을 사람이 없어.”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들이 항시 읊조리는 절망적인 말이다. 정말 뽑을 사람이 없다. 누구를 시켜놔도 제 당과 자신의 이익에만 민감하고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진충보국하는 정치가는 없다. 새로운 사람을 선택하고 기대하지만 지나고 보면 늘 그 타령이다. 왜 그럴까? 바로 정치가들의 텃밭인 국민들 자체가 정치가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비리에 침을 튀기며 분노하지만 국민들 하나하나가 불의한 큰 이익 앞에서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고? 이오십보 소백보다.

  정치인들 욕만 하지 말고 국민들 모두 스스로의 행동을 정화하자. 누구를 뽑아놔도 깨끗하고 진정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게 텃밭을 닦아놓자.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지는 것이.  


                                                                         <금강일보> 2015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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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의 사색 채널>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견리사의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이라는 말씀은 원래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안중근 의사님의 유묵(遺墨)으로 더 유명해진 말이다. 이익을 보면 먼저 의로운 재물인가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치라는 이 말은 이익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고, 이익을 위해서는 국적을 바꾸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큰 교훈이 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자주 안부를 물어오던 제자에게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없어 직장으로 전화를 했더니 보직해임 되어 나오지 않았단다. 하도 기가 막혀 이유를 물었더니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단다. 본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영 받지 않는다. 자식 놈이 그런 일을 당한 듯 궁금하고 속상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소식을 알 만한 그의 친구들에게 다섯 번짼가 전화를 걸었더니,

선생님, 걔 돈 먹고 잘렸대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고놈이 괘씸했지만 참고 연유를 물어보니 옛날 돈을 조금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보직해임이 되었단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한동안 세상을 다 잃은 듯 넋을 잃고 있었다.

  교직생활 초기에 시골 면 소재지 고등학교 아수라장의 분위기 속에서 열정을 다하여 키워낸 금쪽같은 제자였다. 어수선한 면학분위기 속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서울 근교의 명문대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고, 경찰 간부시험에 합격하여 총경까지 승진한 제자였다. 정의롭고 봉사심이 많아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제자였다. 대전에 와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등 자랑스러운 제자들을 수없이 길러냈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 엉겅퀴처럼 스스로 자란 제자이기에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작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허무하게 앞길을 망친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이로움이 눈앞에 있을 때 과연 의로운 이로움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평소에 더없이 청렴하고 깨끗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재물이 눈앞에 있을 때 의로운 재물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기보다 과연 이걸 먹고 걸릴까 안 걸릴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다가 설마 걸리겠어.’하고 꿀꺽 삼켰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요즈음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도 견리사의(見利思義)의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뇌물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그들은 한 번의 잘못 판단으로 전도양양하던 정치생명도 끝장이 나고, 그들을 신뢰하던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국적을 버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견위치명(見危致命)의 교훈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눈보라 치는 만주벌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은 자신의 목숨이 귀한 줄 몰랐던 분들일까. 나라가 있어야 생존권이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자신의 발전과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선구자들이다. 국민들 모두 양심이 살아있어야 나라가 번창하고, 나라가 건재해야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행복마저 지켜진다는 것을 깨닫고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금강일보> 2015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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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4. 3. 08:53

<청라의 사색 채널>

 

나를 따르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19742월 말 ROTC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보병학교에 입소하였다. 소정리역에서부터 구보를 하여 훤히 동트는 새벽 상무대에 도착했을 때 연병장에 새까맣게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불길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를 감동하게 했던 것은 보병학교에 걸려있던 부대 구호였다. “나를 따르라!” 이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도 이 구호를 썼는데 이것은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앞장선다는 뜻이며, 가장 위험한 선봉에 지휘관이 모범을 보인다는 뜻이다. 이 구호 속에는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부하들보다 먼저 튀어나가는 용기와 부하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하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자신에 대한 강한 신뢰가 담겨있다.

  보병학교에 도착했던 첫날 떠오르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전율케 했던 이 구호는 내 평생 삶의 구호가 되었으며, 소대장을 할 때도, 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교직자로 교단에 서 있을 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소대장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교사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항시 아쉬워하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어째서 이러한 구호 하나 마음속에 담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 전 김영란 법(부정청탁 방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이 통과되었을 때 나는 한없는 기쁨 속에서도 씁쓸한 마음 한 자락 들고 일어남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들 누구나가 생각해도 가장 큰 부정의 소지가 있는 정치가, 국회의원에게는 이 법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었다. 관민유착의 고리를 끊는다는 관피아 방지법에서 관의 핵심이 되는 사람들의 목에 줄이 없는데 이 법이 무슨 큰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은 뒤로 빼면서 부하들에게만 진격 앞으로!” 한다면 누가 적진을 향해 돌진하겠는가.

  이제 국회의원의 국민 지지도가 17%에서 까딱거리게 되었음을 인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우리 국회에서 합의라는 민주주의의 꽃은 찾아볼 수 없다. 자신들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정책이 관철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강하게 반대하던 사안들도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교환조건으로 찬성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은 장외투쟁을 하다가도 국회의원 봉급 인상이나 연금 책정 같은 법안은 모두 참여하여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정치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당의 이익보다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김영란 법 같은 지뢰밭도 솔선해서 앞장서고, 자식들 군대도 앞장서서 보내야 한다. 여당 대표는 차기 대선주자 같은 것 인식하지 말고 대통령이 옳게 국정을 꾸려가도록 그림자처럼 도와줘야 하고, 야당 대표는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국가와 국민에 이익이 되는 일에는 박수쳐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위험한 곳에 자신이 앞장섰을 때, 큰 이익을 양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를 따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목소리가 우렁찰 때 국민이 의심 없이 믿어주고 밀어주며 뒤를 따르는 것이다


                                                                          <금강일보> 2015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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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잣대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3. 6. 09:03

<청라의 사색 채널>

 

이중잣대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아일랜드의 어느 항구 도시의 사창가에 두 명의 수병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 목사 한명이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사창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병들은 위선자라고 목사를 비웃었다. 잠시 후에 랍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역시 주위를 살핀 후에 사창가로 들어가자 수병들은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비웃었다. 잠시 후에 카톨릭 신부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사창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병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세상에. 어떤 가엾은 매춘부가 죽어가나 봐.“

이 이야기는 '엉뚱한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목사나 랍비, 신부 모두 타락한 성직자들인데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인 아일랜드 사람들은 카톨릭 신부만 유난히 후한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위와 같은 이중잣대가 심해지고 있는 듯하여 씁쓸할 때가 많다.

얼마 전 추석명절에 고향엘 내려갔을 때 이야기다. 그 때 정부 고위 관리 아들의 병역 비리 문제로 사회가 들썩이고 있었는데, 형님 친구 한 분이 뉴스를 보고 몹시 흥분하여 심한 욕설을 하였다. 평소에 그 분의 인품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음에 다시 고향에 갔을 때 아침 일찍 그 분이 우리 집엘 찾아오셨다. 내 아우가 현역 중령일 때였는데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싸들고 와서 한다는 말이 여보게, 내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있는데 좀 편한 데로 갈 수 없는가?”

위의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의 일엔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일에 관해서는 너그럽기 마련이다. 얼마 전 국무총리 인준에 관한 청문회를 시청하다가 질의하며 호령하는 그분들은 과연 얼마나 청렴하고 깨끗한 분들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다. 자신의 주머니를 뒤집으면 더할 수 없는 먼지가 나올 텐데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게 소리를 지를까. 자신의 부정은 부정이 아니고 남의 부정만 과연 부정일까.

요즈음 정당 정치에서도 이런 모습은 확연히 나타나는데, 여당에서 내놓은 정책은 일단 반대부터 하고 깎아내리는 야당들이 자신들이 여당이 되었을 땐 그런 작태를 일삼는 야당의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다시 야당이 되었을 땐 승산이 없으면 국회야 정상적으로 돌아가든 말든 민생이야 어떻게 되든 장외 투쟁이나 하고.

오랜 교직생활에서 경험한 사실인데 때로는 교사 학부모가 다른 직업의 학부모보다 더 모질고 무서울 때가 있다. 자신은 교직 현장에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담임에게 요구하며 요구가 달성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불평하고 괴롭힌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이중잣대를 잘 표현한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냉정할 일은 나에게도 냉정하고, 나에게 관대할 일은 남에게도 관대하면 안 될까? 때로는 나에게 적대적인 세력일지라도 잘하는 일은 칭찬해주고 더 잘 되게 밀어주는 사람이 많은 사회, 이중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바로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금강일보> 2015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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