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시/제3시집-춤바위 2014. 1. 30. 04:55

첫사랑



첫사랑은 늘

누런 코 훌쩍이던 일곱 살

코찔찔이 시절에 온다.

삘기를 뽑아도

찔레를 꺾어도

엄마 얼굴보다 먼저 아른거리던

마을 누나의 얼굴은

매운 세월의 바람 속에

덧없이 시들었다가

인생이 저무는 예순 살 무렵

어느 깊은 산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슬픈 전설을 만나면

아픈 옹이처럼 심박혀

움츠러들었던 그 어린 날 진달래꽃은

불길처럼 피어나

온 산을 물들이라 한다.

모든 것을 빨아먹는

늪인 줄 알면서도

온몸을 던져서 투신하라 한다.

 

2014. 1. 30


<대전문학> 2014년 봄호(63호)

posted by 청라

어느 가을 날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1. 11. 08:51

어느 가을 날

 

회초리를 놓고서

국화꽃을 들고 간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하늘빛을 닮은 가을날에

 

교실 구석엔

아직도 오지 못한 한 아이의 자리

어둠에 묻혀 있고

 

일찍 들어선 겨울이

군데군데 눈처럼 쌓여

그림자를 만드는데

 

땡감 맛 논설문을 배울

교과서는 덮어놓자.

꽃물 번져가는 교정의 나무들 꿈꾸는  

무지개 빛깔 시 한 수 읊어보자.

 

국화 향 은은한

시로 닦아낼 수 있는 그늘이

아주 작더라도

 

한 발짝 먼저 나가지 않으면

어떠리.

아이들 마음이 풍선으로 떠올라서

하늘에 닿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2013. 11. 10

 

 

posted by 청라

바다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0. 23. 12:00

바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

 

2013. 10. 23

 

posted by 청라

序詩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0. 12. 22:30

序詩

 

황토 물에 떠내려가는

母國語

한 조리 일어

내 시를 빚었다.

 

거친 모래밭에 피어난

풀꽃 송이들아

 

반딧불로

불씨를 살려

사람들의 가슴마다

진한 香氣의 모닥불을 피워 주거라.

 

2013. 10. 12

posted by 청라

마곡사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9. 30. 07:43

마곡사에서

 

산문(山門)의 천왕님은

아직도 눈을 부라리고 있다.

 

묵언(黙言)의 입 꼬리에

몇 올

밧줄 같은 거미줄 걸고

 

내 다섯 살 여름 무렵 첫 대면에  

불타던 그 화산

아직도 눈빛에 이글거리고 있다.

 

옷을 털고 또 털어도

털어낼 수 없는

업연(業緣)의 질긴 먼지들,

 

쓸쓸히 돌아서서

태화산 그림자에 묻혀

세상도 부처님도 모두 잊으니

 

일체의 업장(業障) 쓸어내듯

마음 속 울려주는

늦여름 매미 소리…….

 

2013. 9. 30

posted by 청라

訟詩 -꽃으로 피소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9. 3. 15:44

訟詩

 

꽃으로 피소서

-이경주 교장선생님 청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산처럼 무거워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러워

쉽게 노하지 않는 사람

 

四十年 가까이 걸어오신 삶의 길에

인연의 줄을 접으며

빛나는 발자취 돌아보는 뒷모습에

은은한 솔향기가 풍겨옵니다

 

포연으로 일그러진 전쟁 통에 태어나

황량한 고국의 뜰을 일구어

묘목을 심고 정성스레 가꾸기에

당신의 손길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나무들은 건강히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당신이 가꾸신 이 조국은

세계 속에 우뚝 솟은 거목이 되었습니다.

 

긴 항해 끝에 닻을 내리고

이제는 돌아서야 할 시간

멈추어서 더욱 빛나는 당신을 향해 비오니

새로운 걸음걸음 꽃으로 피소서.

 

 

posted by 청라

풀의 나라

시/제3시집-춤바위 2013. 8. 8. 08:54

풀의 나라

 

그 섬에 가 보니

거기도 온통 풀밭이었다.

풀 중에 뽑힌 것도

역시 잡초였다.

 

풀들의 시선은

온통 아래쪽으로 기울어 있다.

내 땅 한 뼘 더 늘리려고

촉수를 뻗어 어깨 싸움에만 골몰해 있다.

 

나무는 싹 틀 때부터

하늘 향해 뻗고 있는데

하늘 향한 용틀임은 기억에도 없는

저 풀들의 가난한 꿈

 

미래를 향한 이상도 없고

과거의 썩은 것들만 파먹고 사는

풀의 나라에 가서 나는

부끄럼 모르는 풀밭에

 

눈물 한 방울을 떨구어 주었다.

 

2013. 8. 8

posted by 청라

<송시>

향 맑은 옥돌 같은 당신을 보내며

            -오명성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당신 곁에 서 있으면

산골짜기 굽이쳐 돌아 폭풍처럼 달려가는

힘 센 산골 물소리 들려옵니다.

아이들 위해 가야 할 길을 갈 때에는

험한 산봉우리 완강한 바위도 뛰어넘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당신은

의지가 강한 산골 물입니다.

 

당신 곁에 서 있으면

평야를 유유히 흘러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가슴 넓은 강물소리 들려옵니다.

같이 걷는 사람들과 손잡고 갈 때에는

눈보라 칼바람에도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 안고 함께 가는

당신은

포용력이 강한 강물입니다.

 

한평생 달려온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보면

민족의 어두운 새벽에 촛불을 들고

한 올 씩 꺼져가는 불빛을 키워

당신의 걸음 따라 아침이 오고

힘없던 조국은

세계를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당신의 흐름은 이제

바다에 닿았습니다.

당신이 담아온 풀 향기와 도시를 흐르며 거느린

수많은 이야기들도

이제는 닻을 내렸습니다.

향 맑은 옥돌 같은 당신을 보내며

아쉽게 손을 흔들며

우리도 당신을 닮은 향내 품은 물로 살겠습니다.

 

posted by 청라

민들레 편지

시/제3시집-춤바위 2013. 4. 30. 08:44

민들레 편지

 

현충원에 가서 잡초를 뽑다가

어느 병사의 무덤에서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를 보았다. 

바람도 없는데

무덤 속 간절한 절규가 솟아올라

북녘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따뜻한 사랑 한 포기

싹 틔울 수 없는 툰드라의 언 땅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의 소망이 싹틀 수 있도록 

반백 년 넘게 땅 속 깊이 묻어

발효시킨

저 병사의 피 맺힌 염원과  

‘함경도’

소리만 들어도 눈물 흘리시던

내 할아버지의 슬픔,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에

담아 보낸다.

내년 민들레꽃 피기 전까지 

굳게 동여맨 민족의

허리띠를 풀자.

 

2013. 4. 30

posted by 청라

외돌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24. 08:36

외돌개

               -제주 詩抄2

 

누군가 환청처럼 부르는

소리를 따라

서귀포 칠십 리 해안선 길을 걷다가

 

기다림으로

하반신이 닳아버린

외돌개, 그 처절한 외로움을 만나다.

 

삶이 때로는

슬픈 무늬로 아롱질 때도 있지만

동터오는 아침 햇살로 반짝 갤 때도 있으련만

 

외돌개야!

빠지다 만 몇 올 머리카락 신열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주름진 피부 골골마다

소금기로 엉겨 녹지 않는

진한 통증을 안고

 

먼 바다를 응시하는 눈망울엔

아직도 무지개처럼 영롱한

꿈이 어렸다.

 

외로움을 보석처럼 깎고 다듬어

메마른 가슴에

해당화 한 송이 피울 날을 기다리며

 

갈매기 소리에도 귀를 막고

혼신의 힘을 다해 파도 소리로 부서지는

할머니 옆에

 

나도, 문득

자리를 펴고

하나의 돌이 되고 싶었다.

 

2013. 3. 24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