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제4부

세월의 그림자



우리가

흘러가는 세월의 갈피 속에

아름다운 일들만 심을 수 있다면

세월의 그림자지는 삶의 일상 속에

낙락장송처럼 당당할 수 있으리.


일월

일어서는 것들은 모두

세월의 앞자리에 모여 있다.

새해의 아침을

까치 소리가 열고 있다.

지난 봄 꽃을 피우지 못했던 매화나무 가지마다

방울방울 매화의 꿈이 부풀고

열매를 맺지 못했던 나무들의 혈관 속에서

작은 함성이 고동치고 있다.

땅 밑에 귀 기울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볼 것이다.

아직도 굳건한 어둠의 어깨 위에서도

연초록 새싹이 함성으로 일어나는 것을.

함성들의 몸짓이

바람의 한 쪽부터 무너뜨리고

조용히 햇살을 불러오는 것을.  

말갛게 씻겨지는 동편 하늘이

사람들의 꿈밭마다 향기로 내려앉으면

일월은

봄이 오는 길목을 열고

우리들의 가슴 깊이 불 지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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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노을

 

현충원 노을

하늘 살 밑

배어드는

피멍울 빛 외침이여


서편 하늘

한 자락이

봉숭아꽃 물들더니


충혼의

울음으로 녹아

온 세상을 덮는다.

posted by 청라

세상 보기

 

세상 보기

꽃도

꽃의 마음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황홀한 몸짓의 장막 뒤엔

말라 시들은 노래도 있겠지


꽃잎을 먹고사는 어둠의 벌레들이

고랑처럼 파 놓은

상처들도 있겠지.


날 선 눈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아름다운 눈으로 보아야

세상은 아름답다.

posted by 청라

사자(死者)들의 외침

 

사자(死者)들의 외침

― 현충원에서

사월이면 묘역마다 피어나는 영산홍 꽃

이름 모를 들풀 아래 아지랑이로 스러진 영혼

한 서린 땅울림으로 방울방울 맺혔다.


목숨 바쳐 지킨 자유 거리마다 넘쳐나서

아들딸아 모르느냐 피멍울 진 저 외침이

영산홍 꽃 더 짓붉게 피워내는 의미를.

posted by 청라

늦가을 저녁

 

늦가을 저녁

가로수들이 옷을 벗는다.

드러난 알몸들이

빗물에 젖는다.


오래 숨겨 두었던 진실이

앙상하게 바람을 맞는

저녁이 되면


나도 이름을 벗고

생활을 털고

어디 멀리로 떠나가고 싶다.


산사의 창 너머로

낙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며

차를 마시기도 하고


갈매기 소리 파도에 씻기는

이름 모를 항구에

정박하고도 싶다.

비상하려다

늘 주저앉는 프라타너스 이파리처럼

내 소망의 날개도 떨어져 수없이 밟히는 저녁…….

posted by 청라

해돋이

 

해돋이

그믐밤 별빛으로

불씨를 묻었다가


파도에

몸을 맡겨

씻기고 씻긴 사랑


더운 피 온 몸을 태워

어둔 세상 밝힌다

posted by 청라

비온 날 아침

 

비온 날 아침

말갛게 정화된 아침 햇살에

흉몽을 헹구며

신문을 본다. 활자마다 가득

어둠이 고여 있다.

간 밤 가랑비로 닦아 낸 하늘 아래

은행잎 하늘하늘 내리고

내리는 은행잎엔 가을이 더 노랗게 익어 가는데

비는

사람의 마음까진 빨아낼 순 없는 것일까

저기 밤 그림자가 남아있는 고층 빌딩이며 후미진 골목마다

어느 죄악의 독버섯이 자라고 있기에

신문을 보면 나는 이리 떨리는 것일까.

비야, 늦 피는 국화 봉오리에 새 숨결 불어넣는

비야,

나를 닦아 내다오.

이 세상을 닦아 내다오.

푸석거린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찾는

신문의 칸칸마다 네 맑은 영혼으로 정화시켜다오.

매일 아침 되씹는 절망을 접으며

오늘도 나는 웃는 연습을 한다.

posted by 청라

등산

 

등산

가끔은 멈춰 서서

산 빛 속에 정을 주면


초록빛 일색 속에

수만 빛깔 산의 마음


살며시

가슴으로 와

실뿌리를 내린다.


기슭마다 서려 있는

이슬만큼의 산의 눈물


새소리로 속삭이는

산의 말씀에 눈 귀 닫고


서둘러

정상에 오를수록

하늘과는 멀어진다.

posted by 청라

계룡산의 10월

 

계룡산의 10월

시월 계룡산은

타오르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골짜기마다 우웅 우웅

수많은 소리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빛 속으로 빨려 들면

온종일 맴돌며

나올 수가 없었다.


삼불봉에서

황혼을 타서 마시는

바람 한 모금


나도 가슴 뜨거운 가을 산이 되려는지

내뿜는 호흡마다

붉은 기운이 떠돌았다.

posted by 청라

연화교에서

 

연화교에서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목탁소리 눈을 뜨면


안개 낀 다리를 건너

손짓하는 사바의 마을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