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를 보며

 

 

저렇게 익을 대로 익었으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게다

늦가을 천둥이 울다가 가고

눈보라가 서너 번

흔들고 가도

그믐달처럼 한사코

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게다

 

저렇게 삭을 대로 삭았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게다

산다는 게 때로는 시들해지고

아픔이 술래인 듯

잡으러 와도

고목처럼 봄이면

싹을 틔우는 이유가 있을 게다

 

 

 

 

 

 

posted by 청라

남자

남자

 

 

남자는 교목喬木처럼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높이 올라

세상을 넓게 보고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굽히지 않고 뚝심 있게 나아가야 한다

 

끊임없는 정진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크게 세우고

 

백 사람이 백 말을 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역사의 입이 두려워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끝까지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posted by 청라

명량의 아침

 

 

아직도 그 때 그 목소리로

바다가 우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라가 요 모양 요 꼴로

저희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저 소용돌이치는 운명의 물살에

배를 띄우랴

 

남도의 피는 천년을 한결같이

황토 빛깔인데

 

열두 척의 배는

철쇄로 단단하게 묶여있구나

 

동녘 바다에 해가 떠오른다

잠 못 들고 서서 새우는 충무공의

칼을 빌려

불의를 자른다 큰 외침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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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사랑

시/제7시집 2023. 4. 8. 22:27

프리즘 사랑

 

 

마음의 굴절을 재어본다

 

아내여

네게로 가는 내 사랑은

보라 빛깔이다

 

단파장이라서

언제나 망설임이 없다

 

가장 빨리 꺾여서

너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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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사람

 

 

충청도 사람은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 말을 하고

경상도에 가면 경상도 말을 한다

 

밸도 없다고 욕하지 마라

충청도 사람은 진짜다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

자기들 끼리만 붙안고 사랑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허리를 굽혀

모난 손들을 하나로 모을 줄도 안다

 

타고난 피 빛깔이

황토처럼 붉은 색이 아니고

동해바다처럼 푸른색도 아니라서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적 청이 한반도의 테두리 안에서

함께 어우러진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

 

경부선과 호남선이 충청도에서 만나

하나가 되듯

다 같이 손잡고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가자

 

 

posted by 청라

봄날은 간다

시/제7시집 2023. 3. 19. 08:24

봄날은 간다

 

 

절규처럼

홍매화가 피었습니다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들어가는 당신

지난겨울

봄이 오지 않아도 좋다고

세월의 고삐를

소망의 문고리에 굳게 매어 놓았는데

어김없이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향기 따라 봄날이 흘러갑니다

 

posted by 청라

삼월 마중

시/제7시집 2023. 3. 9. 19:27

삼월 마중

 

 

산다는 건 추운 일이다

 

아직 예순도 다 저물지 않았는데

당신의 가을엔 일찍 눈이 내렸다

 

사방으로 쪼그라든 당신의

영혼을 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직 내 청춘의 푸른 설렘은

나비인양 파닥거리는데

당신은 그만 어깨동무를 풀려하는가

 

동백이 피면 겨울을 건너뛸까

아침마다 아리셉트를 챙겨 먹이며

삼월을 마중간다

 

posted by 청라

대보름달 떴다 

 

우리들의 아픈 시간은

해가 지고 나서 다시 달이 뜨는 시간만큼의

잠깐이었으면 좋겠다

불 깡통에서 눈썹 센 별들이

은하처럼 쏟아지는 만큼의 찰나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마음에 둥그렇게 달이 떠오를 때

달집을 사른다

코로나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겨울을 태우고

먹을 것이 없는 마을의 막막한

그믐밤의 절망을 태우고

액운이 깃든 영혼의 저고리 동정을 태우듯

세상의 모든 아픔을 불속에 던져 넣는다

보아라!

망월굿 춤사위 속

그림처럼 살아나는 우리의 산하

먼 산이 검은 그림자 딛고 일어서고

나무들 찬바람 속에서도 분분이 손 흔들어

봄을 부르노니

시대의 밤아 가거라

우리들 마음 가장 높은 곳 어느새 하늘만한

새 정월의 대보름달이 떴다

 

 

 

 

posted by 청라

도자기 무덤에서

 

 

흠 있는 것들끼리 거기 모여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다

 

깨어진 것들끼리 거기 모여서

서로의 절망을 다독여준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은 모르리라

이렇게 어둡고

추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삶의 받침대에

손때 한 번 못 묻히고

 

지옥 불 나오자마자

산산이 깨어진 목숨이 있다는 것을

 

 

 

posted by 청라

징검다리

징검다리

 

 

하나쯤은

이가 빠져 있어도 좋다

 

네가 내게 들어와

삶을 춤추게 하던 그 다리 같이

 

등이 간지러운 시간만큼

설렘이 부풀어 올라

 

그 날 산바람에 묻어오던

뻐꾸기 소리처럼

올 것만 같다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아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