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이름

시/제5시집 2020. 12. 4. 14:13

어머니라는 이름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이름은

어머니다.

 

쪽진 머리

아주까리기름 발라서 곱게 빗고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가 백목련 같던

어머니다.

 

찔레꽃 필 무렵 보릿고개에

식구들 모두 점심을 굶을 때에도

책보를 펼쳐보면 보리누룽지

몰래 숨겨 싸주신

어머니다.

 

자식의 앞길을 빌어준다고

찬 서리 내리는 가을 달밤에

장독대 앞에서 손 모아 빌고 있다가

하루 종일 콜록대던

어머니다.

 

타향에서 서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고향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을 때마다

된장찌개 냄새처럼 제일 먼저 떠오르던

 

어머니, 어머니

부를수록 그리워지는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이름이 바로

어머니다.

 

 

2020. 12. 4

 

posted by 청라

내려갈 때 보았네

수필/서정 수필 2020. 11. 20. 10:13

내려갈 때 보았네

 

  가장교에서 유등천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능소화 덩굴이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다. 7월 하순부터 꽃봉오리들이 조롱조롱 맺히기 시작해서 어느 날 아침 무심코 바라보면 이 줄기 저 줄기에서 적황색 화려한 꽃등들이 피어난다. 아내와 함께 유등천변 산책길로 내려가다가 나는 문득 그 불쑥불쑥 솟아나는 꽃들이 아내가 내뱉는 볼멘소리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온 지 어느덧 40여 년, 아내라고 어찌 불평이 없었겠는가.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만 매달리는 남편 때문에 혼자 그 억센 아들 둘을 키우다시피 한 아내. 그런 속에서도 아내는 한 마디 불평조차 없이 긴 세월 인종의 자세로 견디어 왔다.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화려한 능소화의 몸짓 뒤편에 숨은 멍든 꽃잎, 벌레 먹은 꽃잎, 시든 꽃잎들이 마치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고 숨겨온 아내의 아픔처럼 눈에 들어왔다. 저런 아픔들을 끌어안고 아내는 그 오랜 시간을 견디어온 것이었다. 나는 시조 한 수가 선명한 그림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다물고

  참다 참다

  터져버린 볼멘소리

 

  귀담아

  듣다 보면

  송이송이 진한 아픔

 

  아내여, 긴 세월 견딘

  인종忍從 벗어 버렸구나.

                               엄기창, ‘능소화전문

 

  치매를 앓기 시작한 후 아내는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참지 않고 쫑알쫑알 불평을 잘도 말한다. 가슴에 콕콕 와 닿는 그 말들이 송알송알 피어나는 능소화 꽃송이 같다. 치매로 인해 원래 지니고 있던 신념이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늙어가면서 그동안의 삶에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단하던 인종의 자세가 깨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오히려 아내의 그런 태도가 반갑다. 이제는 아내나 나나 길다면 긴 인생길에서 내려오는 길로 한참은 내려왔다. 황혼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 서로를 인식해 할 말도 못하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선생님의 그 꽃이라는 시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그 소중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결혼 다음해 겨울 첫 아이를 낳고 돌처럼 차가웠던 셋집 단칸방에서 아이만은 따뜻한 곳에 누이려고 몸살 앓던 아내의 아픔. 보리밥이 먹고 싶다고 조르는데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안 가고 뻗대다가 아내를 울리고 말았던 철없는 세월. 그 젊은 날에는 왜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도 아픈 것들도 보지 못하고 있다. 봄꽃들의 다정한 속삭임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여름날의 무성한 녹음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가을날이 되어서야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단풍의 현란한 몸짓에 멈춰 서서 한참을 감탄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유등천 산책길을 걸으며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걷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는 아내가 잡는 손을 창피하다고 뿌리쳤었는데 요즈음은 오히려 내가 아내의 손을 틀어잡는다. 그리고 벤치에 함께 앉아 올라가는 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두루미며 청둥오리며 물총새들의 삶을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 이제야 나는 웃음 뒤에 숨은 아내의 아픔도 슬픔도 말갛게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모양이다.

  아내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꽃 이름을 몇 번을 가르쳐 주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에도 가르쳐준 꽃 이름을 또 다시 물어본다. 나는 내려가는 길에서야 이제 철이 들어서 열 번을 물어도 활짝 웃으면서 가르쳐준다.

  “여보, 이거 무슨 꽃?”

  “금계국

  “, 금계국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천 번을 물어봐도 짜증내지 않고 기꺼이 가르쳐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요즈음 돌부처나 십자가가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두 손을 맞잡으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딱 지금만큼으로 30년만 가게 해 주세요

 

 

posted by 청라

삼척에 가서

시/제5시집 2020. 10. 27. 12:08

삼척에 가서

 

 

바다의 탁본拓本을 뜨러

삼척엘 갔네.

그믐밤의 어둠을 짙게 칠했다가

초하루 아침의 맑은 햇살로 벗겨내면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

삼척 사람들 다정한 미소가

해국海菊으로 피어있네.

태백을 넘어올 때 서둘러

손 흔들던 가을이

죽서루와 어깨동무로

빨갛게 타고 있는 곳

찍혀 나온 바다엔

좋아하면 모두 다 주는

삼척 사나이의 호탕한 웃음이

산호초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2020. 10. 27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