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왕사

수왕사


향냄샌가

숨을 크게 들이쉬면

나무 냄새


독경 소리인가

귀를 쫑긋 세우면

바람 소리


단청을 지우고

사바로 통하는 길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한 파람 남겨두어


모악산 제일봉에

내려왔던 부처님

간절한 발원發願 소릴

제일 먼저 듣는 절

 

 2015.  2.  27

 

posted by 청라

행복

행복



아내의 칼 도마소리는

기도이다.


기도의 울림으로 더욱 고요로운

창가에 앉아

찻잔에 햇살을 풀어 마시면 


아파트 정원수 흔들고 달아나는

바람소리도

대숲 바람소리로 들을 수 있다. 


창밖 먼 산 초록빛이

봄을 이고 달려와 가슴에 안긴다. 


봄하늘로 나른한 눈을 헹구고

아내를 바라보면

새싹처럼 돋아나는  행복 


아내가 거기 있어서

집안은 늘 따뜻하다. 



2015. 1. 12

posted by 청라

대청호 가을

대청호 가을


물빛이 하늘을 닮아

한없이 깊어지는 가을 무렵에

다섯 살 손자 놈 손목을 잡고

대청호 풀숲 길을 걷고 있었다.

생명의 음자리표가

점차로 낮아지는 길모퉁이에서

사마귀 한 마리 마지막 식사를 하려고

두 발로 메뚜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메뚜기 죽는다고

팔짝팔짝 뛰는 손자 곁에서

인과의 어두운 그늘이 고 놈에게 드리울까봐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무서워 지르는 손자의 외마디에

깜짝 놀라 눈을 돌리니

사마귀의 강인한 턱이 메뚜기 머리맡에 다가와 있었다.

자연의 바퀴 속에서 생명은 피고 지지만

업연의 짐을 피하기 위해

눈앞에서 한 생명을 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손자 놈 어려울 땐 메뚜기 제가 도와주겠지.

손등으로 사마귀 머리를 탁 치니

메뚜기 신나게 풀숲을 뛰어갔다.

메뚜기의 등 뒤로 저녁 햇살이 모여들었다.

어둠이 가장 두꺼운 대청호 깊은 곳, 내 마음밭에는

하늘의 밝은 별이 내려와 반짝이고 있었다.


2014. 12. 19

<시문학> 2015년 2월호

posted by 청라

후회

후회


      엄  기  창


아침노을 붉게 물든

하늘 한 자락 오려다가

어머님 주무시는 아랫목에

깔아드리고 싶어라.

찬바람 눈보라가 문풍지에 매달려서

밤새도록 으르렁대는 겨울밤에도

어머님 이불 속만은 고운 꿈 피어나게.

이순 넘어 깨달으니 너무 늦어버렸어라.

아침마다 노을 곱게 피어도

덮을 사람 아니 계시네.

아프고 서러운 시절 눈물만 보태드리고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그 시절 다시 오리.


2014. 12. 16

posted by 청라

눈꽃

눈꽃


계룡산 등산 길에

온 산 가득 핀 눈꽃을 보았다.


함께 견딘 세월이

나무 가지마다 수많은 이야기로 꽃눈 틔워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저 우렁찬 침묵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나는 알겠다.


봄날 능선마다 연분홍 꽃으로 노래하고

여름에는 초록빛 잎들 흔들어 바람 불러오고

가을에는 무지개 빛으로 온몸을 불태운 것이

저 무채색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한 몸짓이었음을


오!

차가워서 더욱 눈부신

나의 여신이여!


가까이 다가가서

따뜻한 입김을 전하면

눈물처럼 녹아내리는 먼 나라의 공주여!


눈꽃이 봄날의 꽃들보다 

아름다운 것은

투명한 햇빛마저 튕겨내는 고고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봄꽃들은 나무마다 같은 몸짓을 하고 있는데

눈꽃은 같은 나무라도

가지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로 피어나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가지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고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가지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고


이윽고 가지마다 나무마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화음을 이뤄

온 산이 우렁우렁 노래하는 것이 아니냐.


산을 오르다 말고 나는

눈꽃들의 합창에 취해

홀린듯이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2014. 12. 15

<시문학> 2015년 2월호



posted by 청라

맹방 앞바다에서

맹방 앞바다에서

 

 

때로는 삶의 조각들 헝크러진 채

그냥 던져두고

입가에 미소 번지듯 가을이 물들어가는

산맥을 가로질러 와

대양과 마주 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있는 힘껏 키워 돌진하는

저 바다의 거대한 남성

수만 번 부딪쳐 피워내는 파도 위의 포말

예순네 살 침묵하던 나의 젊음이

용틀임하며 끓어오르는 힘줄을 보았다.

맹방 백사장에서 술에 취해

바다를 향해 오줌을 갈기면

천 년의 수로부인도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는 희미한 달빛

밤내 아우성치는 원시의

바람을 모아

한 송이 해당화를 피워놓았다,

 

 

2014, 10, 13

<대전문학>67호(2015년 봄호)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돝섬

돝섬

 

 

황금 돼지 끌어앉고

복을 빌지 말자.

 

돝섬은

복을 받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가진 것 버리고 버려

마침내 피부 속에 낀 녹까지 다 닦아내고

 

남쪽 산기슭

대양으로 가는 길목에

허허한 바위가 되기 위해 오는 곳이다.

 

머리 위에 갈매기

리본처럼 얹은 채로

 

섬에 뿌리 내리고

자연으로 숨쉬다가 가는 곳이다.

 

 

2014, 9. 28

"대전문학' 66호(2014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잠 못 드는 새벽

잠 못 드는 새벽

 

 

사십 년 삶의 그림자에

손 흔들고 돌아설 때에

모든 것 다 놓고 온 줄 알았네.

 

새벽에

문득 잠 깨어

열린 창으로 비치는 달을 보니

 

웃음 해맑은 아이들

얼굴 따라와 있네.

바람소리인가, 아이들 목소리도 들리네.

 

다시 잠을 청해도

까르르 까르르

어두운 방 안 가득 피어나는 꽃들

 

손바닥 맞은 놈들

손 다 나았을까,

무슨 욕심으로 마지막까지 그리 때렸을꼬!

 

잠 못 드는 새벽에

다시 헤아려보니

다 버리고 온 줄 알았는데

실은 하나도 버리지 못했구나.

 

 

201495

'대전문학' 66호(2014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