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基昌 作品解說

 

 

절제와 스밈의 시학

 

조 재 훈

<시인. 공주대학 국어과 교수>

 

󰊱 시인의 연장선상에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T.S.엘리어트는 그의 여러 논문 가운데에서 힘주어 말했고, 그 영향으로 이른바 영 미의 이십세기 초반 분석 비평가들은 무슨 의도의 오류라든가 영향(정서)의 오류 등을 내세우면서 작품으로부터 작자와 독자를 단절시킴으로써 작품의 유기체적 자율성을 강조한 바 있다. 윤리 도덕 또는 역사적 비평이 지배하던 당대 문학연구 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이해된다. 가령 소쉬르의 언어이론도 십구 세기 유럽의 언어학을 지배하던 독일 라이프니츠대학 중심의 낭만주의적 역사비교언어학의 거부에서 태어난 것이며 그것은 둘 모두 자본주의 발흥과 기계문명의 첨단화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기초하여 생겨난 파리의 구조주의나 기호학은 가장 적정한 최신의 그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문화를 지탱하는 역사, 경제 등을 살펴,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따라서 작품 안에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필요 충분조건이 다 들어 있다는 견해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역사의 왜곡이 심한 제삼세계 등의 겨레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이러한 말을 늘어놓는 까닭은 엄기창의 사람됨과 나와의 인연을 조금이나마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서다.

공주교육대학에서 일년 쯤 근무하다가 내가 공주사범대학으로 옮긴 것은 천구백칠십 년 오월이었다. 그 이전에도 사 오년간 시간강사로 나왔던 터라 그리 낯선 느낌은 주진 않았다.

전임이 되어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는 수요문학동인들과의 자리였다. 최병두, 노동섭, 심규식, 조동길, 구중회 등 쟁쟁한 젊음들이 동나도록 공주의 막걸리를 퍼마시며 공주 좁은 골목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해박(?)한 이론의 싸움이 그칠 줄 몰랐고, 그 싸움의 불꽃으로 조금씩은 저린 가슴들을 태우곤 하였다. 후끈 달아오른 이런 열기 속에 그들의 후배로서 뛰어든 사람 가운데에 유병환, 엄기창 등이 있었다. 그들의 객기는 동인지, 시화전, 문학의 밤 등 쉬임없이 나타났으며 무슨 허당집인가 하는 이름의 괴짜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발바닥이 땅 위에서 몇 뼘은 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속에서 엄기창은 유난스럽게도 촌색시처럼 조용했고 수줍어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편이었으며 그리고 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 방(연구실)을 찾아와 마곡사 근처에 있는 가교리 고향마을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바람에 나도 촌 태생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의 이야기를 여러 시간 맞장구를 치면서 그야말로 열심히 들은 적이 있었다. 수태극으로 휘돌아 흐르는 냇물과 그 물 속에서 노는 가지가지 물고기 이야기, 무성산의 허물어진 성곽과 그 곁에 있는 샘물 그리고 거기에 얽힌 홍길동 전설, 화전신 이야기 등이었는데, 이번 시집의 원고를 통독하다 보니 그는 아직도 유년의 고향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느긋한 말씨와 부처님의 미소인 듯 따사로운 그의 소리 없는 웃음이 그의 사람됨과 문학의 성향을 모두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겸허한 순결성이라고나 할까? 노자가 일찍이 갈파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처럼 낮은 데서 표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엄기창이란 선생님이자 시인이다. 73년이던가 74년이던가, 엄기창은 시문학에서 주최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공모에서 당당히 당선되었으나 그런 것에 자만하지 않고 묵묵히 시작에 전념함으로써 일년 후(75)문단 데뷔의 관문을 거쳤다. 요즈음 너도 나도 무슨 자격증을 얻듯이 추천입네 뭐네 하여 문단이라는 흙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나는 우리 문학의 건강을 위하여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 말은 엄기창이 이른바 소정의 절차를 밟아 문단이라는 데에 나갔으나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진지하고 겸허해진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의 문학동인에서 핵심적인 위치로 활약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엄기창을 조용하고 맑은 의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펴내는 이 시집에는 그런 향내가 은은히 스며 있다.

 

󰊲 시는 아무래도 응축이 그 바탕이다. 산문이 진술을 통하여 확산을 하는 장거리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시는 압축을 통하여 사물의 핵심을 전광석화로 드러내려는 최단거리의 장르라 이를 만하다. 산문에서는 할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비교적 마음 턱 놓고 차근차근 이야기할 수 있으나 시는 그럴 수가 없다. 직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상황에의 설명이 아니라 존재에의 부가이다. 모울튼이 시를 일러 산문의 토의문학과 대비하여 창조문학이라고 한 것은 소박한 대로 정곡을 찌른 견해이다. 지금은 덜 하지만 오래 전에 나는 시를 무슨 보석처럼 생각하였고 또 무슨 향수의 가장 진한 원료라고 여겼다. 흙의 정()으로서의 보석은 견고하고 빛나며 아름답다. 물의 정으로서의 향료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온 방안이 향내로 가득해진다. 둘 다 최대의 밀도로 농축되어 있다. 역시 시도 그래야 한다고 믿어 왔으며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언어의 경제원리를 철저히 지키는 것――다시 말하여 최소한의 언어를 선택하여 최대한의 감동과 충격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접은 시각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에 따라 어휘 하나, 토씨나 어미 하나, 쉼표 마침표 하나에 숨을 불어 넣으며 그것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상허가 그의 널리 알려진 문장강화의 앞머리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는데 존재의 환기 또는 그 번역으로서 에 있어서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여러 날, 여러 달 또는 여러 해 고심 끝에 문자화 한 시를 거개의 독자는 신문기사를 읽듯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고 나서 무슨 수작을 하는지 모른다고 투덜댄다. 물론 작품에도 그 근본 원인이 있겠으나, 어느 면에서는 속도와 피부적 향락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독자에게 책임이 더 크다.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어느 작품의 경우나 마찬가지다.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

내려올 곳이 너무 많아서

내리지 않고

北岳에서 南山으로 흐르며

울기만 한다.

대밭에 참새처럼 숨어

지저귀는

사람들은 알리라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룽 우르룽 울고 있는지....

번갯불보다 고운 어둠 밑에서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다.

 

그의 서울의 천둥의 전문이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특이할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조금도 격하지 않다. 차분한 가락과 상징을 통하여 할 말을 시로 드러내고 있다.

서울 하늘에 천둥울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울 하늘에만 어떻게 일년내내 비가 오고 천둥이 치겠는가. 그렇다고 과장도 허구도 아니다. 다른 의미를 뒤에 거느린 암시와 상징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온갖 악의 온상일 수 있다. ‘항구라는 언어의 의미군에 숨어 있다는 다른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고향의 시골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울은 반 자연이며 반 고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리(天理)에 따른 한울님의 응징인 천둥이 항상 울기 마련이다. 내려와 인간들에게 응징할 곳이 너무 많으나 그냥 스스로 울 뿐, 가시적인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으로서의 참새 떼같은 인간들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하늘의 말 ―― 번갯불에 타면 그냥 없어지게 될 갖가지 욕망의 꿈을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다. 어둠이 번갯불보다 곱다는 시적 진술은 역설이다.

시인 스스로의 내면을 향할 때에는 더욱더 응축의 정도가 심해진다. 그의 연작시短歌는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눈 위에 떨어진

피 한 방울처럼

너와 나는 남남이다.

새벽부터 木鐸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다.

宇宙를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고

後光에 싸여 온 너의

하얀 손

그 하얀 손의 고갯짓

四十九日 밤낮을 눈 안 붙이고

나를 위해 木鐸만 두드리더니

너는 하얗게 昇天하고

아직 붉은

나와, 너는 남남이다.

―― 「短歌 3

 

나와 너 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적 시상의 작품이다. 삶은 사실상 너와 나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너의 존재와 나의 욕망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고독의 숙명, 그것이 삶의 거짓 없는 모습일지 모른다. 이 시는 그러한 절망과 벽의 문제를 담담히 그러나 깊이 있게 드러내 주고 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곧 하얀 눈과 붉은 핏방울의 선명한 대비는 백설공주의 그것처럼 찬연히 아름답다. 그러나 하는 거부(흰색은 배제이니까), 차가움이며 다른 하나는 타오름(붉은 색은 불의 이미지를 지니므로)과 뜨거움으로서, 서로 단절되어 있는 상태다. 이것이 이 시인이 본 존재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讀解)의 결론은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벽 목탁 소리를 배음(背音)으로 하되 그것은 우주를 목도리처럼 목에 두른하얀 손, 너의 나를 향()한 간절한 염원이다. 그러나 지상에 내린 눈이 곧 소멸하듯이 하얀 눈의 그 하얀 손은 사라지게 된다. 나는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리하여 는 영원히 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이러한 시적 요소들에 의하여 이 시는 진부함을 벗어나 그 나름의 빛을 얻는다.

엄기창의 시를 눈여겨보면, 잠언풍이다. 짧은 서정시 같아도 그 속에서 그 나름으로 삶의 의미가 종교적으로 천착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엄기창이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의 하나이다.

 

󰊳 견고한 시 쳐놓고 건조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미지스트의 시들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명석하고 선명하지만 그런 만큼 깊이가 빤히 드러나 울림이 적다.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시 읽는 시법독해의 재미는 줄지언정 감동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랜슴 같은 이가 그런 유의 시를, 뿌리 없이 모래 위에 꽂아 놓은 시라고 빗대면서 물질시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럴듯하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있어서 상징주의적인 시보다는 투명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울림은 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지 위주의 시는 울림을 통하여 스민다기 보다는 금속성으로 빛난다 할 것이다.

엄기창의 시는 단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결코 드라이하지 않다. 봄비처럼 촉촉이 스미는 그 무엇이 있다. 그 자력(磁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바탕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시적 형상화의 성공이라고 생각된다. 대체로 문학은 말하기(telling)보다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 구체성으로 나타내야 하며 그것은 시에서 극치를 이룬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형상화 또는 육화(incarnation)라 부른다. 관념의 노출이 시가 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관념이 용해된 시적 육체를 얻을 때 공감대가 넓고도 깊어진다. 육화와 더불어 또 하나 지적할 일은 시의 서정성이다. 우무래도 시는 감성의 문학이며 직과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부분이다. 엄기창의 시는 잔잔한 서정을 예외 없이 배음처럼 깔도 있다. 거기에다가 시의 호흡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하나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바탕위에 그가 가진 시정신의 취향이 보여주는 친화력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자연 친화의 경향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보내는 태도는 고금 시인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특히 동양시의 전통이서 엄기창의 자연 친화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예찬이 아니고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계문명의 세계에 대한 거부와 농촌(고향) 붕괴에 대한 연민의 정을 포괄한다. 둘째로는, 미세한 것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벌레 한 마리, 새 한 마리, 들꽃 한 송이에 대해서도 그는 애정을 보낸다. 주로 그의 애정은 자연에 향해 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라 대체로 작고 힘없는 것들이다. 셋째로는, 삶의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쪽의 보이지 않는 데를 투시하여 의미를 드러내려는 예지가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시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때, 엄기창의 시는 시로서의 품격을 지닌다.

이러한 여로 통로를 통하여 오는 엄기창의 시가 지닌 스밈의 친화력은 소중하다.

 

[] 溪谷으로 돌 돌

연두빛 生命 굴리는 십자매 울음

그 울음소리로도

일어서지 않는

……

――「K화백 화실 풍경

 

[] 굳게 입다문 산그늘 허물어진

반달만한 양지에

初産으로 낯 붉힌 진홍빛

저 간절한

말 한 마디

――「三月의 한 연

 

[] 한 여자가 끊고 지나간

,

눈발이 날린다.

滿月처럼 둥근 배가 쫓아와서

앞길을 막아서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절의

끈 한 편에

풀꽈리처럼 조그맣게 매달린

내 금간 하루

――「의 앞부분

 

[] 막차는 차갑게 식어

어둠에 풀린다.

――「막차 안에서첫 부분

 

[] 하나의 離別

별처럼 반짝이지만

두 개의 離別, 세 개의 離別,

수많은 이별들은 반짝이지 못한다.

――「短歌 5첫 부분

 

그의 시에는 신선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시 구절은 꽤 많다. 그 이미지들이 단순히 장식적인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의도하는 시상과 튼튼히 그러면서 기발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적 효과를 배가하고 있다.

위의 인용은 극히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윗 시 중 []~[]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연은 섬세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으며 그것은 단아한 호흡에 얹혀 독특한 시적 이미지로 전이된다. 특히 [][]가 그러하다. 귀엽고 앙징스러운 십자매의 울음소리와, 봄이 되어 얼음 풀린 계곡의 물이 연두빛으로 오버랩 되면서 그것을 아직은 철이 이른지 그냥 묵중한 채 웅크리고 있는 산에 연결시키고 있다. 제명에 의거하건대 아마 어느 화가의 화실에 걸린 그림의 인상이 아닌가 싶다. []도 진달래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굳게 입 다문 산그 그늘 허물어진’ ‘반달크기의 작은 양달에 피어 있되, 겨울 지나 피어 있는 그 어려움과 경이스러움이 여인의 초산과 같다고 말한다. 초산의 비유는 신선하면서도 적절하다. 어려움, 경탄, 생명에의 외경, , 핏덩이 탄생 등의 연상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간절한/말 한마디>는 초산의 긴장과 염원으로 충전된다.

[] []는 퍼스나의 고독이 자연 속에 용해되어 있는 예이다. ‘한 여자가 단절시키고 떠나가 버린 길은 적막과 좌절의 그것이다. 그리하여 차가운 눈발이 사정없이 볼을 때린다. 하얗게 눈 덮인 벌판처럼 세상은 없음으로 꽉 차 공허할 따름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배는 아직 보름달처럼 둥글지만 그래도 역시 앞을 가로막는다. <은빛 반짝이는 단절>일 밖에 없다. 퍼스나의 고독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그맣게 풀 꽈리로 매달린 그 이미지가 단절의 처절성을 상당부분 완화시킴으로써 <금간 하루>정도로 머물게 해주고 있다.

 

󰊴 무던하다는 말이 있다 엄기창에게 꼭 들어맞는 말로 여겨진다. 고등학교 시절의 팔각정동인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의 24~26년간 시에 열정을 쏟은 셈이며, 많은 재능들을 물리치고 문단이라는 데에 첫 선을 보인 지도 거의 20년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안달복달하면서 시집 간행과 발표에 눈독을 드릴 테인데, 그냥 묵묵히 누구를 부러워 할 것도 없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시만 다듬다가 이제 멱이 찼다고 느꼈는지 그동안 발표한 것들을 정리하여 한 권으로 묶게 되었다. 오늘날 문학 공해의 시대에 나는 그런 엄기창의 겸허와 진지성에 대하여 신뢰감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고전적인 시작 태도에 관해서도 긍정적이다. 모던이니, 포스트모던이니 해도 역시 시의 올바른 길은 엄격한 언어의 절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의 적절한 절제에서 압축성을 갖게 되며 그 압축에서 리듬이 태어나고 그 리듬은 힘이 되어 우리를 울린다. 어떤 평자가 정지용의 시를 언급하면서 정곡을 찌른 말처럼, 언어의 절제는 욕구의 억제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턱없는 미지에의 동경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절제 잃은 언어의 분류로 나타난다면, 고전적인 엄격한 자아의 통제는 자연히 언어의 절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엄기창이 보여 주는 언어의 절제도 실은 그가 가진 세계관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 엄기창 문학의 한계가 있으며 극복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엄기창의 시는 예외 없이 짧다. 서정적이며 아름답고 또 거부감 없이 잘 스며들지만 작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서정의 소품이 그의 시가 지닌 대체적인 인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작다>는 사실은 다양성의 결여와도 연루되어 있다. 소재의 선택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 두루 마찬가지다.

시인은 늘 틀을 깨부수는 자이며, 새것을 찾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열정이 늘 따라야 된다. 삶의 문제에 관하여 세계에 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이 무엇인가, 선이 무엇인가, 미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추구해야 한다. 시인이 불안해 보이고, 불온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랜만에 그동안 써온 시편들을 일단 정리하면서 이 시인에게 나는 답답할 정도로 꼼꼼한 시학으로서의 모범적인 시 쓰기의 구속에서 좀 벗어나는 그런 용기를 갖도록 주문한다. 튼튼한 엄기창의 시학을 토양으로 하여 변모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posted by 청라

해설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

엄기창 시인의 시세계

 

 

                                                                         리 헌 석

                               (시인, 문학평론가, 대전문인협회 회장)

 

 

1.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어릴 때 떠내려간/ 태화산 그림자를 건지려고/ 서해 바다에 갔었네>(세월일부)라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1951년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그곳에는 태화산이 있고, 그 자락에서 곱고 맑은 향토적 서정을 익힌다.

그는 세월을 거슬러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풀꽃을 그리워한다. 맨발에 신겨 주던 꽃신과 날려보낸 연()의 추억이 아직도 그림자로 가슴에 남아 있다. 아련하게 그리운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에 머물려고 몸을 추슬러 보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초승달이 오히려 그리움의 정서를 일깨운다.

 

번지 없이 띄워 보낸

내 풀꽃은

흔적이 없고

 

맨발 위에 신겨준

꽃신만 한 짝

파란 하늘 보고 돌아누워 있었네.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연()처럼

영원히 잃어버린 내 그림자여,

 

물빛 흔들어 몸을 감추고

닫아 거는 가슴엔

날선 초승달 하나.

―「세월일부

 

산촌에서 소년기를 지난 그는 중소도시 공주로 유학을 한다. 그 곳에서 그는 학업에 정진함과 동시에 문학의 꿈을 가꾸게 된다.

공주영명고등학교 재학 시절 팔각정문학회의 일원으로 문학 청소년기를 보낸다. 당시 대학에 재학 중인 윤석산 시인이 자주 찾아와 문학혼을 일깨우고, 유병학 시인은 국어 지도교사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선배인 문희봉, 김영훈, 전영관 등으로부터 문학 창작의 열기를 이어받는다. 필자는 그와 동기동창이면서 같은 서클 동인으로, 문학의 꽃을 함께 가꾼 지기지우(知己之友)였는데, 80년대에 다시 만나 문인의 길을 같이 가고 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한다. 당시 공주사대에는 수요문학회가 치열하게 활동할 때여서, 그의 문학혼은 일찍 개화하게 된다. 임헌도 조재훈 한상각 시인을 교수로 만나고, 선배인 임강빈 임성숙 최원규 김명배 등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명수 구중회 윤강원 등의 선배 동인을 만난다. 당시 수요문학회는 작품 합평회를 통해 작품 수준을 높이고자 절차탁마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수련을 거쳐 그는 재학 중인 1974년에 시문학주최 제1회 전국 대학생 시 공모에서 당선하여 1회 추천의 대우를 받는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군 복무 중인 1975년에 완료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는 중등학교 청년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의 삽질을 쉬지 않는다. 1980년대에는 오늘의문학회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예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1993년에 첫 시집 서울의 천둥을 발간한다. 향토적 서정이 넘치는 작품 성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제목의 시집이지만, 이 시집에는 엄기창 시인의 결 고운 서정이 가득하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현()을 베고 누운 음()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음()들로 구상(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서곡(序曲)전문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노래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그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인지, 혹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인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스스로 노래에 일가견을 가진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현을 통해 생성된 소리들이 그의 목젖을 통해 노래로 거듭난다는 표현에 이르면, 그는 노래를 듣는 수준에서 주체가 되어 부르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노래는 의 노래와 동일시되고 있다. 즉 새의 울음소리로 상징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음들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 여기에서 노래라고 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정형화된 예술 행위로 수용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를 읊거나 짓는 행위 또한 노래한다고 하는 점에 이르면, 그의 노래는 시 창작 행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어떻든 그는 고운 서정과 맑은 향기가 넘치는 작품을 빚고 있다. 그러한 작품이 최근에는 우리 고유의 정가(正歌)시조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에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연륜을 가늠하게 한다. 다작(多作)과 과작(寡作)을 뛰어넘어, 쉬지 않고 창작에 전념하여, 둘째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2. 금강의 여울소리를 찾아

 

<그대 속삭임 들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돋움하는/ 키 큰 나무가 되고 싶다.>(금강일부)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금강을 주제로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에 있는 무성산태화산철성산에서 흘러내린 태화천 계곡의 물은 구불구불 흘러서 유구천에 이른다. 다시 이 냇물은 산 그림자와 들녘의 바람을 데리고 금강에 이르는데, 바로 이 지점이 금강의 디디울나루 아랫녘이다. 디디울나루는 금강의 여울과 유구천의 여울이 만나서 이룬 덧여울이었는데, ‘더뎌울’ ‘데디울’ ‘디디울로 변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는 금강의 상류에서부터 곰나루’(디디울나루의 약간 상류)에 이르기까지를 맑은 서정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어서 그의 시혼(詩魂)은 금강의 하류인 황산나루나 백제의 역사가 잠겨 있는 부여의 백마강을 거쳐 서해 바다에 이르러 결곡한 서정을 형성하기도 한다.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

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금강일부

 

그는 또 다른 작품 금강에서 <하늘의 맑은 마음 한 자락/ 내려와 손을 씻는 비단가람>이라고 노래한다. 그의 의식 속에는 세세한 추억과 삶의 양상이 금강과 맞닿아 있다. <어릴 때 잃어버린 내 따오기 소리>도 금강에서 찾아내고, 상류에 있는 무주구천동의 물소리처럼 반짝이는 여울도 찾아낸다. 또한 그는 <오래 보지 않아도/ 그 노래 그 물빛 마음에 젖어/ 눈감으면 나직이 우는 가람>과 함께 살아간다.

금강은 나직하게 울면서 아름다운 산 그림자를 싣고 내려간다. 산수도(山水圖)에서 그는 개나리꽃에 불을 붙이는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기도 하고, 시인 스스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온갖 골물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는 낚시를 하는 노옹(老翁)에 시선을 멈춘다. 그 노옹의 낚시 끝에 걸린 청청한 산그림자를 발견하는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낚시터에서라는 작품을 통해 <빈 바구니에/ 달빛만 가득 채워도/ 세상을 늘 사랑할 수 있다.>고 노래하여 동양적 세계관, 즉 허정(虛靜)의 시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허정의 시심은 자연을 관조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직접 노래하지 않고, 3자적 관찰자 입장을 취하기도 하는데, 비유적 감각이 눈부시다.

 

하얀 돛단배가

아침의 건반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파도에 몸을 던지고

잊었던 리듬을 생각하는 갈매기,

쾌적한 바람이 햇살 층층을 탄주한다.

미역 숲에서 멸치 떼들이

오선의 층계를 올라간다.

갈매기 노란 부리가

번득이는 가락을 줍고 있다.

 

밤내 뒤척이던

허전한 어둠의 꿈밭

소라껍질이 휘파람 불며

모래알 손뼉을 쳐 뿌리고 있다.

얼비친 하늘의 푸른 물살을 타는

갈매기 눈알에

잊었던 리듬이 내려앉는다.

하늘 속의 빛이랑이 내려앉는다.

―「아침 바다전문

 

어찌 보면 단순한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난해한 것 같기도 한 이 작품은 바다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아침 바다에 하얀 돛단배가 지나가고, 갈매기가 먹이 사냥을 한다. 이미 생명을 잃은 소라껍질은 모래알이 묻은 상태로 해변에 버려져 있는데,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갈매기는 바다와 하늘을 유영한다. 이런 서경을 독자적인 시어와 문학적 감수성으로 빚어낸 절창이라 하겠다.

그는 강에 대한 사랑도 특별하지만,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바다에 대한 노래도 곡진하다. 어촌에서 그는 <물비늘 번득이는 바다의 자유>, 까치집처럼 열려 있는 아낙들의 빈 가슴, <돛대 끝이 휘저어 놓는 하늘>, 투시의 눈을 반짝이는 하얀 갈매기, 바다의 노래를 실러 떠나는 바다의 노래, 등의 특별한 형상화를 보인다.

또한 후리를 통해 <달빛 아래 퍼덕이는 절망의 바다>를 찾아내기도 하고, 에서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를 찾아내기도 한다. 제주해협에서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을 통해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을 찾아 <무릉도원>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듯이 물의 이미지에 특별한 자질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태화천의 맑은 물소리에 연유하는 것 같다.

 

 

3. 눈물 빛 사친가(思親歌)에 같이 울며

 

<상여 뒤 따르며 울 때는/ 솔방울마다 요령 소리로 울어/ 하늘이 무너지더니/ 남같이 낯설어진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아버님 무덤>(성묘(省墓)일부)에 머리 숙여 눈물 흘리는 엄기창 시인은 절절한 슬픔을 예술적 서정으로 승화시킨다.

<저승은 늘 춥고 바람 불 텐데/ 제 염려 거두시>라고 말씀드리며 절을 해 보지만, 생전의 아버지 음성이 들려 오는 것만 같다. 머리 위 상현달은 바로 아버지의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별세하신 육친에 대한 그리움은 시인의 의식을 사물의 테두리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온갖 사물들이 육친과 연결되고, 그 범주에서 연상의 구체화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엄기창 시인은 격정적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격조를 지킨다. 그 서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고,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를 형성한다.

 

아버님 목소리 땅에 묻던 날

대밭에서는

하루종일 대순이 돋았습니다.

한 줄금 내린 소나기로

목타던 대지가 젖어

취나물 향기 이내처럼 번지고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며

개나리꽃 빈 가지에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착하게 사신 생애 기름으로 태워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셨나,

철성산 풀빛 짙어오는

풀빛 속에나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태화천

물소리 속에

아버님 모습을 늘 뵙니다.

―「아버님 전 상서전문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는 봄날에 그는 선친께 편지를 쓴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신 아버지를 그린다. 이 작품은 후에 시조로 거듭나기도 한다.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무덤가에// 눈시울 적시며/ 절하고 돌아서면// 내딛는 발자국마다/ 밝혀주는 초승달>(성묘전문)이라고 사친(思親)의 절절함을 노래한다. 이 시조는 앞에서 예를 든 서정시의 다양한 표현 요소 중에서 핵심 요소만 추출하여 형상화한 작품이어서 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애절한 사친가(思親歌)는 사모10(思母十題)를 비롯한 사모의 정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다. 어머니가 별세한 때부터 열 가지 과정을 통해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 바로 사모 10인 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어머니에 대한 작품들을 통해 눈물 어린 사모곡(思母曲)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안수에서 <찢어진 문틈으로 보던 어머님의 합장한 손> <살포시 지은 미소에 성스러운 그 눈빛> <정안수 대접에 담긴 어머님의 큰사랑> 등은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담아낸다.

둘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가슴에 묻은 이름에서 그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도 꺼지지 않으려고/ 날개 파닥이는 등불을 보며/ 어머니의 생애를 접어/ 가슴에 묻는>다고 노래한다. 현실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산에 묻지만, 사실은 그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엄기창 시인 역시 선자(先慈)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어머님 이름이 지워지자

고향 빛깔은

막막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임종(臨終)(思母十題 1) 일부

 

오르막길 오를 때마다 상여는 멈춰 서고

상주들은 너도나도 돈을 거는데

어머님은 빈 손 맨발로 떠나

저승의 어느 주막에서 울고 있을까.

―「운상(運喪)(思母十題 2) 일부

 

사잣밥상 아래

백목련 꽃 두어 이파리

어머님이 벗어 던진 이승의 신발

―「고무신(思母十題 3) 일부

 

자식 둘 앞서 보낸 눈물의 생애를 묻고

맨발로 헤쳐 온 아픈 역사를 묻고

어머니의 향기를 묻는다.

―「하관(下官)(思母十題 4) 일부

 

생전에 못 사드린 과일로

제사상을 채우며

이제는 장식에 지나지 않음에 가슴 아파합니다.

―「사십구재(四十九齋)(思母十題 5) 일부

 

부모를 여읜 자녀라면 누구나 체험했을 가슴 아픈 노래이면서, 엄기창 시인의 진실 어린 고백이기도 하다. 누구나 이러한 애절함을 느꼈을 터이지만, 그 애통함을 그냥 가슴에 묻어둔 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노래한 이 작품들은 애상적 정서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픈 노래를 계속한다. <어머님 아린 가슴에/ 뽑혀지지 않는 대못>(돌무덤), <산천에 봄이 왔지만/ 내 가슴은 겨울입니다>(기다림), <어둠을 환히 태우고도 남을/ 시퍼렇게 날 선 눈물을 보았습니다.>(눈물), <살아생전 마음 한 번/ 편하게 못해 드린/ 내 마음의 빛깔은/ 잿빛 후회입니다>(어머니), <어머님 눈동자에 맑게 고인 하늘로/ 하얀 구름 되어 떠나셨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흑백사진 속에서/ 어머님의 나이는/ 언제나 서른입니다>(흑백사진) 등 그의 사모곡은 그칠 줄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아내가 채운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사랑이 가득 담긴 축시(祝詩)를 빚는다. <생활의 아픈 멍울 가슴으로 싸 안으며/ 얼굴엔 항시 햇살 같은 웃음으로 어둠을 밝혀/ 바라보면 고향같이 편안한/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일곱 살 철부지>가 된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아내로부터 모성을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속에 묻어 둔 사랑의 촛불>을 밝혀 아내에게 씌워진 <생활의 짐>을 벗기고자 한다.

이렇듯이 그는 사랑 안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어린 소년과 같다. 지천명(知天命)의 연치(年齒)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년과 같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다.

 

 

4. 생명의 원천을 지키기 위해서

 

<강물은 그저/ 헐떡이고만 있었다.// 키 큰 미루나무 가지 사이/ 거미줄 속엔/ 강물의 핏빛 울음만 걸려 있었다//// 검게 썩은 물빛 문둥이처럼/ 강의 신음소리>(강변 야영일부)가 밤새 시인의 꿈 밭으로 흘러든다고 노래하는 엄기창 시인은 자연 환경의 중요성을 작품으로 환기시킨다.

오염된 강에서 시인은 환경 파괴의 무서움을 토로한다. 갑천 붕어는 아파트 그림자를 산 그림자로 알고 올라온다. 그러나 상류로 오를수록 <검은 폐수만 흘러내려/ 앞길은 깜깜하게 막혀> 있다. 그래서 <붕어의 눈물 속에서/ 납물>이 흐를 정도로 오염된 상황을 만난다. <등뼈 굽은 새끼를 안 낳으려고/ 붕어는 자갈밭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고 노래한 부분에서 그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엿보게 된다.

강물만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소나무에서도 <찢어진 살갗에서/ 중금속 피가 흘렀다>고 고발한다. 그런 소나무를 보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멀어지는 산의 마음>을 찾아내며 시인은 절망한다. 특히 일급 자연으로 유명한 지역, 수려한 산촌의 대명사로 알려진 청양마저 오염되었다는 데에 이르면 삶의 위태로움을 예견하게 한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개구리 울음 하나 지나갔다.

 

별똥별처럼

타버리고 다시는 반짝이지 않았다.

 

칠갑산 큰 어둠은

돌 틈마다 풀꽃으로

개구리 울음을 품고 있지만

 

기침 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

가슴을 닫았다.

 

차창을 더 크게 열어봤지만

청양을 다 지나도록 청양 개구리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청양 개구리전문

 

환경 오염에 의한 개구리의 감소를 밝히는 것인지, 혹은 무차별 개구리를 포획하여 보신하는 세태를 고발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의 부재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의 중심 제재는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청양 개구리>라 할 때, 자연 파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는 노래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실망은 인간 삶의 양식으로 전이된다. 우리 나라 도시의 표상인 서울에 대해 시인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서울의 천둥에서 그는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고 진술한다.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우르릉 울고 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부정적 시각을 표출한다. 서울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지만, 그의 시심은 절망적 색채에 싸인다. 이러한 절망은 꼭 서울이라는 특수 지명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넘치는 도시의 일반화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여 거듭나고자 한다. 극복의 매체로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주문한다.

 

꽃도

꽃의 마음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황홀한 몸짓의 장막 뒤엔

말라 시들은 노래도 있겠지

 

꽃잎을 먹고사는 어둠의 벌레들이

고랑처럼 파 놓은

상처들도 있겠지.

 

날 선 눈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아름다운 눈으로 보아야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 보기전문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성싶다.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더럽고 부정적인 사물까지 아름답게 노래한다면, 그것은 진실의 은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둔 현실에서도 아름다운 시심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 같다. 빈 접시에서 그는 <내가 꽂아 주는 억새꽃으로/ 오늘밤 네 고향 산에/ 칠색 영롱한 무지개를 걸>라고 청하기도 한다. 달맞이꽃에서는 자녀들에게 <올해는 헐벗은 가슴에/ 전설 같은/ 이 애비의 어릴 적 보름달을 안>으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세상을 지탱하는 벼릿줄이고, 순수를 지킬 수 있는 대안(代案)임을 노래하여 맑은 시심을 견지하고 있다.

 

 

5. 연화교에서 부는 바람처럼

 

<잠 못 드는 노승의/ 천수경에 달은 지고// 불심은 태화천에 녹아/ 사바세계로 흐른다>(마곡사일부)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어릴 때부터 불교적 환경에서 자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작품에는 불교적 시심이 짙게 깔려 있다. ‘마곡사는 그의 고향 마을에 있는 천년 고찰(古刹)로 조계종의 본사 중의 하나인데,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여러 분 배출되어 유명한 절이다.

큰 절이 대부분 그렇듯이 마곡사에도 연화교와 오층석탑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연화교 건너서면/ 솔바람 풍경소리// 향내 서린 잎새마다/ 불경 소리 담겨 있고// 법계를 지키고 서서/ 침묵하는 오층석탑>을 노래한다. 불심이 태화천에 녹아 흐른다거나, 나무 잎새마다 불경 소리가 담겨 있다는 관점은 바로 온갖 사물에 불심(佛心)이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해당한다. 또한 사물과 불성(佛性)을 하나로 보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목탁소리 눈을 뜨면

 

안개 낀 다리를 건너

손짓하는 사바의 마을

―「연화교에서전문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1(시조의 초장)이라 하겠다.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는 시각은 대상과 본질의 역설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시냇물이 흘러가고, 나는 다리에 서 있는데, 다리에 서서 바라보면 그와 달리 착시(錯視) 현상에 빠지게 된다. 시인은 이런 현상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밝힌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선어(禪語)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한다.

이런 시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매일 아침 되씹는 절망을 접으며/ 오늘도 나는 웃는 연습>(비온 날 아침)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또한 <더운 피 온 몸을 태워/ 어둔 세상 밝>(해돋이)히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에 이른다.

 

향일암 석등(石燈)

찰람찰람 고인 고요를

새벽달이 갸웃이 훔쳐보고 있다.

 

파도 소리에 씻겨진

동백꽃 봉오리마다

세상 밝히는 꽃불을 켜면

 

먼 수평선 일어서는 눈부신 평화(平和)

관음상 입가에 살포시

미소로 번진다.

―「향일암 일출전문

 

이 작품을 읽으며, 엄기창 시인은 눈부신 평화를 위하여, 늘 관음상 입가에 번지는 미소처럼 맑은 마음을 지향할 것 같다. 그리하여 어둔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자리할 것 같다. 이제까지 고운 서정과 맑은 향기가 넘치는 작품을 창작하였듯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본다. 이런 기대와 믿음으로 그의 작품 기행(紀行)을 마친다.

posted by 청라

엄기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를 읽고


                                                            시 인  차 승 열




    


우편함에서 누군가 보내준 책을 꺼내보는 일은 썩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요즈음 같은 디지털 시대에 새하얀 종잇장에 찍힌 갓 세상에 나온 활자 냄새를 맡는 일은

아련한 향수마저 불러온다.

"세한도에 사는 사내"라~ 



먼저 시집을 상재하신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시집 <세한도에 사는 사내>,

도서출판 이든북, 2017.9.27 

 
  "퇴임을 하고 무료한 날이 많아지면서 내게
  시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고희를 넘어 시를 소개받고, 시를 쓰는 즐거움에

  암마저 나았다는 한 시인님의 말을 들으며,

  시가 어떤 사람의 삶에는 밝은 등불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 시에 꽂히면 삶에 꽃이 핀다.
  네 번째 피우는 이 시집에서 한 송이 시라도 살아남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시에 꽂히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삶에 환한 꽃을 피워줬으면 좋겠다.
  
  - "시인의 말" 전문 


엄 시인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80년대 중반 <오늘의문학회>에서 일이니 

선배님과 교분을 이어온 지도 줄잡아 30년은 넘었지 싶다.

엄 시인은 '엄부처'라는 별명처럼 천성적으로 온화한 인품을 타고 나신 그야말로 충청도 양반 중에

양반이시다. 시풍도 그가 태어난 공주 마곡사의 수려한 땅 기운을 받았음인가

결 고운 서정으로 채색된 그의 시편들에는

세상의 바라보는 깊고 따뜻한 시선이 담긴 느릿한 충청도 말씨가 담겨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은퇴의 졸업장을 받아들고 그야말로 은빛으로 빛나는 날들을 보내고 계신

엄 시인님의 네 번째 시그릇에는 어떤 시들이 담겨있을까?

엄 시인이 살고 계신 세한도의 달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스승 

김정희를 위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구해온 귀한 책들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편지에

그려진 작은 그림으로, 제자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한 문인화이다.

추사는 전과 다름없이 스승으로써 자신을 섬기는 고마운 제자에게 이렇게 썼다.

"더구나 온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ㆍ이익만을 붙쫓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허비하고도 권세ㆍ이익에

돌리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외의 한 초췌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돌리기를 마치 세상이 권세ㆍ이익에

붙쫓는 것과 같이 하니 어인 일인지요."


그렇다면 엄 시인님에게 세한도는 무엇이었을까?.

작품해설을 쓰신 문학평론가 조혜옥 님의 말처럼, 엄 시인님에게 세한도란?

"한 사내의 기개와 청청한 외로움'을 간직한 시적 공간이라는데 동의한다.

엄 시인님은 권세와 이익을 좇는 화려함과 거짓됨으로 치장된 세상을 초월한 세한도의 달집에 은둔해

살면서 시집 <세한도에 사는 사내>에 실린 여러편의 시에서 보듯이

부모에게는 착한 자식으로써, 아내에게는 믿음직한 남편으로써, 자식에게는 인자한 아비로써,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후학양성에 평생을 몸바쳐온 교사로써 선비로써,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서예가, 금석학자, 화가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세상의 버림을 받아 긴 세월 동안 유배지를 떠돌아야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추사처럼 자신만의 기상과 지조를 키워왔던 것이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열려진 달집의 작은 문을 통해 시로써 세상과 소통해왔던 것이다.

엄 시인님을 쏙 빼어닮은 시 몇 편을 더 읽어보자.



네가 오리풀꽃으로 홍사초롱 밝혀든다면

나는 고추잠자리로

네 기다림 위에 날개를 쉬겠네.

우리들의 늦여름은 소리 없이 달려서

초록 사랑 빛바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흔들어 봐요, 하늬바람아

때로는 오이풀꽃 도리도리해도

한 몸인 듯 돌이 되겠네


- 「오이풀꽃과 고추잠자리」 전문



엄 시인님이 태어난 해가 '51년이니 올해 예순일곱. 예전 같으면 노인네라고 불리울 나이인데도

아직도 문학소년처럼 해맑은 감성이 담긴 서정시를 쓰고 계시는가 하면,



      할아버지 끌고 가는 리어카 위엔

할머니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다.

자가용은 못 태워줘도, 임자

리어카는 실컷 태워줄끼다.

심들어서 워쩐대유 워떠칸대유

올라가는 고갯길 바람이 살짝 밀어준다.

마른 수숫대 같아서 눈물 나는 사람

늦가을 햇살처럼 스르르 사라질까봐

뒤돌아보며 자꾸 말 걸며 숨차게 올라간다.


- 「늦가을 소묘」 전문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으시고 그늘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밝은 등불' 같은 시를 들려준다.



소리치는 사람들은 깃발이 있다.

깃발 들고 모인 사람들은

제 그림자는 볼 줄 모른다.


조룡대에 와서

주먹질 하는 나그네들아

조롱대는 날마다 죽지를 자르고 싶다.


부소산에 단풍 한 잎 물들 때마다

어제보다 더 자란

소정방의 무릎 자국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화인


지느러미라도 있었다면

천 년 전 그 날

물 속 깊이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을


깃발 들고 목청만 높이는 사람들아.

비듬처럼 일어나는 부끄러움을 삭히려고

백마장 물살을 빌려 조룡대는

오늘도 머리를 감는다


- 「조룡대, 머리를 감다」 전문


 

어디 그뿐인가. 

'듣는 대로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순을 지나 고희를 바라보고 계심인가

이 시대의 어른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쓴소리도 간간히 실려있다.



엄 시인님은 '시인의 말'에서 교직에서 은퇴한 뒤로 할 일이 없어졌다고 엄살하시지만

이제는 40년 넘게 시를 써 온 원로 시인 중에 한 분으로 더욱 더 정진하셔서

눈부신 서정이 담긴 아름다운 시편들로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에 '밝은 등불'이 되는,

한번 꽂히면 기어이 피어나고야 마는 '환한 꽃'처럼 맑은 시향을 전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그래서 우리 같은 얼치기 시인들은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 그늘에 눌러 앉아 

청정하게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할수만 있다면,

달집 뒤편에 서있는 잣나무로 서서 시를 이야기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늙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서천 앞바다.

     옛 문우들과 모임에서

     엄 시인님과...             

 






posted by 청라

타자시학

엄기창론 2017. 10. 3. 10:07

이달의 문제작<>

 

타자시학

 

                                                                         정 신 재

                                                                                                         <문학평론가>

 

 

  라캉에 의하면 타자는 주체가 아닌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주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사물에 해당되는 궁극적인 기표(SIGNIFIER)이다. 이 타자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의 궁극적인 기표이기 때문에 사실상 나를 정의한다.(조셉 칠더스 게리 헨치 외, 현대 문학 문화 비평 용어 사전문학동네, 2001) 시문학9월호에는 주체가 말하고 싶은 것을 타자가 대행하고 실패를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 많았다.

  대부분의 시에는 타자가 들어있다. 주체가 타자와 함께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화자의 몫이다.

 

중략

 

5. 융합의 미학

 

  몸이 생명체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 기관과 피와 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몸의 각 부분은 융합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융합이 몸을 살린다.

  엄기창에게 타자는 융합을 추구하는 존재요, 사물이다.

 

     나라 없는 백성들은 질경이처럼 짓밟혀서

     꺾여도 꺾여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역사의 속살을 가리려고

     바람은

     투명한 수면에다 주름을 잡아놓는가

                                                   -엄기창, 슬픔을 태우며부분

 

  전쟁에서 패배한 군사 나라 없는 백성을 통해서 시인은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현재에 남아있는 타자의 생명력에 주목한다. 타자의 생명력이 지속되는 한 역사는 바람처럼 굴러가는 것이다.

 

 

시문학201710월호

posted by 청라

순백의 외로움과 빛나는 나를 만나는 시간

 

                                                             문학평론가 조해옥

 

 

 

1. 시 정신의 근간, 염결성과 연민과 자족

 

엄기창 시인의 새 시집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를 이끄는 시 의식은 염결의식(廉潔意識)과 연민의식(憐憫意識)이다. 자족(自足)의 정신 역시 새 시집에서 시인의 시적 지향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시인의 첫 시집 󰡔서울의 천둥󰡕(1993), 두 번째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2004), 세 번째 시집 󰡔춤바위󰡕(2014), 그리고 새 시집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염결성과 연민의 감정이 창작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무욕으로부터 형성되는 자족의 아우라가 시인의 시편들을 감싸고 있다.

엄기창 시인의 시에서 염결의식은 지금까지 발표한 시인의 시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적 지향이다. 시인은 그의 마음 세상에서 세속성을 다 지우고 순백의 고결함으로 변화시키려는 갈망을 드러낸다. 그 갈망은 세상을 향해 있기보다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다. 그의 시 山水圖(󰡔서울의 천둥󰡕)향일암向日庵에서(󰡔춤바위󰡕)에서 보여준 지움과 텅 빔을 향한 시인의 시적 추구는 새 시집에 실린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에 이르러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세상이라는 바깥이 아니라, 그로부터 초월한 자신에게서 지극한 자유로움을 얻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엄기창 시인의 연민의식은 벗어날 수 없는 아픔을 체득한 존재론적인 인식임을 드러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시인이 반복하여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이 그의 연민의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무덤(󰡔가슴에 묻은 이름󰡕)에서 드러나 있듯, 엄기창 시인은 어머니로부터 언제나 생생하게 환기되는 아픔이면서 그것의 강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아픔을 경험한다. 새 시집에 실린 대못에서 시인의 시적 자아는 가슴 깊숙이 묻는 아픔, 내색하지 못 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어머니를 통해 체득한다. 시인에게 가슴은 연민이 거처하는 장소이다. 동시에 가슴은 시인의 시적 자아가 내면으로 들어가 진짜 자기를 만나는 장소이며, 다른 생명들과 타자들을 자신과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약한 존재들에게 머물 때, 연민이 발생한다. 연민의 감정은 외부에 있는 미소한 위상을 갖는 생명들로부터 오고, 온기를 지닌 시인의 마음 밭”(대청호 가을)에서 오기도 한다. 엄기창 시인은 그의 마음 밭에서 외부의 화려함과 거짓됨을 다 걷어낸 후에 살아서 반짝이는 자신을 만난다. 시인이 참된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욕의 삶에서 기인한다. 마음의 터전에서 시인은 빛나는 외로움과 대면한다.(유등천에서) 그가 진정한 자기를 깨닫는 시간을 맞을 수 있는 것은 위기에 처한 생명들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 마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 같은 연민의식은 시인의 시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욕의 시 정신을 형성하며, 자족의 시 세계로 이끄는 힘이다.

 

 

 

2. 은거(隱居), 지극한 자유로움의 형태

 

엄기창 시인의 시작품에서는 여러 사물들과 풍경은 점점 지워지고 하나의 상징적인 사물로 응축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남겨진 사물은 다른 사물들이 사라진 시의 화폭에서 명징하게 드러나게 된다. 시의 화폭에서 주변에 머물던 여백은 점점 커지고, 여백의 한가운데서 하나의 사물이 선명하게 솟아나는 것이다. 여백이 사물들을 지운 순백의 화폭은 엄기창 시인의 염결의 시 정신을 표상한다.

엄기창 시인의 염결성은 그의 󰡔서울의 천둥󰡕󰡔춤바위󰡕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다.

 

투명하게 벗어 오히려

속 깊은

하늘 한복판에

예닐곱 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난

맨드라미만한 구름 한 송이

                    -山水圖부분, 󰡔서울의 천둥󰡕

 

山水圖에는 갖가지 자연물들이 가득하지만, 그것들은 점점 지워지고 하늘 한복판에 구름 한 송이만 남는다. 구름 한 송이는 고결함을 지향하는 시적 자아의 상징적 거처이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 소리마저 지운다

 

(중략)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향일암向日庵에서부분, 󰡔춤바위󰡕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지우고 비워내는 시인은 순백의 세계를 꿈꾼다. 눈보라의 흰빛이 사물들을 덮으며 사물들의 형상을 지우고, 목탁 소리마저 지운다. 그는 오감(五感)으로 감각하는 세상을 넘어 텅 빔의 세계를 추구한다. 시인의 완벽한 순수의 지향은 그의 새 시집에서 그의 시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 낸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에서 형상화의 절정에 도달한다.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에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 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전문

 

추사의 <세한도>에는 한겨울을 배경으로 소나무 네 그루와 작은 집 한 채만이 화폭에 담겨 있다. 엄기창 시인의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세한도>에 담긴 추사의 서사를 반영하면서도 집에 은거하고 있을 사내의 의식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내는 엄기창 시인의 시적 자아이면서 중심이 되는 자아이다. 위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용사들인 없다않았다사내의 거부의 기개와 청청한 외로움을 부각시킨다. 외부 세계를 지우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하는 사내의 결연한 모습은 그가 스스로 찾아낸 지극한 자유로움의 형상이다.

 

꽃이 되지 못했다고 서러워 말아라.

이른 봄부터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여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낸

네가 없었다면

어찌 한 송이의 꽃인들

피울 수 있었으랴.

 

꽃이 박수 받을 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묻혔다고 울지 말아라.

세상에 박수 받던 것들은

쉬이 떠나가고

장막 뒤에 숨어있던 너만 살아 반짝일 때

그림자이기에 오히려 빛나는

뿌리의 의미를 알 것이다.

                           -뿌리에게전문

 

위 시에서 시인의 시적 자아는 바깥의 화려하고 요란한 형상들을 모두 지우고 자신의 내부로 들어간다. 그는 거짓된 자신 혹은 위장된 자기를 벗어나 생생하게 살아 빛나는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 가장 진실한 자기를 만날 때, 어떤 것으로도 꾸미지 않은 자신을 만날 때, 그는 비로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뿌리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뿌리는 엄기창 시인이 갈망하는 가장 안쪽에 자리한 진실한 시적 자아이며, 생기로 반짝이는 자아를 상징한다.

대문 굳게 닫힌 울안/빈 집 속의 적막으로 봉오리 부풀려/한 등 눈물로 켜든 저 짙붉은 외로움.”(장미)에서처럼 시인은 빈 집에 홀로 피어난 장미에게도 응축된 외로움의 감정을 투사시킨다. 그러나 그가 시에서 노래하는 외로움은 단순히 처연하거나 쓸쓸하지만은 않다. 그는 외로움의 감정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계기로써 인식하기 때문이다.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이었다./내 그림자 혼자 따라와/반짝이는 외로움”(유등천에서)에서도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홀로 걸어들어 간 시적 화자는 반짝이는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 엄기창 시인의 시에서 외로움은 그의 시적 자아가 진정한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3. 나를 초월하는 감정, 연민

 

엄기창 시인의 시에서 근간이 되는 연민의식은 어머니에 대한 그의 연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가슴에 묻은 이름󰡕 2부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편에는 시인의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시(獻詩) 20편이 실려 있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성스러운 그 눈빛”(정안수, 󰡔가슴에 묻은 이름󰡕)처럼 성스러운 존재이며, “어머님 이름이 지워지자/고향 빛깔은/막막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임종, 󰡔가슴에 묻은 이름󰡕)에서처럼, 의미를 생성하기도 하고 그 의미를 무화시키기도 하는 절대적 존재이다.

눈 가만 감으시고/형님 얘기 하실 적에/입가엔 웃음 짓고/눈 가엔 이슬 맺혀/피멍울 끌어안고서/평생 사신 어머님.”(돌무덤, 󰡔가슴에 묻은 이름󰡕)에서처럼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결코 소진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체득하게 된다.

 

도라지꽃 핀 돌무덤은

긴 대못이었다.

웃음꽃 벙글 때마다

어머니 가슴을 찔러

피멍울 맺히게 하는

뽑지 못할 대못이었다.

육이오 사변 통에

돌무덤에 묻혀

밤이면 부엉이 울음으로 울던 형

부엉이 울음 달빛으로 깔리던 밤

부엉이 울음 따라 나도 갈까봐

가슴에 꼭 안고서 지새우던 어머니

기억의 갈피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길고긴 한평생을 대못에 꽂혀

환하게 웃던 모습 본 적이 없다.

                               -대못전문

 

위 시의 화자는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남은 아들마저 잃을까 불안해하던 어머니의 초조를 그의 어린 시절부터 생생하게 감지해야 했다. 참척(慘慽)의 아픔을 평생 지니고 산 어머니의 아픔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의 아픔에 절절하게 공감하는 화자는 어머니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오라기는 서두르지 않는다.

가뭄에 밀리다

반달만큼 남은 마지막 물웅덩이

목숨끼리 부딪쳐 깨어지는

여기에서는

생명은 생명이 아닌 것이냐!

나는 갑자기

입술이 갈라터진 아프리카 소녀가 생각났다.

한 대접의 물로는

한 생명도 살릴 수 없지만

네가 부어주고 또 내가 붓다 보면

연못이 다시 넘치지 않겠는가.

                            -한 대접의 물전문

 

가뭄에 말라붙은 연못에서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마시려는 동물들을 보면서 시의 화자는 한 대접의 물을 붓고자 한다. 목마른 동물들을 보고 화자는 목마른 아프리카 소녀의 갈라터진 입술을 떠올린다. 연못의 물을 채울 수 없을지라도 한 대접의 물을 붓고자 하는 화자의 행동은 무의미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의 물 붓는 행동은 해오라기를 비롯한 동물들에게서 자신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임이 드러난다. 동물들의 갈증과 화자 자신의 목마름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화자의 인식은 다른 생명체들과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 마음의 실행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연못이 다시 넘치지 않겠는가하는 믿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경적을 울리면/아기 비둘기 놀랄까봐······.”(따뜻한 가을, 󰡔춤바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생명을 대하는 시인의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은 도로 위의 비둘기에게도 머물고, 메뚜기(대청호 가을)에게도 머문다.

 

눈앞에서 한 생명을 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손자 놈 어려울 땐 메뚜기 제가 도와주겠지.

손등으로 사마귀 머리를 탁 치니

메뚜기 신나게 풀숲을 뛰어갔다.

메뚜기의 등 뒤로 저녁 햇살이 모여들었다.

어둠이 가장 두꺼운 대청호 깊은 곳, 내 마음 밭에는

하늘의 밝은 별이 내려와 반짝이고 있었다.

                                                 -대청호 가을부분

 

사마귀에게 먹힐 위기에 처한 메뚜기를 살려주는 화자인 의 행동은 타자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화자는 미소한 생명체일지라도 위급한 상황에 빠진 메뚜기를 측은하게 여기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다. 엄기창 시인은 연민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작은 생명체들에게서 인간과 다르지 않은 존귀함을 발견한다.

시인은 새 시집에서 백제가 패망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인 낙화암 전설이나 조룡대 전설, 삼충사, 그리고 금강을 소재로 한 시편들을 싣고 있다. “어제보다 더 자란/소정방의 무릎 자국/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조룡대, 머리를 감다), “허공에 흘러가는 바람이더라./아프고 아픈 것들 철쭉꽃으로/피었다가 지는데/깨져버린 마음처럼/삼충사 문은 열릴 줄 모른다.”(삼충사三忠祠의 문), “신라도 당나라도 없는 세상에/삼천궁녀의 한숨이 가슴에 닿아/꽃으로 피는 사람 있을까.”(낙화암) 등의 시구들은 패망한 나라의 백성들을 향한 시인의 연민을 애절하게 드러낸다. 지금은 백제를 망하게 한 당나라와 신라도 사라졌다. 다만 그들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여인들을 애처롭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마음만이 썩다 만 모과”(낙화암) 같은 패망한 과거 위에 머물 뿐이다.

엄기창 시인의 시적 지향은 무엇보다도 자족의 삶을 향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행복, 아내의 자리등에서 시인의 시적 자아는 아내와 가족,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집에서 가지는 만족감을 노래한다. 그의 마음의 평화가 아내와 가족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평화는 외부적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그가 욕심을 버림으로써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엄기창 시인이 노래하는 자족의 삶은 참된 자기를 발견한 자가 어떠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청라

슬픔을 태우며

엄기창론 2017. 2. 24. 07:30

슬픔을 태우며

                                      엄 기 창


 

미루나무 그림자가 노을 한 자락 걸치고 있는

금강 변에 서면

품고 온 슬픔이 없는데도 가슴에서 피가 난다.

 

착한 것도 죄가 되는가!

 

백제의 산들은 왜 모두 모난 데 없이 둥글기만 해서

적군의 발길 하나 막지 못한 것이냐.

 

나라 없는 백성들은 질경이처럼 짓밟혀서

꺾여도 꺾여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역사의 속살을 가리려고

바람은

투명한 수면에다 주름을 잡아놓는가.

 

짠한 눈물 몇 종지 스스로 씻어내며

세월의 골짜기를 흐르는 금강

 

강변에 불을 피우고

남은 슬픔 몇 단 불 속에 던져 넣는다.


약력 

1975시문학으로 등단.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시집 서울의 천둥』 『가슴에 묻은 이름』 『춤바위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

<대전문학상> <호승시문학상> <하이트진로문학상> 대상 <정훈문학상> 대상

<대전광역시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시작 노트

 

나는 백제라는 이름만 읊조려도 눈물이 난다. 역사 속에서 사라질 때 슬프지 않은 나라가 있겠느냐만 공주나 부여에 가면 유독 슬픈 전설이 많고, 어린 시절부터 그런 전설에 묻혀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면 백제의 얼굴 표본이라 한다. 둥글둥글 모난 데 없이 원만한 게 서산 마애불이나 석불들의 모습과 닮았단다. 문화재 속에 드러난 백제인의 얼굴들은 모두 더없이 친근감 있고 평화로운 모습인데 왜 백제의 역사는 비극으로 인식되는 걸까. 아마도 3국 중에 제일 먼저 망한 나라가 백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백제에 관한 시를 몇 편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맨 첫 번째 쓴 시가 이 슬픔을 태우며이다. 열 편 쯤 만들어 다음 시집에 펴내고 싶다. 슬픔을 태우고 백제의 전설들을 그들의 얼굴처럼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posted by 청라

감각적 이미지로 그린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

 

 

유등천에서

 

 

열병식 하듯 줄지어선

갈대들의 춤사위도 시들해지고 있었다.

해오라기 눈동자가

물비늘로 일렁이는 여름날 오후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이었다.

내 그림자 혼자 따라와

반짝이는 외로움

 

저기 가장교 물아래 거꾸로 달리는

트럭의 바큇살마다

비누거품으로 만든 구름이 피어나고

 

발을 다친 소음騷音들은

모두 유등천으로 내려와

뿌연 물이끼로 자라고 있었다.

 

일광의 화살을 막고 서있는

버드나무 아래엔 손수건만한 구름이 하나

 

어딘가로 보내는 간절한 소식처럼

계룡산 쪽으로

새 한 마리 띄워 보낸다.


  한창 시를 공부할 무렵 나는 김광균 시인의 시에 심취해 있었다. 와사등, 기항지, 설야, 추풍귀우, 황혼가등의 시집을 꼼꼼히 챙겨 읽으며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참신하고 탁월한 감각적 표현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도 있게 형상화할 수 있겠는가를 연구하였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 “길은 한 줄기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추일 서정)” 등의 시구를 읽으며 시를 읽는 쾌감에 전율하였다.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에 담긴 시들이 비유나 상징으로 그려진 이미지 중심의 시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 시의 태동이 김광균, 정지용 등의 모더니즘 시로부터였고, 그 분들을 닮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명하던 내 시의 빛깔이 희미해지고 관념적 추상적 목소리로 노래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할 말이 많아져 이미지 중심의 묘사적 기법이 아니고, 설명을 통한 서술 중심의 시를 완성하고 만족하기도 하였다. 어느 여름날 유등천을 걸으면서 이러다는 안 되겠다 큰일 나겠다 하는 경각심이 들었다. 버드나무 아래 벤취에 앉아 한 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 머릿속에 담긴 김광균 시인의 시의 기법으로 시 한 편 써보자 하는 생각으로 유등천에서를 완성하였다.

  위 시는 언어로 그린 한 폭의 풍경화이다. “열병식 하듯 줄지어선/ 갈대들의 춤사위도 시들해지고 있었다.” 내가 유등천에 가서 첫 번째 만난 것은 갈대들이었다. 직유법과 의인법을 사용하여 더위에 늘어진 유등천변의 여름날 오후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물에 발을 담그고 물속을 노려보는 해오라기 한 마리의 눈동자에서는 물비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모두가 낯선 타인들이었다. 그 타인들 속에 느끼는 도시인의 고독을 내 그림자 혼자 따라와/ 반짝이는 외로움이라고 역설법을 통해 표현하였다.

   문득 바라보니 가장교 아래로 흐르는 물속으로 트럭 그림자가 달리고, 바큇살에는 비누그림자가 뻐끔거리며 걸려있었다. 깨끗한 것같이 보이는 물도 오염되어 있었는데 발을 다친 소음騷音들은/ 모두 유등천으로 내려와/ 뿌연 물이끼로 자라고 있었다.”라고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해 보았다. 따갑게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일광의 화살이라 은유법으로 표현해 보았고, 손수건만한 그 그늘에서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를 알리려고 대자연인 계룡산 쪽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새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응답은 아마 가지고 오지 못할 것이다. 현대인의 고독과 우수는 해결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청라

(해설)

 

자유성에 깃든 절제와 균형의 시조미학

-엄기창 시조세계

 

권갑하(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1

 

시조(時調)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편이다. 시조를 쓴다고 하면 아직도 창()을 한번 해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시조창이 이렇게 일반에 강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18세기 전후 국민적 인기를 누린 데 따른 결과이지만, 노래와 분리된 현대시로서 시조를 창작하는 시인들로서는 곤혹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시조에 대한 인식이 낮은 또 다른 이유는 서구 문화에 매몰된 20세기 근대화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의 한시만을라고 불렀던 조선시대 사대적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또다시 서구에서 들여온 자유시만을 라고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오늘을 살고 있다.

언제부턴가 시조를 창작하지 못하면서 어찌 이 땅의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자유시만을 창작해오던 시단의 중견 시인들이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화를 경험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결과이기도 한데, 어찌됐든 우리 스스로 폄하하고 외면했던 시조를 다시 읽고 쓰는 현실은 고무적이다.

시조와 관련해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문제는 자유시단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흐름이다. 폭력적 이념이 문단을 지배하던 1970~80년대를 지나 1990년대 들면서 신서정이 유행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시 경향이 젊은 세대 중심의 미래파시였다.

이들은 기존 시인들과 다른 감수성과 시학으로 중언부언과 리듬의 소멸 등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난해한 시를 창작했는데, 이에 반발해 등장한 것이 극서정시운동이다. 근본적으로는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불안감 속에서 나온 현상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논쟁의 핵심은 산문적 장시를 추구하는 젊은 시인 중심의 미래파와 응축의 짧은 시를 지향하는 중견 원로 중심의 극서정시 계열의 대립이었다. 극서정탈서정의 이러한 대립은 어떤 이즘의 충돌이라기보다 디지털과 모바일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 환경에 적응하려는 시단의 몸부림으로 읽혀진다.

논의가 여기에 이르면, 극서정시는 결국 45자 내외의 짧은 시양식인 시조와 만나게 된다. 짧으면서도 좋은 시 창작은 나름의 서정과 운율, 시적 긴장 구조를 내재해야만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짧은 시의 지향은 결국 최적화된 시의 그릇으로 빚어진 시조의 특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관점에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상에서 5~6행 정도 읽으면 페이지를 넘기는, 짧은 시가 선호되는 시대의 도래는 그런 점에서 시조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인식된다. 앞으로의 예술은 갈수록 양식의 복합화, 종합화 경향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시조는 자유시보다 용이하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시 형식적 인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환경이 이렇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엔 솔깃해하면서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는 외면하는 문화적 자긍심이 결여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청라淸羅 엄기창嚴基昌 시인은 시조와 자유시를 함께 창작하는 시력 40여년의 대표적인 이 땅의 중견 시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를 상재한다. 시조와 자유시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시혼을 불태워 오고 있는 엄 시인의 남다른 창작열에 후배 시인으로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엄 시인은 특히 자유시에서도 짧은 시를 지향하는 시인이란 점에서 그의 시세계는 주목된다. 굳이 시조라는 시 형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시는 기본적으로 절제와 함축, 균형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황하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

- 바다전문

 

3시집에 발표된 바다짧지만 깊은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끝임 없이 탁한 황하를 가슴에 품지만 바다는 금방 푸른 하늘을 닮는다는 진술은 속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던진다. 여기에씻고 또 씻어라는 자기 정화와 극복의 자세는 고결한 선비의 품격을 표출한다. 군소리를 최대한 줄인, 뼈를 깎는 절제와 함축 속에서 폭발력 강한 이미지를 선명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짧은 시 창작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어쩌면 짧은 시를 쓸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인들이 길게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짧은 시 창작에는 남다른 관조와 직관, 절차탁마의 장인 정신이 요구된다. 엄 시인이 40여 년의 긴 시력에도 불과 네 권의 시집을 출간하는 과작의 여정을 보이고 있는 것도 어쩌면 시인의 이러한 시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그동안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이미지의 서정적 작품들을 다채롭게 선보였다. 첫 시집 󰡔서울의 천둥󰡕(시문학사, 1993)에서 향토적 서정에 바탕을 둔 결 고운 서정을 직조해냈다면 두 번째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오늘의문학사, 2004)에서는 선자(先慈)에 대한 곡진한 사랑을 승화된 언어로 노래했다. 세 번째 시집 󰡔춤바위󰡕(2014, 오늘의 문학사)에 이르러서는 한 단계 부활하는 시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절제와 스밈의 시학(조재훈),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리헌석), 원숙과 정예의 파노라마(조남익) 등으로 조명된 시인의 시세계를 통해서도 엄 시인의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재훈은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으로 절제와 응축의 미학이 돋보이며, 견고한 시적 구조에도 자연 친화와 미세한 것에 대한 애정, 삶의 내면 투시 등 남다른 스밈의 친화력을 지녔다고 엄 시인의 시세계를 극찬했다.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에 대한 평설은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시조의 경우 내용 측면만 다룰 경우 정형시로서의 형식 미학을 간과할 수 있다. 과잉과 일탈의 자유시가 범람할수록 정형의 시조가 지닌 미적 의의와 가치는 주목받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정형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매력 강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 백일장 등에서 시조 작품을 심사하다 보면, 시조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을 상당수 만날 수 있다. 이는 시조 형식에 대한 교육과 해설이 제대로 뒷받침 되지 못한 탓이 크다 할 것이다.

현대시조의 형식적 조건은 3645자 내외로, 각 장은 4음보로 구성되며, 종장의 첫 구는 3·5음절로 엄격히 제한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조건만으로 좋은 시조의 충분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좋은 시조가 되기 위해서는 묘사와 진술이 조화로운 원리 속에서 특히 종장에서 반전이나 승화, 비약 등의 의미적 전환이 크게 일어나야 한다. 이런 요소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할 경우 외형은 시조지만 시조로서의 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 작품을 통해 엄기창 시조의 형식 미학과 표현 감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솔 사이로 새는 별을

소주잔에 동동 띄우고

 

보름달 곱게 깎아

떡갈잎에 한 조각 싸서

 

임 한 잔 마실 때마다

입에 넣어 주는 밤

 

산은 바람을 불러

가락을 연주하고

 

물은 하늘을 담아

별 세상을 꾸며주네.

 

임과만 둘 있는 세상

시간마저 멈춘 계곡

- 청하계곡에서전문

2수로 짜인 이 작품은 초·중장의 시상 전개와 종장의 응축적 전환이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장이 경()의 세계인 감각적 구체에 가깝다면 종장은 의미를 부여하는 정()의 세계로 집약되고 있다. ·중장이 열림의 세계라면 종장은 포괄적인 닫힘의 미의식을 창출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감각적 표현이 돋보이는데, 특히 동적인 이미지가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어느 한 부분도 율격에 걸림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는 동과 정, 감각과 관념, 펼침과 전환이 응축과 절제로 형상화되고 있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엄기창의 시조는 이렇게 응축과 절제의 전통미학과 현대적 리얼리티를 동시에 구현하는 현대시조의 보편적 창작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지적되는 고답성에서도 훌쩍 벗어나고 있다. 소위편안한 시조를 지향하면서도 시조의 정체성과 리듬감을 잃지 않는 미덕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정형의 속박에서 벗어나 현대 자유성을 수용한 장의 구분이나 장 내의 분절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3

엄기창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는 대부분의 작품이 단수 또는 2수로 구성된 데서 짧은 시를 지향하는 시인의 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시세계는 타고난 선비적 품성에다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삶의 방식과도 닮아 있어 신뢰를 더한다. 여백은 시인의 이러한 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벽을 비워 놓았더니

산이 들어와 앉아 있다

 

꽃향기

골물 소리

집안 가득 피어난다

 

채우고 채워진 세상

하나 비워 얻은 평화

-여백전문

 

시인은 비움의 미학을 지향한다. 벽을 비우니 산이 들어오고 그 속에서 꽃향기와 골물소리를 누리는 세계는 자연동화의 한 경지다. 이러한 정신은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고 노래한 면앙정 송순의 자연 순응과 안분지족의 삶을 닮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정신의 사상적 토대는 무엇일까. 바로 불교적 사유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천년고찰 마곡사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 아침에는 독경소리 저녁에는 풍경소리/ 법당 문에 귀 기울려 묵언참선”(보리수일부)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적 시심을 일궈왔다. 과잉과 과장이 난무하는 현대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우고 내려놓고 은둔하는 불교적 사유는 성찰과 함께 치유의 손길을 거느린다.

 

골 깊어 한낮부터

부엉이는 울어서

 

부엉이 울음 따라

송홧가루 날려서

 

담 없는 절 마당으로

산이 그냥 내려와서

 

여승은 염불하다

끝내는 걸 잊었는지

 

부처님은 웃다가

성내는 걸 잊었는지

 

저녁놀 익은 조각이

꽃비처럼 날린다.

-은적암전문

 

은적암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불교적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사유를 더욱 깊게 이끄는 것은 첫수의 ‘~와 둘째 수의 ‘~로 끝나는 각운 처리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첫수의 경우 각장의 각운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불교의 물아일체의 사유를 더욱 심화시키는 매우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바라밀경 한 소절이/ 구절초로 눈을 틔워// 목탁 소리 한 울림에/ 한 송이씩 꽃을 피”(영평사일부)우는 정경이나 모란꽃/ 모든 귀들은/ 법당 쪽으로만 기울, “불경소릴 들으려고/ 깃 세워 퍼덕이는 장면등도 모두 부처님의 섭리가 작동되는 불성 이입의 세계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또 다른 세계를 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육친에 대한 곡진한 사랑을 담은 시편들이다. 육친에 대한 정과 그리움은 특히 이승을 떠난 누이와 부모님을 그리는 부분에서 절절하게 표출되고 있다.

 

작은누님, 오셔요.

버들피리 불게요.

 

회재 높아 못 온다 해서

낮게 깎아 놓았어요.

 

산굽이

돌아 돌아서

아지랑이만 날리네요.

 

산그늘이

내려와서

장막처럼 드리우고

 

남가섭암 불빛이

별빛으로 일어서요.

 

밀양 땅 산자락에 누운

누님 기다리는 봄 하루.

-봄날에 기다리다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이 작품은 세상을 떠나 밀양 땅에 묻힌 누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간절히 노래하고 있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다 가시고 없는 집에// 누님이/ 좋아하던/ 앵두 혼자 익어간다.// 짙붉은 앵두 빛깔에/ 넘쳐나는 서러움.“(누님 부음 오던 날전문)은 이제 그리움을 넘어 현실적 기다림으로 승화된다. 이승을 떠난 누님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는 선물시편에서 더욱 절절하다. “고향 산 솔바람을 박씨처럼 물고 가서/ 작은 누님 무덤가에 총총히 심어놓네요./ 첫 제사 선물 삼아서 솔향기도 담아가고.// 여기 솔바람은 열무김치 맛이다, / 부모님 유택 뒤로 산 뻐꾸기 울던 시절/ 누님의 그 말소리가 저녁달로 뜨네요.”(선물전문) 이들 시편은 특히 구어체의 적절한 기법 구사로 마치 살아 있는 누님과 속삭이는 듯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2시집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시편들이 이번 시집에서는 격정을 가라앉힌 승화된 음역으로 나타나 울림의 깊이를 더한다. 특히 아버님 제삿날 눈보라 칼바람에 온몸 꽁꽁 어셔서/ 우성 지난 길가에 주저앉아 떨면서도/ 내 옷깃 여며주시던 모닥불빛 그 손길”(눈길일부)을 추억하며 아버님의 부재를 실감하는 장면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도 다르지 않는데, “한 대접 정화수에 밤하늘 별을 담아/ 새벽녘 꿈을 헹궈 자식들 복 비는 마음/ 살포시 지은 미소에 성스러운 그 눈빛”(정화수일부)으로 차원 높게 승화되고 있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는 자연스럽게 가정의 행복과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갈무리된다.

 

 열면 안겨오는

아내의 웃음꽃다발

 

곤두섰던 털 재우고

바람 묻은 외투를 벗으면

 

내민 손

반가운 눈빛에서

일어서는 봄 햇살

-가정전문

 

가정의 행복은 부부사랑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문 열면 안겨오는 아내의 웃음꽃다발봄 햇살같은 행복감을 만끽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부 사랑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춰주고/ 내가 발 틀리면 아내가 발 맞춰 주”(동반자일부)는 숨은 노력과 함께 행복한 아내 마음의 미소지킴이 되고”(미소 지킴이일부)자 하는 현실적 실천이 뒤따라야만 가능해진다.

엄기창의 시조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시장으로 상징되는 낮고 힘겨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 즉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시조가 시절가조時節歌調인 점을 감안할 때 오늘 여기에 대한 관심과 공감은 매우 중요하다. 왜곡된 면이 있지만 그동안 시조가 음풍농월의 문학으로 비판 받아왔던 것도 이러한 시대정신을 외면한, 자연서정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 녹는 시장 골목

비둘기는

맨발이다.

신발 전 털신 한 짝

사 신기고 싶구나.

종종종

서둘러 가는

머리 위엔 하얀 눈발.

 

하루 종일 찍어 봐도

허기진 건

숙명이다.

싸전의 주인은

쌀알 한 톨 안 흘리네.

구구구

나직한 신음

핏빛으로 깨진 평화.

-비둘기-시장풍경 5

 

맨발의 비둘기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초상은 하루 종일 찍어 봐도 허기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현실은 쌀 한 톨 흘리지 않는 각박한 무대이며 서둘러 돌아가는 머리 위엔 차가운 눈발이 쌓이고 나직한 신음을 토하는 아픔을 노정한다. “장마 뒤의 깊은 계곡”(주름살-시장 풍경3) 같은 주름살 깊게 파인 노점상 할머니는 그러한 현실 속의 대표적인 초상이다. 이들을 시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은 데서 우리는 엄기창 시인의 현실의식을 높이 살 수밖에 없다.

쇠락해가는 농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도 이러한 시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인은 봄 햇살 사운대도 대문은 굳게 닫혀/ 울안에 혼자 사는 살구꽃 꽃가지만/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목청 돋워 피”(빈집)고 있는 농촌을 애잔하게 바라본다. 2016년 산골마을꼬부랑/ 할머니/ 혼자/ 고샅길/ 걸어가서// 쾅쾅쾅/ 대문 두드려도// 깨어날 줄/ 모르는/ 마을로 표상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봄이 와도 꽃은 없고/ 꾀꼬리 꽃 부르던/ 목소리도 사라지고/ 고샅길/ 꼬불꼬불 돌아/ 경운기만 가고 있”(장다리골)는 풍경으로 다시 그려진다.

누구나 그러하듯, 어느 순간 세월의 깊이를 문득 깨닫게 된다. “얼룽이는 삶의 무늬/ 취해서 살다 보가로수/ 잎 진 가지에/ 칼바람이 앉아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루살이에 비하면 짧은 삶이 아니었네.

매미의 마지막 노래 초록 잎에 꽃물 들여

온 산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구나.

 

진다고 아주 지고 머문다고 아주 머무나

있음도 없음도 흘러가는 바람이라.

저 산불 꺼지고 나면 무욕無慾의 눈 덮이리.

-각성覺性의 가을전문

 

사는 일 돌아보면 있음도 없음도 흘러가는 바람임을 문득 깨닫게 되는 계절이 가을이다. 붉게 타는 단풍이 지고나면 무욕의 흰 눈이 세상을 뒤덮는다. 아마도 이순이라는 연치가 그쯤의 풍경 아닐까 싶다. “작년에 본 굽은 나무/ 올해 보니 또 새롭다./ 잔가지 자를 때도/ 망설이고 또 망설여,/ 미운 것/ 예쁜 것들을/ 구별 않고 보는 나이”(이순耳順)가 바로 그런 계절의 마음가짐이요, 시선이다. “익숙한 옷들을 벗고/ 눈발 아래 서는시간이지만 지난 세월 실을 뽑아/ 새 날의 그물을 짜며/ 또 한 발/ 못 가본 바다에/ 의 기를 세”(퇴임 이후)워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계절은 제 눈물 젖은 가랑비 울음 모아 흐르는”(낙화 기행) 시간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대에게 다가가는 길은 끊어지고/ 오늘따라 어둠은 장막처럼 가로막아// 창문에/ 비친 불빛만/ 바라보며 서 있”(우수憂愁)는 우수어린 시간일 수도 있다.

 

돌 틈마다 세월의 무게가 돌이끼로 덮여있다.

 

깨어진 기왓장에 박혀있는 삶의 무늬

 

시간이 스쳐 온 자리 스며있는 눈물과 한숨

 

무너져도 일어서는 분노를 다독이며

 

단심丹心 의혈義血이 꽃처럼 지던 그 날

 

함성이 떠난 자리에 흰 구름만 떠도네.

 

무엇을 깎아내려 밤새도록 쏟아 붓던

 

비바람 지나간 성터 수목 빛이 더욱 곱다.

 

역사는 지우려 할수록 더 파랗게 살아난다.

-전문

 

역사의식이 돋보이는 위 시조는 엄기창 시조의 또 다른 빛깔로 자리한다. 시인은 세월의 무게가 돌이끼로 덮여 있는옛 성을 통해 삶의 무늬와 시간이 스쳐 온 자리에 스며 있는 눈물과 한숨을 읽는다. 의혈이 꽃처럼 지던 그 자리엔 흰구름만 무심히 떠돈다는 진술은 오늘을 있게 한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역사는 지우려 할수록 더 파랗게 살아난다는 구절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길어 올린 울림이 큰 시적 메시지다.

 

4

 

엄기창 시인은 다양한 시적 관심사를 정격의 시조 양식 속에 조화롭게 우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시적 대상에 진솔하게 접근하는 시적 진정성으로 고답적이지 않는 현대 서정시조의 색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단수 또는 2수 내외의 짧은 시조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이는 비우고 내려놓는 불교적 사유와 일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절제된 삶의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엄기창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의 시편들이 환기시키는 이러한 진솔한 시각과 온기 어린 시선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시풍은 특유의 시적 감응력을 발휘하는데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시인의 선한 인품과도 닮아 있어 더욱 신뢰가 간다.

시인은 시조를 쓰는 이유툰드라의 가슴마다/ 햇살 씨앗 깊게 심어// 벌 나비/ 날갯짓하게/ 봄꽃 가득 피우려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겨울잠을 자는 툰드라의 가슴에 봄꽃을 피우려는 마음,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엄기창 시조가 지향하는 드높은 세계라 여겨진다.

그러나 엄기창 시가 안겨주는 이러한 따뜻한 기운은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지워도 날이 서는 아픔을 다독이”(하회탈)는 자기 극복의 고통 과정과 오늘도 웃는 연습에/ 하루해가 저”(마애삼존불)무는 노력 속에서 얻게 되는 성취라 하겠다. 어쩌면 그러한 시세계는 그리움이 안으로 익긴 겨울을 초록으로 견딘 아픔이 있었기에 얻어질 수 있는, “향기로 자욱이 퍼지”(인동초)는 그런 성취일 것이다.

시인은 대학시절부터 시인의 길을 걸어온 시력 40년의 대표적인 한국문단의 중견 시인으로 자릴 잡았으면서도 여전히 신인의 자세로 겸허하게 시를 받들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그가 줄기차게 견지해온 삶의 태도와 다르지 않으며 시의 품격을 높이는 중심적 사유로 작동한다. 어쩌면 그것은 앞에서 살핀 불교적 사유와 풀 뒤에 숨어 읊조리는 자줏빛 저 고백을/ 가다가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듣고 있는 관심과 배려의 정신이 승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낮고 그늘진 곳에 눈길을 떼지 않는 현실의식과 치열한 역사의식은 순수서정에 바탕을 둔 엄기창 시세계를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라 할 것이다.

자유시와 함께 시조를 쓰고 있는 시인답게 시인이 보여주는 시조의 문법 또한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적 사유와 감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도 다양한 빛깔로 시조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범람과 일탈 속에서 응축과 절제의 양식인 시조를 쓴다는 것은 고행을 마다 않는 수행자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그 길은 고통스럽지만 성스러운 축복의 여정이다.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엄 시인님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올리며 모쪼록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

 

posted by 청라

원숙과 정예의 파노라마

                             ― 엄기창의 시세계

조 남 익 시인

 

 

 

󰊱 화려한 당선, 그후

  청라(淸羅) 엄기창(嚴基昌) 시인이 화려한 당선을 하게 되는 것은 공주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재학중인 22세 때였다. 시전문지 시문학이 창간 2주년의 기념사업으로 실시한 전국대학생들의 전국대학시집에서 그의 아침 序曲이 장현숙(동국대 국문과)작업 Ⅲ」과 함께 나란히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전국대학시집은 시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국대학생들의 시를 모음이란 뜻으로 사용된 듯하다. 시문학의 발표에 의하면 응모가 542편이었다. 예심에 예심을 거듭하여 최종심은 김남조 유경환 두 분에게 의뢰하게 된다.

당선작 2편이 최고상이었고, 우수작 3, 입선작 42편이 시문학(197312월호)에 모두 발표된다. 이미 오래 전 일을 이렇게 상세히 적는 것은 이에 대한 기록이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엄기창은 공주사범대 수요문학회의 동인이었다. 조재훈 교수의 지도 아래 수요문학회에서는 유병환, 구중회, 최병두, 조동길, 심규식 등이 활동했다. 엄기창의 시문학당선은 수요문학회에 고무적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시문학의 당선작에는 추천이 1회를 거친 것으로 간주되는 특전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대학시집행사는 1회로 끝난다.

엄기창이 제2회 추천을 완료한 것은 당선으로부터 2년이 되어가던 시문학197511월호에서였다. 추천된 시는 아침바다, 원점에서2편이었고, 추천자는 이철균 시인이었다.

엄기창의 천료 소감을 보면 시는 나의 거울이다. 내 정신의 몰골을 비춰보며, 끝없이 반성을 되풀이하는 내 양심의 꽃이다로 시작된다. 이때의 엄기창은 ROTC로 임관한 국군 장교(중위)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엄기창과 함께 나란히 천료하게 되는 분이 있었으니 김용재였다. 그는 장시라 할 수 있는 파도 앞에서를 선보였고, 추천자는 역시 이철균이었다. 그는 당시 충남고등학교 교사였다. 한 지면에 같은 지역의 두 시인이 탄생하였지만, 정작 김용재, 엄기창 두 분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용재는 있는 그대로를 살고 싶지 않아서 무슨 변혁의 꿈을 꾸다가 학창에서 즐기던 시공부를 시작했습니다로 천료소감을 시작하고 있다.

엄기창의 당선작 아침 序曲을 보기로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을 베고 누운 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는 악보 속에서도 살지 않는

沈澱,

아침의 곧은 줄기 섬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들로 構想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鮮明하게

숲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公州師大 國語科>

― 「아침 序曲전문(시문학, 197312월호)

 

아침 序曲20대의 발랄한 젊음과 아침이라는 신선한 이미지가 결합된 환상적인 작품이다. 불과 16행의 이 시가 당선의 계열에 든 것은 노래 (풍류줄 현, 현악기에 매어 소리를 내는 줄. 또는 현악기의 준말) (소리) 등 실제의 아침보다는 음악과 숲속의 햇살을 소재로 한 생명 탄생의 신비를 배경으로 한 때문이다.

이 시에 대한 당시의 심사평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작품수준이 均等하여 優劣의 큰 차이는 없다고 여겨졌다.반면에 아쉬웠던 점은 個性主張하고 主題들도 그다지 淸新하지는 못했었다 當選을 차지한 嚴基昌作品詩語生硬이 좀 있었으나 透徹을 인정할 수가 있어 이 점을 취했다 말하자면 詩化하려한 作品意圖가 비교적 分明하고 迫進性을 내어 풍긴다.

金南祚

시가 기품을 내뿜으면서 엄정한 위의(威儀)에 있을 때 전율할 수가 있다. 삶의 고난이나 체취가 별로 묻어있지 않아도 진정성의 감동은 큰 것이다. 이는 시신(詩神)의 음성, 곧 신운(神韻)의 경지이며, 시의 절창인 것이다. 아침 序曲은 엄기창의 재능이 한껏 승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얀 돛단 배가

아침의 鍵盤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파도에 몸을 던지고

잊었던 리듬을 생각하는 갈매기.

쾌적한 바람이 햇살 층층을 彈奏한다

미역 숲에서 멸치 떼들이

五線의 층계를 올라간다.

갈매기 노란 부리가

번뜩이는 音樂을 줍고 있다.

 

2

밤내 뒤척이던

허전한 어둠의 꿈 밭

소라 껍질이 휘파람 불며

모래알 손뼉을 쳐 뿌리고 있다.

얼비친 하늘의 푸른 물살을 타는

갈매기 눈알에

잊은 리듬이 내려앉는다.

하늘 속의 빛 이랑이 내려와 앉는다.

― 「아침 바다전문(시문학197511월호)

 

아침 바다원점에서와 함께 시문학의 추천을 끝내게 되는 작품이다. 앞에서 본 아침 序曲에 못지않은 시의 신선도와 리듬 감각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시적 응시가 깊은 안정감을 준다고 하겠다.

이 시에 대한 추천사는 엄기창 씨에게서는 영원과 순간의 좌점(座點), 그리고 출발과 도착의 동시성을 보았다. 이것으로 2회 추천이 완료되어 시단에 내보내면서 앞날을 축복한다(李轍均)”는 비교적 짧은 표현을 보인다.

 

󰊲 뜻을 얻어 부활하는 시편들

  엄기창 시인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서울의 천둥󰡕(시문학사, 1993), 󰡔가슴에 묻은 이름󰡕(오늘의문학사, 2004)이 그것인데 오늘의 물량화시대에 비교적 과작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시집 󰡔춤바위󰡕3시집에 해당한다.

훌륭한 능력도 기회가 없으면 빛이 없다고 하지만, 엄기창 시인의 경우는 화려한 당선 그 후, 인문고교의 교직생활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초기의 단형에 이끌리어 시의 호소력을 등한시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제3시집에 이르러 엄기창 시인의 시혼은 시의 뜻을 새롭게 얻어 부활하는 경지를 선보인다. 초기의 재능이 대기만성의 기틀을 보임이리라. 이제 그는 고독을 깨우치는 연치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고독에서부터 지혜와 관조의 초자아로 확대된 눈을 뜬다. 시가 인간의 묵시록(黙示錄)이라면, 그의 언어에 대한 입증 능력은 서정시의 진경에 기적적인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그 구체적인 실례를 보기로 한다.

 

절 마당은

무량(無量)의 바다로 이어지고

무어라고 지껄이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 소리마저 지운다.

 

지워져서 더욱 빛나는

관음상 입가의 미소처럼

 

나도 눈보라에 녹아서

돌로 나무로 바람으로 지워지면

갈매기 소리 알아 듣는 귀가 열릴까.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 「향일암(向日庵)에서전문

 

향일암에서는 한편의 서정시로서의 직관과 품격을 갖춘 명징성(明澄性)이 매력이다. 엄기창 시인이 드디어 뜻을 얻어 부활하는 시편인 것이다. 그의 기세는 바야흐로 풍부한 서정과 사고력이 숙성되어 감을 느끼게 한다.

시인의 사명이 고도의 미적 쾌락을 일깨우는 것이라면, 고차원의 감정, 곧 정신의 성숙인 것이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해방감과 지성의 빛을 은은하게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대중적 취향보다는 고급 독자들의 미학적 가치가 뒷받침될 때, 최고의 성취를 보게 한다.

그러나, 현대의 서정시, 시의 가치관은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다. 우리가 읽는 시에서 서정시는 압도적인 비율로 많은 편이고, 독자 또한 적은 편이 아니다. 문학의 독자는 국민적 지층에 민도로서 깊이 대중화되어 있다.

서정시의 오래고 낡은 운명,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전통, 한시조차 그 운문율이나 정서까지 여전히 답습되기만 한다는 것은 무언가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반성과 비판이 있다. 세상이 변해도 서정시는 변하지 않는다는 자책인 것이다.

그렇다고 난해한 기교와 난삽한 수사를 앞세운 시들, 해독의 틈이 전혀 없는 시들, 일부에서는 아직도 서정시를 쓰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러나 고전적인 경향에서는 여전히 자연은 서정의 원형질이고, 영원한 시의 오브제라고 주장한다.

불온한 시로 말해지는 시의 혁신은 시인의 취향에 따라 언어와 수사에서, 그리고 시정신의 확산과 깊이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시는 낡은 것조차 청순한 새로운 방식으로 혁파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있다. 시가 언어의 조직이고, 그 언어는 시대의 언어라야 한다는 대전제인 것이다.

엄기창 시인의 시는 시정신의 개척과 그 입증능력의 고양이다. 그의 시정신은 보다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전통을 이어간다.

최근 그는 불교적인 상념에서 수준있는 부활을 보인다. 향일암에서」 「마곡사에서」 「부처님의 미소」 「산사」 「가을 산」 「동학사 가는 길등은 모두 이런 취향의 소산이다. 깨달음을 중요하게 작품화하고, 보이는 것과 말하려는 것의 시 본질에 대한 투철한 소명이 있다. 현대적 서정의 맥박을 느끼게 한다.

향일암에서향일암은 많이 알려진 것처럼 전남 여수시 돌산도의 금오산에 있는 절벽 암자이다. 우리 나라 4대 관음 기도처의 하나이며, 도 지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금오산은 거북이 모양이고, 향일암은 경전을 등에 모신 금거북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지우고 또 지운다는 향일암에서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종연)는 표현에 이른다. 세상의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해 가는 대자연이 뜻밖의 경이로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겉모습만 좇는 것은 바탕을 잃을 수도 있지만, 비어있는 근원으로 돌아가면 뜻을 찾아낸다는 청순한 불심의 울림이다.

다음 시는 현상적인 현실이면서도 그 깊이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있다.

 

불타는 단풍 산으로

노스님이 들어섰다.

 

산 빛 깨어지지 않고,

회색 승의가

단풍에 녹아든다.

작은 등짐에 담겨온

속세의 눈물들을

산문 앞에 부려 두고,

 

조금씩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비우고 비워 산바람이 된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가에

울던 새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저녁 어스름으로

지워지는 산들이

스님의 등 쪽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 「가을 산전문

 

고요와 비움의 경지는 청렴하고 결백한 염결(廉潔)의 고향일 것이다. 시에서는 일찍부터 사특함이 없는 정신’(思無邪)의 가치를 추앙하였고, 불교에서는 참선, 안거 등을 비롯하여 그 종교적 정진과 수행에 밀접한 바가 있을 것이다.

가을 산의 배경은 노스님과 단풍, 새울음과 저녁 어스름 등 소박하고 군소리가 거의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시의 담백과 미적 취향은 적은 것이 아니다. 담담한 풍경을 하나씩 짚어주는 간결성에는 의외로 시적 경이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본래 시는 독창성이라기보다는 미묘한 충일감에 의하여 경이감을 준다. 그것이 퍼스나(persona)의 지고한 사상의 전달로 감동을 주고, 거의 기억처럼 느끼게 한다.

일찍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서사시인이나 서정시인의 뛰어난 작품은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고 신이 들어서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문학의 천재론의 근거가 여기 있었다.

작은 등짐에 담겨온/ 속세의 눈물들을/ 산문 앞에 부려두고// 조금씩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비우고 비워 산바람이 된다, 여기의 산바람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시의 직관에서만 가능한 신비로운 초월인 것이다.

서정주는 눈썹으로 절 짓기가 그의 어법이었고 구경적 생의 형식은 김동리의 문법이라고 한 것이 있다. 서정주가 직관적이었다면, 김동리는 논리적이었다. 시와 소설의 차이였다.

시의 직관은 잠깐 사이에 고금을 살피고, 눈 깜빡할 틈에 사해를 누른다. 천리를 틀안에 넣고, 만물을 붓끝으로 꺾는다고 했듯이 종횡무진의 상상력인 것이다.

비우고 비워 산바람이 된다는 것은 이 시의 절구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흔히 문학은 제3의 눈이 있을 것을 강조한다. 자기 속에 있는 영원한 시력, 변함없는 파수꾼, 결코 자는 일 없는 목격자의 눈이 그것이다.

엄기창이 가을 산에서 보이는 것은 속세를 떠난 정신의 적멸(寂滅)이다. 언어에 의한 입증능력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창작의 매력이 있다. 시가 거룩한 것이라면, 바로 이런 경지 때문일 것이다.

시는 지식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주변이었다. 모든 학문을 포괄하며, 또한 모든 학문이 이에 근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 명징한 이미지, 알레고리 시학

  어쩌니 해도 수사술은 문학의 본질이다. 특히 시는 말이나 글을 아름답고 정연하게 꾸미고 다듬는 기교적 재능이 큰 영향을 끼친다. 수사술은 자신의 이야기를 신용있게 드러내는 언어능력인데, 정서에 대한 환기, 표현에 대한 입증능력을 뜻한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훌륭한 작품은 사상성과 예술성이 서로 등가(等價)와 조화에 있다고 한 것은 T.S엘리어트였다. 여기의 예술성이란 바로 수사술을 지칭한 것이다. 수사의 세련성, 거시적 가치의 심미성, 독자적인 문채(文彩) 등은 대가들의 명작에서 접할 수 있다.

엄기창 시인의 언어는 비교적 명징하고 간결하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단형으로 빛을 내었고, 2시집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 세월을 주로 단형에 몰두한 감이 있다.

현대시에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이미니즘, 이미저리(여러 이미지들의 집합적 명칭) 등은 낯익고 흔한 용어들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애매성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저리만 해도 그 적용 범위는 시의 독자들에게 경험된다는 심상’(이미지)으로부터 시의 요소에 이르는 총체적인 데까지 달한다. 이미저리는 비유언어, 곧 은유와 상징을 가장 광채있는 부분으로 보며, 모순과 충돌하는 언어를 수용함으로써 탄력적인 현대시의 규범에 이른다.

엄기창의 단형에서 가시를 보자. 그 이미지가 선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볼멘소리 아내의 노여움과 탱자나무의 가시가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숨기다가 숨기다가/ 무심코 튀어나온/ 아내의 볼멘소리처럼// 수줍게 고갤 내민 탱자나무 새순에/ 가시/ 하나의 불과 42자의 단형이다.

이미지란 말로 만들어지는 그림이다. 한편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는데, 그것은 시를 구체화할 때 가능한 것이다. 가시는 구체화된 한 편의 이미지이며, 매우 예리한 바가 있다.

 

물총새의 눈동자가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 「황혼 무렵전문

 

황혼에 물총새가 총알처럼 날쌔게 물속의 먹이를 낚아채는, 물고기의 사냥을 소제로 한 시다. 그런데 단순히 사실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여러 해설적의미장치를 배치한다. 그것은 곧 풍경적 묘사가 아니고, 시인의 의도적 철학과의 연쇄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1),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2),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4) 등이 그것인데, 단말마적인 상황이 중후한 시의 의미로 채색된다. 변화된 시의 기법으로 진보적인 수사술일 수도 있다.

물총새의 냉정한 살기를 돌의 적막’ ‘바위의 응시라고 한 것도 그만의 비유라고 하겠다.

30년대만 해도 시는 풍경 등 외면적인 감각에 더 많이 열중했다. 관념이나 심리적 사상까지도 시의 회화성으로 바꾼 것이 김광균(1914~1993)이었는데, 결국 그의 시에는 사상이 스며들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예술적 표현이란 마음 깊은 곳에 접하는 일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상성은 도저히 경시할 수 없는 문제로 대두된다. 황혼 무렵은 약육강식의 구도이지만, 냉정한 대자연의 근원인식에서 포용된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다.

알레고리(allegory)의 서양 원어의 뜻은 다른 것을 말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우화(寓話) 우의(寓意) 등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라 할 수 있고, 교훈적 풍자적인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빗대어 넌지시 비추어 쓰는 수사법인 것이다.

우의소설(寓意小說)에서는 빗대어 쓴 것이 이야기가 되겠지마는 시에서는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나게 된다. 내용의 음영이 비유나 설명이 겉으로 드러난 이상의 숨은 내용이 암시되는 것이다. 가령 대부분의 속담은 이런 전형에 속하는데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등이 그러하다.

알레고리는 우화법 풍유법 우유법 등의 번역을 볼 수 있다.

엄기창 시인의 첫시집의 서울의 천둥이나 등은 원관념은 드러나지 않고 보조관념으로만 된 알레고리를 본다. 서울의 천둥은 너무도 복잡한 서울에 대한 위기의식의 풍자가 천둥이고, 이의 원관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은 사랑의 원관념이 보조관념만을 거느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제3시집에서도 파계(破戒)」 「똥을 묻으며」 「맹인(盲人)의 그림 보기」 「바다등은 작품의 의도가 따로 있는 작품들이다. 알레고리의 시학은 지혜의 소산이며 의도된 방략(方略)’의 작품이기 때문에 주제가 너무 선명할수록 작품성은 떨어지게 된다. 예술성을 중시할수록 세련된 표현을 취한다. 사실 주제가 정신적 도덕적 역사적 또는 정치적으로 너무 표면화될 수는 없다.

엄기창의 단형인 바다를 보기로 한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는 것이 전문이다.

광대한 바다의 맑은 물이란 실은 황하가 그의 누런 물을 씻고 또 씻어 맑게 되었고 하늘을 닮은 것이라는 이야기로 교훈적인 내용이다. 사회의 악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 오히려 나의 인격적 성장에 좋은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이 시는 가르친다.

이솝우화는 가장 널리 읽히는 대중적 알레고리로 되어 있다. ‘동물 우화는 특히 그 교훈이 직설적이다. 가령 포도 우화에서 여우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가 없다고 핑계대는 것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엄기창의 맹인(盲人)의 그림 보기에는 맹인 지팡이 짚고 미술 전시회 가네”(2)로 이 시가 진행한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하나밖에 모르는 놈들/ 맹인은 산수도에서. 우주를 보네// 앞을 못 보아서/ 더 큰 세상을 보네”(4.5)로 끝난다.

대부분 사람들은 두 눈을 가지고서도 하나밖에 못 보는 놈들이지만, 맹인은 오히려 더 큰 세상을 보네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는 맹인의 심안(心眼)을 예찬하면서 세상을 질책한다. 아이러니가 섞인 날카로운 알레고리이다.

엄기창 시인은 정연한 시작법에 골몰한다. 이 난해시가 판치는 시대에 적은 듯 뜻을 얻고 표현의 정도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 겸허한 선생님이자 시인의 자아가치

  시인에게는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적으나마 속내 깊은 자존심 같은 것이 숨어 있다. 시인은 일찍부터 시인은 세계의 마음이다또는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입법자이다.” 등을 읽으며 시를 쓴다.

시인들은 귀기(鬼氣)가 서려있는 보들레르의 새로운 전율적 창조27세로 요절한 중국 중당기의 이하(李賀)의 시편들도 조금씩은 공부한 터이다. 국내의 고전적인 시인이나 작품은 거의가 학교 교육에 들여온다.

시는 항상 속세와의 일정거리를 둔다. 속세란 우리의 삶이 사는 늪이지만, 지고한 문학의 관조를 위해서는 그 흙탕물을 다 뒤집어 쓸 수는 없다. 설령 죽음과의 슬픔이 있어도 작품에서는 고급스럽게 녹여 놓는다.

장자의 말처럼 신발이 맞으면 신발의 존재를 잃는다는 것은 정신적 달관과 조화가 얼마나 기초적인가를 알게 한다. 예술이란 필연적으로 소아의 세계가 아니라 대아적인 소명의식이라야 공감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엄기창 시인은 전형적인 그것도 공주가 낳은 시인이다. 온후한 그의 모습을 보면 진선지인(眞善之人)이란 바로 저런 사람이겠지 한다. 근본이 착한 사람, 그늘이 없어 보이는 얼굴인 것이다.

조재훈 교수는 첫시집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엄기창 시인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의 원고를 통독하다 보니 그는 아직도 유년의 고향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느릿한 말씨와 부처님의 미소인 듯 따사로운 그의 소리 없는 웃음이 그의 사람됨과 문학의 성향을 모두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겸허한 순결성이라고나 할까? 노자가 일찍이 갈파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처럼 낮은 데서 표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엄기창이란 선생님이자 시인이다.

조재훈 절제와 스밈의 시학

엄기창의 이런 바탕은 첫시집에서 연번호가 없는 고향연작시 5, 금강2편이 나온다. 2시집에서는 부제 思母十題에 의한 모친의 장례에 이르기까지의 10, 그리고 시의 제목에 공주, 대전, 공산성, 대청소, 계족산, 현충원, 계룡산 등의 지역 지명들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시가 공감성이 적은 소아적인 소재나, 사사로운 편견에 갇힌다는 것은, 시의 소주제에 스스로 갇힌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는 엄기창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의 시가 최소한의 공공성, 대아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지 않고 편견의 사사로운 유희로 쓰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는 삼국유사를 탐독하면서 시의 구상을 다듬는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시집 󰡔신라초󰡕 󰡔동천󰡕을 비롯하여 그의 명시들이 이런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엄기창 시인의 경우는 그의 겸허한 순결성의 자아가치에서 햇빛 같은 시의 구원을 본다. ‘자아가치는 천지만물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주체인 자아가 성스러운 만족·보상·탕감 등의 태생적 경지를 소요하고 있음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선지인이었고, 공리적인 세상에서 높은 초월의 인성적 감동으로 시의 질을 잡는다.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

 

경적을 울리면

아기 비둘기 놀랄까봐…….

 

산을 오르다가

허리 구부러져 누운 들국화를 보면

발을 멈추고 튼튼한 이웃에 기대어 준다.

 

가벼운 바람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잠시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내 따스한 마음 머물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

 

단풍잎 붉은 기운이

핏줄을 타고 들어온다.

바람은 차도 가을은 따뜻하다.

― 「따뜻한 가을전문

 

따뜻한 가을은 역시 뜻을 얻고 있는 작품으로 따뜻한 시인의 마음이 곧 깨끗한 시가 되었다. 비둘기들이 놀랄까봐 차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든가, 등산길에서 구부러진 들국화를 세워준다든가 등은 쉬운 일 같으면서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 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6) 하고 시인은 나의 온기에 대해서 깊은 뜻을 헤아린다. 이런 마음씨를 자비심이라 할 수 있고, 불성이라고들 할 수 있겠지만, 시인은 일상의 생활감정에서 찾아낸다.

시의 표현이 순수하고 내용이 성숙된 것을 본다. 바로 완숙의 세계인 것이다. 예술을 신성시한다든가, 마술적 열광을 높이 사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가 복잡할수록 존경스럽고 성화(聖化)와 같은 감화의 순치 또한 얼마나 값진 일이겠는가.

본래부터 시는 진선미(眞善美)였다. 인간이 이상으로 삼는 참다움·착함·아름다움인 것이다. 셸리는 그의 시의 옹호에서 시는 지복지고(至福至高)의 마음의 지고지복(至高至福)의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한다. “지극히 높고 지극히 행복한 기쁨의 경지에서 시는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 정신적인 극치의 환희인 것이다.

아름다움에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이 있음이다.

시 한 편을 더 보기로 한다.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

 

산밑 낮으막한 등성이에서

불꽃을 피워 올려

산벚꽃 연분홍으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

온 산을 덮는 봄날의 환희와

 

비온 날 아침 떡시루를 찌듯

뭉게뭉게 일어나는 골안개로 온 몸을 가렸다가

한 줄기 햇살로 맨살 드러내어

진초록 함성 하늘 향해 이글거리는 여름날의 열정,

 

늦여름 초록의 밑둥에서 조금씩 배어나와

색색으로 물들였던 산의 간절한 이야기 떨어지고

나무 가지마다 침묵으로 앙상한

저 가을날의 고독

 

시루봉 이마 하얀 눈으로 덮이고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옅어졌다가

어느새 수묵의 함초롬한 자세로 식어있는

겨울날의 허무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

― 「유리창을 닦으며전문

 

유리창을 닦으며는 같은 계열의 엉겅퀴꽃의 노래와 함께 활성적인 시인의 인식과 정서가 녹아든 원숙함을 보인다. 기교적으로도 함축적이다.

6연의 이 시는 처음과 끝에서 수미상관의 묘미를 응용한다.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첫연),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종연)가 그것인데, 전체적 균형을 잡/아준다. 대전의 명산인 보문산의 비밀’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의 발상법이 이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엄기창 시인은 역시 자질과 열정을 갖춘 시인이었다. 화려한 당선 그 후, 그는 이상하게도 영광의 상처처럼 너무 오래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단형에 얽매였던 시의 틀을 과감히 깨고, 대기만성의 원숙과 정예의 파노라마를 일으키며 기적적인 부활을 보인다.

그는 시의 뜻을 얻었을 뿐 아니라 깨끗한 서정과 함께 시를 응용하는 시력도 함께 회복한다. 그는 시의 광야에서 선지자의 넋을 마음껏 외칠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을 넘기도 어렵지만, 자신을 넘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엄기창 시인은 무한한 시의 세계를 끝없이 동경하며 그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내공이 있었기에 부활될 수가 있었다. 더구나 그의 시는 평이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메아리가 있다. 현대시의 리듬과 표현기교, 그리고 전반적인 예술성의 수준을 유지한다.

릴케는 일생의 10편의 좋은 시를 쓰기 어렵다.”고 했다. 겸허하고 순결한 엄기창 시인의 영혼과 열정을 축복하면서 그의 앞길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다.

 

posted by 청라

<해설>

 

절제와 응축으로 피어난 생명 탄생의 신비

                                           엄 기 창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序曲」 전문

 

  위의 시 「아침 序曲」은 1974년 월간「時文學」지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백일장’에 장원으로 선정되어 『時文學』지에 초회 추천을 받은 시이다. 내가 붓을 꺾지 않고 지금까지 시의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침 序曲」의 장원 입상이 그 때 마침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내 자신에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序曲」에서 용기를 얻어 이 날까지 탈선하지 않고 꾸준히 시를 썼고, 부족하지만 두 권의 시집도 상재하였다. 이 시 이후에 태어난 시들은 이 시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 시의 자식들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당신의 대표 시가 무엇이오?”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침 序曲」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태화산의 새벽 숲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맑고 신선하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나는 공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선생님이 사시던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숲길을 거닐면서 태화산의 새벽 숲에 매료돼 버렸다. 햇살이 번지기 전의 차갑도록 청신한 공기와 막 잠에서 깨어 “찌르르 찌르르” 울고 있는 나지막한 새들의 울음소리. 어둠 속에 잠들었던 새 생명이 여명 앞에 실체를 드러내어 약동하는 생명 탄생의 신비를 나 혼자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숲에서 벌어지는 생명 탄생의 모습을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참신한 시를 쓰고 싶었다. 이 세상 그 어느 생명보다 은밀하게 태어나 새벽 숲에 햇살처럼 번져가는 생명을…….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수요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시를 보는 안목과 시를 쓰는 실력도 많이 성장하였다. 그 때 나는 드디어 오래 간직했던 기억의 창고에서 그 때 그 마곡사의 새벽 숲에서 느꼈던 생명 탄생을 훔쳐보던 감흥을 시로 형상화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조재훈 선생님은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작품 해설 「절제와 스밈의 시학」에서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재훈 선생님의 평대로 이 시는 극도의 응축과 절제를 통해 만들어진 여백 속에 너무도 정갈하고 신선하여 신비하기까지 한 태화산 새벽 숲에 태동하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가)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나)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다)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라)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위의 (가)~(라)에서 ‘音’, ‘노래’ 등은 ‘생명’을 상징하는 시어들이다. (가)에서는 이미 만들어져 악보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고, (나)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의 목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 (다)에서는 가장 곧고 성센 가지를 골라 생명이 태동하는 모습을 (라)에서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더 이상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언어의 절제 속에 당시 심사위원장이셨던 김남조 선생님께서 “생경할 정도로 참신한 이미지와 그를 받쳐 주는 탄탄한 구조가 너무 아름다워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으로 선정하였다”는 말씀대로 생명이 탄생하는 숨막히는 순간을 투명하게 그려내었다.

  서정주 선생님은 생명 탄생의 신비를 지켜보는 감흥을 그의 시 「국화옆에서」에서 “노오란 네 꽃잎이 필랴고/ 간밤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라고 노래하셨고, 이호우 선생님은 그의 시조 「개화」에서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고 노래하셨다. 고요한 새벽 숲, 새의 목 너머에 숨어있던 새로운 생명이 소리로 튀어나와 햇살처럼 평화롭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는 감흥을 나는 너무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일까!

  나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의 벽에 이 시를 시화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마다 읊조리며 기도한다. 어린 시절 태화산 새벽 숲에서 보았던 새 생명의 태동과 그로 인한 평화가 이 시로 인해 우리 집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평화를 주기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