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를 무치며

시/제5시집 2019.05.21 08:29

동치미를 무치며

 

 

장미꽃이 필 때 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잘 먹어 중후하게 생긴

남자가 좋다는

아내의 푸념을 들으며

 

먼 기억 속

어머니의 손맛을 꺼내듯

해묵은 단지에서 동치미를 꺼낸다.

 

그리움에 윤을 내듯

골마지를 씻으면

힘들 때마다 문득 찾아오는 당신의 향기

 

들기름을 치고

고춧가루를 버무리며

저승에서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입맛을 찾는다.

 

201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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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송頌

시/제5시집 2019.05.14 14:00

겨울 송

 

 

겨울은

내가 다가갈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많아서 좋다.

 

들판에서 홀로 바람 맞는

허수아비처럼

조금은 허점이 있고

적당히 쓸쓸하고

 

수염 자국 거무죽죽한

사나이마냥

그늘이 있어 정이 가는

 

겨울아

온 천지 꽃으로 채운 봄 이기보다

여백을 많이 거느린

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비우다 만 술병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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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 고한다

시/제5시집 2019.05.08 08:00

청춘에 고한다

 

 

책은

눈물을 지워주는 지우개

 

많이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posted by 청라

아픈 손가락

시/제5시집 2019.05.07 06:46

아픈 손가락

 

 

오월은

초록빛 목소리로 온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오면

반짝반짝 빛나는 목소리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진짜 찾고 싶은 이름 하나

자폐증을 앓고 있던 화철이

제 이름도 쓰지 못하고

노래 하나 제대로 부르는 것 없었지만

풀꽃  가슴에 달아주면서

선생님, 좋아요

어떤 노래보다 듣기 좋던 노래

세월의 강 너머에서 가시로 찔러

언제나 피 흘리는 아픈 손가락

 

2019.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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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가교리

시/제5시집 2019.05.01 07:40

내 고향 가교리

 

 

마곡사에서 떠내려 온 풍경소리가

수 태극 옆구리에서

수많은 풀꽃으로 피어나는 곳

 

풀꽃을 닮아

웃음도 해맑은 사람들이

담 너머로 떡 사발 주고받는 곳

 

달빛 아래 정화수 떠놓고

자식 위해 비시던

어머니 하얀 손이 그리울 때면

 

천 리 밖 머언 곳에서도

마음을 띄워

철새처럼 회재 고개 넘어간다네.

 

 

201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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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삼월이 오면 우리가 할 일은

비둘기 맨발에

꽃신을 신겨주는 일이다.

얼마나 추운 것들이

많은 세상이냐.

우리가 봄 햇살 같이 다가가

꽁꽁 언 가슴마다

불씨 하나 지펴준다면

그리하여

빙산처럼 단단한 슬픔에

금 하나라도 가게 할 수 있다면

! 눈물 맑은 노래들이 피어올라서

이 세상을 데워주겠지.

주위를 돌아보며 사는 일들은

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2019.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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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게

시/제5시집 2019.02.28 17:10


제비꽃에게

 

 

콘크리트 사이에

뾰족이 고갤 쳐든 제비꽃아

괜찮다. 괜찮다.

목련꽃처럼 우아하지 않으면 어떠리.

겨우내 툰드라의 뜰에서

옹송그리고 지내다가

봄 오자 단단한 벽을 허물고 깃발 세운

네 눈빛만으로 골목이 환하지 않느냐.

 

괜찮다. 괜찮다.

어린 아이들아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떠리.

까르르 까르르

너희들의 웃음만으로도

온 세상이 환하지 않느냐.

 

2019. 2. 28

충청예술문화2019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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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시/제5시집 2019.02.02 09:10

눈 오는 날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해야겠다.

 

따뜻한 정종 몇 잔 함께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대전의 밤거리를 걸어야겠다.

 

서먹했던 마음의 골목

밝게 비추는 불빛

수만의 벌떼처럼 잉잉대는 눈발

 

고희古稀의 문턱인데

명리名利를 다퉈 무엇 하리.

 

묵은 둥치일수록

단단하게 붙어있는

잔나비걸상버섯처럼

 

겨울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가자고

손을 내밀어야겠다.

 

 

2019, 2, 2

충청예술문화2019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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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일구다

시/제5시집 2019.01.08 08:18

사막을 일구다

 

 

사랑편지를 전했더니

사막을 보내왔다.

그녀의 답신答信은 사막의 달빛처럼

무채색이다.

내 사랑 어디 씨앗 하나 싹틔울 곳 없어

도마뱀처럼 납작 엎드려

기어도 기어도 꽃은 피지 않는다.

선인장 가시에 긁힌 바람만 몇 올

모래언덕을 헤집다 스러진다.

사랑이여!

작은 생명 하나 움트지 못할

불모의 땅에 뿌리를 내려보자.

깊이 숨어있는 초록의 숨결을 모아

천둥 번개를 불러오겠다.

바삭거리는 당신의 가슴에

몇 천 번이라도 비를 퍼붓겠다.

나는 사막을 일궈

사랑 한 그루 푸르게 크게 하겠다.

 

 

2019. 1. 8

posted by 청라

간송澗松 미술관에서

 

 

일본 땅 어디쯤 헤매고 있겠지

빼어난 어깨 위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온유한 가슴에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당신의 열정

민족혼이 지켜낸 천학매병千鶴梅甁

 

! 천 마리의 학들이 날아오른다.

비취빛 하늘

편편이 날리는 구름을 뚫고

 

종소리처럼 솔향기처럼

보아도 보아도 눈을 뗄 수 없는

가녀리고도 질긴 힘이여!

 

오롯한 한 가지만 심어도 좋을

좁은 입 속에

야월 한설夜月寒雪 피어난 한 송이 매화꽃 같은

당신의 정신만 꽂아놓고 싶었다.

 

 

2019. 1. 4

시문학20193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