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매듭을 푸는 소리 -서편제를 읽고

독후감 2007. 4. 13. 09:00

<독후감>

한(恨)의 매듭을 푸는 소리
‘서편제’를 읽고


淸羅 嚴基昌
 한(恨)이란 것이 과연 인간의 마음을 모질게만 만드는 것일까? 모질게 만들어 세상을 저주하고, 천둥과 벼락으로 발톱을 세워 광명의 땅 곳곳마다 어둠을 심는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것일까?

 나는 오래 전부터 원한으로 악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러한 의문에 잠겨 있었다. 한(恨)조차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시킨 ‘소월 시’를 보며, 한이란 것이 결코 우리의 삶을 거칠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슴푸레 느낄 수 있었으며, ‘서편제’를 탐독하고 나서야 한의 껍질을 벗기고 보면 질기고 따스한 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가 한(恨)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해학과 익살로 승화시켜 한(恨) 자체를 즐겼던 우리 조상의 숨결이 ‘서편제’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자줏빛 낭만으로 승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붓아비로 인해 하나뿐인 어머니를 빼앗긴 소년.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북 잡이 노릇을 하며 의붓아비를 살해할 목적으로 유랑생활을 하던 소년. 은밀한 살의가 움터 오르다가도 의붓아비의 천연스럽고 유장한 노랫가락 소리만 들으면 도무지 힘을 쓸 수 없었던 이 소년은 애초부터 소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의붓아비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원을 풀 기회를 주었음에도 살해할 뜻을 버리고 의붓아비와 어린 누이의 곁에서 -사람을 홀리는 노랫가락 곁에서 자취를 숨기고 떠난 것일 게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아비를 죽이고 싶어 한 부질없는 자신의 원한을 후회하고, 아비와 누이를 버리고 떠난 자신의 비정을 속죄하며 누이를 찾아 남도 땅을 헤맬 때, 나도 남도 땅 산천 골골 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 속에 묻혀 이 사내와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모처럼의 휴일에 영화감상을 선택하지 않고 책을 펴든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만족해했다. 장장 마다 펼쳐진 문장의 유려함도 놀랍거니와 서너 줄 읽고 강 자락 휘어진 남도의 어느 산길이나 벌판과 바다를 상상해 보고, 눈 먼 여인의 한 맺힌 노랫가락 소리를 귀보다 훨씬 깊은 마음으로 듣는 재미를 어찌 영화가 따라올 수 있겠는가. 보성 땅 어느 공동묘지 옆 주막에서 여인의 애절한 소리에 맞춰 북 장단을 칠적에, 오랫동안 잊으려 애를 썼으나 결국은 버릴 수 없었던 소리의 얼굴을 다시 대면한 사내의 운명. 이 운명에 대한 깨달음이 혼이 담긴 소리를 가꾸기 위해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부은 의붓아비의 집착마저 이해하게 된 원인이 아닐까. 한(恨)이란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는 사내의 말처럼, 아비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눈먼 여인은 일찍부터 아비를 용서하고 그 용서로 인해 한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소리무덤 속에 아비의 소리를 묻고 소리의 빛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던 여인. 가끔 마루 끝 볕발 속으로 나와 앉아 보이지 않는 눈길을 들판 건너 먼 산허리께로 내던진 채 끊임없이 무엇을 기다리던 여인. 이 여인이 기다리던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장단을 맞춰주던 자기 소리의 한 쪽, 바로 어느 산굽이에서 용변을 보러가듯 스르르 없어진 추억 속의 오라비가 아니었을까. 탐진강 물굽이 휘돌아 흐르던 장흥 어느 주막에서 이 오누이가 서로 만나던 저녁 나는 인간적 호기심으로 가슴을 설레었다. 서로를 확인하고는 오열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 것인가? 아니면 사내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암으로 가라앉았던 살의가 다시 이해와 용서라는 얇은 벽을 태워 이빨을 드러낼 것인가? 그러나 사내는 북채를 잡고 여인은 소리를 하며 동틀 무렵까지 지내다가 싱겁게 헤어지고 말아다. 여인은 소리로 울며 장단을 통해 사내가 오라비임을 확인하였고, 오라비는 여인이 누이임을 알면서 누이의 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햇덩이 같이 일어나는 살기를 누르며 사내 쪽에서 몸을 피해 도망친 것이다. 누이의 한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몰래 떠나간 오라비나, 제 소리를 아껴주는 오라비의 한을 제 것과 한가지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이나 속세의 때에 전 나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는 듯 느껴졌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행로에서 한과 만난다. 한의 매듭에 옭혀 허우적거리다가 인생을 불행하게 끝내는 사람도 있고, 그 매듭을 깨끗하게 풀어내어 사랑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한의 매듭을 풀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용서하는 일이다. 남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을 용서하는 일이 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편제’를 덮고 아련한 책 속의 향기에 취한 이 밤, 나는 문득 남도 행 열차를 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날의 주막은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문명에 덮여 흔적조차 찾기 어렵겠지만, 뚝심 있게 남도 가락을 지키며 그 소리를 통해 한의 매듭을 풀던 여인을, 그 사내를 남도 땅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을 듯도 싶다.    


posted by 청라

죽음의 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4. 12. 09:00

죽음의 의미

淸羅 嚴基昌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연탄가스로 죽었다. 한여름내 등 밑을 적셔왔던 습기를 없앤다고 연탄을 피워놓고 잠든 사이에 죽음의 신은 그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끌고 가 버렸다. 팔팔 뛰던 사람이 밤사이에 웃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도 못하고, 나를 보아도 반갑다 말 한 마디 못하는 한 덩어리 굳은 물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 동안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posted by 청라

가슴으로 사랑하기

수필/교단일기 2007. 4. 11. 09:00

가슴으로 사랑하기

淸羅 嚴基昌
 상담실에 근무하면서 삶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학년 교실을 순찰하고,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학생들의 자습을 감독하던 학년부장 시절의 일들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대전에 온 이후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분주한 나날이었다. 22년 동안 3학년 담임 11년, 3학년 부장 3년, 1, 2학년 부장 2년 등 16년을 일찍 퇴근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렇게 전깃불 아래서 태워 날려 버렸다. 분주한 만큼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얻은 여유 있는 시간에 나는 철저하게 자아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일만 해도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김 선생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고 하길래 궁금한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중간고사 일 중간에 휴일이 이틀 끼어 있다고 나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올려놓았다. 교직에 30년 넘게 몸담아 있었지만 이런 욕은 처음 들어보는 까닭에 참으로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학사일정은 내가 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고사 일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왜 나를 향해 욕을 했을까?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놈이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방학 중에도 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일찍 오는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 있는 교실 열쇠를 못 꺼낼까 걱정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신새벽에 출근하였다. 학교를 떠나 있으면 늘 아이들 걱정을 하였으며, 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었다. 아이들에게도 나의 이런 마음이 전달되었다 생각했고,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존경받는 교사일 것이라고 착각을 하였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사랑하였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체했던 것이 아닐까. 예쁜 아이는 예뻐하고, 미운 아이는 그냥 미워했었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사는 머리로만 아이들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진정 감동시키고 바르게 자라는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posted by 청라

호빵맨

수필/교단일기 2007. 4. 10. 09:00

호빵맨

淸羅 嚴基昌
 D고 시절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내 별명은 ‘호빵맨’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얼굴에 양 볼이 붉어 만화영화에 나오는 호빵맨을 닮았단다. 나는 이 별명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별명으로 붙여줬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별명으로 나를 불러주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
 D고에 가던 첫해에 3학년 문과 여학생 반 담임을 했다. 시내의 다른 학교에 비해 성적도 뛰어나게 좋았지만, 극성스럽기도 또한 지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사이좋은 친구사이인데도 질투심은 또 왜 그렇게 많았던지……. 3월 첫날 누군가가 예쁜 꽃병에 꽃을 꽂아놓았다. 다음날엔 어떤 놈이 그 꽃병을 치워버리고 자기의 꽃병에 꽃을 꽂아 놓는다.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가져다 준 쟁반 위의 컵들도 수시로 바뀌었다.
 4월 초였다. 처연하게 지는 매화꽃 옆에서 백목련 탐스럽게 피어나는 오후였다. 부반장 놈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인형을 하나 들고 왔다.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이었다. 배는 불쑥 나오고, 얼굴은 호빵처럼 둥글둥글하고, 양 볼은 볼그레하다. 인형을 내 옆에 같다 대더니

  “선생님, 똑같아요.”
  “뭐가?”
  “선생님하고 이 인형요.”

 모여 서서들 기를 죽이려는 듯 까르르 웃어댄다. 나쁜 놈들, 내가 뭐 저렇게 웃기게 생겼다고. 책상에 내려놓는 인형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정을 했다.
 인형을 갖다 준 것이 음모였다는 것을 나는 다음날부터 금방 알아차렸다. 나한테 혼이 나거나 나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면 나 몰래 와서 인형을 팼다. 심지어 어떤 놈은 호빵맨 인형의 손목에 세균맨을 채워놓고 갔다. 교무실로 들어오다 호빵맨 인형을 때리는 놈을 보았지만, 나는 못 본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놈들의 애교 있는 반항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잘도 연락을 하더니 졸업 후엔 전혀 소식이 없다. 그놈들이 지어준 별명은 Y고로 건너와 이 곳 학생들도 부르고 있지만 고놈들 소식은 알 수가 없다. 호빵맨 인형을 내 집안의 책상 위에 소중히 간수해두고 아이들이 그리울 때면 어루만져 보며 생각한다. 지금 고놈들 시집간 놈은 있을까?    

posted by 청라

보리밥

수필/서정 수필 2007. 4. 9. 09:00
 
보리밥

淸羅 嚴基昌
 집 근처에 보리밥을 잘 하는 식당이 새로 생겼다기에 모처럼 외식을 시켜준다고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아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별미로 먹는 보리밥 외식에 대체로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모처럼의 외식에 큰 기대를 가지고 따라 온 아이들은 불평이 대단하였다.

 “아빠, 왜 이렇게 꺼끌꺼끌해? 이것도 먹는 음식 맞아요?”

 “미끌미끌해서 안 씹어지고 입 속으로 막 돌아다니네. 라면 끓여 먹는 게 훨씬  낫겠다.”

 햄이나 소시지, 라면 등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에게 보리밥은 낯설고 거칠어 전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가난하였었다. 겨울이 지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은 모두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오월을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하지 않았던가. 누렇게 부황난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던 이 시절엔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뿡뿡 기운차게 방귀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점심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밥 차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엌을 기웃거려 보니 시렁에 보리쌀을 삶아 밥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 있었다. 식구들 저녁거리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시장한 판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배가 불끈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겁이 났다. 일에 지쳐서 돌아와 부족한 저녁밥에 눈을 부라리실 부모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일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쯤 되어 나는 겁에 질려 뒷논에 쌓아 놓은 짚더미에 몸을 숨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 걱정에 온 마을을 헤맨 부모님이 짚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못 견디게 그리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보리밥을 먹어가며 아이들에게 그 보리밥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마치 옛 이야기나 전설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들 자신조파 풍요에 취해 어려웠던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데, 그 시절 그 가난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과연 실감이 나는 이야길까?

 요즈음 아이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서만은 그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만큼 가슴 시린 그리운 이야기 거리는 그 때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posted by 청라

해우실

수필/서정 수필 2007. 4. 8. 09:00

해우실(解憂室)

淸羅 嚴基昌
 D 사 입구에 해우실(解憂室)이 있다. 근심이 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록빛 녹음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하게 서 있는 이 기와집에 호기심을 품고 들어서면 지린내가 코를 진동한다. 뒷간을 화장실이라 부르다 못해 이젠 해우실(解憂室) 이라고? 미화(美化)도 이만하면 극치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면 찡그린 얼굴로 황황히 들어섰던 사람들이 얼굴을 활짝 편 모습으로 느긋하게 나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이 자비로 중생을 제도하듯이 계곡 냇가에 세워진 이 작은 집 한 채가 등산객들의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고픔을 참는 고통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뱃속의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엔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설악산과 동해 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강릉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내 성격에 선생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다음 정차하는 곳까지 참기로 하였다.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자갈길에서 차가 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빙빙 돌아 처음 보는 동해의 장관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께 발견되어 울진이든가 영덕이든가 어디에서 시원하게 배설하던 그 쾌감! 나는 지금도 그곳  퀴퀴한 화장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도 우리의 소화기관과 같다. 막히면 답답하고, 풀어줘야 할 때 풀어주지 못하면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바로잡아 줄 어른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굽은 채 자라도 바로잡아 줄 선생님도 많이 줄어들었다. 잘못된 자유의 범람으로 모든 것이 서로 얽혀도 풀어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아 교통이 막히고 경제가 막히고 미풍양속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 누군가 근심 걱정이 술술 풀리는 해우실(解憂室)로 우릴 인도할 수는 없을까.

posted by 청라

깨어진 추억

수필/서정 수필 2007. 4. 7. 09:00

깨어진 추억

淸羅 嚴基昌
 내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울진에 가던 날엔 2월인데도 어느새 성큼 봄이 와 있었다. 먼 산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금방이라도 연초록 잎새를 토해낼 것 같았고, 오랜만에 보는 동해바다는 쪽빛으로 푸르러 있었다. 내가 울진에서 해안소대장을 하다가 제대한 지가 1976년 6월이니 벌써 30년이 지난 까마득한 옛날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그리움을 느끼면서도 젊은 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쉽게 와보지 못하였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가 기성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이 너른 바다와 마을들과 바위들의 정겨운 모습. 내 젊은 날에 보던 동해가 거기 고스란히 누워있었다. 사동을 지나면서 잠깐 멈춰 해안 바윗길을 바라보았다. 거기 바닷가 산 밑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내가 근무하던 소초(소대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나올 것이다.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은빛으로 반짝이던 하얀 백사장.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파도소리에 깨어나던 곳.

 달밤이면 이 소위(대령으로 예편)가 나를 불렀었다. 달빛이 너무 밝으니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근무하는 소대원들이 볼까 두려워 술병 하나 감추고 이소위 부대 쪽으로 갈 때면 월광이 출렁이는 바다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양 소대 근무지 중간지점의 백사장에서 만나 술 한 잔에 달을 띄워 마시며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시국 이야기도 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다시 순찰을 돌며 돌아올 때 바다와 달과 술, 그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초 아이들은 간첩이 오는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고, 중대장님(대령으로 예편)이 순찰 오시는 도로 쪽을 경계했었다. 중대장님의 오토바이가 우리 부대 쪽으로 들어오면 즉시 전화로 연락을 했고, 나는 부대원들의 근무상태를 점검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중대장님은 바둑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소초로 들어오시면 바둑으로 유혹을 했었다. 바둑판을 잘 보이도록 내무반에 놓아두고

 “중대장님, 바둑 좀 느셨어요?”

 “왜, 한 수 하자고?”

  바둑 한 번 붙으면 그 날 우리 소대 순찰은 끝이었다.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눈치 빠른 일국(당시 병장)이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계란을 풀어 라면을 끓여 왔다. 바둑의 판세는 내가 압도적이고, 그럴 때 여유를 부리며 먹는 라면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중대장님이 바둑만 두시다가 가시는 덕분에 늘 우리 소대 지적사항이 제일 적었었다.

 기성면 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척산리 가는 들길로 들어섰다. 한 번 다닌 길에 자국이 남는다면 수도 없이 내 흔적이 찍혀 있을 그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길 가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이전했는지 보이지 않고, 마을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조그마한 횟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 백사장 옆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소초로 들어가는 산길 옆 방파제 앞에서 나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옛날 조그맣던 방파제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확장되어 있었고, 소초로 들어가던 길은 뚝 끊어져 있었다. 울퉁불퉁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해변을 억지로 걸어 소초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충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초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름이면 소대원들과 수영을 하며 놀던 백사장도 파도에 휩쓸려 가서 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백사장 가 바위틈 여기저기에 어디에선가 떠내려 온 부유물들이 쓰레기장처럼 널려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에 찾아갔다가 무참히 헐리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커다란 상실감에 일어설 줄 몰랐다.

 아름다 운 추억은 아름다운대로 가슴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산에 핀 꽃은 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듯 그리운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리고,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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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생암귀(疑心生暗鬼)

수필/교단일기 2007. 4. 6. 09:00

<교단일기>

의심 생암귀(疑心生暗鬼)

淸羅 嚴基昌
 “엄 선생님,  가람이가 그 병 또 도진 것 같은데요.”

 토요일 오후였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나른한 오후의 주말을 즐기고 있는데 조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람이는 성품도 쾌활하고, 급우들을 위해 봉사할 줄도 알며, 공부도 곧잘 하는 아이다. 부모님들도 교양 있고, 집안도 부유한 편인데 어쩌다가 그 아이에게 그런 몹쓸 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깨어진 주말의 평화 때문에 불쾌한 마음으로 학교로 달려갔다. 교무실에 가 보니 가람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조 선생은 화 난 얼굴로 무엇인가 묻고 있다.

 “조 선생, 가람이가 또 무슨 사고를 낸 모양이죠?”

 “예. 우리 반 형태가 지갑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런데 가람이가 점심시간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왔었대요. 아이들 모두 가람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선생님, 저 정말로 성태 보러….”

 “시끄러워 임마”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내가 사정을 했는데. 제 편에 서서 그렇게 힘썼는데. 그만하면 돌부처도 감동했겠다. 나는 가람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하여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갔을 때 맨 처음 말을 건 학생이 가람이었다. 모두 싫어하는 급식당번을 모집했을 때도 제일 먼저 지원을 했고, 회계를 모집했을 때도 주저 없이 손을 든 아이였다. 늘 얼굴이 환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서 사랑스런 마음이 절로 생겨나는 아이였다 . 그 날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나는 반장보다 더 가람이를 의지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학교에 가니 2학년 담임 한 분이 좀 만나자는 쪽지를 책상 위에 놓고 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즉시 달려가서 절망적인 그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어제 4교시 가람이가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현금과 핸드폰을 훔쳐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가람이를 믿고 있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가람이라고 확신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미련한 놈이 옆에 있는 헌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새 핸드폰과 현금들만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그 헌 핸드폰 임자가 자기가 운동장에 있는 시간에 자기 핸드폰을 쓴 사람이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기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가람이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들으신 교장, 교감선생님은 당연히 크게 노하셨고, 퇴학을 시키라 하시는 것을 간신히 사회봉사로 끝내었던 것이다.

 “선생님, 이번은 정말 제가 하지 않았어요. 정말 억울해요.”

 가람이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 눈물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 선생님 학급의 도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으로 가람이가 했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기에 그의 모든 행동들이 의심스러웠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의심스럽고, 가끔씩 저항적인 눈빛을 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래. 틀림 없어. 이번의 범인도 이놈일거야. 가람이에게 가지고 있던 한 가닥의 기대도 나는 몽땅 버려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 선생 앞에서 형태가 꾸중을 듣고 있는 걸 보았다. 내가 자리에 앉으니 조선생이 미안한 얼굴로

 “엄 선생님, 이거 어쩌죠. 어제 이 놈이 글쎄 집에다 지갑을 놓고 왔대요.”

 나는 가람이 얼굴 볼 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 번 의심하기시작하면 그 의심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심 생 암귀’의 고사가 문득 생각났다. 하나의 사건만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일은 교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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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차 한 봉지

수필/교단일기 2007. 4. 5. 09:00

<교단일기>

쌍화차 한 봉지

淸羅 嚴基昌
 월요일 아침. 안개 자욱한 만년교를 건넜다.  오늘 아침 유성은 안개도시다. 갑천에서 일어난 몽롱한 안개가 빌딩을 덮고, 가로수들을 덮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가려 버렸다.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개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안개가 주는 축축함이 싫다. 기분마저 축축해져서 마음이 나른해지고, 아무 것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침부터 가라앉은 마음으로 교무실을 열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자그마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할 때까지는 분명 없었던 물건이다. 궁금한 마음으로 종이뭉치를 풀었다. 그리고 피식 웃고 말았다. 쌍화차 한 봉지였다. 남학생의 솜씨임을 금방 알 수 있는 투박하지만 정성껏 싼 종이뭉치에서 나온 것은 쌍화차 한 봉지였다. 차 봉지 위에는 서툰 글솜씨지만 따스한 마음이 내비치는 글 한 구절이 붙어 있었다.

 “피로하실 때 드세요. 음… 물은 종이컵의 이분의 일 정도 넣었다가 조금 맵다 싶으면 물을 조금 더 타서 드세요. 다방에서 파는 쌍화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찹니다. 3학년 8반”

 즉시 따뜻한 물에 차를 타서 마셨다. 조금씩 눈을 감고 음미해가며 나는 그 아이의 정성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전달했으리라. 남모르게 수줍게 가져다놓은 순수한 마음이 싸아한 쌍화차 맛 속에서 상큼한 맛으로 떠돌았다.

 누구의 정성인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묻지 않았다. 구태여 몰래 가져다 놓은 아이의 마음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때를 묻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정성이 칙칙한 아침의 내 기분을 환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까? 나의 말 없는 이 감동과 고마움이 그 아이에게 전해질까?

 세상은 공교육을, 그 속에서 커 가는 아이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는 한 이 아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posted by 청라

빼앗긴 웃음

수필/교단일기 2007. 4. 4. 09:00

<교단일기>

빼앗긴 웃음

淸羅 嚴基昌
  "선생님 저 어쩌면 좋아요? 정말 미치겠어요.”

 마지막 모의고사를 마치고 자가 채점표를 걷어 교무실로 들어서자, 만섭이가 황급히 따라와 죽는 표정으로 호들갑을 떤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만섭이가 어두운 얼굴이 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만섭이는 2학년 때까지 학급의 반장을 했고 성품도 쾌활했던 아이였다. 그러던 것이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어머님의 부탁으로 반장을 출마하지 않았고, 반장이 되지 못했다는 허전한 마음속에 치렀던 첫 모의고사에서 형편없는 성적이 나오자 모든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행여나 하고 기대했던 두 번째 모의고사마저 실패하자 얼굴에 그늘이 들어앉기 시작했다.

 “야 임마. 네 선배들도 다 실패를 딛고 컸어. 사내놈이 죽는 얼굴하고는. 너를 믿어. 자신감만 얻으면 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나의 이런 격려도 세 번 네 번 모의고사를 실패하자 약발이 떨어졌다. 이렇게 슬럼프에 빠졌던 학생이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만섭이에게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얼굴은 자꾸만 우울해지고. 그 때부터 만섭이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교 자습을 빠지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해 보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내 교직 경험들을 총동원한 어떤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 독서실에서 공부한 후 치른 시험 성적은 오히려 형편없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여름방학 특기적성 수업을 빠지고 지리산 기숙학원에 가서 한 달간 공부해보겠다고 했다.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얼굴의 그늘이나 걷고 오라고 허락했더니, 조금쯤 밝아졌던 얼굴이 2학기 첫 모의고사에서 실패하자 완전한 낙담으로 변해버렸다. 그때부터 자격지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여 친구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섭이의 의식은 작아져서 작아져서 완전한 난쟁이가 되어버렸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굴뚝 위에서 달나라를 향해 공을 쏘아 올리는 난쟁이처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기 보다 자꾸만 도망하려고 하였다.

“만섭아,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시험에 최선을 다하자. 네가 노력한 만큼 나오는 그 성적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내 무능이 정말 싫다. 잎도 피지 않은 초3월 3학년에 올라와서 잎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다시 단풍으로 물들었다 떨어져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한 길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 아이들. 피 끓는 청춘을 교실에 가둬두고 그 어떤 유혹에도 초연하며 구도자 같은 금욕의 생활로 보낸 1년.

 수학능력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다. 11월 5일 저녁, 우리 아이들과 만섭이의 얼굴에 빼앗겼던 환한 웃음이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