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스승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4. 21:53
 

<訟詩>


    겨레의 스승


              김선회 교장선생님의 전년퇴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올곧은 기개를 지닌 사람


물처럼 부드럽게

바른 곳으로만 흘러 흘러

제자들의 마음도

맑게 씻겨준 사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빛을 세워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묵묵히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돌아보면

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고개를 넘어

당신의 삶의 발자국 점점이 찍힌 길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겨레의 스승입니다.

posted by 청라

난꽃과 아내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1. 14:29
 

난꽃과 아내


난향(蘭香)은

있는 듯 없는 듯 그윽하다.

창틀 위에 난초꽃 한 송이만 피어있어도

온 집안 비었어도 가득하다.


아내는

있는 듯 없는 듯 따뜻하다.

주방 도마에 칼 소리만 또각거려도

온 집안 비었어도 가득하다.

posted by 청라

원가계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2. 08:38
 

   원가계



   봉우리마다 구름이 너울처럼

   산의 얼굴을 가려주고

   골짜기마다 안개는 나삼(羅衫)이 되어

   산의 알몸을 가려주네.


   기봉(奇峰)은 날아서

   학이 되고

   폭포(瀑布)는 떨어져

   은하수가 되네.


   옛날에 신선도(神仙圖)를 보고

   관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오히려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2008. 1. 29

posted by 청라

똥을 묻으며

시/제3시집-춤바위 2008. 1. 28. 20:25
 

똥을 묻으며


똥을 덮는다.

낙엽을 긁어모아

내 삶의 부끄러움을 덮는다.


아무리 묻고 묻어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처럼

묻을수록 더욱 살아나는

지난 세월의 허물들


이순의 마을 가까이엔

담장을 낮추어야 한다.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한다.


무더기 큰 똥일수록

햇살 아래 드러내어

바삭바삭 말려주어야 한다.


posted by 청라

상대동

시/제3시집-춤바위 2008. 1. 23. 10:52
 

상대동



재개발  마을 상대동에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공회당 마당에서

참새들만 농성하고 있다.


서둘러 떠난

빈 집 화단에는

황매화, 수국 꽃나무

꽃망울들이 여물고 있다.


참새들은 알고 있지.

이 마을엔 봄이 오지 않는다는 걸


 

피멍 든 외침만 각혈처럼 떠올라

노을 진 하늘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posted by 청라

유리창을 닦으며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2. 22. 19:26
 

유리창을 닦으며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


산밑 낮으막한 등성이에서

불꽃을 피워 올려

산벚꽃 연분홍으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

온 산을 덮는 봄날의 환희와


비온 날 아침 떡시루를 찌듯

뭉게뭉게 일어나는 골안개로 온 몸을 가렸다가

한 줄기 햇살로 맨살 드러내어

진초록 함성 하늘 향해 이글거리는 여름날의 열정,


늦여름 초록의 밑둥에서 조금씩 배어나와

색색으로 물들였던 산의 간절한 이야기 떨어지고

나무 가지마다 침묵으로 앙상한

저 가을날의 고독


시루봉 이마 하얀 눈으로 덮이고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옅어졌다가

어느새 수묵의 함초롬한 자세로 식어있는

겨울날의 허무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



2007. 12, 23

 





posted by 청라

귀향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1. 13. 09:34
 

귀향


휘파람새 울음을 밟고

돌아가네.

저녁노을 깔린 고갯길 굽이돌아

골어스름 안개처럼 내리는 여울 건너

마실갔다 돌아오는 아이처럼 돌아가네.


집집마다 한 등씩 불이 켜지고,

땅거미 따라 내려오는

남가섭암 목탁소리.

산벚꽃 자지러진 향내를 묻히고

사바의 마을을 닦아주는 천수경 한 자락.


장다리골 너머

초승달은 떠오르네.

달빛아래 몸을 떨며 손 내미는

작아진 산들,


도회의 옷들은 한 겹씩 벗으려네

모든 것 다 벗고

빙어처럼 투명해 지려네.


실핏줄까지 드러나는

어릴 적 마음으로

고향의 품속으로 안겨들려네.


posted by 청라

파계(破戒)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1. 2. 07:36
 

파계(破戒)



암자(庵子)들은 도심(都心)으로 내려오고

부처님 말씀은 그냥 산에 남아있다.


목탁을 쳐봐야

자동차 소리에 가로막히고

불경(佛經)을 외워봐야

아무런 울림이 없다.


어제 밤 몰래 먹은 한 잔 술에 취해

아침 예불(禮佛)도 거른 저 스님아

얻은 것은 풍요(豊饒)를 얻었지만

잃은 것은 도(道)를 잃었구나.

posted by 청라

낙우송

 

낙우송

― 대전고 제자들에게

잎은 비단결처럼 부드럽지만

둥치는

하늘을 떠받들 듯 우람한 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작은 잎새 하나도

서로가 서로를 아껴

기쁨도 아픔도 함께 하는 나무


낙우송아!

그렇게 도란도란 어깨동무하고

폭풍우 눈보라도 함께 헤쳐가거라


튼튼한 가지는

약한 가지를 감싸주고

약한 가지는 튼튼한 가지 밀어주며


얼마 동안 보지 못하면

서로가 서로의 소식을 물어

인생의 동반자로 그렇게 걸어가거라.


 

잎새마다 가지마다

파아랗게 하늘 고이고

햇살 더 환하게 너희들 머리 위에 거느려


새 천년엔

세계를 일구어 가는

기둥이 되거라.


posted by 청라

세월의 그림자

 

세월의 그림자

아름다운 생각만 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세월입니다.

아름다운 것들만 보며 살기에도

부족한 세월입니다.


세상 앞에 서기 전에

늘 마음을 물처럼 맑게 하고

우리가 흘러가는 세월의 갈피에 끼여

같이 흘러갈 때에

스쳐 지나가는 소리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소리만 듣는 귀를 달으십시오.


때때로

사랑하던 것들이 미워질 때에

내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분노와 미움을 걸러내야 합니다.


앞에서 바라보면

푸른 숲 골물소리 그윽한 산을

구태여

뒤에서 바라보며

칼바위 가시덩굴 우거진 산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일생 동안 세월에 떠밀려

떠내려만 가지 말고

세월의 그림자 진 굽이마다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 나가봅시다.


오늘 절망의 늪에 빠지더라도

손놓지 말고 헤엄쳐 나오십시오.

세월 속에 아픔은 저절로 가라앉을 테고

살아보면 정말 살만한 세상입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