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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6 예술의 고향 진도
- 2015.04.11 솔향기 길에서 봄을 마시다
- 2007.03.17 장가계(張家界) 기행(紀行) 7
글
예술의 고향 진도
묵언수행黙言修行을 하라는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엊그제 목감기 기운이 살짝 비치더니 그것이 깜빡 내 목소리를 먹어버린 모양이다. 오늘은 ‘문학사랑’ 진도 문학기행이 있는 날인데 어찌해야할까. 진도는 꼭 가보고 싶은 섬이고 이 회장에게도 참여한다고 단단히 약속을 해 놓았기에 일단 참여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집결지인 시청 동문에 도착하니 아는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의외로 서울에 사시는 성기조 선생님도 참여하셔서 반가웠다. 진도가 고향이고 이번 여행을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한정민 시인도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인사에 바쁘다. 흥분되기도 하겠지. 중학교 2학년에 가출하여 어엿한 시인이 되어 많은 손님들을 이끌고 금의환향하는 고향 길에 어찌 만감이 교차되지 않겠는가.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를 건너자 꽃으로 덮인 진도가 반가이 우리를 맞는다. 진도대교는 1984년 완공된 길이 484m, 너비 11.7m의 다리이다. 해무海霧가 아직 다 걷히지 않은 다리 양편에 진도와 해남군의 낮은 산들이 흐릿하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배 12척으로 10배 이상의 적함 130여척을 격파한 역사의 현장. 칼을 한 번 뽑으면 산천을 쪼갤 것 같은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북소리에 몸을 맡겨보았다.
장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진도문인협회 오판주 회장과 김영승 사무국장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진도향토문화회관.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받은 바 있는 씻김굿을 비롯하여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무형문화재 4종과 북놀이, 만가, 진도홍주 등의 무형문화재 3종 등 수많은 무형의 자원이 옛 모습 그대로 전승 보전되어 오고 있는 곳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인간문화재와 전수생 등에 의해 민속공연이 펼쳐진다는데 이번 주 공연은 ‘씻김의 미학’이었다. 달빛 요요히 내리비치는 바닷가에 해무는 뭉클거리고, 죽은 이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졌다. 북, 피리, 아쟁, 가야금 소리 높아지고 하얀 장삼을 입은 당골에미 무가가 공연장을 압도하는 가운데 ‘혼맞이소리’, ‘흥타령’, ‘고풀이’, ‘영돈말이’, ‘추억’, ‘길닦음’ 등의 공연이 차례로 진행될 때 나는 감동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망자의 넋이 극락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희고 긴 천으로 된 질베 위에 지전을 얹어두고 넋 당삭으로 그 위를 왔다갔다 닦으며 무가를 부를 때 나는 신 내림과 같은 깊은 황홀감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용장산성龍藏山城으로 가는 길은 온통 꽃길이었다. 길가에 줄지어선 벚나무마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꽃잎을 떨구고, 좌우로 연한 산마다 산 벚꽃이 절정이었다. 그 외로 복숭아꽃, 진달래꽃, 늦게 핀 목련꽃도 함께 어우러져 진도는 온통 꽃세상이었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 아니라는 지인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섬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용장산성龍藏山城은 고려 삼별초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고려 원종 11년(1270년)부터 14년(1273년)까지 근거지로 삼았던 성터이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자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산성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아홉 달이 지나지 않아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게 되고 다시 제주도로 옮겨 가니 그 때의 사람들은 지금 간 곳 없고 행궁 터와 석축만 남아있는 성터엔 봄꽃들만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역사의 무상함을 말해 무엇 할까. 인걸은 사라졌어도 자연은 항시 그대로인걸.
가이드 이산재 선생의 맛깔스런 너스레를 들으며 도착한 곳은 벽파진碧波津, 이순신 장군이 1597년 수군 진영을 장도에서 이곳으로 옮긴 이후 명량해전 직전까지 머물면서 작전을 구상했던 곳이다. 을씨년스런 날씨 속에 벽파진 전첩비碧波津戰捷碑가 우뚝 서있다. 정유재란 당시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물리친 명량해전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1956년 진도군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했다 한다. 언덕 위에 솟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산 꼭대기를 거북 모양으로 깎은 후 받침돌로 삼아 그 위에 화강석으로 비를 세웠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 선생이 글씨를 쓴 이 비는 2001년 향토유형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하는데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임을 목청 높여 외치는 듯하였다. 정면 바로 앞에서 감포도가 빙그시 웃고 있고 그 뒤로 해남 어린포 마을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신비의 바닷길을 보다 시간에 쫓겨 도착한 곳이 운림산방雲林山榜. 마음 급한 여행자들과 달리 운림산방雲林山榜은 무르익은 봄 속에 허허한 자세로 서 있었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이 기거한 곳이다. 남종화는 북종화와 구분되는 화법이다. 당나라의 문인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왕유를 비조로 하여 송나라를 거쳐 원나라의 사대가(四大家, 뛰어난 산수화가였던 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을 이름), 명나라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같은 오파吳派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화법이다. 남종화는 북종화보다 존숭되었는데 중국 명청 시대에는 남종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두 분파의 큰 차이점은 주로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다. 북종화는 외형을 위주로 한 사실적인 묘사를 주로하고 남종화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에 중점을 둔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다.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은 후 49세가 되던 다음 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관장님의 배려로 잠깐이나마 그림을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치 허련을 비롯하여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림, 의재 허백련, 그리고 허건의 손자들에 이르는 화맥의 산실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해바다에 자리 잡은 보배섬 진도에는 3락과 3보가 있는데 진도민요 진도서화 진도토속주 홍주 등을 진도 3락이라 하고 진돗개 진도구기자 진도곽 등을 진도 3보라 한단다. 점심에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진도민요를 들으며 1락을 누렸고, 운림산방에서 서화를 감상하며 2락을 누린 것만도 복에 겨운데 저녁에 오판주 회장의 배려로 진도홍주를 마음껏 들면서 3락을 완성하였으니 어찌 복에 겨운 여행이 아니겠는가. 오 회장은 칵테일 솜씨도 뛰어나서 하얀 사이다에 빨간 홍주를 섞어 만드는 빛깔이 환상적이었다. 감기 때문에 술에 취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3락을 즐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첨찰산 아래 위치한 운림펜션의 품에 안길 때쯤엔 감기도 피로도 잊을 만큼 홈빡 취해있었다.
조찬을 들고 장전미술관長田美術館으로 향하였다. 진도 이 비좁은 섬엔 왜 이리 예술가들이 많은 것이냐. 일찍이 진도에 가서는 글씨와 그림, 그리고 노래 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진도 사람 중 민요 한 자락 못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그림 한 폭 못 그리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웃기는 소리 잘하는 가이드만 해도 차 안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 한 곡조가 그렇게 구성질 수 없었다.
장전미술관長田美術館은 서예가 장전長田 하남호 선생이 사비를 들여 건립한 미술관이다. 1989년 800여 평의 대지 위에 100여 평의 본가, 연원관, 양서재를 짓고, 150평의 3층 미술관을 건립하여 서예,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고대자기, 분재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마침 유채꽃이 피는 계절이어서 노란 유채꽃과 지다 만 벚꽃, 목련이 어우러진 미술관은 선경처럼 아름다웠다. 관장 하영규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추사 김정희의 명월송간조明月松間照,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 남농 허건의 하경산수화 등의 국보급 미술품을 보는 시간은 꿈 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사의 그림을 보다 문득 왕유의 ‘산거추명山居秋暝’이 떠오른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空山新雨後[공산신우후]
天氣晩來秋[천기만래추]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竹喧歸浣女[죽훤귀완녀]
蓮動下漁舟[연동하어주]
隨意春芳歇[수의춘방헐]
王孫自可留[왕손자가류]
적막한 산에 내리던 비 개이니
더욱 더 쌀쌀해진 늦가을 날씨
밝은 달빛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맑은 샘물은 바위 위로 흐르네.
대숲 소란하더니 아낙들 씻고 가고
연 잎 흔들리더니 고깃배 내려가네.
봄꽃이야 시든지 오래되었지만
그런대로 이 산골에 머물 만하네.
하영규 관장의 요청으로 일행인 중산 조태수 선생이 ‘문향만리文香萬里’ 한 구절을 써서 남긴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예술의 고향에 와서 예술에 문외한으로 구경만 하다 돌아가는 일은 얼마나 부끄럽고 쓸쓸한 일인가.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남도진성南桃鎭城으로 향하였다.
남도진성南桃鎭城은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삼국시대 백제 매구리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1438년(조선 세종 20년)에 재 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둥그런 벽과 동 서 남문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성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서있다. 마을 사람들은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하고 있었다.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운교와 단운교 두 개의 운교(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이 성은 1964년에 사적 제127호로 제정되었다, 우리는 성벽을 위를 걸어 성을 한 바퀴 돌았다. 패망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남동리를 감싸고 있는 성에도 꽃은 피었지만 쓸쓸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꽃이 무성히 피었을 때는 아무도 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꽃이 지고 흰 구름만 떠도는 역사가 되었을 때 후세 사람만 인생 무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전미술관素筌美術館을 대충 둘러보고 성기조 선생님, 김영수 학장님, 이 회장 그리고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첨찰산 쌍계사尖察山雙鷄寺로 향하였다. 예술도 술과 같아서 진도에 와서 그 향기에 너무 취하다 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동해서랄까.
첨찰산 쌍계사尖察山雙鷄寺는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아주 오래 된 절이었다. 계곡 물이 쌍계사를 사이에 두고 쌍으로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일주문을 지나 산자락으로 접어드니 해탈문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쌍계사 경내에서는 아담한 대웅전이 우선 눈에 뜨인다. 숙종 23년에 중수되었다는 대웅전은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목존삼존불좌상이 빙긋이 웃고 계셨다. 나는 아홉 번 공손히 절을 올리고, 가족과 함께 온 세 사람의 건강을 빌었다. 대웅전 왼편으로는 정면 측면 1칸의 원통전이 자리 잡고 있고, 오른편으론 지옥을 다스리는 시왕을 모신 시왕전. 시간이 없어 모두 알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절 뒤로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등이 무성히 우거진 상록수림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다 만 동백꽃이 드문드문 매달린 동백나무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성기조 선생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숲을 바라보았다. 참 대단한 어른이시다. 87세 넘은 나이로 피곤한 기색도 없이 여행을 즐기고 있다. 상록수림의 싱싱한 기운이 선생님의 팔다리로 모두 빨려드는 듯하였다.
듬북국으로 점심을 먹고, 진돗개 묘기를 관람한 후 버스는 대전으로 향했다. 전망대를 보고 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때마침 비도 내리고 안개도 짙어 올라가봐야 별로 볼 게 없으리라는 오판주 회장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진도대교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정민 시인이 모두 좌측을 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차창 밖으로는 낮은 산자락을 의지해 조그만 산마을이 누워있었다, 거기가 바로 한 시인의 고향이란다. 소 판 돈을 훔쳐서 저 마을을 뛰쳐나오던 그 시절 그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리도 없던 그 옛날 울돌목을 건널 때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을까. 생각해보면 가출한 소년치고는 반듯하게 잘 자라 시인이 되고 금의환향하였으니 그래도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임이 틀림없다. 나는 흐뭇한 눈으로 나이 많은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망울 속에서 이틀 동안 우리 마음을 풍요로운 예술향기로 감싸주었던 예술의 고향 진도가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글
<기행문>
솔향기 길에서 봄을 마시다
노은동 수산시장 주차장에서 홍 선생 차로 갈아타고 대전을 출발한 것은 봄꽃이 만발했던 4월 8일 오전 7시 30분. 하늘은 큰비라도 쏟아낼 듯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전주의 향란 씨 정년퇴임 기념으로 태안 천삼백 리 절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솔향기길’로 초대를 했는데 비 때문에 올라가보지도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여왕처럼 위해줘야 해”
문득 선영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엄숙하게 한담.
스쳐가는 차창 밖의 봄꽃들에 정신이 팔려있는 명중이, 덕규, 선영이를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들이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만족하는 것은 교사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대전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대전에 저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몸담아온 교단에서 물러나 허탈해하고 있을 친구를 초대해주고, 그런 친구를 여왕처럼 위해주자는 웃기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순진한 친구들. 내 남은 인생에 저 친구들과 함께라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만대항으로 들어서며 하늘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개었다. 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는 4월의 은빛 햇살, 떼 지어 나르는 갈매기 소리, 짭조름한 바다 냄새. 그래, ‘솔향기길’에 간다고 그렇게 가슴이 뛰었던 것은 내 잠재적 의식 속에 4월 바다의 몽환적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풋풋하게 안겨오는 바다의 흐트러진 몸짓 위에 봄은 이미 와 있었다.
‘만대수산’ 앞에 주차를 하고 ‘솔향기길’ 안내판 뒤 산길을 오른다. ‘솔향기길’은 태안의 상징인 ‘바다’와 ‘소나무’를 테마로 하여 태안군에서 조성한 생태 탐방로인데 현재 5개 코스 51,4km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길은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당시 자원봉사자들의 방제작업을 위해 만든 작은 길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자원봉사자들의 편의를 위해 이곳 이원면민회 회장 차윤천 선생이 길을 닦기 시작했다고 한다. 방제작업이 끝난 이후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따라 산책로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태안군의 협조를 받아 오늘의 이 길을 완성했단다. 우리가 오늘 걸어야 할 길은 다섯 개 코스 중 제일 아름다운 제1 코스 만대항부터 꾸지나무골 해수욕장까지 10,2km. 생업까지 젖혀놓고 이 길에 매달렸을 한 사람의 땀과 의지에 머리가 숙여진다.
등성이로 올라가며 보니 온산이 진달래꽃으로 불이 붙었다. 연분홍으로 혹은 진주홍으로 풀섶마다 바위틈마다 일어난 불길이 산봉우리 가까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꽃 사이로 들어서면 온몸이 불길에 타오를 것만 같다. 산길을 오르는 것도 잊고 모두들 카메라에 이 화려한 봄의 향연을 담아놓느라 정신들이 없다. 왼쪽으로는 가로림만의 풍광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론 중국까지 이어진 서해바다. 봄은 관능적인 몸짓으로 여기 와서 벌써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기만 하는 길이 힘들어서일까, 아래로 치달린 길이 백사장으로 이어져 있다. 해안가의 집 몇 채가 옹기종기 정답다. 여기가 큰구매수동. 들어왔다 나간 물 자국 선명한 백사장 끝 작은구매수동 쪽으로 삼형제바위가 온몸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터전 안에 있어서 보는 장소에 따라 하나로도 보이고 둘로도 보이고 셋으로도 보이는 이 바위는 한집안에 살을 같이하는 삼형제가 서로 의좋게 지내면서 잘못된 것은 숨겨주고 잘된 것은 드러나게 하는 현상과 같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한다. 가족 간의 정이 이익 앞에 산산이 부서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발길 한없이 무겁다.
이름도 정다운 붉은앙뗑이, 새막금쉼터, 큰노루금 등을 지나 당봉전망대에 다다랐다. 섬처럼 양편의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 길, 바위들 절묘하게 선 절벽 끝엔 한없는 바다. 날은 활짝 개어 눈을 크게 뜨면 바다 너머 중국이 보일 듯도 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솔향기가 가득 온몸으로 들어온다. 이러다가 온통 솔향기에 절어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또 어떠리. 속진에 절은 몸을 솔향기로 목욕한다면 이보다 더 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매서운 기세는 가셨지만 아직도 드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려가니 거기 餘섬이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함초롬히 서 있었다. 해안에서 좀 떨어져 둥그렇게 솟은 모습이 신기하다. 옛날 선인들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이 섬이 유일하게 하나만 남게 될 것을 예견하고 남을 여(餘)자를 붙여서 餘섬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북쪽 가마봉 쪽에서 보면 아름다운 여인상으로도 보이고 서쪽 끝부분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남자의 신(腎)처럼 보인다고도 하는데 눈썰미가 없어서 그런지 도통 그런 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오묘하게도 절벽 이어진 바닷가에 어찌 또 저런 섬을 지어놓았을까? 조물주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여섬을 지나 다시 등성이로 올라가는데 앞서가던 향란 씨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길가에서 뱀이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단다. 다 늙은 할머니 뭐가 매력적이라고 봐. 콧방귀를 뀌며 달려가 보니 능구렁이 한 마리 진달래꽃 사이로 황급히 몸을 숨긴다. 문득 서정주 시인의 ‘화사(花蛇)’가 생각났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뱀을 보며 시를 읊조리다 보니 친구들은 벌써 산모롱이를 돌아갔다. 봉우리를 넘어가보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변에 펜션들이 줄지어있다. 시간이 있다면 아름다운 봄의 서정이 넘치는 펜션에서 며칠 쯤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션촌에서 점심을 먹고 찾아간 곳이 용난굴, 해변 절벽 위에 용이 빠져나온 자국인 듯 동굴이 덩그렇다. 동굴 천장엔 안에서부터 밖까지 하얀 바위가 길게 뻗어있는데, 마치 한 마리 용이 굴을 빠져나오다가 바위로 굳은 듯하다. 용난굴 앞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소리는 용난굴을 채웠다가 비워지고 화석으로 굳은 용의 몸을 쓰다듬고 사라진다. 곰보처럼 고동들로 덮여있는 바위와 절벽에 서있는 해묵은 소나무들. 그럴 듯한 전설 하나 여기 산다고 고개 저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서 수줍게 피어난 하얀 제비꽃을 보았다. 진달래 화려한 자태와 이웃해있어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 없을 것 같다. 젊었을 때 안보이던 꽃이 늙으니까 보이는 것일까. 이제 내려가면 솔향기 풍기는 봄의 향취를 한참은 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정의 마지막 봉우리에서 나는 진달래꽃 향기를 마시고, 봄 바다의 파돗소리를 마시고, 봄 물기 싱싱한 솔향기를 마시고, ‘솔향기길’의 청아한 봄을 몽땅 마셔버렸다.
2015년 4월 11일
<문학사랑> 2015년 여름호(112호)
글
장가계(張家界) 기행(紀行)淸羅 嚴基昌 상해 홍교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어둠 속을 달려 장가계(張家界)공항에 우리 ‘선비회’ 11쌍의 부부를 쏟아놓은 시간은 밤 12시. 비행기에서 내려 좌우를 둘러보니 어슴프레한 달빛 속에 천문산(天門山) 산봉우리가 버티고 선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좌우에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산의 능선들이 유독 천문산(天門山)에 이르러서만 날고뛰는 천신(天神)의 모습처럼 역동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하늘로 오르는 산이라는 산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지녔다, 산봉우리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십삼 야월(夜月)의 달빛이 넘실거린다. 산 위에 떠 있는 달은 한국의 달과 같은데 몸은 만 리 밖 외국 땅에 서 있구나. 대전에 비해 이곳 날씨는 봄인 듯 따뜻하다. 처음 오는 외국인지라 가슴이 더욱 뛴다.
버스 안에서 현지 가이드 김양(김미화: 조선족으로 길림성에서 왔다 함)과 간단한 인사를 한 후 도로 정리가 덜 되어 터덜거리는 산길을 40분 쯤 달려 도착한 곳이 개천호텔. 지금 시간은 12시 40분, 한국 시간으로 보면 1시 40분이다. 우리 일행들은 장가계(張家界) 첫 밤에 대한 설렘을 펼쳐볼 시간도 없이 각자 지정된 방에 들어가 중국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밖에 나가니 심산(深山)의 아침이라 햇살이 더욱 투명하다. 대전을 출발할 때는 눈이 펄펄 내리는 추운 날씨라 걱정을 했는데 청주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인솔한 현대천 이사님이 삼일 전부터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빌었다더니 제법 효험이 있나보다. 이곳은 남방의 습한 날씨가 계속되므로 1년 중 140일 정도 비가 내리고, 250일 정도 안개가 낀다는데, 오늘 날씨는 비정상적으로 맑다.
조식 후 풍경구로 이동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맨 앞에 전개되는 산봉우리 사이의 계곡이 ‘백장협’. 옛날 이 곳에서 일백 번 전쟁이 치러졌기 때문에 ‘백장협’이라고도 하고, 산의 높이가 사람 키로 일백 길 높이라서 그렇게 명명되었다고도 한단다. 계곡의 넓이는 넓은 곳이라야 50m 정도이고, 좁은 곳은 20m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양편은 도끼로 찍은 듯한 수직의 봉우리가 서 있으니, 열 명이 가로막으면 능히 백 명의 적을 감당할 수 있겠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반마춘(磐馬椿), 마도석(磨刀石) 너머로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풍경구(風景區)에 도착하여 셔틀버스에서 내리니 잡상인들이 모여든다. 연령층이 다양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마저 악착같이 달려든다. 도망을 가도 “천 원, 천 원” 하며 쫓아오는 모습이 거머리처럼 끈질기다. 모두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초라한 모습이다. 고랑이 깊게 파인 얼굴과 거친 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몇 개 사줄까 생각하였지만 상품이 조잡하여 살 만한 것이 없었다. 천 원짜리 새 돈을 지갑 가득 가져갔기에 필요 없는 것일지라도 사줄까 하였지만 쓸데없는 외화 낭비라 생각하여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몇 분 안 걸려 ‘십리화랑’에 도착했다. ‘십리화랑’은 삭계진 풍경구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있는 길이 11.6리의 협곡(峽谷)으로 계곡의 길이가 약 십 리에 이른다 하여 십리화랑이라 이름 지어 졌다 한다. 모노레일을 타고 천천히 계곡으로 들어서자 잎 진 나무들 위로 솟아오른 기이한 암석의 봉우리들. 마치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식지(食指)를 세워놓은 듯 우뚝 솟은 봉우리가 식지봉, 세 자매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의 봉우리가 자매봉, 노인이 약초를 지고 내려오는 모습의 바위가 약초캐는노인바위, 식탁을 닮은 바위가 식탁바위, 엄마 아빠 아기를 닮았다 하여 가족바위. 암봉은 가도가도 끝이 없다. 일찍이 중국의 유명한 시인 려성명은 십리화랑을 유람하고 나서 “기봉(奇峰)이 다투어 하늘을 보려고 하니 천태만상(千態萬象)이 화공(畵工)을 이루노라. 수곡청계가 십리라. 사람들은 그림 속을 거니노라.”하는 즉흥시(卽興詩)로서 십리화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하였다 하거니와 나도 모노레일에서 내려 저 기봉 속을 거니노라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쳐 하늘에 오를 것만 같다. 아름다운 경취에 취해 소리를 지르다 보니 모노레일 차는 계곡을 한 바퀴 돌아 어느새 계곡 출구에 도착해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며 우리는 천자산(千字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6명 수용의 케이블카를 타고 10여 분 간 오른 해발 1,250m의 봉우리, 천자산(天子山)! 탁 트인 시야에 펼쳐지는 비경(秘境)의 웅장함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무릉원(천자산자연보호구)의 계곡과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필봉, 서해, 천자각, 신당만, 대관대, 선인교, 장군암 신병집회……. 저마다 다투듯이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혹은 날고 혹은 뛰고. 계곡을 따라 안개의 강이 흐르는 모습이 바라볼수록 신비하다. 속세의 모든 시름들이 산바람에 씻겨 사라지는 듯도 하다. 천자산의 수려한 경관을 넋을 잃고 바라보노라니 선인들이 왜 한사코 산 속에 묻혀 강호가도를 즐겼는지 이해할 만하다. 문득 이백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笑而不答心自閒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 아니했지.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잎 아득히 물에 떠 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 여기는 별천지라 인간 세상 아니라네
그림 1) <천자산>
천자산은 명나라 홍무 년 간 토가족 수령 향왕천자(향대곤)가 이곳에서 의병들을 모아 명나라에 저항하며 전쟁을 치른 곳이기에 이름 지어진 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러할까? 다기(多岐)한 바위의 모습들이 마치 천군만마가 하늘을 향해 기세당당하게 달려 오르는 듯도 하다.
천자산 정상 표지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한․중국식 뷔페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향이 강한 중국식 식단이 제공되었었는데 한국 관광객이 많아지자 향을 빼고 한국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식사 걱정으로 고추장, 김치, 김 등을 많이 준비하였는데 의외로 식사 걱정 없을 만큼 잘들 먹는다. 식당 좌우에서 들려오는 여행객들의 말이 대부분 한국말이다. 한국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곳. 한국의 화폐만으로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곳. 도무지 외국 여행을 온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장가계를 채운 여행객들의 80% 이상이 한국 사람이란다. 우리의 국력이 이렇게 커졌는가! 기꺼운 마음도 들었지만, 무분별한 외국 여행으로 근로자(勤勞者)들이 힘들여 벌어온 외화를 낭비하고 있다 생각하니 한편 마음이 씁쓸해온다.
식사를 마치고 찾아간 곳이 하룡공원! 모택동과 함께 중국을 일으킨 하룡장군을 기리기 위해 천자산 입구에 세워진 공원이다. 동상(銅像)은 1986년 하룡원수를 기념하기위해 만들어졌으며, 높이 6,5m, 무게 9톤의 중국 근 백 년 내 이루어진 것 중 가장 크다고 한다. 하룡공원이라는 대리석에 새긴 글씨는 1995년 강택민 총서기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웅대한 천자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서있는 팔자수염 밑에 어린 미소가 웅장한 대자연을 압도하는 듯도 하다.
그림 2) <하룡공원>
다시 버스를 타고 50여 분 간 산 구비 돌아돌아 원가계에 도착. 눈앞에 펼쳐지는 암봉들이 예사롭지 않다. 위태로운 산길을 돌며 내려다보니 눈 아래는 천 길 절벽. 까마득한 바위 아래 계곡에 금실처럼 반짝이며 물이 흐르고 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니 까마득히 늘어선 바위산들이 날고, 뛰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준초하게 깎인 모습들이 서로 몸매를 자랑하는 듯도 싶다. 아! 자연은 왜 이리도 웅대하고 아름다운가. 마치 거대한 남화 속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나는 일찍이 기암절벽 아래 폭포가 흐르고 소나무 우거진 곳에 사슴이 뛰노는 중국 관념 산수화를 보면서 상상 속의 세계를 그렸다고 생각했거니와 여기 와 바라보니 자연 그대로의 모습도 다 그리지 못한 듯하다. 감흥(感興)에 취해 문득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그림 3) <원가계>
마음을 졸이며 천하제일교를 건넜다. 천하제일교는 봉(峰)과 봉(峰) 사이를 산이 기묘하게 이어준 바위이다. 아래에서 바라보면 마치 동굴모양을 이루었는데 발을 헛디디면 저 아래 금편계곡에 몇 조각의 골편들로 흩어지리라. 이 다리를 건너면 99세까지 장수한다 하며, 자물쇠에 이름을 새겨 걸어놓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여 이름 새겨진 자물쇠가 끝도 없이 걸려 있다. 이 신선의 세계에 와서도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니 묵묵한 자연에 부끄럽기만 하다.
비경(秘境)에 도취하여 정신을 잃어버린다는 미혼대를 바라보며 걸은 걸음이 어느덧 백룡엘리베이터. 해는 벌써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이 엘리베이터는 수직 높이가 335m, 운행 고도가 313m인데 그 중 156m는 산체 내 동굴이고, 171m는 산체 외부에 붙인 수직철강구조로 이루어졌다. 3대의 엘리베이터가 나란히 운행되면서 삼림계곡, 금편계, 수요사문으로부터 원가계, 오룡채, 천자산을 연길시키는 중요한 교통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100% 투명도의 엘리베이터이며, 세계에서 제일 높은 2층으로 된 관광전용 엘리베이터이며, 세계에서 제일 빠른 관광전용 엘리베이터라는 가이드의 자랑을 들으며, 중국도 세계 제일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림 4) <백룡 엘레베이터>
시간에 쫓겨 금편계곡 입구에서 돌아서서 나오는데 건너편 암봉 꼭대기에 마지막 햇살이 눈부시다. 금편계곡은 길이 7,1Km의 아름다운 협곡(峽谷)으로 금편계가 조란조란 흐르는 양 편엔 금편암, 문성암 등의 멋진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무성한 원시림 속에서 삼림욕도 할 수 있다 한다. 서두르면 다녀올 수 있다고 우기는 우리 일행에게 산골의 날씨는 곧 어두워져서 위험하다고 버스에 몰아넣는 가이드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석식 후 장가계 써꺼스를 구경하고 아내와 나란히 누워 마사지를 받았다. 스물이나 되었을까? 어린 소녀에게 몸을 맡기니 손길 닿는 곳마다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여행 계획의 일부라니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현재를 즐기기로 마음 을 바꿨다, 살짝 눈을 뜨고 아내를 보니 외간남자에게 몸을 맡겨 놓고 나른한 행복에 취해 있다. 샘이 나서 기침을 해봐도 눈을 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외국 풍물을 경험해 보는 건데 어떠리. 나도 모든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맛보기로 하였다.
장가계 마지막 밤을 위한 파티가 있다고 하길래 마사지 끝난 후 강 부장 방으로 모였다. 나도 한국에서 준비해온 소주 댓 병과 마른안주를 준비하여 건너갔다. 사모님들과 함께 모여서 도란도란 술잔을 나누는 모습이 가족같이 정겹다. 어제 처음 만났을 때 서먹서먹하던 사모님들도 남자들보다 오히려 더 친해진 모습이다. 남방과일의 여왕이라 자랑하며 송 교장 사모님께서 사 오신 듀리안을 먹어가며, 냄새의 지독함에 인상을 쓰면서도 모두 즐겁게 깔깔거렸다. 조국에서의 조그만 인연들이 모여 외국 여행길 같이하는 동안에 어느덧 흠뻑 정이 들어버린 사람들. 그들의 웃음소리 너머로 남방의 풋풋한 정취 넘치는 장가계 마지막 밤은 침침히 깊어갔다.
이튿날 아침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눈이 떠진 것은 새로운 경관을 구경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비경 속에서 신선이 되어 노니는 꿈은 너무도 짧아 어제 밤 술 몇 잔에 취해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은 환하게 밝아버렸다. 오늘 아침 첫 여정은 황룡동굴. 늦게 도착하면 사람이 많아 구경도 잘 할 수 없다는 가이드의 재촉 때문에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버스에 올라 황룡동굴 근처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각다귀같이 달려드는 잡상인들을 피해 1km쯤 오르다 보니 가이드 김양이 중국 전통 화장실을 구경하란다. 우리 일행 모두 우루루 들어가 보니 대변소 칸칸 모두 문이 없어서 볼일 보는 동안 신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사정없이 노출될 것 같다. 도랑 식으로 되어 5분마다 물이 쏟아져 나와 변을 씻어내는데 첫 변소나 마지막 변소에 잘못 앉으면 똥물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 하니 불안해서 볼일인들 잘 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기념사진을 찍어줄 테니 포즈를 취해보라고 사모님들에게 카메라를 들여대니 모두들 기겁을 하고, 아내는 주책없다고 하얗게 눈을 흘긴다. 이런 야만인들이 어디 있느냐고 푸념하는 사모님들을 이야기를 들어가며 몸은 어느덧 황룡동굴 앞 광장에 들어섰다.
그림 5) <황룡동굴>
황룡동굴은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용암동굴로서 1983년에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하 총 4층으로 되어있으며, 총 면적은 618ha, 동굴을 지탱하고 있는 종유기둥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 14,000m에 달하는 규모를 지녔다 한다. 한국에서 이미 ‘성류굴’, ‘고수동굴’, ‘환선굴’ 등을 두루 섭렵한 바 있기에 중국의 동굴이라고 별 수 있으려나 하는 시큰둥한 생각으로 황룡동굴속에 들어갔지만, 100걸음을 채 걷지 않아 나의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나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나타나는 지하 광장. 아! 얼마나 웅대하고 신비로운 비경인가. 4, 5백 평 정도의 공간에 마치 전시라도 해 놓은 듯 다양하고 기묘하게 늘어선 석주(石柱)들. 천장은 하늘처럼 높아 수억 년 연륜 속을 자란 석회석 기둥들도 끝까지 다 도달하지 못하였다. 환선굴의 규모와 성류굴 고수동굴의 오묘함으로는 도저히 이 동굴과 비교할 수 없었다. 어제 원가계 경관을 보며 놀랐던 가슴이 이 지하세계의 신비로움을 보고는 놀랄 기운마저 잃고 말았다. 이 동굴 속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종유석 기둥으로 높이가 27m에 달한다고 한다. 1998년 중국 평안보험공사라는 보험회사에서 인민페 1억 원의 보험을 들었다고 하니 이 동굴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하겠다. 물기로 반들거리는 것이 젊은 종유석이고, 하얗고 푸석거리는 것이 늙어 죽은 종유석이란 가이드 김양의 설명을 들어가며 삶과 죽음의 이치가 돌에게까지 미친다는 생각에 잠깐 애상에 잠겼다. 동굴 속에 있는 1곳의 물구덩이와 2곳의 강물, 3개의 폭포, 4개의 연못, 13개의 궁전을 구경하고, 20여 분간 배를 타고 도달한 곳은 동굴의 출구, 아쉬운 마음이 동굴 종유석마다 떠돌았다.
그림6) <보봉호>
버스를 타고 보봉호(寶峰湖)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 시커먼 아저씨들이 가마를 타라고 유혹한다. 다리 성한 사람이 웬 가마냐고 거절하고 나서 일행들끼리 웃고 떠들며 보봉호로 오르다 보니 산 동굴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장관이다. 옛날엔 계곡에 자연적인 폭포가 있었는데, 산 중턱에 터널을 뚫어 호수의 물을 50여m 아래로 낙하시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고 한다. 폭포만 살짝 내비치고 숨어있는 호수를 찾아 허위허위 고개를 올라가니 저만큼 발밑에 그림처럼 호수가 누워있다. 원래는 수력발전소였던 것을 말레이시아 상인이 투자하여 관광 명소로 개발하였다고 한다.
30여 명이 탈 수 있는 유람선(遊覽船)에 올라 호수를 보니 거울같이 깨끗한 물에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잠겨 있다. 녹음이 우거지기 이른 철인데도 물은 산으로 인해 푸르고, 산은 물로 인해 더욱 푸르다. 산봉의 호수가 평화롭기 때문일까. 물속에 떠가는 구름마저 여유롭다. 아귀고기의 슬픈 전설을 들어가며 산봉에 취해 물 위를 떠가다 보니 문득 토가족 전통 복장을 한 예쁜 소녀가 나와 노래를 부른다. 남자에게 구애(求愛)하는 노래라고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도 청아하여 오히려 구슬프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부르는 인간의 노래는 오히려 자연의 조화를 깨는 불협화음이 분명할 텐데도 토가족 소녀의 노래는 묘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계곡 속을 울린다. 자연을 마음에 담으면 모두 신선이 되는 걸까. 선비회 22명의 모든 부부들도 모두 한 점의 욕심이 없이 자연에 취해 있으니 이 곧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점심을 먹고 천문산(天文山)엘 올랐다. 장가계에 첫 발을 내딛던 그 밤에 넘실거리던 달빛 아래서 나를 유혹하던 산이다. 장가계 시내의 케이블카 승차장에서 미지의 세계에
그림7) <천문산>
대 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정상까지는 7.2Km. 장가계 시가지 건물들의 지붕을 넘고, 토가족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골 들판과 마을을 지나, 케이블카는 드디어 가파른 산을 오른다. 발밑은 천야만야의 낭떠러지, 앞에는 병풍처럼 막아선 절벽. 떨어질 듯 부딪칠 듯 위태위태하게 헐덕이며 케이블카는 산을 올라가고 있다. 칼끝 같은 기봉(奇峰)들이 점차 낮아지고, 멀리 보이던 천문동굴이 가까워진다. 원래는 까마득히 케이블카 밑으로 구렁이가 꿈틀거리듯 미로처럼 걸려있는 도로를 통해 셔틀버스로 천문동굴까지 갈 수 있다는데, 아직 산 길 위 응달에 잔설이 남아있어 지금은 갈 수 없다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김부장님 사모님도 이 위대한 자연 앞엔 마냥 눈감고만 있을 수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감탄의 소리를 지른다.
아! 이놈의 나라는 어찌하여 절경(絶景) 아닌 곳이 없는가! 산은 산대로 기묘한 바위들을 뿌려놓아 비경(秘境)을 이루고, 호수는 호수대로 맑고 투명한 물 위에 그림같은 산을 담아 신비롭고, 동굴은 왜 그리 크고 넓은 곳에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석주(石柱)들의 숲을 만들어 해동(海東)에서 온 나를 이리 기죽게 만드는가. 나는 처음으로 이 광활한 중국의 국토에 대한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천혜(天惠)의 아름답고 웅장한 국토에 사는 사람들이 오만한 중화사상에 취해 왜 그리 편협하고 독선적인 지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내일은 소주에 가서 졸정원과 한산사, 호구사의 호구탑을 보야야 한다. 상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이 아름다운 신선의 마을, 장가계의 모습을 머릿속 에 깊이깊이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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