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푸념

시/제3시집-춤바위 2011. 9. 2. 14:50

교사의 푸념 

 

아침에 교문을 들어설 때에

“안녕하세요?”

인사 한 마디에 꽃등처럼 환해지는

하루의 예감

 

아이들 웃음을 마시며 사는

나의 예순은

아버지의 예순보다 이십 년은 아름답다.

 

어느 화단에 가면

우리 아이들보다

더 빛나는 꽃이 있으랴.

 

“이놈들!”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위엄을 부려 봐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에

결국은 허물어지는 내 안의 성城

 

울타리 밖에 빙벽을 철판처럼 세우고도

가슴 속엔 불꽃을 심어 키우며

“선생님, 아파요.”

얼굴만 찡그려도 가슴이 덜컥하는

나는 천생 선생인가보다.

 

2011. 9. 2

 

posted by 청라

변신變身

시/제3시집-춤바위 2011. 5. 22. 09:16

변신變身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오월, 상수리나무

목청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서는

물안개처럼 몽롱한 연둣빛 속살이

언뜻언뜻 보인다.

 

단풍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산기슭 올라가는 바람의 꽁지에서는

빛살의 창을 모두 거두고 서해로 투신하는

태양의 열정이 타오르고

 

겨울!

눈보라 몰고 가는 바람의 날개에서는

죽음보다 더 깊은 침묵의

하얀 정적,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바람에는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2011. 5. 22

posted by 청라

빈 마을 2

시/제3시집-춤바위 2011. 5. 15. 11:31

빈 마을

2


 

장다리골엔 봄이 왔어도

장다리꽃이 피지 않는다.

 

아이들 웃음소리 묻어나던

공회당 깃대 끝엔

찢어진 깃발처럼 구름 한 조각 걸려있고,

 

사립문 열릴 때마다 문을 나서는 건

허리 굽은

바람…….

 

장다리꽃 기다리다 지친

나비는

움찔움찔 떨면서 경운기 뒤를 따라간다.

 

뒷산 산 그림자 멈춰 서서

시간이 늦게 흐르는 마을,


2011. 5. 15

posted by 청라

빈 마을

시/제3시집-춤바위 2011. 4. 24. 07:43

빈 마을

 

심심한 까치가

호들갑스레 울다 간 후

 

느티나무 혼자 지키고 선

빈 마을의 적막,

 

바람의 빗자루가

퀭한 골목을 쓸고 있다.

 

사립문 굳게 닫힌 골목의

마지막 집에


하염없이 머물다 가는

낮달의

창백한 시선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

살구꽃 꽃등은 타오르는데…….

 

2011. 4. 24

 

 

 

 


posted by 청라

대보름달

시/제3시집-춤바위 2011. 2. 20. 22:19

 

대보름달



껍질을 깎을 것도 없이

날 시린 바람의 칼로 한 조각 잘라 내어

아내의 생일상에 올려놓고 싶다.


한 점 베어 물면

용암처럼 뜨겁고 상큼한 과즙(果汁)이 솟아나리.


이순의 문턱에서

검버섯으로 피어난 속앓이를 씻어줄

대보름달 같은 웃음을 보고 싶다.



2011. 2. 18

posted by 청라

버려진 그릇

시/제3시집-춤바위 2011. 1. 26. 21:23

 

버려진 그릇

-도천 선생 그릇 무덤에서

 


바늘 자국만한 흠 하나로도

나는 온전한 그릇으로 설 수 없었다. 


삼천 도의 불가마에서

온 몸이 익어가는 통증 속에서도

다향으로 목 축일

작은 꿈 하나 있어 정신을 놓지 않았다. 


가마를 나와 탯줄도 자르기 전에

눈 뜨고 응아 한 번 울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무덤에 버려졌다. 


찻물 한 모금 담아보지 못하고

그릇도 아니고 흙도 아닌

제 살 조각도 맞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람들은 지나가며

안쓰런 눈으로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흠들 


저 많은 흠을 두르고

어찌 사람이라고 살아가나? 


아, 하느님은

도공보다 너그럽다.


2011. 1.25


 


posted by 청라

<신년 축하 시>

 

염원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엄 기 창 

 

제야(除夜)의 종소리로 새해를 빚습니다.

신묘년(辛卯年)년의 태양이

한반도의 어둠을 쓸어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의 겨울은 참으로 추웠습니다.

땅 밑에서 고동치는 봄의 온기(溫氣)를 불러내어

상처 입은 가슴들에

연둣빛 새살을 돋게 하소서.

 

포격(砲擊)으로 일그러진 연평도 산하와

황운(黃雲)이 짙게 피어오르는 국토의 골골마다

비둘기의 은빛 날개로 덮어 주시고

북녘 땅 이리들의 날 세운 발톱에

강인한 족쇄(足鎖)를 채워 주소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깨동무로 걷는 법을 잊었습니다.

정치의 마을엔 상생(相生)의 도(道)가 사라지고

경제의 마을에선 공생(共生)의 원리도 무너졌습니다.

 

윤리(倫理)의 깃대는 부러지고, 깃발은 찢어져

신문의 칸칸마다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끼니를 걱정하던 60년대부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입니다.


온 세계의 하늘을 향해 다시

염원(念願)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계룡산이 주위의 산들과 어깨동무로 노래하고

금강물이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흐르듯

새해에는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2011년 1월 1일 아침

<금강일보> 신년 축하시  

 

 

 

 

posted by 청라

원가계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0. 11. 4. 08:10

원가계에서

 

신선도를 보고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posted by 청라

독도3

시/제3시집-춤바위 2010. 4. 7. 10:10

독도3

 

 눈을 뜨고 잔다.

 

파도에 갈리어

반달만큼 남았어도

 

대양을 막아선

저 완강한 등…….

 

 

posted by 청라

봄비 오는 날

시/제3시집-춤바위 2010. 3. 31. 11:04

봄비 오는 날

 

           엄 기 창

 

 

봄비 오는 날

빗소리에

한 사람 목 맨 부음이 묻어오고

 

매화꽃은 한

봉오리씩

겨울 떨치고 피어나는데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3월의 눈발들이 핏기 잃은 가지마다

날선 눈꽃으로

숨을 막아도

 

멍든 아픔 삭혀

꽃등 환하게 일어서는 매화

 

아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