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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 사람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냉전 중인데 힘이 드는구먼.”
“누구하고? 제수씨하고? 이 사람아 살아가며 부부끼리 냉전 한 번 안 해본 사람 이 있는가. 자네가 좀 양보하지.”
“집사람 하고라면야 걱정도 않지. 며늘아이 하고 그러는데 참 불편하구만. 내보내야겠어.”
그러고 보니 지난 3월 친구의 자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들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손자, 손녀를 보았을 때를 대비해서 집안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며느리 성격이 싹싹하다고 무던하다고 지난번에 자랑하지 않았나? 그런 며느리 하고 왜?”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느리가 화낼 만도 하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 저녁이라도 자기가 차려드린다고 일찍 퇴근하여 저녁상을 올렸더니, 국이 좀 짰던지
“소금이 넘쳐나는 모양이구나. 네 집은 음식을 이렇게 짜게 먹냐?”
정통으로 며느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거였다. 웬만하면 참는 이해심 많은 여자도 친정의 흉을 보면 골내는 것을 몰랐던가? 예순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여자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다니!
판암동에서 추동 쪽으로 접어들자 길 가에 벚꽃이 무르녹았다. 벚꽃뿐만 아니라 진달래, 목련, 배꽃들도 저마다 자태를 자랑하며 산하를 온통 꽃으로 덮어버렸다. 대청호의 푸른 물과 조화를 이룬 절경을 감상하며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는가? 우리 선인들은 그럴 때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겠는가?”
나는 어느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옛날 어떤 며느리가 시집 온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시아버지 진짓상을 보아다 놓았다네. 시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대견하였겠는가. 자애로운 눈으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데, 첫 숟갈에 ‘딱’ 하고 돌멩이를 깨물었다네. ‘얘, 아가!’ 불안해 죽겠는데 부르시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간신히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로, ‘네……?’ 하였더니. 시아버지 한다는 소리가, ‘이 다음에는 식성대로 섞어 먹게 따로따로 놓아라.’ 이렇게 말했다네. 위축된 상태의 며느리를 감싸면서도, 앞으로는 돌멩이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이렇게 따뜻하게 할 수는 없는가? ”
“……….”
“자네 말한 대로라면, ‘너희 집은 쌀이 부족해서 쌀 반 돌 반 섞어먹니?’하고 말하지 않았겠나. 집에 가는대로 시아버지 자존심 어쩌고 하지 말고 사과하게.”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기 속 며느리는 죄송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으로 가면서 쿡쿡거리며 웃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시아버지를 더욱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참으로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듣기 거북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 말을 잘못해서 부부간에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상사에게 미움을 받아 직장을 쫓겨나는 사람도 있다.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말을 보내면,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이 건너온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전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말, 이것이 정말로 묘미 있는 말이 아닐까?
글
정화수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전으로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문틈으로 열여드레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으스름 달빛은 온 세상에 넘실거리고, 검게 가라앉은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꼍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산 밑 장독대 앞에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를 만큼 어머니는 기도에 몰두하고 계셨다. 하얀 사발 안에 우물에서 갓 길어낸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어머님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꼭 감긴 두 눈가엔 간절한 염원처럼 맑은 달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아들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들만은 그 어렵다는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빌고 계실 터였다. 온 새벽의 경건함이 새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님 등 뒤에 둘러져 있고, 찬란한 달빛은 모두 어머님의 두 손끝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온몸이 달빛을 받아 후광에 싸여 있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오신 어머님이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나를 낳고는 겨우 웃음을 찾으시었고, 내가 등창만 앓아도 아버지 밥상에도 놓기 어려운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남가섭암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시던 어머님이다.
나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감동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바라보았다. 잘못 움직이면 어머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깨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살금살금 방으로 뒤돌아올 때도 달빛 아래 그림처럼 그렇게 앉아 계셨다.
『한밭수필』제9호(2017)
글
체육시간에도 화철이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혼자 놀았다. 친구들은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였지만 늘 멀건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화철이를 자기 팀에 끼워주지 않았다. 하기는 헛발질만 하고, 때로는 자기 골문으로 볼을 차는 놈을 자기 팀에 끼워줄 사람이 있겠는가?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서 어슬렁거리며 교실로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이제 급우들도 화철이 일이라면 아무리 웃기는 일이라도 웃지도 않았다.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화철이는 우리 학급에서 있어도 없는 존재였다.
한 번은 철봉 아래 모래밭에서 혼자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화철이를 불렀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왜? 왜 재미없어?”
“그냥 재미없어요.”
“누가 우리 화철이 때리는 사람 있어? 괴롭히는 사람 있어?”
화철이는 다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화철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야?”
화철이는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애들하고 놀고 싶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탁 막혔다. 불쌍한 놈. 화철이의 표정에는 애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소망이 간절하게 나타나 있었다. 머리가 부족한 놈에게도 외로움은 있는 거였다.
나는 쉬는 시간에 당장 반장을 불렀다. 그리고 화철이 이야기를 했다. 그 애가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지를 이야기 하고, 같이 놀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그 다음부터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뛰어다니는 화철이를 보았다. 뛰는 것은 어설퍼도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학급의 모든 일에 화철이를 참여시켰고, 그 때부터 화철이는 진정한 학급의 일원이 되었으며,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 늦게 등교하는 일도 줄어들고, 수업시간에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하루는 다시 화철이를 불러 미리 준비한 사탕을 주면서 물어보았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화철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즐거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뭐가 좋은데? 화철이 뭐가 그렇게 좋아?”
“애들이 잘 해줘요. 축구 재밌어요.”
나는 나의 말 한 마디에 그렇게 화철이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학급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내 조그마한 관심이 외로움의 그늘 속에서 즐거움의 양지쪽으로 한 아이를 꺼내 주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기뻤다.
가을이었다. 교정의 나무들에도 가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퇴근을 하려고 교문을 나서는데 담 뒤에 숨어있던 한 아이가 뛰어왔다. 화철이었다. 내 손에 무엇을 쥐어주고
“선생님, 좋아요.”
발음도 분명하지 않게 중얼거리고 뛰어갔다. 어설프게 싼 종이를 풀어보니 곱게 물든 단풍잎 한 가지였다. 나의 온 몸에 짜르르 환희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교사의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이 가을의 모든 아름다움이 화철이가 주고 간 단풍잎에 모여 고여 있는 듯했다. 억만금의 선물보다 더 귀하고 고마웠다.
뛰어가는 화철이의 등에 대고 나도 마음속으로 외쳤다.
“화철아, 나도 사랑해”
<한밭수필>2016(8호)
글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글
생각해보면 대전에 온 이후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분주한 나날이었다. 22년 동안 3학년 담임 11년, 3학년 부장 3년, 1, 2학년 부장 2년 등 16년을 일찍 퇴근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렇게 전깃불 아래서 태워 날려 버렸다. 분주한 만큼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얻은 여유 있는 시간에 나는 철저하게 자아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일만 해도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김 선생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고 하길래 궁금한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중간고사 일 중간에 휴일이 이틀 끼어 있다고 나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올려놓았다. 교직에 30년 넘게 몸담아 있었지만 이런 욕은 처음 들어보는 까닭에 참으로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학사일정은 내가 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고사 일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왜 나를 향해 욕을 했을까?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놈이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방학 중에도 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일찍 오는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 있는 교실 열쇠를 못 꺼낼까 걱정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신새벽에 출근하였다. 학교를 떠나 있으면 늘 아이들 걱정을 하였으며, 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었다. 아이들에게도 나의 이런 마음이 전달되었다 생각했고,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존경받는 교사일 것이라고 착각을 하였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사랑하였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체했던 것이 아닐까. 예쁜 아이는 예뻐하고, 미운 아이는 그냥 미워했었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사는 머리로만 아이들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진정 감동시키고 바르게 자라는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글
D고에 가던 첫해에 3학년 문과 여학생 반 담임을 했다. 시내의 다른 학교에 비해 성적도 뛰어나게 좋았지만, 극성스럽기도 또한 지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사이좋은 친구사이인데도 질투심은 또 왜 그렇게 많았던지……. 3월 첫날 누군가가 예쁜 꽃병에 꽃을 꽂아놓았다. 다음날엔 어떤 놈이 그 꽃병을 치워버리고 자기의 꽃병에 꽃을 꽂아 놓는다.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가져다 준 쟁반 위의 컵들도 수시로 바뀌었다.
4월 초였다. 처연하게 지는 매화꽃 옆에서 백목련 탐스럽게 피어나는 오후였다. 부반장 놈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인형을 하나 들고 왔다.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이었다. 배는 불쑥 나오고, 얼굴은 호빵처럼 둥글둥글하고, 양 볼은 볼그레하다. 인형을 내 옆에 같다 대더니
“선생님, 똑같아요.”
“뭐가?”
“선생님하고 이 인형요.”
모여 서서들 기를 죽이려는 듯 까르르 웃어댄다. 나쁜 놈들, 내가 뭐 저렇게 웃기게 생겼다고. 책상에 내려놓는 인형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정을 했다.
인형을 갖다 준 것이 음모였다는 것을 나는 다음날부터 금방 알아차렸다. 나한테 혼이 나거나 나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면 나 몰래 와서 인형을 팼다. 심지어 어떤 놈은 호빵맨 인형의 손목에 세균맨을 채워놓고 갔다. 교무실로 들어오다 호빵맨 인형을 때리는 놈을 보았지만, 나는 못 본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놈들의 애교 있는 반항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잘도 연락을 하더니 졸업 후엔 전혀 소식이 없다. 그놈들이 지어준 별명은 Y고로 건너와 이 곳 학생들도 부르고 있지만 고놈들 소식은 알 수가 없다. 호빵맨 인형을 내 집안의 책상 위에 소중히 간수해두고 아이들이 그리울 때면 어루만져 보며 생각한다. 지금 고놈들 시집간 놈은 있을까?
글
“아빠, 왜 이렇게 꺼끌꺼끌해? 이것도 먹는 음식 맞아요?”
“미끌미끌해서 안 씹어지고 입 속으로 막 돌아다니네. 라면 끓여 먹는 게 훨씬 낫겠다.”
햄이나 소시지, 라면 등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에게 보리밥은 낯설고 거칠어 전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가난하였었다. 겨울이 지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은 모두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오월을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하지 않았던가. 누렇게 부황난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던 이 시절엔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뿡뿡 기운차게 방귀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점심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밥 차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엌을 기웃거려 보니 시렁에 보리쌀을 삶아 밥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 있었다. 식구들 저녁거리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시장한 판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배가 불끈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겁이 났다. 일에 지쳐서 돌아와 부족한 저녁밥에 눈을 부라리실 부모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일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쯤 되어 나는 겁에 질려 뒷논에 쌓아 놓은 짚더미에 몸을 숨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 걱정에 온 마을을 헤맨 부모님이 짚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못 견디게 그리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보리밥을 먹어가며 아이들에게 그 보리밥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마치 옛 이야기나 전설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들 자신조파 풍요에 취해 어려웠던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데, 그 시절 그 가난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과연 실감이 나는 이야길까?
요즈음 아이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서만은 그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만큼 가슴 시린 그리운 이야기 거리는 그 때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글
배고픔을 참는 고통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뱃속의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엔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설악산과 동해 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강릉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내 성격에 선생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다음 정차하는 곳까지 참기로 하였다.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자갈길에서 차가 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빙빙 돌아 처음 보는 동해의 장관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께 발견되어 울진이든가 영덕이든가 어디에서 시원하게 배설하던 그 쾌감! 나는 지금도 그곳 퀴퀴한 화장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도 우리의 소화기관과 같다. 막히면 답답하고, 풀어줘야 할 때 풀어주지 못하면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바로잡아 줄 어른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굽은 채 자라도 바로잡아 줄 선생님도 많이 줄어들었다. 잘못된 자유의 범람으로 모든 것이 서로 얽혀도 풀어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아 교통이 막히고 경제가 막히고 미풍양속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 누군가 근심 걱정이 술술 풀리는 해우실(解憂室)로 우릴 인도할 수는 없을까.
글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가 기성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이 너른 바다와 마을들과 바위들의 정겨운 모습. 내 젊은 날에 보던 동해가 거기 고스란히 누워있었다. 사동을 지나면서 잠깐 멈춰 해안 바윗길을 바라보았다. 거기 바닷가 산 밑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내가 근무하던 소초(소대장이 근무하는 초소)가 나올 것이다.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은빛으로 반짝이던 하얀 백사장.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파도소리에 깨어나던 곳.
달밤이면 이 소위(대령으로 예편)가 나를 불렀었다. 달빛이 너무 밝으니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근무하는 소대원들이 볼까 두려워 술병 하나 감추고 이소위 부대 쪽으로 갈 때면 월광이 출렁이는 바다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양 소대 근무지 중간지점의 백사장에서 만나 술 한 잔에 달을 띄워 마시며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시국 이야기도 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다시 순찰을 돌며 돌아올 때 바다와 달과 술, 그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초 아이들은 간첩이 오는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고, 중대장님(대령으로 예편)이 순찰 오시는 도로 쪽을 경계했었다. 중대장님의 오토바이가 우리 부대 쪽으로 들어오면 즉시 전화로 연락을 했고, 나는 부대원들의 근무상태를 점검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중대장님은 바둑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소초로 들어오시면 바둑으로 유혹을 했었다. 바둑판을 잘 보이도록 내무반에 놓아두고
“중대장님, 바둑 좀 느셨어요?”
“왜, 한 수 하자고?”
바둑 한 번 붙으면 그 날 우리 소대 순찰은 끝이었다.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눈치 빠른 일국(당시 병장)이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계란을 풀어 라면을 끓여 왔다. 바둑의 판세는 내가 압도적이고, 그럴 때 여유를 부리며 먹는 라면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중대장님이 바둑만 두시다가 가시는 덕분에 늘 우리 소대 지적사항이 제일 적었었다.
기성면 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척산리 가는 들길로 들어섰다. 한 번 다닌 길에 자국이 남는다면 수도 없이 내 흔적이 찍혀 있을 그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길 가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이전했는지 보이지 않고, 마을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조그마한 횟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 백사장 옆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소초로 들어가는 산길 옆 방파제 앞에서 나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옛날 조그맣던 방파제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확장되어 있었고, 소초로 들어가던 길은 뚝 끊어져 있었다. 울퉁불퉁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해변을 억지로 걸어 소초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충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초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름이면 소대원들과 수영을 하며 놀던 백사장도 파도에 휩쓸려 가서 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백사장 가 바위틈 여기저기에 어디에선가 떠내려 온 부유물들이 쓰레기장처럼 널려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에 찾아갔다가 무참히 헐리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커다란 상실감에 일어설 줄 몰랐다.
아름다 운 추억은 아름다운대로 가슴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산에 핀 꽃은 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듯 그리운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와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리고,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글
<교단일기>
토요일 오후였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나른한 오후의 주말을 즐기고 있는데 조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람이는 성품도 쾌활하고, 급우들을 위해 봉사할 줄도 알며, 공부도 곧잘 하는 아이다. 부모님들도 교양 있고, 집안도 부유한 편인데 어쩌다가 그 아이에게 그런 몹쓸 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깨어진 주말의 평화 때문에 불쾌한 마음으로 학교로 달려갔다. 교무실에 가 보니 가람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조 선생은 화 난 얼굴로 무엇인가 묻고 있다.
“조 선생, 가람이가 또 무슨 사고를 낸 모양이죠?”
“예. 우리 반 형태가 지갑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런데 가람이가 점심시간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왔었대요. 아이들 모두 가람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선생님, 저 정말로 성태 보러….”
“시끄러워 임마”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내가 사정을 했는데. 제 편에 서서 그렇게 힘썼는데. 그만하면 돌부처도 감동했겠다. 나는 가람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하여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갔을 때 맨 처음 말을 건 학생이 가람이었다. 모두 싫어하는 급식당번을 모집했을 때도 제일 먼저 지원을 했고, 회계를 모집했을 때도 주저 없이 손을 든 아이였다. 늘 얼굴이 환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서 사랑스런 마음이 절로 생겨나는 아이였다 . 그 날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나는 반장보다 더 가람이를 의지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학교에 가니 2학년 담임 한 분이 좀 만나자는 쪽지를 책상 위에 놓고 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즉시 달려가서 절망적인 그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어제 4교시 가람이가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현금과 핸드폰을 훔쳐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가람이를 믿고 있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가람이라고 확신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미련한 놈이 옆에 있는 헌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새 핸드폰과 현금들만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그 헌 핸드폰 임자가 자기가 운동장에 있는 시간에 자기 핸드폰을 쓴 사람이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기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가람이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들으신 교장, 교감선생님은 당연히 크게 노하셨고, 퇴학을 시키라 하시는 것을 간신히 사회봉사로 끝내었던 것이다.
“선생님, 이번은 정말 제가 하지 않았어요. 정말 억울해요.”
가람이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 눈물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 선생님 학급의 도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으로 가람이가 했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기에 그의 모든 행동들이 의심스러웠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의심스럽고, 가끔씩 저항적인 눈빛을 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래. 틀림 없어. 이번의 범인도 이놈일거야. 가람이에게 가지고 있던 한 가닥의 기대도 나는 몽땅 버려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 선생 앞에서 형태가 꾸중을 듣고 있는 걸 보았다. 내가 자리에 앉으니 조선생이 미안한 얼굴로
“엄 선생님, 이거 어쩌죠. 어제 이 놈이 글쎄 집에다 지갑을 놓고 왔대요.”
나는 가람이 얼굴 볼 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 번 의심하기시작하면 그 의심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심 생 암귀’의 고사가 문득 생각났다. 하나의 사건만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일은 교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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