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시/제5시집 2019.07.06 10:50

나무

 

 

나무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서있다.

둥치 감아 올라오는 칡덩굴의 초록빛에

칼날이 번득여도

허리를 굽히는 법이 없다.

 

꼭대기까지 다 덮어

숨 쉴 공간 하나 없어도

하늘 향해 뻗어 나가던 꿈마저

다 막혀도

나무는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작은 틈으로 바라보면

산은 온통

풀들의 분노를 활활 피워 올린

검붉은 칡꽃 밭

 

풀들은 공생할 줄을 모른다.

욕심을 한 뼘이라도 더 뻗어

세상의 진액을 남김없이 빨아댈 뿐

 

온 산을 기세 좋게 휘감은 저 풀들의 반란

산을 지키는 것은 풀이 아니다.

칡덩굴이 무성할수록

산은 황폐해진다.

 

수만 톤의 무게가 찍어 눌러도

나무야, 절대 허리를 굽히지 말자.

뿌리를 넓고 튼튼하게 벌려

모진 장마가 할퀴고 지나갈 때에

산을 지켜주자.

 

 

2019.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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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갈대숲

시/제5시집 2019.06.18 08:46

저녁 갈대숲

 

오늘 하루도

새끼 다섯 마리 모두 안녕하신가.

하루 종일 혹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갈대숲 사이를 헤엄치던 청둥오리

가장 조그마한 한 마리 늦을라치면

한참을 기다리며 조바심하던 어미

오늘 아침 신문기사에

세 살 난 딸을 패 죽였다는 엄마

사람보다 아름다워라

몸은 안 보이고

도란도란 소리만 들려오는 청둥오리네 집에

나팔꽃 연분홍 등 하나 반짝 켜진다.

부리로 털을 골라주며

오늘 하루 위험했던 순간 하나하나 상기시켜 주겠지.

어떻게 살아가야 빛이 나는 지를

정답게 조곤조곤 얘기해주겠지.

집에만 돌아오면 게임에 매달리는 아이들

대화 하나 없이 메마른 우리네 집안

사람보다 아름다워라

밤새도록 소곤거리는 소리 들려오는

청둥오리네 창에

가장 밝은 별 하나도 반짝이며 기웃대고 있다.

 

 

2019.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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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시/제5시집 2019.06.08 09:05

강가에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만 달려온

내 얼굴이 담겨있다.

 

오르고 또 올라서

산이 되었는가.

하늘이 되었는가.

 

산과 하늘을 가볍게 안은 

강물의 흐름 속에서

나는 한 점으로 떠있다.

 

2019.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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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를 무치며

시/제5시집 2019.05.21 08:29

동치미를 무치며

 

 

장미꽃이 필 때 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도솔산 뻐꾸기가 초록을 물고 와

소태처럼 쓴 일상日常

새 잎을 마구 피워 올려도

호박잎모양 후줄근한 삶에 멀미를 느끼며

 

먼 기억 속

어머니의 손맛을 꺼내듯

해묵은 단지에서 동치미를 꺼낸다.

 

그리움에 윤을 내듯

골마지를 씻으면

힘들 때마다 문득 찾아오는 당신의 향기

 

들기름을 치고

고춧가루를 버무리며

저승에서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삶의 입맛을 찾는다.

 

2019. 5. 21

충청예술문화2019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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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송頌

시/제5시집 2019.05.14 14:00

겨울 송

 

 

겨울은

내가 다가갈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많아서 좋다.

 

들판에서 홀로 바람 맞는

허수아비처럼

조금은 허점이 있고

적당히 쓸쓸하고

 

수염 자국 거무죽죽한

사나이마냥

그늘이 있어 정이 가는

 

겨울아

온 천지 꽃으로 채운 봄 이기보다

여백을 많이 거느린

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비우다 만 술병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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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 고한다

시/제5시집 2019.05.08 08:00

청춘에 고한다

 

 

책은

눈물을 지워주는 지우개

 

많이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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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손가락

시/제5시집 2019.05.07 06:46

아픈 손가락

 

 

오월은

초록빛 목소리로 온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오면

반짝반짝 빛나는 목소리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진짜 찾고 싶은 이름 하나

자폐증을 앓고 있던 화철이

제 이름도 쓰지 못하고

노래 하나 제대로 부르는 것 없었지만

풀꽃  가슴에 달아주면서

선생님, 좋아요

어떤 노래보다 듣기 좋던 노래

세월의 강 너머에서 가시로 찔러

언제나 피 흘리는 아픈 손가락

 

2019.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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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가교리

시/제5시집 2019.05.01 07:40

내 고향 가교리

 

 

마곡사에서 떠내려 온 풍경소리가

수 태극 옆구리에서

수많은 풀꽃으로 피어나는 곳

 

풀꽃을 닮아

웃음도 해맑은 사람들이

담 너머로 떡 사발 주고받는 곳

 

달빛 아래 정화수 떠놓고

자식 위해 비시던

어머니 하얀 손이 그리울 때면

 

천 리 밖 머언 곳에서도

마음을 띄워

철새처럼 회재 고개 넘어간다네.

 

 

201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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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삼월이 오면 우리가 할 일은

비둘기 맨발에

꽃신을 신겨주는 일이다.

얼마나 추운 것들이

많은 세상이냐.

우리가 봄 햇살 같이 다가가

꽁꽁 언 가슴마다

불씨 하나 지펴준다면

그리하여

빙산처럼 단단한 슬픔에

금 하나라도 가게 할 수 있다면

! 눈물 맑은 노래들이 피어올라서

이 세상을 데워주겠지.

주위를 돌아보며 사는 일들은

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2019.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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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게

시/제5시집 2019.02.28 17:10


제비꽃에게

 

 

콘크리트 사이에

뾰족이 고갤 쳐든 제비꽃아

괜찮다. 괜찮다.

목련꽃처럼 우아하지 않으면 어떠리.

겨우내 툰드라의 뜰에서

옹송그리고 지내다가

봄 오자 단단한 벽을 허물고 깃발 세운

네 눈빛만으로 골목이 환하지 않느냐.

 

괜찮다. 괜찮다.

어린 아이들아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떠리.

까르르 까르르

너희들의 웃음만으로도

온 세상이 환하지 않느냐.

 

2019. 2. 28

충청예술문화20194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