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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7시집에 해당되는 글 4건
- 2023.04.08 프리즘 사랑
- 2023.03.19 봄날은 간다
- 2023.03.09 삼월 마중
- 2020.05.17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글
프리즘 사랑
마음의 굴절을 재어본다
아내여
네게로 가는 내 사랑은
보라 빛깔이다
단파장이라서
언제나 망설임이 없다
가장 빨리 꺾여서
너에게로 간다
글
봄날은 간다
절규처럼
홍매화가 피었습니다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들어가는 당신
지난겨울
봄이 오지 않아도 좋다고
세월의 고삐를
소망의 문고리에 굳게 매어 놓았는데
어김없이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향기 따라 봄날이 흘러갑니다
글
삼월 마중
산다는 건 추운 일이다
아직 예순도 다 저물지 않았는데
당신의 가을엔 일찍 눈이 내렸다
사방으로 쪼그라든 당신의
영혼을 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직 내 청춘의 푸른 설렘은
나비인양 파닥거리는데
당신은 그만 어깨동무를 풀려하는가
동백이 피면 겨울을 건너뛸까
아침마다 아리셉트를 챙겨 먹이며
삼월을 마중간다
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지난 생일에 내가 사준
진주 반지의 영롱한 빛깔도 흐려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여섯 살 손자의 이름도 낯설어지고
가끔은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자다 말고 문득 일어나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간절한 주문呪文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시문학』202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