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 노을

 

계족산 노을

마음 시린 날 저녁

계족산 정상에 서면

어린 날 봉숭아꽃

지천으로 날리는 하늘

계룡산 넘어가는 햇살 속에 번진

하늘의 미소가

용화사 저녁 종소리와 만나

환한 웃음으로 핀다.

성벽의 이끼마다 얼룽이는

노을에 몸을 담그면

삶은 허허로운 바람 같은 것

눈물 많은 사람들 꿈밭을 덮어주라는

어머님 손길같이 따스한 홑이불 하나

하늘의 음성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고향

 

고향

아이들 웃음소리

넘쳐나던 고샅 머리

밤하늘 별빛 새는

까치집 위의 적막

남가섭암 목탁소리만

다독이고 있구나.

posted by 청라
 

아내에게

― 생일을 축하하며

아내의 향기는

청국장 맛이다.

하루의 눈금 위를 초침처럼

수없이 더듬으며

가문 날에도 흠뻑 젖어 있는

당신의 손은

나이보다 더 많은 주름살로 덮여 있다.

식구들 생일은 꼼꼼히 챙기며

자기의 생일은 잊어버리고

신 새벽 아이들 아침 준비로

미역국도 굶은 아내여

생활의 아픈 멍울 가슴으로 싸 안으며

얼굴엔 항시 햇살 같은 웃음으로 집안을 밝혀

바라보면 고향같이 편안한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일곱 살 철부지가 되지만

오늘은

소중한 줄 몰라서 더욱 소중한

단풍이 곱게 물든 당신의 가을 가슴에

장미꽃 한 다발 안겨주리라.  

색색의 눈빛으로 말하는 꽃들의 눈짓에 담아

마음속에 묻어 둔 사랑의 촛불을 밝혀

내가 지워 준 생활의 짐을 벗기고

웃음 속에 내비치는 외로움의 그늘을 지워 주리라.




posted by 청라

대청호 낚시질

 

대청호 낚시질

놓아두고 간 그리움들이

물이끼로 돋아올 때쯤


호심에

줄을 던지면

삭지 못한 아픔들이 입질 하네.


물비늘 반짝이는 옛집 마당에서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건져올리고


진달래꽃 낯붉히던

이웃집 누이의 속마음도 건져올리고….


짐을 싸들고 뒤돌아보며

돌아 나설 때

안타깝게 손 흔들던 느티나무 언저리


고향은 거기 가라앉아서

천 년 산 그림자로 굳어 있네. 

posted by 청라

마곡사

 

      마곡사

      연

    화  교

  건 너 서 면

솔바람 풍경소리

     향내

   서    린

  잎 새 마 다

불경 소리 담겨 있고

      법

    계  를

  지키고 서서

침묵하는 오층석탑


깨어진 돌부처에

염화미소 어리인 땅


잠 못 드는 노승의

천수경에 달은 지고


불심은 태화천에 녹아

사바세계로 흐른다


posted by 청라

공주(公州)에서

 

공주(公州)에서

친구여!

막걸리 몇 잔에 취해 별을 줍던

금강 변 백사장엔 오늘도 별이 내리느니.


가을이 석양빛 꽃물로

곱게 물들인 산성공원 오솔길로는

영은암 종소리가 늦바람으로 달려가느니.


몸이 떠나 삼십 년

마음마저 멀어져

목소리 아득한 나의 친구여


다시 금강 변 모래밭에 서면

그리운 모습들 보일 듯하여

갈바람 갈피에 숨어 찾아왔더니


강물은 어제처럼 흘러가는데

정다운 얼굴들 보이지 않네.


知天命 지나보낸 우리 나이에

무슨 더 큰 욕심 있으랴.


추억이 곱게 접히는 밤에

다시  어깨동무하고 막걸리 집 찾아

흥청거리며 걷는 발길엔


스물 다섯에 놓아두고 간

우리 젊음이

프라타너스 잎사귀처럼 지천으로 밟히리.

posted by 청라

목숨

 

목숨

저 그늘 외로운 길

햇살 따라 가다 보면

수줍게 입을 벌린

진달래꽃 한 이파리

한겨울 딛고 일어선

여린 목숨 하나.


산 빛 아직 익지 않은

초 삼월 바람 속에

목청 돋워 봄 부르는

등대로 피었느냐

한 모금 물빛 향기로

세상 밝히는 목숨 하나.

posted by 청라

기다림

 

기다림

막차는

휭 하니

바람만 뿌리고 지나간다.


가슴속에서 무너지는

섬광 하나


건너 뜸 개 짖는 소리

몸을 떠는 늦저녘 달

posted by 청라

눈 내리는 마을

 

눈 내리는 마을

세상으로 나가는 문들은

닫혀 있었다.

흰 산도라지 꽃 몽롱한 산자락마다

마지막 푸른 목청이 덮이고,

강물은 더 깊은 울음으로 우는데

솔가지 부러지는 산울림 끝에 심지 하나 박고

촛불을 켠다.

살갗마다 일어서는 빛이랑, 외로움이

붉은 포도주 한 잔에 녹아나고,

산마을 밖 두고 온 그리움 눈 속에 묻으면서

참나무 울타리 잎새 떨며 우는 바람에

아우성치는 세간의 정들 먼지처럼 날리리라.

칭얼대며 유리창 두드리는

송이 눈에

어제 일들 깨끗이 털어버리고,

혼자 마시는 술잔 가득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 목구멍 속에 구겨 넣어도

잠깐 취기처럼 아득한 세사의 뿌리들이

덮어도 덮어도 지울 수 없는 댓잎으로

돋아나는데

아무도 넘어오지 않는 회재 고개 너머로

오늘 잠시 떼어놓은 이름표를 달고

내일은 또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산나리꽃


때로는

혼자일 때가

더 외롭지 않을 수도 있다.


닿을 수 없던 한 뼘만큼의 눈물

꽃술 속에 감춰두고


민들레 꽃씨처럼 그리움의

날개를 날려

한 송이 수줍은

산나리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바람이 밟고 가는 나뭇잎 소리에

가슴 설레며

사랑하는 마음

몰래 피었다가 몰래 떨어지는

산나리꽃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