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꽃밭에서


나팔꽃 꽃밭에서

淸羅 嚴基昌
덩굴이 뚝심 있게 감아 올라간
나팔꽃 꽃밭에서
네 소리의 빛깔을 투시하기 위해
호흡을 멈춘다.
먼 길을 돌아와 꽃이 된
나의 말이여
지난 가을 까만 씨로 떨어져
찬바람에 갈리고 갈린
나의 말이여
송이송이 여단 나팔마다
소리소리 일어나 함성이 되거라
나비 한 마리 부르지 못하는
꽃술 밑에서
빈 씨앗으로 조그맣게 익어가는
나의 말이여.

posted by 청라




淸羅 嚴基昌
한 여자가 끊고 지나간
길,
눈발이 날린다.
만월처럼 둥근 배가 쫓아와서
앞길을 막아서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절의
끈 한 편에
풀꽈리처럼 조그맣게 매달린
내 금간 하루,
햇빛을 막아서는
저 질긴 끈을 자를 칼은 없는가,
자동차 안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며
그 강한 주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posted by 청라

만추


만추

淸羅 嚴基昌
개살구빛 햇살들이 미꾸라지처럼
구름 속으로 파고 든다.
잔광이 비늘처럼 잘게 부서지는 하늘로
제비 한 마리 높이높이 차올라
몇 올 빛가루를 줍고 있다.
점점 낮아오는 北天의 껍질 밑으로
야윈 풀벌레 울음이 흐르고
부리 끝이라도 부빌 溫氣를 캐러
구름 속으로 들어간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떨고 있는 빨래줄마다
노랗게 돋아나는 한숨
눈물이 흔한 단풍나무가
화장을 지운다.
posted by 청라

단풍잎

수필/교단일기 2007. 4. 27. 09:00

단풍잎

淸羅 嚴基昌
 내가 첫 발령을 받아 부임한 N중학교에서 나는 처음 화철이를 만났다. 화철이는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조용히 있다가도 제 기분에 맞지 않으면 수업시간에도 막 소리를 질렀다. 중학교 2학년인데도 한글을 전혀 몰랐고, 제 이름도 ‘이효ㅏ철’이라고 썼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화철이를 무시했다. 그래서 화철이는 늘 모든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혼자 살아가는 이방인이었다.
 체육시간에도 화철이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혼자 놀았다. 친구들은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였지만 늘 멀건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화철이를 자기 팀에 끼워주지 않았다. 하기는 헛발질만 하고, 때로는 자기 골문으로 볼을 차는 놈을 자기 팀에 끼워줄 사람이 있겠는가?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서 어슬렁거리며 교실로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이제 급우들도 화철이 일이라면 아무리 웃기는 일이라도 웃지도 않았다.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화철이는 우리 학급에서 있어도 없는 존재였다.
 한 번은 철봉 아래 모래밭에서 혼자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화철이를 불렀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왜? 왜 재미없어?”
 “그냥 재미없어요.”
 “누가 우리 화철이 때리는 사람 있어? 괴롭히는 사람 있어?”

 화철이는 다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화철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야?”

 화철이는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애들하고 놀고 싶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탁 막혔다. 불쌍한 놈. 화철이의 표정에는 애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소망이 간절하게 나타나 있었다. 머리가 부족한 놈에게도 외로움은 있는 거였다.
 나는 쉬는 시간에 당장 반장을 불렀다. 그리고 화철이 이야기를 했다. 그 애가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지를 이야기 하고, 같이 놀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그 다음부터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뛰어다니는 화철이를 보았다. 뛰는 것은 어설퍼도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학급의 모든 일에 화철이를 참여시켰고, 그 때부터 화철이는 진정한 학급의 일원이 되었으며,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 늦게 등교하는 일도 줄어들고, 수업시간에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하루는 다시 화철이를 불러 미리 준비한 사탕을 주면서 물어보았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화철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즐거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뭐가 좋은데? 화철이 뭐가 그렇게 좋아?”
 “애들이 잘 해줘요. 축구 재밌어요.”

 나는 나의 말 한 마디에 그렇게 화철이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학급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내 조그마한 관심이 외로움의 그늘 속에서 즐거움의 양지쪽으로 한 아이를 꺼내 주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기뻤다.
 가을이었다. 교정의 나무들에도 가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퇴근을 하려고 교문을 나서는데 담 뒤에 숨어있던 한 아이가 뛰어왔다. 화철이었다. 내 손에 무엇을 쥐어주고

 “선생님, 좋아요.”

 발음도 분명하지 않게 중얼거리고 뛰어갔다. 어설프게 싼 종이를 풀어보니 곱게 물든 단풍잎 한 가지였다. 나의 온 몸에 짜르르 환희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교사의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이 가을의 모든 아름다움이 화철이가 주고 간 단풍잎에 모여 고여 있는 듯했다. 억만금의 선물보다 더 귀하고 고마웠다.
 뛰어가는 화철이의 등에 대고 나도 마음속으로 외쳤다.

 “화철아, 나도 사랑해”

<한밭수필>2016(8


posted by 청라

제주해협


제주해협

淸羅 嚴基昌
섬들의 발꿈치를 벗어나자
바다는 막막하게 지워져버린다.
북빙양을 돌아온 흰 말떼들도
보이지 않는다.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 속으로
발자욱을 찍으려 하루내내 오르내리던
갈매기 노래소리도 보이지 않는다.
소금기 서걱이는 검은 바람에 쫓겨
사람들은
좁은 선실 속으로 숨어들고
하늘과 맞닿은 광막한 여백
멈춘 시간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먼 섬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이여!
가보지 목한 곳의 따스한 이야기들이
불빛을 통해 건너오니
어둠은 나를 지우지 못했구나
텅 빈 공간 속에 말간 공기로
허허로운 어둠으로 녹아들지 못했구나
저녁에 마신 한잔의 소주 열기로
몽롱히 가라앉는 人事의 그림자
검은 장막을 접고 배는 달리고
새벽이 오면
댓순처럼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처럼
나의 무릉도원은 짜릿하게 가까워온다.
posted by 청라

얼룩


얼룩

淸羅 嚴基昌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러기 한 마리
그리고 지나가는 하얀 금 위에
그리운 자장가 소리 철렁대며 걸리고
천 가닥 넘어 쏟아지는 달빛 이랑
이제는 아무도 올 수 없는 길로
어릴 때 내 빈 몸 빈 마음의
작은 날개들이
푸득대며 날아오르는 청랑한 소리.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밤새워 짠 베틀로는
한 파람의 겨울도 막을 수 없는
귀뚜라미의 허전한 발
걸어가는 발 밑에 눈뜨는
자잘한 이야기들이
진하디 진한 얼룩으로 남는다.
posted by 청라

풍경


풍경

淸羅 嚴基昌
찢어진 꽃잎처럼
나비 한 마리
길 가운데 누워
파닥이고 있다.

구둣발 하나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구둣발 둘이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비명을 묻히고 무심히 돌아가는
구둣발
하나

셋......

동양백화점 피뢰침에
죽지를 꿰어 주저앉은 낮달
기침하는 도시를 비추다
골목으로 눈을 돌리면

나비의 문신 가슴에 새긴
내게서만
나비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posted by 청라




淸羅 嚴基昌
박꽃 아래엔
박꽃만한 그늘이 하나 버려져 있다.
어둠의 갈매기들이
눈부시게 하얀 알을 낳는다.
은밀한 세상을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
외로운 섬 하나 남아
진초록 비밀을 가꾸어 있다.

달빛이 수평으로 파도쳐 온다.
펄렁 젖혀진 기슭에
숨죽여 누워 있는
비밀의 속살이 보인다.
가냘픈 대궁이 위태로운 섬
풀려진 달빛 속에 묻혀 있는 섬
지켜야 할 어둠으로
포만한 배를 끌고 길게 누워 있다.
posted by 청라

山水圖


山水圖

淸羅 嚴基昌
꾀고리 울음소리가
개나리꽃 가지에 불을 붙이고 있다.
햇살이 양각으로 박아 놓은 老翁의 낚시 끝에는
청청한 산그림자가 걸려 있고
누군가 넘어 오라는
아스라한 고갯길 따라
저녁 연기로 골골이 잦아드는
저녁 골안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조롱조롱 열린 귀에는
온종일 골물 소리만 들려오고
투명하게 벗어 오히려
속 깊은
하늘 한복판에
예닐곱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난
맨드라미만한 구름 한 송이
posted by 청라

황혼 무렵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19. 19:13

황혼 무렵

淸羅 嚴基昌
물총새의 눈동자가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