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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7시집에 해당되는 글 22건
- 2024.10.29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 2024.10.03 하일夏日 귀향歸鄕 3
- 2024.09.27 산을 마시다
- 2024.08.14 혼자 사는 친구에게
- 2024.08.02 하일夏日 점묘點描
- 2024.07.11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 2024.06.18 천 년의 울음
- 2024.06.13 아내는 착한 치매 중
- 2024.02.25 남산 뻐꾸기
- 2024.01.22 목줄
글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세상일들이
바싹 마른 북어 맛처럼 밋밋해지면
자작나무 숲으로 가자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하늘 끝에 팔랑대는 잎새들이 불타는 색깔로
옷을 갈아입듯이
사랑이 메말랐던 내 가슴에도 단풍이 익는다네
오오, 천둥이여
자작나무에 기대어 가을을 안아주면
쿠르릉 쿠르릉
몸속에서 일어서는 천둥이여
오랫동안 시들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세월에 속아서 차갑게 식었던 사랑이
봄풀처럼 손들고 일어서는 아우성이여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려서
미워했던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는
눈물 많은 나를 찾았다네
산이 속삭이는 말을 알아듣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젊어져서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를 찾았다네
글
하일夏日 귀향歸鄕
골목은 사막처럼 비어있었다
분꽃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노인들
삭정이 마른 기침소리만 남아있었다
회재를 넘으면 언제나
된장찌개 냄새 마중 보내던 어머니
옛집 마당가에 돌절구로 서있고
저녁떄면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에
별 촘촘 달던
감나무 묵은 둥치엔 허기진 꿈들만 무성했다
그리운 얼굴들 하나씩 소환하며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추억은 늦여름 파장처럼 비틀거리는데
사람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 대문 닫히고
한 집 대문 닫히면 한 역사에 거미줄이 그어지고
풀들만 웃자란 건너 마을 초등학교에선
언제 또 담임 선생님처럼 종소리가 부르려는지
낯선 언어들로 삭막해지는
어린 날 손때 희미해진 거리에 가슴을 치며
홍시처럼 노을만
소멸되어가는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
산을 마시다
아침 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니
산은 가을 안개에 안겨있다
붙어산다고 꼭 정다운 것은 아니다
멀리서 손에 잡힐 듯 타오르는 초록을
한 모금 마신다
래미안아파트 17층
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산과 한몸이 되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외로운 사람에겐 꾀꼬리소리를 보내주고
고달픈 사람에겐
고촉사 목탁소리를 보내 달래주고
세상의 바람소리 잠재운 내 가슴의
둥지에
이름 모를 새는 알을 낳는다
글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등 기대고 부대끼며 살다가
나들이 끝내고 돌아가는 것
손 흔드는 뒷모습 허전하지 않게
씨앗 몇 알갱이 떨어뜨리고
큰 나무로 자라게 거름이나 주면서
싸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
아이들 많은 집안은 가난해도 부자이다
자식들 꿈들은 모두 다 내 재산이다
허공 높이 소망을 연처럼 띄워놓고
하늘까지 오르도록 줄 함께 잡고 버티다 보니
이제 나는 알겠다
기르는 게 두려워 외롭게 사는 것보다
날마다 전쟁이라도
웃을 일 풍성한 게 행복이라는 걸
글
하일夏日 점묘點描
매미소리 한 줄금
골목을 쓸고 간 후
배롱나무 가지에 타오르는
늦더위 송이송이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마을회관 공터에는
고추잠자리만 하루 종일 맴돌다 간다
소 울음 닭소리도 잦아든 지 오래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씩
사립문 닫히는 마을
봉숭아꽃 몇 번을 피었다 져도
금줄 걸린 집 하나 찾을 수 없고
접동새 흐느낌만
어둠처럼 내리고 있다
글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친구들 더러는 여의도에 가고
모두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신문마다 이름들 반짝반짝 빛나는 저녁
혼자 앉아 김치 안주로
소주 몇 잔 꺾고 돌아앉는 어둠에
푸념처럼 슬그머니 떠오르는
벼린 초승달
무엇을 이루려고 젊은 날을 불살랐는지
권력놀음에 취해
서로에게 총질하는 서글픈 창문 너머로
삭막해진 산하를
그래도 촉촉하게 붙잡아주는 개구리 소리
글
천 년의 울음
백제의 노을 새 옷처럼 걸치고
낙화암에 서서
강물의 흐름에 녹아있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보면
어떤 슬픔은 천 년을 가는 것도 있다
해가 갈수록 이끼처럼
푸르러지는 것도 있다
와당에 새겨진 눈부신 웃음에도
눈물은 숙성되어 짠해지고 있었다
고란사 종소리가 백마강에 윤슬로 반짝일 때면
잔잔하던 가슴의 깊은 어디쯤에선가
용암처럼 뭉클뭉클 솟아나는 인연의 울림
아, 나는 피에서 피로
천 년의 울음을 물려받은
백제의 후손
부소산 그늘에 기대어 한참을 흐느끼다가
그 날의 함성을 떠올려 보니
궁녀들 울음도 천 년을 살아
낙화암 진달래는
핏빛으로 붉더라
슬픔 밴 백마강은 쉬지 않고 울더라
글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오월 산은 빛나는 에메랄드
꾀꼬리 노래가
송이송이 금계국 잎 사이에 꽃을 매달면
신바람 난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머스캣 한 줌씩 나누어준다
아내의 시계는 일곱 살로 돌아갔다
무의식 속에서도 빼앗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즐기는 아내
아내의 세상은 장밋빛인데
함께 걸어가는
나의 세상은 먹오디 빛이다
글
남산 뻐꾸기
남도에서 온 사람도 북도에서
온 사람도
뻐꾸기 노랫소리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울이 온통 고향 산처럼
초록 물드는 오월이 오면
남산 뻐꾸기 짝을 부르듯
고향 사투리로 노래를 한다
봉수대에서 한 나절 초록을 품고있다가
팔각정으로 와서
도시의 소음들을 말갛게 씻어놓는다
남산 뻐꾸기 목소리
골목마다 구성지게 흘러넘치면
서울 사람들 모두 편안해진다
한 고향 사람처럼 어깨동무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이웃이 된다
글
목줄
아내가 목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다
파란 힘줄이 앙버틴 양 다리에서 소름처럼 돋아난다
눈 감고 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동행하는 나의 목에도 줄이 매어져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목엔 모두 굴레가 채워져 있다
인생이 개처럼 인연의 목줄에 꿰여
덧없이 끌려가는 운명이라 해도
가장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고 웃으면서 살아가자
지금은 혼자 다독이는 슬픔에 절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삶이라 해도
잘 말린 구절초 꽃잎처럼
우릴수록 향이 깊어지는 그런 사림이 되자
올무에 옭힌 세상은 온통 눈밭이지만
나 혼자만 매화로 피어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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