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나라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1. 30. 14:54

<청라의 사색 채널>

 

풀의 나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지난 가을 계족산 등산길에 칡덩굴에 둘러싸여 힘겨워하는 교목(喬木)을 본 일이 있다. 수령(樹齡)이 꽤 오래 된 낙엽송 나무였는데 칡덩굴이 친친 감고 올라가 둥치는 보이지도 않고 칡 잎사귀만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던 나무의 꿈은 시들어가고 있었으며, 풀의 공격에 의해 나무의 권위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 나무를 보며 무성한 민주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켜져야 할 소중한 가치들이 점차 무너져가는 우리나라가 생각나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

 

김수영의 시 의 일부이다. 이 시는 오랜 역사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시이다.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 폭력화되었을 때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억압자들의 폭력에 고통을 받아온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투쟁을 통해 바람의 대립적 역사를 종식시키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참으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자유가 지나치게 범람(氾濫)하다 보니 권위(權威)있는 것들은 모두 다 적대시하여 말살시키려는 의식이 팽배(澎湃)해져서 참으로 안타깝다.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 서야 되고, 교육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현장에 가보면 나이 든 학부모님들이 교육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신규 여선생님에게 반말 비슷하게 하는 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자기 자식이 회초리라도 맞고 오는 날이면 갖은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여 항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식들이 있는 곳에서 담임선생님의 욕을 과하게 하는 부모님도 계시다. 교사들의 권위를 깔아뭉개놓고는 교내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보호해달라고 한다. 학부모님, 학생, 그리고 사회가 교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힘을 실어줘야 그 힘으로 자녀들의 안전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왜 모르는 것일까.

언젠가 취객(醉客)에 의해 파출소가 부서지고 경찰들이 다쳤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치안을 지키기 위해 박봉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민중의 지팡이를 부러뜨려놓고 폭력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때로는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부르는 사람이 있다. 정책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욕들을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런 것일까? 풀들만 무성한 풀의 나라엔 하늘 향해 솟아오르는 나무들의 꿈도 없고 땅 한 평 더 차지하려는 풀들의 질시(嫉視)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살기 좋은 풀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권위는 모두 힘을 모아 지켜줘야 한다.   


<금강일보> 2015년 1월 30일

posted by 청라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기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1. 24. 09:30

<청라의 사색 채널>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기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내가 K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그 곳에서 만난 교장선생님은 확고한 교육철학을 가지신 분이셨다. 학생들을 처벌로 교육하기보다 훌륭한 학생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큰 상을 줌으로써 모든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학생 상을 제시해주고, 모든 학생들이 그 학생을 닮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계셨다. 시골의 작은 학교라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아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불평에도 굳건히 버티시면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셨다.

  벚꽃이 교정에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학생과 교내 계를 맡고 있던 나는 아침 교문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복장불량 학생들만 따로 모아 한쪽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놓았다. 기분 좋게 출근하시던 교장선생님께서 그걸 보시더니 불같이 화를 내셨다.

  “엄 선생, 즉시 교장실로 와요.”

  벌을 받던 아이들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평소에 온화한 성품이셨기에 별 일이야 있으려고 하고 큰 걱정 없이 교장실에 갔다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나고 입이 퉁퉁 부어 나왔다. 교장선생님의 그런 따뜻한 배려심도 모르고 학생들은 계속 말썽을 일으켰고, 나도 한동안 교문에 절대 안 서는 것으로 반항도 했지만, 교직에 오래 서 있으면서 그 때 그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 내 가슴에 나도 모르게 이식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잘못을 꼭꼭 짚어주는 것도 교사가 할 일이지만, 때로는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을 하고 세상에 나와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학교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남의 잘못을 먼저 발견하여 지적해주면 인간관계를 해치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중에는 사물을 보는 기본이 부정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있고 긍정에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최복현 선생은 마음을 열어주는 편지중에서 남의 좋은 점만 찾다 보면 자신도 언젠가는 그 사람을 닮아가서 남의 좋은 점을 말하면 자신도 좋은 말을 듣게 된다고 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판단의 기본이 부정에서 출발하여 비판만 하는 사람은 주위를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느새 돌아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흉악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신문의 칸칸을 찾아보아도 읽어서 흐뭇한 이야기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드문 세상이다. 아들이 부모를 죽였다느니, 동거하던 여자를 죽여 토막 내어 묻었다느니 입에 담지 못할 패륜적인 이야기들만 난무하는 세상이다. 기자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굴하여 세상을 밝힐 생각은 않고 특종만 얻으려고 가장 자극적이 이야기들만 찾아 나선다. 저런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배워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겠는가.

  우리 모두 아름다운 것을 먼저 보는 눈을 가꾸자.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살게 하자.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다.


<금강일보> 2015년 1월 2일

posted by 청라

20년 후의 나

수필/교단일기 2010. 12. 28. 16:07

20년 후의 나

 

유리창 밖으로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구나. 메마른 나뭇가지에 조금씩 설화가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설경에 대한 감탄보다 너희들의 움츠린 어깨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내가 선생이기 때문일까?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너희들 교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단다. 내 첫 시집에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야간자습’이란 제목으로 써서 수록한 것이 있는데 한 번 소개해 볼까.  

투명한 유리창은/ 아이들의 상승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수많은 목소리에 눌려 작아질 대로/ 작아진 아이들의 소망은/ 가끔은 무지개빛 호랑나비가 되지만// 초록빛 자유로운 바람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날개를 찢어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초침은 멎어 있었다.// 영산홍꽃 꽃가지마다/불을 지핀 오월이/ 산 접동새 소리로 아이들을 데리러 왔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힘없이 비가 되었다.// 어둠을 태우는 형광등/ 환한 불빛이/ 우리 아이들에겐 오히려/ 진한 어둠이었다.

                                                                       <야간자습> 전문

 

우리 예쁜 공주님들아!
또 한편 생각해보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하게 싸워나가는 너희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단다. 여자는 연약한 게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남자들과 당당하게 실력으로 맞설 수 있도록 자신을 닦아나가는 것이 현대 여성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육십 살쯤 되어가는 내 친구들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 일찍이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는 자기발전의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몇 번쯤 성공의 기회가 오는데, 미리 준비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기회를 잡아 성공하여 존중받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가 있단다.

3년 전 대전고 67회 제자들의 20주년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몇 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감격한 적이 있단다. 그 애들의 졸업 전 마지막 시간에 ‘20년 후의 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제출하게 했는데, 그 글을 쓰면서 정말로 20년 후의 영광스런 자신의 모습을 위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고 했지. 그때 비로소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다 보니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였다고 감사의 말을 하더구나. 한 학생의 말이라면 인사 삼아 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미래에 희망을 주는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너희들도 이 기회에 2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겠니? 그리고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보려므나. 그러면 20년 후 먼 발치에서 나를 보았을 때 달려와 자랑하고 싶을 만큼 성공해 있을 게다. 내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은 청소년 시기에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아가는 학생들이란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들을 일일이 깨워 세워놓고 수업을 한 것이란다. 노력하다 지나쳐 실수하는 삶은 희망이 있지만,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는 삶은 희망이 없는 것이지. 나는 정말 선생이 되고 싶어 교단에 섰고, 학생들을 위해 고집을 피우다가 큰 고난도 겪어본 사람이다. 지금도 내 큰 소망은 너희들이 내년에 가고 싶은 대학의 학과에 합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고, 미래에 자신의 주위나마 밝힐 수 있는 등불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란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고, 여름에 가꾸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단다. 우리 예쁜 공주님들, 20년 후에 모두 자기가 추구하는 부문에서만은 권위자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멈추지 말고, 고지를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20년 후, 아름답게 피어 세상을 향해 향기를 뿌리고 있을 너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2010년 12월 세모

엄 기 창(국어, 대전둔산여자고등학교)

posted by 청라

운동화

수필/서정 수필 2010. 6. 27. 17:47

 

운동화


  작은 아이 생일이라고 아내가 십사만 원짜리 운동화를 선물한다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아이들은 메이커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지금까지 삼사만 원짜리 운동화에도 아무 불평 없이 잘만 지내왔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운동화가 그렇게 비싸?”

  나의 말에 아내는 입을 삐쭉하며

  “서방님, 당신은 몰라도 너무 몰라요. 운동화 삼십만 원 넘는 것도 많다네요.”

  “왜, 작은 놈 메이커 신고 싶대?”

  “말은 안 하지만 은근히 저도 그거 한 번 신어보고 싶은가봐요. 엊그제 경기가 나이키 운동화 신고 있는데 눈이 빠져라고 쳐다보더라고요.”

  나는 그동안 아이들이 비싼 신 신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비싼 신을 신으면 체육시간에 공 한 번 차는 것도 망설여질 터이고, 신발장에 신을 놓고 또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안돼”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아버님이 이런 일을 당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열한 살 때의 그 여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은 왜 그렇게 모두들 가난했는지. 일 년에 옷은 추석이나 설 때 겨우 한두 벌 얻어 입고, 신은 검은 고무신이나 좀 형편이 나은 집엔 우리가 지렁이 고무신이라 부르는 지렁이 색 고무신을 얻어 신었다. 나는 명절날 아침이면 언제나 서둘러 일어나는 대로 머리맡을 바라보았다. 머리맡에 새 옷 한 벌이 곱게 놓여있는 그날이면 하루 종일 신이 났고, 아무것도 없이 썰렁한 날이면 집안 사정을 잘 이해하면서도 심통을 부렸다. 그때의 고무신이라는 게 왜 또 그렇게 잘 찢어졌는지! 고무신에 조금만 상처가 나면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쭉쭉 찢어져서 우리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했다. 만일 학교에서 신을 잃어버리거나 새로 사준 지 얼마 안 된 새신을 찢어먹으면 집에 돌아와서 무진장 혼이 났다. 그래서 잘 안 찢어지는 운동화를 신은 부잣집 아이들이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날도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로 소를 풀 뜯기러 산으로 올라갔다.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서 풀이 많은 곳에 매어놓고 놀다가 소가 풀을 거의 다 뜯었을 때엔 다른 풀 많은 곳으로 옮겨 매면 되었다. 그늘에 누워 책을 보거나 놀 수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나에게 끔찍한 사건은 갑자기 일어났다. 소를 옮겨 매는데 소가 무엇에 놀랐는지 느닷없이 뛰었다. 나는 소를 놓치지 않으려고 줄을 잡고 뛰어가는데 갑자기 발밑에서 푸욱 소리가 났다. 줄을 놓는 지도 모르게 던져버리고 발밑을 보니 웬 등걸 하나가 신을 찢고 올라왔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나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소고 뭐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엊그제 사곡 장에서 힘들게 사다 주시면서 “오래 신어라.” 하셨는데……. 하셨는데……. 해 있을 때 집에 가면 어머님께 들킬까봐 나는 땅거미가 이만큼 내릴 때까지 소에게 풀을 뜯겼다. 얄미운 소만 터지게 배가 불렀다.

  풀이 죽어서 산을 내려오는데 저만큼서 아버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났다. 날이 어둔데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 되셨나보다. 나는 얼른 신을 벗어 등 뒤에 숨겼다. 어둠 속에서도 아들의 맨발은 잘 보이시는지,

  “신은?”

  궁금한 얼굴로 물으셨다.

  “아, 예. 저, 저, 저”

  나는 사색이 되어 그냥 얼버무렸다. 얼굴이 빨개졌을 텐데 날이 어두워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님께선 내 등 뒤를 힐끗 바라보시곤 더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사곡 장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가려는데 마루 밑에 새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어제 아침 살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장에 가려느냐고 어머니께 핀잔을 들으시더니 내 운동화를 사시러 시오리 가까운 장엘 다녀오신 모양이다. 나는 운동화를 신으려다 그냥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서러운 일도 없는데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따라 나오시던 아버님도 어머님도 서서 눈시울을 적시셨다. 나는 울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내를 얻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가장은 그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잊지 않으려 했었는데 어느새 또 망각의 바다에 묻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때로는 보아도 못 본 척하고, 자식의 가슴에 늘 가장 가까이 가슴을 대고 있어야 한다는 아버님의 교훈을.

  나는 얼른 아내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더 좋은 운동화는 없어?”

2010. 6. 27

한밭수필2010 

posted by 청라

만우절

수필/교단일기 2008. 4. 4. 12:46
 

만우절

 

엄 기 창

 

 

  내가 둔산여고에 와서 1개월이 넘었지만 영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다조회시간 수업시간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서 눈만 떼면 와글와글 떠드는 것이다출근 첫 날 급식 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나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갑자기 여학생의 뾰족한 비명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친구 하나가 갑자기 뒤에서 껴안았다고 그렇게나 크게 비명을 지르다니그 뒤에도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고 웃고 떠들고 서로 때리고마치 비오는 날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악을 쓰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 으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점심식사를 하고 나왔다.

  그러나 교실에서만은 모두 요조숙녀 같이 정숙해서 흐뭇해 하기는 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조것들이 나하고 처음이니까 저렇지 언제까지 조용할까 하고아니나 다를까. 1주일이 지난 뒤부터 자습시간 수업시간 가리지 않고 못 말리게 떠들어댄다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된다. “조용히 해” 이 말이 완전히 내 입에 붙어 버릴까봐.

  세월은 소리 없이 달려 만우절이 왔다아이들의 만우절 장난이 심하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동료 선생님들에게 이미 들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긴장하였다바보같이 속아서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지아무리 그럴듯한 거짓말이라도 절대 속지 말아야지.

  4교시 문학시간에 10반 교실로 들어갔다그리고 흠칫 하였다아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다. ‘요놈들 봐라 내가 질 줄 알고’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속으로는 같이 자지 뭐’ 하는 생각으로 배짱을 부려보았다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한 놈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어라그런데 고놈은 11반 우리 반 학생이었다. “야 임마”.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 하던 놈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까르르 웃었다모두 우리 반 놈들이었다이것들이 단체로 마실 왔나나는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지만 같이 놀아주면 큰일이 날 것 같아 정색을 한 얼굴로 혼을 내고 아이들을 다시 원위치 시키고 수업을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우리 반 수업이라 교실에 들어갔다. 평소보다 교실이 환해져 있었다아이들이 학교 울타리의 개나리꽃 몇 줄기를 꺾어 조금씩 나누어서 오른 쪽 머리에 꽂고 있었다깜찍하고 예쁘기는 했다그러나 그냥 놔두면 교정의 꽃을 꺾어 머리에 꽂는 것이 유행이 될 것 같아서 속마음을 감추고 소리를 크게 질러 혼을 내었다그리고 생각했다. 자식들꽃을 머리에 꽂아놓으니 꽃만 돋보이잖아…….

  12반 놈들은 한술 더 떠서 능청스럽기가 말할 수 없었다아이들 반수 이상이 교재로 쓰는 프린트가 없어 뭔가 의심스럽다고 하니까 반장 놈이 정말 정직한 얼굴로 선생님 저 못 믿으세요정말 아니예요.” 하길래 믿기로 했다그랬더니 수업 중간에 한 놈이 아파 양호실에 간다고 했다허락을 했더니 갑자기 복도가 시끄러워졌다고놈이 나가다가 복도에 쓰러져 버린 거였다예상했던 장난이지만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수업 받던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들고 한 놈이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빨리 업고 양호실 가셔야죠.” 나는 눈치 채고 네가 업어라 임마” 하고 교실로 들어왔다교탁 앞에 서니 한 놈씩 겉옷을 벗었다그런데 벗는 놈마다 노란 명찰이었다. 1학년 놈들하고 반반씩 바꾸어 앉은 거였다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에구조것들 얼마나 애교 있는 장난이냐참자참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14반에 들어갔더니 인사 끝나자 마자

 "선생님, 바지 좀 내려주세요."

 천연덕 스럽게 말하고 다른 놈들은 까르르 웃었다. 무슨 성희롱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웬 뚱단지 같은 소리람. 남자 선생님이 여학생 성희롱했단 소리는 들었어도 여학생이 남자 선생 성희롱했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었다. 황당해서 얼굴이 빨개졌나보다. 또 모두 소리를 모아

  "빨개졌대요. 빨개졌대요"

  합창들을 한다. 정신이 없는 중에서도 아이들 눈길을 보니 모두 칠판 위를 향하였다. 올려다보니 꾀죄죄한 체육복 바지가 하나 얹혀 있었다. 아하! 저거 내려달란 소리였어? 음흉한 놈들

  "알았어. 내려 줄께."

  못 본 척 하고 지퍼로 손이 가니 모두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른다. 자식들이 까불고 있어어쨌든 하루 종일 무언가 일어날까봐 불안하게 보낸 하루였다남학교에만 근무하던 나에겐 참으로 지랄맞고 황당한 하루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도 아이들 장난에 박자를 맞춰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후회도 된다얼마나 애교 있는 장난인가조런 것들이 여학교에 근무하는 재미가 아닐까수업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싫기만 하니 나도 천상 옛날 선생인가보다며칠 전 식당에서 1학년 학생 한 놈이 선생님선생님, SS501 멋지죠좋아하시죠?” 하고 물었을 때 그거 먹는 음식 이름이냐?”하고 애들을 웃긴 일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그런 그룹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애들 세대의 일에 무심하였다새 시대 새 아이들에 맞는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마저도 아이들과 공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가장 아이들 같은 마음을 가진 가장 어른다운 교사. 지금은 그런 교사가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금도 후회되는 게 하나 있다. 애들이 놀라게 했을 때 좀 더 놀라줄걸…….


한밭수필9(2017)

  

posted by 청라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수필/서정 수필 2008. 2. 25. 15:10
 

  내가 중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소주의 ‘졸정원’ 관광 중에 일행 중 하나가 무심코 씹던 껌을 뱉은 일이 있다. 뒤따라오던 노인 한 분이 화장지를 꺼내더니 그 껌을 곱게 싸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 곁에 다가가서

  “할아버지, 그 껌 무엇 하려고 그러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 할아버지가 무어라고 말하는데 중국말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옆에 따라오던 통역이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한답니다. ‘졸정원’이 더러워지는 것은 중국의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라고 통역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커다란 감동이었다. 문화재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화재 위에 떨어지는 작은 티끌 하나라도 줍는 저 노인의 자긍심이 모여 오랜 잠에서 깨어나 바로 거인으로 발돋움하는 중국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난 2월 11일 새벽 ‘숭례문’이 화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숭례문’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축조된 것이니 햇수로 612년이 된 건물이다. 서울의 도성 정문으로서 우리 민족의 부침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며, 서울시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병란도 피해갔으며, 일제치하에서 조선 문화의 잔재를 말살하려던 일본인들조차 보호해 주었던 민족의 자존심과 얼이 담겨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 1호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이 건물이 자연 발생적 화재도 아니고 우리 국민 중 1인의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니 참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조상들에게도 죄송스럽고, 국보 1호를 보존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부끄럽다. 이제 국민 성금이나 국고를 통해 ‘숭례문’을 재건축 한다고 하는데 겉모습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역사는 어찌 되살릴 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라 하더라도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들은 산업화 속에서도 문화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도,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도 쉽게 문화재를 훼손시키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문화재 한 귀퉁이에 낙서를 한 곳도 없으며, 기분이 나쁘다고 발길질하는 사람도 없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랭보를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문화의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오랜 역사적 유적지를 망설임 없이 옮기는 나라, 심심풀이로 문화재 벽에 낙서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작은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국보 1호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의 국민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전통을 소중하게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는 나라, 자신의 문화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


  국민들의 자부심을 남김없이 불살라버리고 조금의 뉘우침도 없는 뻔뻔한 방화범 그 노인의 얼굴을 보며, 소주 ‘졸정원’에서 껌을 주워 주머니에 넣던 그 노인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posted by 청라

말의 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5. 16. 09:00

말의 묘미

淸羅 嚴基昌
 벚꽃이 만개한 일요일. 친구하고 ‘청남대’ 구경을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기에 차를 몰고 친구의 집으로 향하였다. 봄날은 화창한데 기다리다가 차에 오르는 친구의 얼굴은 겨울처럼 흐리다.

  “이 사람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냉전 중인데 힘이 드는구먼.”

  “누구하고? 제수씨하고? 이 사람아 살아가며 부부끼리 냉전 한 번 안 해본 사람  이 있는가. 자네가 좀 양보하지.”

  “집사람 하고라면야 걱정도 않지. 며늘아이 하고 그러는데 참 불편하구만. 내보내야겠어.”

  그러고 보니 지난 3월 친구의 자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들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손자, 손녀를 보았을 때를 대비해서 집안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며느리 성격이 싹싹하다고 무던하다고 지난번에 자랑하지 않았나? 그런 며느리 하고 왜?”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느리가 화낼 만도 하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 저녁이라도 자기가 차려드린다고 일찍 퇴근하여 저녁상을 올렸더니, 국이 좀 짰던지

  “소금이 넘쳐나는 모양이구나. 네 집은 음식을 이렇게 짜게 먹냐?”

  정통으로 며느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거였다. 웬만하면 참는 이해심 많은 여자도 친정의 흉을 보면 골내는 것을 몰랐던가? 예순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여자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다니!

  판암동에서 추동 쪽으로 접어들자 길 가에 벚꽃이 무르녹았다. 벚꽃뿐만 아니라 진달래, 목련, 배꽃들도 저마다 자태를 자랑하며 산하를 온통 꽃으로 덮어버렸다. 대청호의 푸른 물과 조화를 이룬 절경을 감상하며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는가? 우리 선인들은 그럴 때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겠는가?”

  나는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옛날 어떤 며느리가 시집 온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시아버지 진짓상을 보아다 놓았다네. 시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대견하였겠는가. 자애로운 눈으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데, 첫 숟갈에 ‘딱’ 하고 돌멩이를 깨물었다네. ‘얘, 아가!’ 불안해 죽겠는데 부르시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간신히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로, ‘네……?’ 하였더니. 시아버지 한다는 소리가, ‘이 다음에는 식성대로 섞어 먹게 따로따로 놓아라.’ 이렇게 말했다네. 위축된 상태의 며느리를 감싸면서도, 앞으로는 돌멩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이렇게 따뜻하게 할 수는 없는가? ”

  “……….”

  “자네 말한 대로라면, ‘너희 집은 쌀이 부족해서 쌀 반 돌 반 섞어먹니?’하고 말하지 않았겠나. 집에 가는대로 시아버지 자존심 어쩌고 하지 말고 사과하게.”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기 속 며느리는 죄송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으로 가면서 쿡쿡거리며 웃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시아버지를 더욱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참으로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듣기 거북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 말을 잘못해서 부부간에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상사에게 미움을 받아 직장을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말을 보내면,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 건너온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전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말, 이것이 정말로 묘미 있는 말이 아닐까?    

posted by 청라

정화수

수필/서정 수필 2007. 5. 2. 09:00

정화수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전으로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문틈으로 열여드레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으스름 달빛은 온 세상에 넘실거리고, 검게 가라앉은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꼍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산 밑 장독대 앞에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를 만큼 어머니는 기도에 몰두하고 계셨다. 하얀 사발 안에 우물에서 갓 길어낸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어머님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꼭 감긴 두 눈가엔 간절한 염원처럼 맑은 달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아들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들만은 그 어렵다는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빌고 계실 터였다. 온 새벽의 경건함이 새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님 등 뒤에 둘러져 있고, 찬란한 달빛은 모두 어머님의 두 손끝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온몸이 달빛을 받아 후광에 싸여 있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오신 어머님이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나를 낳고는 겨우 웃음을 찾으시었고, 내가 등창만 앓아도 아버지 밥상에도 놓기 어려운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남가섭암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시던 어머님이다.

  나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감동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바라보았다. 잘못 움직이면 어머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깨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살금살금 방으로 뒤돌아올 때도 달빛 아래 그림처럼 그렇게 앉아 계셨다.


한밭수필9(2017)

  


posted by 청라

단풍잎

수필/교단일기 2007. 4. 27. 09:00

단풍잎

淸羅 嚴基昌
 내가 첫 발령을 받아 부임한 N중학교에서 나는 처음 화철이를 만났다. 화철이는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조용히 있다가도 제 기분에 맞지 않으면 수업시간에도 막 소리를 질렀다. 중학교 2학년인데도 한글을 전혀 몰랐고, 제 이름도 ‘이효ㅏ철’이라고 썼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화철이를 무시했다. 그래서 화철이는 늘 모든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혼자 살아가는 이방인이었다.
 체육시간에도 화철이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혼자 놀았다. 친구들은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였지만 늘 멀건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화철이를 자기 팀에 끼워주지 않았다. 하기는 헛발질만 하고, 때로는 자기 골문으로 볼을 차는 놈을 자기 팀에 끼워줄 사람이 있겠는가?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서 어슬렁거리며 교실로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이제 급우들도 화철이 일이라면 아무리 웃기는 일이라도 웃지도 않았다.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화철이는 우리 학급에서 있어도 없는 존재였다.
 한 번은 철봉 아래 모래밭에서 혼자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화철이를 불렀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왜? 왜 재미없어?”
 “그냥 재미없어요.”
 “누가 우리 화철이 때리는 사람 있어? 괴롭히는 사람 있어?”

 화철이는 다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화철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야?”

 화철이는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애들하고 놀고 싶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탁 막혔다. 불쌍한 놈. 화철이의 표정에는 애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소망이 간절하게 나타나 있었다. 머리가 부족한 놈에게도 외로움은 있는 거였다.
 나는 쉬는 시간에 당장 반장을 불렀다. 그리고 화철이 이야기를 했다. 그 애가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지를 이야기 하고, 같이 놀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그 다음부터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뛰어다니는 화철이를 보았다. 뛰는 것은 어설퍼도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학급의 모든 일에 화철이를 참여시켰고, 그 때부터 화철이는 진정한 학급의 일원이 되었으며,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 늦게 등교하는 일도 줄어들고, 수업시간에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하루는 다시 화철이를 불러 미리 준비한 사탕을 주면서 물어보았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화철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즐거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뭐가 좋은데? 화철이 뭐가 그렇게 좋아?”
 “애들이 잘 해줘요. 축구 재밌어요.”

 나는 나의 말 한 마디에 그렇게 화철이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학급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내 조그마한 관심이 외로움의 그늘 속에서 즐거움의 양지쪽으로 한 아이를 꺼내 주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기뻤다.
 가을이었다. 교정의 나무들에도 가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퇴근을 하려고 교문을 나서는데 담 뒤에 숨어있던 한 아이가 뛰어왔다. 화철이었다. 내 손에 무엇을 쥐어주고

 “선생님, 좋아요.”

 발음도 분명하지 않게 중얼거리고 뛰어갔다. 어설프게 싼 종이를 풀어보니 곱게 물든 단풍잎 한 가지였다. 나의 온 몸에 짜르르 환희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교사의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이 가을의 모든 아름다움이 화철이가 주고 간 단풍잎에 모여 고여 있는 듯했다. 억만금의 선물보다 더 귀하고 고마웠다.
 뛰어가는 화철이의 등에 대고 나도 마음속으로 외쳤다.

 “화철아, 나도 사랑해”

<한밭수필>2016(8


posted by 청라

죽음의 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4. 12. 09:00

죽음의 의미

淸羅 嚴基昌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연탄가스로 죽었다. 한여름내 등 밑을 적셔왔던 습기를 없앤다고 연탄을 피워놓고 잠든 사이에 죽음의 신은 그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끌고 가 버렸다. 팔팔 뛰던 사람이 밤사이에 웃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도 못하고, 나를 보아도 반갑다 말 한 마디 못하는 한 덩어리 굳은 물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 동안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