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사랑하기

수필/교단일기 2007. 4. 11. 09:00

가슴으로 사랑하기

淸羅 嚴基昌
 상담실에 근무하면서 삶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학년 교실을 순찰하고,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학생들의 자습을 감독하던 학년부장 시절의 일들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대전에 온 이후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분주한 나날이었다. 22년 동안 3학년 담임 11년, 3학년 부장 3년, 1, 2학년 부장 2년 등 16년을 일찍 퇴근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렇게 전깃불 아래서 태워 날려 버렸다. 분주한 만큼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얻은 여유 있는 시간에 나는 철저하게 자아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일만 해도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김 선생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고 하길래 궁금한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중간고사 일 중간에 휴일이 이틀 끼어 있다고 나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올려놓았다. 교직에 30년 넘게 몸담아 있었지만 이런 욕은 처음 들어보는 까닭에 참으로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학사일정은 내가 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고사 일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왜 나를 향해 욕을 했을까?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놈이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방학 중에도 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일찍 오는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 있는 교실 열쇠를 못 꺼낼까 걱정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신새벽에 출근하였다. 학교를 떠나 있으면 늘 아이들 걱정을 하였으며, 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었다. 아이들에게도 나의 이런 마음이 전달되었다 생각했고,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존경받는 교사일 것이라고 착각을 하였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사랑하였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체했던 것이 아닐까. 예쁜 아이는 예뻐하고, 미운 아이는 그냥 미워했었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사는 머리로만 아이들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진정 감동시키고 바르게 자라는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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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수필/교단일기 2007. 4. 10. 09:00

호빵맨

淸羅 嚴基昌
 D고 시절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내 별명은 ‘호빵맨’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얼굴에 양 볼이 붉어 만화영화에 나오는 호빵맨을 닮았단다. 나는 이 별명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별명으로 붙여줬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별명으로 나를 불러주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
 D고에 가던 첫해에 3학년 문과 여학생 반 담임을 했다. 시내의 다른 학교에 비해 성적도 뛰어나게 좋았지만, 극성스럽기도 또한 지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사이좋은 친구사이인데도 질투심은 또 왜 그렇게 많았던지……. 3월 첫날 누군가가 예쁜 꽃병에 꽃을 꽂아놓았다. 다음날엔 어떤 놈이 그 꽃병을 치워버리고 자기의 꽃병에 꽃을 꽂아 놓는다.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가져다 준 쟁반 위의 컵들도 수시로 바뀌었다.
 4월 초였다. 처연하게 지는 매화꽃 옆에서 백목련 탐스럽게 피어나는 오후였다. 부반장 놈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인형을 하나 들고 왔다.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이었다. 배는 불쑥 나오고, 얼굴은 호빵처럼 둥글둥글하고, 양 볼은 볼그레하다. 인형을 내 옆에 같다 대더니

  “선생님, 똑같아요.”
  “뭐가?”
  “선생님하고 이 인형요.”

 모여 서서들 기를 죽이려는 듯 까르르 웃어댄다. 나쁜 놈들, 내가 뭐 저렇게 웃기게 생겼다고. 책상에 내려놓는 인형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정을 했다.
 인형을 갖다 준 것이 음모였다는 것을 나는 다음날부터 금방 알아차렸다. 나한테 혼이 나거나 나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면 나 몰래 와서 인형을 팼다. 심지어 어떤 놈은 호빵맨 인형의 손목에 세균맨을 채워놓고 갔다. 교무실로 들어오다 호빵맨 인형을 때리는 놈을 보았지만, 나는 못 본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놈들의 애교 있는 반항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잘도 연락을 하더니 졸업 후엔 전혀 소식이 없다. 그놈들이 지어준 별명은 Y고로 건너와 이 곳 학생들도 부르고 있지만 고놈들 소식은 알 수가 없다. 호빵맨 인형을 내 집안의 책상 위에 소중히 간수해두고 아이들이 그리울 때면 어루만져 보며 생각한다. 지금 고놈들 시집간 놈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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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수필/서정 수필 2007. 4. 9. 09:00
 
보리밥

淸羅 嚴基昌
 집 근처에 보리밥을 잘 하는 식당이 새로 생겼다기에 모처럼 외식을 시켜준다고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아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별미로 먹는 보리밥 외식에 대체로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모처럼의 외식에 큰 기대를 가지고 따라 온 아이들은 불평이 대단하였다.

 “아빠, 왜 이렇게 꺼끌꺼끌해? 이것도 먹는 음식 맞아요?”

 “미끌미끌해서 안 씹어지고 입 속으로 막 돌아다니네. 라면 끓여 먹는 게 훨씬  낫겠다.”

 햄이나 소시지, 라면 등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에게 보리밥은 낯설고 거칠어 전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가난하였었다. 겨울이 지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은 모두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오월을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하지 않았던가. 누렇게 부황난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던 이 시절엔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뿡뿡 기운차게 방귀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점심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밥 차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엌을 기웃거려 보니 시렁에 보리쌀을 삶아 밥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 있었다. 식구들 저녁거리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시장한 판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배가 불끈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겁이 났다. 일에 지쳐서 돌아와 부족한 저녁밥에 눈을 부라리실 부모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일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쯤 되어 나는 겁에 질려 뒷논에 쌓아 놓은 짚더미에 몸을 숨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 걱정에 온 마을을 헤맨 부모님이 짚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못 견디게 그리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보리밥을 먹어가며 아이들에게 그 보리밥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마치 옛 이야기나 전설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들 자신조파 풍요에 취해 어려웠던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데, 그 시절 그 가난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과연 실감이 나는 이야길까?

 요즈음 아이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서만은 그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만큼 가슴 시린 그리운 이야기 거리는 그 때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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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실

수필/서정 수필 2007. 4. 8. 09:00

해우실(解憂室)

淸羅 嚴基昌
 D 사 입구에 해우실(解憂室)이 있다. 근심이 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록빛 녹음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하게 서 있는 이 기와집에 호기심을 품고 들어서면 지린내가 코를 진동한다. 뒷간을 화장실이라 부르다 못해 이젠 해우실(解憂室) 이라고? 미화(美化)도 이만하면 극치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면 찡그린 얼굴로 황황히 들어섰던 사람들이 얼굴을 활짝 편 모습으로 느긋하게 나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이 자비로 중생을 제도하듯이 계곡 냇가에 세워진 이 작은 집 한 채가 등산객들의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고픔을 참는 고통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뱃속의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엔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설악산과 동해 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강릉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내 성격에 선생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다음 정차하는 곳까지 참기로 하였다.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자갈길에서 차가 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빙빙 돌아 처음 보는 동해의 장관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께 발견되어 울진이든가 영덕이든가 어디에서 시원하게 배설하던 그 쾌감! 나는 지금도 그곳  퀴퀴한 화장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도 우리의 소화기관과 같다. 막히면 답답하고, 풀어줘야 할 때 풀어주지 못하면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바로잡아 줄 어른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굽은 채 자라도 바로잡아 줄 선생님도 많이 줄어들었다. 잘못된 자유의 범람으로 모든 것이 서로 얽혀도 풀어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아 교통이 막히고 경제가 막히고 미풍양속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 누군가 근심 걱정이 술술 풀리는 해우실(解憂室)로 우릴 인도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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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추억

수필/서정 수필 2007. 4. 7. 09:00

깨어진 추억

淸羅 嚴基昌
 내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울진에 가던 날엔 2월인데도 어느새 성큼 봄이 와 있었다. 먼 산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금방이라도 연초록 잎새를 토해낼 것 같았고, 오랜만에 보는 동해바다는 쪽빛으로 푸르러 있었다. 내가 울진에서 해안소대장을 하다가 제대한 지가 1976년 6월이니 벌써 30년이 지난 까마득한 옛날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그리움을 느끼면서도 젊은 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쉽게 와보지 못하였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가 기성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이 너른 바다와 마을들과 바위들의 정겨운 모습. 내 젊은 날에 보던 동해가 거기 고스란히 누워있었다. 사동을 지나면서 잠깐 멈춰 해안 바윗길을 바라보았다. 거기 바닷가 산 밑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내가 근무하던 소초(소대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나올 것이다.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은빛으로 반짝이던 하얀 백사장.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파도소리에 깨어나던 곳.

 달밤이면 이 소위(대령으로 예편)가 나를 불렀었다. 달빛이 너무 밝으니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근무하는 소대원들이 볼까 두려워 술병 하나 감추고 이소위 부대 쪽으로 갈 때면 월광이 출렁이는 바다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양 소대 근무지 중간지점의 백사장에서 만나 술 한 잔에 달을 띄워 마시며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시국 이야기도 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다시 순찰을 돌며 돌아올 때 바다와 달과 술, 그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초 아이들은 간첩이 오는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고, 중대장님(대령으로 예편)이 순찰 오시는 도로 쪽을 경계했었다. 중대장님의 오토바이가 우리 부대 쪽으로 들어오면 즉시 전화로 연락을 했고, 나는 부대원들의 근무상태를 점검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중대장님은 바둑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소초로 들어오시면 바둑으로 유혹을 했었다. 바둑판을 잘 보이도록 내무반에 놓아두고

 “중대장님, 바둑 좀 느셨어요?”

 “왜, 한 수 하자고?”

  바둑 한 번 붙으면 그 날 우리 소대 순찰은 끝이었다.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눈치 빠른 일국(당시 병장)이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계란을 풀어 라면을 끓여 왔다. 바둑의 판세는 내가 압도적이고, 그럴 때 여유를 부리며 먹는 라면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중대장님이 바둑만 두시다가 가시는 덕분에 늘 우리 소대 지적사항이 제일 적었었다.

 기성면 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척산리 가는 들길로 들어섰다. 한 번 다닌 길에 자국이 남는다면 수도 없이 내 흔적이 찍혀 있을 그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길 가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이전했는지 보이지 않고, 마을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조그마한 횟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 백사장 옆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소초로 들어가는 산길 옆 방파제 앞에서 나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옛날 조그맣던 방파제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확장되어 있었고, 소초로 들어가던 길은 뚝 끊어져 있었다. 울퉁불퉁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해변을 억지로 걸어 소초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충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초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름이면 소대원들과 수영을 하며 놀던 백사장도 파도에 휩쓸려 가서 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백사장 가 바위틈 여기저기에 어디에선가 떠내려 온 부유물들이 쓰레기장처럼 널려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에 찾아갔다가 무참히 헐리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커다란 상실감에 일어설 줄 몰랐다.

 아름다 운 추억은 아름다운대로 가슴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산에 핀 꽃은 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듯 그리운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리고,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posted by 청라

의심 생암귀(疑心生暗鬼)

수필/교단일기 2007. 4. 6. 09:00

<교단일기>

의심 생암귀(疑心生暗鬼)

淸羅 嚴基昌
 “엄 선생님,  가람이가 그 병 또 도진 것 같은데요.”

 토요일 오후였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나른한 오후의 주말을 즐기고 있는데 조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람이는 성품도 쾌활하고, 급우들을 위해 봉사할 줄도 알며, 공부도 곧잘 하는 아이다. 부모님들도 교양 있고, 집안도 부유한 편인데 어쩌다가 그 아이에게 그런 몹쓸 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깨어진 주말의 평화 때문에 불쾌한 마음으로 학교로 달려갔다. 교무실에 가 보니 가람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조 선생은 화 난 얼굴로 무엇인가 묻고 있다.

 “조 선생, 가람이가 또 무슨 사고를 낸 모양이죠?”

 “예. 우리 반 형태가 지갑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런데 가람이가 점심시간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왔었대요. 아이들 모두 가람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선생님, 저 정말로 성태 보러….”

 “시끄러워 임마”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내가 사정을 했는데. 제 편에 서서 그렇게 힘썼는데. 그만하면 돌부처도 감동했겠다. 나는 가람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하여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갔을 때 맨 처음 말을 건 학생이 가람이었다. 모두 싫어하는 급식당번을 모집했을 때도 제일 먼저 지원을 했고, 회계를 모집했을 때도 주저 없이 손을 든 아이였다. 늘 얼굴이 환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서 사랑스런 마음이 절로 생겨나는 아이였다 . 그 날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나는 반장보다 더 가람이를 의지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학교에 가니 2학년 담임 한 분이 좀 만나자는 쪽지를 책상 위에 놓고 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즉시 달려가서 절망적인 그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어제 4교시 가람이가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현금과 핸드폰을 훔쳐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가람이를 믿고 있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가람이라고 확신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미련한 놈이 옆에 있는 헌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새 핸드폰과 현금들만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그 헌 핸드폰 임자가 자기가 운동장에 있는 시간에 자기 핸드폰을 쓴 사람이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기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가람이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들으신 교장, 교감선생님은 당연히 크게 노하셨고, 퇴학을 시키라 하시는 것을 간신히 사회봉사로 끝내었던 것이다.

 “선생님, 이번은 정말 제가 하지 않았어요. 정말 억울해요.”

 가람이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 눈물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 선생님 학급의 도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으로 가람이가 했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기에 그의 모든 행동들이 의심스러웠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의심스럽고, 가끔씩 저항적인 눈빛을 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래. 틀림 없어. 이번의 범인도 이놈일거야. 가람이에게 가지고 있던 한 가닥의 기대도 나는 몽땅 버려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 선생 앞에서 형태가 꾸중을 듣고 있는 걸 보았다. 내가 자리에 앉으니 조선생이 미안한 얼굴로

 “엄 선생님, 이거 어쩌죠. 어제 이 놈이 글쎄 집에다 지갑을 놓고 왔대요.”

 나는 가람이 얼굴 볼 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 번 의심하기시작하면 그 의심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심 생 암귀’의 고사가 문득 생각났다. 하나의 사건만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일은 교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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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차 한 봉지

수필/교단일기 2007. 4. 5. 09:00

<교단일기>

쌍화차 한 봉지

淸羅 嚴基昌
 월요일 아침. 안개 자욱한 만년교를 건넜다.  오늘 아침 유성은 안개도시다. 갑천에서 일어난 몽롱한 안개가 빌딩을 덮고, 가로수들을 덮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가려 버렸다.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개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안개가 주는 축축함이 싫다. 기분마저 축축해져서 마음이 나른해지고, 아무 것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침부터 가라앉은 마음으로 교무실을 열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자그마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할 때까지는 분명 없었던 물건이다. 궁금한 마음으로 종이뭉치를 풀었다. 그리고 피식 웃고 말았다. 쌍화차 한 봉지였다. 남학생의 솜씨임을 금방 알 수 있는 투박하지만 정성껏 싼 종이뭉치에서 나온 것은 쌍화차 한 봉지였다. 차 봉지 위에는 서툰 글솜씨지만 따스한 마음이 내비치는 글 한 구절이 붙어 있었다.

 “피로하실 때 드세요. 음… 물은 종이컵의 이분의 일 정도 넣었다가 조금 맵다 싶으면 물을 조금 더 타서 드세요. 다방에서 파는 쌍화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찹니다. 3학년 8반”

 즉시 따뜻한 물에 차를 타서 마셨다. 조금씩 눈을 감고 음미해가며 나는 그 아이의 정성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전달했으리라. 남모르게 수줍게 가져다놓은 순수한 마음이 싸아한 쌍화차 맛 속에서 상큼한 맛으로 떠돌았다.

 누구의 정성인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묻지 않았다. 구태여 몰래 가져다 놓은 아이의 마음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때를 묻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정성이 칙칙한 아침의 내 기분을 환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까? 나의 말 없는 이 감동과 고마움이 그 아이에게 전해질까?

 세상은 공교육을, 그 속에서 커 가는 아이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는 한 이 아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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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웃음

수필/교단일기 2007. 4. 4. 09:00

<교단일기>

빼앗긴 웃음

淸羅 嚴基昌
  "선생님 저 어쩌면 좋아요? 정말 미치겠어요.”

 마지막 모의고사를 마치고 자가 채점표를 걷어 교무실로 들어서자, 만섭이가 황급히 따라와 죽는 표정으로 호들갑을 떤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만섭이가 어두운 얼굴이 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만섭이는 2학년 때까지 학급의 반장을 했고 성품도 쾌활했던 아이였다. 그러던 것이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어머님의 부탁으로 반장을 출마하지 않았고, 반장이 되지 못했다는 허전한 마음속에 치렀던 첫 모의고사에서 형편없는 성적이 나오자 모든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행여나 하고 기대했던 두 번째 모의고사마저 실패하자 얼굴에 그늘이 들어앉기 시작했다.

 “야 임마. 네 선배들도 다 실패를 딛고 컸어. 사내놈이 죽는 얼굴하고는. 너를 믿어. 자신감만 얻으면 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나의 이런 격려도 세 번 네 번 모의고사를 실패하자 약발이 떨어졌다. 이렇게 슬럼프에 빠졌던 학생이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만섭이에게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얼굴은 자꾸만 우울해지고. 그 때부터 만섭이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교 자습을 빠지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해 보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내 교직 경험들을 총동원한 어떤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 독서실에서 공부한 후 치른 시험 성적은 오히려 형편없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여름방학 특기적성 수업을 빠지고 지리산 기숙학원에 가서 한 달간 공부해보겠다고 했다.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얼굴의 그늘이나 걷고 오라고 허락했더니, 조금쯤 밝아졌던 얼굴이 2학기 첫 모의고사에서 실패하자 완전한 낙담으로 변해버렸다. 그때부터 자격지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여 친구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섭이의 의식은 작아져서 작아져서 완전한 난쟁이가 되어버렸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굴뚝 위에서 달나라를 향해 공을 쏘아 올리는 난쟁이처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기 보다 자꾸만 도망하려고 하였다.

“만섭아,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시험에 최선을 다하자. 네가 노력한 만큼 나오는 그 성적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내 무능이 정말 싫다. 잎도 피지 않은 초3월 3학년에 올라와서 잎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다시 단풍으로 물들었다 떨어져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한 길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 아이들. 피 끓는 청춘을 교실에 가둬두고 그 어떤 유혹에도 초연하며 구도자 같은 금욕의 생활로 보낸 1년.

 수학능력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다. 11월 5일 저녁, 우리 아이들과 만섭이의 얼굴에 빼앗겼던 환한 웃음이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청라

거짓말

수필/교단일기 2007. 4. 3. 09:00

<교단일기>

거 짓 말

淸羅 嚴基昌
 ‘오늘은 우리 아이들에게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 말아야지. 칭찬을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어야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내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결심을 한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그 결심을 어기고 말았다.

 추석 다음날이라 학교로 향하는 거리는 한산했다. 세상을 가리고 싶은 안개만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날은 자습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으리라. 한창 기운이 솟을 나이에 앉기만 하면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연휴 중에도 등교해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이 가엾게 생각되었다.

 학교로 들어서는데 안개 속에서 혁이가 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서서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어라, 저 놈 왜 집으로 가지? 어디 몸이 아픈가? 나는 마음속으로 걱정을 하였다. 워낙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라 추석에 제사를 지낸다고 무리를 하였으리라 생각했다.
 
 자습 시작종이 울리고 출석 체크를 하기 위해 교실로 갔다. 다른 날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혁이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출석 체크 후에 자리를 비운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야지.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았는데 웬만하면 등교하여 자습을 하라고 권해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선생님, 저 혁인데요. 여기 시골이걸랑요. 오늘 아침 출발하는데 한 두어 시간 늦을 것 같아요.”

 참으로 능청스런 거짓말이었다.  아마 아침에 교문을 나오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깜빡 속고 말았으리라.

 “거기 시골 어딘데? 오늘 아홉 시까지 나오라고 했잖아.”

 “ 저도 일찍 오려고 했는데요. 엄마가 아파서 못 일어나서 늦어졌어요.”

 멀쩡한 어머님까지 아주 환자로 만들고 있었다. 좀 더 놀아줄려고 하다가 나도 모르게 열이 뻗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야 임마. 너 빨리 못 와. 아침에 교문 밖으로 나가는걸 보았는데 언제 벌써 시골에 갔어? 잔말 말고 빨리 와. 오는 대로 나한테 들려.”

 8분쯤 후 혁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얼굴이 사색이 다 되었다. 죄송한 마음을 얼굴 가득 떠올리면서도 제 2탄 거짓말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 책을 가질러 갔었는데요, 배가 막 아파서 잠깐 누웠는데요, 깜빡 잠이 들었지 뭐예요. 그래서 그만……”

 나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근엄한 표정으로

 “엎드려 뻗쳐”

 기어이 종아리 몇 대를 때리고 말았다. 아침에 굳게굳게 맹세한 결심은 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어른들 사회가 거짓말이 만연된 사회인데 아이들에게만 정직하라고 권할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좀 더 의연했으면 좋겠다. 맑은 샘물이 되어 혼탁한 이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정화시켰으면 좋겠다. 아이들마저 혼탁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하루를 닫으며 하는 고백이지만, 늘 엄격함으로 포장된 내 마음속에서 아직까지 너희들이 밉지는 않다.

posted by 청라

닭서리

수필/서정 수필 2007. 3. 11. 23:51

닭서리


淸羅 嚴基昌
 얼마 전 고향 친구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끼리 저녁이나 먹으려고 하니 시간 있으면 참석해 달라 한다. 일 년에 몇 번씩은 방문하는 고향이지만 도회에 나와 살면서 고향을 생각하면 늘 솔바람소리, 뻐꾸기 울음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친구들은 거의 떠나고 없지만 눈을 감으면 친구들의 얼굴은 늘 거기에 있고, 어릴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보석처럼 간직되어 있는 곳이기에, 타향의 거리를 헤매다가 외로움을 느낄 때면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늘 심심하지 않고 즐거웠다. 봄이면 얼음 풀리는 도랑에 나가 가재를 잡아 구워 먹고, 여름이면 냇물에 나가 미역을 감으면서 수박이나 복숭아 서리 할 음모들을 꾸몄다. 별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도 마냥 재미있어 깔깔거렸다. 가을이면 남의 밤나무 밑을 어정거리다 쫓겨 달아나기도 하고, 겨울이면 토끼몰이를 한다고 온 산을 헤매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겨울밤 우리 조무래기 7, 8명은 친구 집에 모였다.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그 친구의 부모님께서  부산에 가고, 남매만 달랑 남아 밤이 무섭다고 하기에 집도 보아줄 겸 신나게 놀아보자는 계획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가며 귀신 이야기도 하고, 윷도 놀고, 베개 싸움도 하다가 열 한 시가 넘어가자 입이 출출해졌다. 생고구마를 깎아 먹어도 동치미를 꺼내어 먹어도 우리들의 허기증은 가시지 않았다. 한 친구가 은밀하게 닭서리를 하는 게 어떠냐고 하였다. 아무도 망설이지 않고 재미있겠다고 눈을 반짝거렸다. 가위 바위 보로 닭을 잡아오는 행동대원을 3명 뽑고, 2명은 닭을 잡고, 나머지는 물을 끓이고 양념을 준비하는 조로 나누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지 물 끓이는 조에 뽑혔다. 행동대원으로 뽑힌 친구들이 밖으로 나간 지 한 시간쯤 지나 큰 닭 두 마리를 잡아왔다. 우리 작은 악당들은 약간의 두려움으로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며 닭을 죽인 뒤에 이미 끓여놓은 물에 담갔다가 닭털을 뽑았다. 내장을 꺼내어 간이나 콩팥 등의 먹을 수 있는 내장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으슥한 땅에 묻었다. 무슨 요리사라도 된 듯이 마디씩 지껄이는 말들에 따라 마늘도 넣고 파도 넣고 그냥 푹 삶아 소금을 찍어 먹었다. 어설픈 요리솜씨임에도 우리들의 시장기는 순식간에 닭 두 마리를 뼈만 남겨놓았다. 새벽녘 헤어질 때 우리는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처럼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잡고 이 비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집에 돌아와 살풋 잠이 든 듯한데

 “아이고 우리 닭. 아이고 우리 닭”

 어머님께서 외치시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벌써 새벽이 되어 날이 부옇게 밝았다. 닭장에 뛰어가 보니 큰 닭 두 마리가 없어졌다.

 “나쁜 놈들, 약아빠진 놈들……”

 이제 와 생각하니 친구들이 잡아왔을 때 왠지 그 닭들이 낯익었던 듯도 하다. 그런데 우리 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 닭서리 하다가 발각되어도 자기 아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어쩌려고 하는 고 놈들의 속셈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지만 이제 공범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같이 걱정하고 있는 아들이 범인인줄도 모르고 분해 펄펄 뛰시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 고향은 쓸쓸해 졌지만, 허전할 때면 가슴 설레고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