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시/제7시집 2024. 7. 11. 04:43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친구들 더러는 여의도에 가고

모두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신문마다 이름들 반짝반짝 빛나는 저녁

 혼자 앉아 김치 안주로

소주 몇 잔 꺾고 돌아앉는 어둠에

푸념처럼 슬그머니 떠오르는

벼린 초승달

무엇을 이루려고 젊은 날을 불살랐는지

권력놀음에 취해

서로에게 총질하는 서글픈 창문 너머로

삭막해진 산하를

그래도 촉촉하게 붙잡아주는 개구리 소리

posted by 청라

천 년의 울음

시/제7시집 2024. 6. 18. 10:02

천 년의 울음

 

 

백제의 노을 새 옷처럼 걸치고

낙화암에 서서

강물의 흐름에 녹아있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보면

 

어떤 슬픔은 천 년을 가는 것도 있다

해가 갈수록 이끼처럼

푸르러지는 것도 있다

 

와당에 새겨진 눈부신 웃음에도

눈물은 숙성되어 짠해지고 있었다

 

고란사 종소리가 백마강에 윤슬로 반짝일 때면

잔잔하던 가슴의 깊은 어디쯤에선가

용암처럼 뭉클뭉클 솟아나는 인연의 울림

 

, 나는 피에서 피로

천 년의 울음을 물려받은

백제의 후손

 

부소산 그늘에 기대어 한참을 흐느끼다가

그 날의 함성을 떠올려 보니

 

궁녀들 울음도 천 년을 살아

낙화암 진달래는

핏빛으로 붉더라

 

슬픔 밴 백마강은 쉬지 않고 울더라

 

 

posted by 청라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시/제7시집 2024. 6. 13. 22:47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오월 산은 빛나는 에메랄드

꾀꼬리 노래가

송이송이 금계국 잎 사이에 꽃을 매달면

신바람 난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머스캣 한 줌씩 나누어준다

아내의 시계는 일곱 살로 돌아갔다

무의식 속에서도 빼앗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즐기는 아내

아내의 세상은 장밋빛인데

함께 걸어가는

나의 세상은 먹오디 빛이다

 

 

 

posted by 청라

남산 뻐꾸기

시/제7시집 2024. 2. 25. 21:46

남산 뻐꾸기

 

 

남도에서 온 사람도 북도에서

온 사람도

뻐꾸기 노랫소리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울이 온통 고향 산처럼

초록 물드는 오월이 오면

남산 뻐꾸기 짝을 부르듯

고향 사투리로 노래를 한다

 

봉수대에서 한 나절 초록을 품고있다가

팔각정으로 내려와서

도시의 소음들을 말갛게 씻어놓는다

 

남산 뻐꾸기 목소리

골목마다 구성지게 흘러넘치면

서울 사람들 모두 편안해진다

 

한 고향 사람처럼 어깨동무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이웃이 된다

posted by 청라

목줄

시/제7시집 2024. 1. 22. 16:32

목줄

 

 

아내가 목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다

파란 힘줄이 앙버틴 양 다리에서 소름처럼 돋아난다

눈 감고 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동행하는 나의 목에도 줄이 매어져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목엔 모두 굴레가 채워져 있다

인생이 개처럼 인연의 목줄에 꿰여

덧없이 끌려가는 운명이라 해도

가장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고 웃으면서 살아가자

지금은 혼자 다독이는 슬픔에 절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삶이라 해도

잘 말린 구절초 꽃잎처럼

우릴수록 향이 깊어지는 그런 사림이 되자

올무에 옭힌 세상은 온통 눈밭이지만

나 혼자만 매화로 피어날 수는 없다

 

posted by 청라

첫눈

시/제7시집 2023. 12. 23. 08:52

첫눈

 

 

바람 편에 배달된

아내의 걱정

 

이 먼 들녘까지 따라왔구나

 

정겨운 잔소리처럼 팔랑대는

기차의 창문 너머로

 

평생을 몰래 숙성시킨

속말을 보낸다

 

아내여

멀리 보내놓고

두근거리는 가슴처럼 날리는 눈은

 

다음 또 다음 생애에서도

천 년을 함께하고픈

내 마음이다

 

posted by 청라

낮달

시/제7시집 2023. 12. 12. 17:05

낮달

 

 

새 신을 사시고도

어머닌 오래도록 헌 신을 기워 신으셨다

 

찢어진 데가 또 찢어져 발가락이 나와도

시렁 위에 모셔둔 신발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저 건너로 가시고 난 후

 

너희들이나 신으라고 어머니 벗어놓고 간

하얀 고무신 한 짝

 

어머니

저승의 주막집까지 

맨발로 절뚝이며 가셨는가요

 

오늘도 끼니 거르신

창백한 얼굴이 가을 하늘에 슬프다

posted by 청라

두 석상의 하나 되기

시/제7시집 2023. 12. 10. 09:11

두 석상의 하나 되기

 

 

통일 전망대 내리는 비엔 소금기가 배어있다

갈 수 없는 마을이 그리워 울다 떠난 사람들의 눈물과

높새바람에 펄럭이던 수많은 소망들이

포말처럼 부서져서 해당화로 피는 곳

남해에서 달려온 꽃바람이 철조망에 막혀

한숨으로 시드는  곳

겨울만 사는 동네는 봄이 와도 쪽문을 열지 않는다

산 하나 넘으면 저기가 고향인데

나의 그리움은 늘 우연雨煙에 가로막힌다

두고 온 어머니의 따뜻한 웃음과 고향 마을의

학 울음소리

나의 어린 시절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봄이면 제비처럼 찾아와 울던 고향이 함흥이라는

그 할아버지

발걸음 뚝 끊긴지 오래인데

아직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닿지 못하였는가

미륵불 성모 마리아 두 석상의 기도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소망처럼 끝까지 매달렸던

마지막 잎새 툭 하고 떨어지고

국토는 아직도 굳게 동여맨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

 

posted by 청라

소리의 틀

시/제7시집 2023. 11. 25. 07:13

소리의 틀

 

 

다듬이 소리

봄날 배꽃 피어나는 달밤 산골 물소리처럼

마을 골목을 쓸고 가던 그 소리엔

누나가 수틀에 그리던 꿈이 살고 있다

 

빨래방망이 소리는 어머니 한숨

밤낮으로 일을 해도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는

평생 푸념 같은 아픔이 배어있다

 

베 짜는 소리 속엔 할머니

삶의 여유가 들어있다

눈물도 웃음도 날줄로 쌓여

오래 묵은 대추나무 같은 세월이 거기 있다

 

사랑방에는

아버지 기침소리가 살고 있어야

제 맛이다

 

고달픈 삶을 기워 짜놓은 자리만큼

질기지만 위태롭던

아버지의 등

 

소리에도 틀이 있다

세월의 강물에 다 쓸려가 아득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가두어놓은

그리운 것들은 다 소리 속에 있다

posted by 청라

묻히는 노래

시/제7시집 2023. 11. 17. 09:40

묻히는 노래

 

 

철모르는 철쭉꽃이

눈보라를 맞고 있다

 

새빨간 절규가 눈에 묻힌다

 

덧없이 피었다 지는

내  노래처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