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7시집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청라 2020. 5. 17. 10:09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지난 생일에 내가 사준

진주 반지의 영롱한 빛깔도 흐려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여섯 살 손자의 이름도 낯설어지고

가끔은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자다 말고 문득 일어나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간절한 주문呪文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시문학202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