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뻐꾸기

시/제7시집 2024. 2. 25. 21:46

남산 뻐꾸기

 

 

남도에서 온 사람도 북도에서

온 사람도

뻐꾸기 노랫소리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울이 온통 고향 산처럼

초록 물드는 오월이 오면

남산 뻐꾸기 짝을 부르듯

고향 사투리로 노래를 한다

 

봉수대에서 한 나절 초록을 품고있다가

팔각정으로 내려와서

도시의 소음들을 말갛게 씻어놓는다

 

남산 뻐꾸기 목소리

골목마다 구성지게 흘러넘치면

서울 사람들 모두 편안해진다

 

한 고향 사람처럼 어깨동무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이웃이 된다

posted by 청라

목줄

시/제7시집 2024. 1. 22. 16:32

목줄

 

 

아내가 목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다

파란 힘줄이 앙버틴 양 다리에서 소름처럼 돋아난다

눈 감고 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동행하는 나의 목에도 줄이 매어져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목엔 모두 굴레가 채워져 있다

인생이 개처럼 인연의 목줄에 꿰여

덧없이 끌려가는 운명이라 해도

가장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고 웃으면서 살아가자

지금은 혼자 다독이는 슬픔에 절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삶이라 해도

잘 말린 구절초 꽃잎처럼

우릴수록 향이 깊어지는 그런 사림이 되자

올무에 옭힌 세상은 온통 눈밭이지만

나 혼자만 매화로 피어날 수는 없다

 

posted by 청라

첫눈

시/제7시집 2023. 12. 23. 08:52

첫눈

 

 

바람 편에 배달된

아내의 걱정

 

이 먼 들녘까지 따라왔구나

 

정겨운 잔소리처럼 팔랑대는

기차의 창문 너머로

 

평생을 몰래 숙성시킨

속말을 보낸다

 

아내여

멀리 보내놓고

두근거리는 가슴처럼 날리는 눈은

 

다음 또 다음 생애에서도

천 년을 함께하고픈

내 마음이다

 

posted by 청라

낮달

시/제7시집 2023. 12. 12. 17:05

낮달

 

 

새 신을 사시고도

어머닌 오래도록 헌 신을 기워 신으셨다

 

찢어진 데가 또 찢어져 발가락이 나와도

시렁 위에 모셔둔 신발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저 건너로 가시고 난 후

 

너희들이나 신으라고 어머니 벗어놓고 간

하얀 고무신 한 짝

 

어머니

저승의 주막집까지 

맨발로 절뚝이며 가셨는가요

 

오늘도 끼니 거르신

창백한 얼굴이 가을 하늘에 슬프다

posted by 청라

두 석상의 하나 되기

시/제7시집 2023. 12. 10. 09:11

두 석상의 하나 되기

 

 

통일 전망대 내리는 비엔 소금기가 배어있다

갈 수 없는 마을이 그리워 울다 떠난 사람들의 눈물과

높새바람에 펄럭이던 수많은 소망들이

포말처럼 부서져서 해당화로 피는 곳

남해에서 달려온 꽃바람이 철조망에 막혀

한숨으로 시드는  곳

겨울만 사는 동네는 봄이 와도 쪽문을 열지 않는다

산 하나 넘으면 저기가 고향인데

나의 그리움은 늘 우연雨煙에 가로막힌다

두고 온 어머니의 따뜻한 웃음과 고향 마을의

학 울음소리

나의 어린 시절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봄이면 제비처럼 찾아와 울던 고향이 함흥이라는

그 할아버지

발걸음 뚝 끊긴지 오래인데

아직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닿지 못하였는가

미륵불 성모 마리아 두 석상의 기도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소망처럼 끝까지 매달렸던

마지막 잎새 툭 하고 떨어지고

국토는 아직도 굳게 동여맨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

 

posted by 청라

소리의 틀

시/제7시집 2023. 11. 25. 07:13

소리의 틀

 

 

다듬이 소리

봄날 배꽃 피어나는 달밤 산골 물소리처럼

마을 골목을 쓸고 가던 그 소리엔

누나가 수틀에 그리던 꿈이 살고 있다

 

빨래방망이 소리는 어머니 한숨

밤낮으로 일을 해도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는

평생 푸념 같은 아픔이 배어있다

 

베 짜는 소리 속엔 할머니

삶의 여유가 들어있다

눈물도 웃음도 날줄로 쌓여

오래 묵은 대추나무 같은 세월이 거기 있다

 

사랑방에는

아버지 기침소리가 살고 있어야

제 맛이다

 

고달픈 삶을 기워 짜놓은 자리만큼

질기지만 위태롭던

아버지의 등

 

소리에도 틀이 있다

세월의 강물에 다 쓸려가 아득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가두어놓은

그리운 것들은 다 소리 속에 있다

posted by 청라

묻히는 노래

시/제7시집 2023. 11. 17. 09:40

묻히는 노래

 

 

철모르는 철쭉꽃이

눈보라를 맞고 있다

 

새빨간 절규가 눈에 묻힌다

 

덧없이 피었다 지는

내  노래처럼

posted by 청라

행복을 파는 찻집

시/제7시집 2023. 11. 13. 21:51

행복을 파는 찻집

 

 

심각한 인생사도 저녁나절 안개와 같다

 

차 한 잔 마시고

창밖 산기슭 바라보니

 

가득 차서

텅 비어버린 풍경화 한 폭

 

입안에 고이는 차향이 단풍을 닮아

무지개 빛깔로 현란하다

 

얽힌 매듭처럼 풀리지 않던 사랑도

갓 잣은 실처럼

가지런해지는 찻집

 

세사의 근심들도 행복으로

말갛게 우러나는 찻집

 

 

posted by 청라

명량의 북소리

시/제7시집 2023. 10. 26. 20:14

명량의 북소리

 

 

울돌목에 나가 바다를 살포시 안아보아라

반천 년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북소리

가슴에 단심丹心이 화인火印처럼 찍혀있는

진도 사람들은 알리라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한 충무공의 염원이

울돌목 북소리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진도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숨을 쉬듯이

저 소리를 마시며 자랐기에

나라 사랑의 마음이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진도 사람들 피는 진달래 꽃빛이다

나라가 불의로 덮여있을 때 명량의 북소리로 일어서서

해일처럼 온 나라를 쓸어내는 저 간절한 의지

진도 사람들 목소리엔 천둥이 들어있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정수리에

벼락을 내리치는 강렬한 용기

황토마을 사람 중에 나라 사랑의 빛깔이 더 붉어서

충무공의 큰 칼이 오래 입은 옷처럼 편한 진도 사람들

진도에 살아서 진도 사람이 아니다

타지에 나가서도 혈맥을 통해 명량의 북소리가 울려오니까

진도 사람이다

명량의 북소리가 첨찰산 상봉에 닿아 봄이면 동백꽃 향기

피어오르는 것을 멀리서도 그리워하니 진도 사람이다

 

 

posted by 청라

사랑이 반이다

시/제7시집 2023. 8. 17. 08:51

사랑이 반이다

 

 

꽃이 없는 봄은 봄이 아니다

봄이라는 이름엔 꽃이 반이다

산수유 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만개해야만 우리는

기나긴 겨울을 털어냈다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삶이라는 이름의 절반은 사랑이다

그리움과 아픔도 사랑에서 온다

어느 날 파뿌리처럼 하얘진 머리카락

거울에 비춰 보며

흘러간 시간의 유역 한 지점을 그리워하거나

기쁠수록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일찍 시들어서 이젠 웃을 일이 없다

우리의 인생길엔 사랑이 반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