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나라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1. 30. 14:54

<청라의 사색 채널>

 

풀의 나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지난 가을 계족산 등산길에 칡덩굴에 둘러싸여 힘겨워하는 교목(喬木)을 본 일이 있다. 수령(樹齡)이 꽤 오래 된 낙엽송 나무였는데 칡덩굴이 친친 감고 올라가 둥치는 보이지도 않고 칡 잎사귀만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던 나무의 꿈은 시들어가고 있었으며, 풀의 공격에 의해 나무의 권위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 나무를 보며 무성한 민주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켜져야 할 소중한 가치들이 점차 무너져가는 우리나라가 생각나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

 

김수영의 시 의 일부이다. 이 시는 오랜 역사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시이다.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 폭력화되었을 때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억압자들의 폭력에 고통을 받아온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투쟁을 통해 바람의 대립적 역사를 종식시키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참으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자유가 지나치게 범람(氾濫)하다 보니 권위(權威)있는 것들은 모두 다 적대시하여 말살시키려는 의식이 팽배(澎湃)해져서 참으로 안타깝다.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 서야 되고, 교육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현장에 가보면 나이 든 학부모님들이 교육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신규 여선생님에게 반말 비슷하게 하는 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자기 자식이 회초리라도 맞고 오는 날이면 갖은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여 항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식들이 있는 곳에서 담임선생님의 욕을 과하게 하는 부모님도 계시다. 교사들의 권위를 깔아뭉개놓고는 교내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보호해달라고 한다. 학부모님, 학생, 그리고 사회가 교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힘을 실어줘야 그 힘으로 자녀들의 안전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왜 모르는 것일까.

언젠가 취객(醉客)에 의해 파출소가 부서지고 경찰들이 다쳤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치안을 지키기 위해 박봉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민중의 지팡이를 부러뜨려놓고 폭력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때로는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부르는 사람이 있다. 정책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욕들을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런 것일까? 풀들만 무성한 풀의 나라엔 하늘 향해 솟아오르는 나무들의 꿈도 없고 땅 한 평 더 차지하려는 풀들의 질시(嫉視)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살기 좋은 풀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권위는 모두 힘을 모아 지켜줘야 한다.   


<금강일보> 2015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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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기

수필/청라의 사색 채널 2015. 1. 24. 09:30

<청라의 사색 채널>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 보기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내가 K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그 곳에서 만난 교장선생님은 확고한 교육철학을 가지신 분이셨다. 학생들을 처벌로 교육하기보다 훌륭한 학생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큰 상을 줌으로써 모든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학생 상을 제시해주고, 모든 학생들이 그 학생을 닮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계셨다. 시골의 작은 학교라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아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불평에도 굳건히 버티시면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셨다.

  벚꽃이 교정에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학생과 교내 계를 맡고 있던 나는 아침 교문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복장불량 학생들만 따로 모아 한쪽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놓았다. 기분 좋게 출근하시던 교장선생님께서 그걸 보시더니 불같이 화를 내셨다.

  “엄 선생, 즉시 교장실로 와요.”

  벌을 받던 아이들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평소에 온화한 성품이셨기에 별 일이야 있으려고 하고 큰 걱정 없이 교장실에 갔다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나고 입이 퉁퉁 부어 나왔다. 교장선생님의 그런 따뜻한 배려심도 모르고 학생들은 계속 말썽을 일으켰고, 나도 한동안 교문에 절대 안 서는 것으로 반항도 했지만, 교직에 오래 서 있으면서 그 때 그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 내 가슴에 나도 모르게 이식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잘못을 꼭꼭 짚어주는 것도 교사가 할 일이지만, 때로는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을 하고 세상에 나와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학교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남의 잘못을 먼저 발견하여 지적해주면 인간관계를 해치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중에는 사물을 보는 기본이 부정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있고 긍정에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최복현 선생은 마음을 열어주는 편지중에서 남의 좋은 점만 찾다 보면 자신도 언젠가는 그 사람을 닮아가서 남의 좋은 점을 말하면 자신도 좋은 말을 듣게 된다고 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판단의 기본이 부정에서 출발하여 비판만 하는 사람은 주위를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느새 돌아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흉악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신문의 칸칸을 찾아보아도 읽어서 흐뭇한 이야기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드문 세상이다. 아들이 부모를 죽였다느니, 동거하던 여자를 죽여 토막 내어 묻었다느니 입에 담지 못할 패륜적인 이야기들만 난무하는 세상이다. 기자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굴하여 세상을 밝힐 생각은 않고 특종만 얻으려고 가장 자극적이 이야기들만 찾아 나선다. 저런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배워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겠는가.

  우리 모두 아름다운 것을 먼저 보는 눈을 가꾸자.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살게 하자.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다.


<금강일보> 2015년 1월 2일

posted by 청라

성城

시조 2015. 1. 13. 07:49



돌 틈마다 세월의 무게가 돌이끼로 덮여있다.

깨어진 기왓장에 박혀있는 삶의 무늬

시간이 스쳐 온 자리 스며있는 눈물과 한숨

무너져도 일어서는 분노를 다독이며

단심丹心 의혈義血이 꽃처럼 지던 그 날

함성이 떠난 자리에 흰 구름만 떠도네.

무엇을 깎아내려 밤새도록 쏟아 부었나

비바람 지나간 성터 수목 빛이 더욱 곱다.

역사는 지우려할수록 더 파랗게 살아난다.


2015, 1, 13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