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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징검다리
하나쯤은
이가 빠져 있어도 좋다
네가 내게 들어와
삶을 춤추게 하던 그 다리 같이
등이 간지러운 시간만큼
설렘이 부풀어 올라
그 날 산바람에 묻어오던
뻐꾸기 소리처럼
올 것만 같다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아
글
팔월의 눈
그 날 아버지는 구급차를 타고
눈보라치는 연미산 고개를 넘으시면서
하얗게 덮인 금강의 백사장이며 빨랫줄처럼 흔들거리는
공산성의 성벽들을 샅샅이 눈에 담으셨다.
“내가 이제 여기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아버지의 쉰 목소리에서 눈바람소리가 울렸다.
쉰아홉에 휘몰아친 팔월의 눈보라
간이 돌처럼 딱딱해져서
수술도 할 수 없다는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몇 마지기 땅뙈기로 아들 셋을 대학 보내며
꿈꾸었을
아버지의 무지개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나는 벌판처럼 쓸쓸해진 그의 시선을 피해
너무도 일찍 와버린 아버지의 겨울을 생각했다
첫 월급을 타서 보낸 한약 한 재가
아버지의 삶에 이른 눈보라를 불러왔을까
아들의 첫 선물에 너무도 좋아하던 환한 얼굴 너머로
죄책감처럼 몰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꺼질 듯 꺼질 듯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삶의 된서리에도 푸르게 견뎌가던
명아주 한 포기 시들어가는 소리였다.
그 해에는 눈도 참 일찍 왔다
글
득음得音
상수리나무 잎새에 매미 소리가 박혀있다
한 달의 득음得音을 위해
칠 년을 침묵의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한
고단한 생애가 판화처럼 찍혀있다
매미는 알았을 것이다 때로는 덧없는 길도
묵묵히 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노래 한 곡 반짝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명가수의 뒷모습이나
하루의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우화羽化가
결코 부질없는 생애는 아니라는 것을
매미가 한 달을 소리쳐 울기 위해
칠 년을 고행 하듯이
시 한 편 남기기 위해 메아리 없는 외침
수도 없이 외쳐대는 시인들이여
모아이 석상처럼 매미는 시력을 반납한 채
껍질로 남아 지켜보고 있다
자신의 득음得音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려줄 것인지
사람들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인지
세상에 무의미한 생애란 없다
글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가을은
오래 묵혀두었던 그리움을
꺼내보게 하는 계절
은행잎마다 내려앉은
노란 그리움에 같이 물들다 보면
서랍 속에 넣어둔 편지를 읽게 된다
그리움은 나비이다
보고싶다보고싶다보고싶다
갈바람 한 줌에도
무수히 날아오르는 그리움의 군무
진정한 그리움은
너에게 닿지 못 한다
간절함의 무게로 떨어져 흙이 된다
줍지 마라
흘러간 사랑은
흙이 묻은 채 그냥 놓아두어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글
가을의 파편
조그만 은행잎엔
오롯이 가을이 담겨있다
속삭이는 햇살과 나른한 눈빛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의 마음
나는
가을이 가장 눈부시게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 가슴에 깔고
세상에 반짝이는 모든 슬픔들
널어 말린다
꽃처럼 떨어진 젊음들과
레일에 깔린 비명
노릇노릇 향기롭게 말라갈 때쯤
아!
세상의 눈물들아 이젠 모두 가자고
나비처럼 모여 팔랑대는 가을의 파편
글
꽃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날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글
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글
4월의 눈
잠 안 오는 밤 접동새 불러
배나무 밭에 가면
4월에도 눈이 온다
보아라!
푸른 달빛 아래
다정한 속삭임의 빛깔로 내리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사위
외로움 한 가닥씩 빗겨지며
비로소 지상에는 빛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배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손 흔들고 떠난 사람 얼굴마저 흐릿한데
사월 분분히 날리는 눈발 아래 서면
왜 홀로 슬픔을 풀어 춤사위로 녹이는가
접동새 울음은 익어
은하수는 삼경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는 언약처럼
분분히 무유의 흙으로 떨어지는 꽃잎
돌아서서 눈물을 말리는 것은
다정도 때로는 병이 되기 때문이다
글
꽃으로 피고 싶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털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글
바다와 함께 춤을
온 세상 한 바퀴 돌아
사나이 할 일 다 마치고 돌아와선
그래도 바다가 못 잊어 하면
조선소造船所가 환히 보이는 거제도 바닷가에
작은 집 짓고
바다랑 도란도란 얘기나 하며 살겠네.
심심하면 가끔 조선소造船所에 가서
큰 배 만드는 거나 보면서
그 배 커다란 몸을 이끌고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이나 보면서
낮은 돌담에 장미 대신 해당화를 올리고
바다랑 지난 세월 사랑 얘기나 하며 살겠네.
저녁에 인생처럼 황혼이 깔리는
바다에 취해
막걸리 몇 잔 마시고 바다를 살며시 안아주면
아, 어린 곤충처럼
파르르 몸을 떠는 바다
내 몸 깊은 곳에 알을 낳는 바다.
먼 수평선에 운명처럼 달이 떠오르면
은빛 물결이 되리라
바다와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리라.
아픔도 서러움도 달빛으로 씻어
온 바다 흥타령으로 푸르게 일어서게
플라멩코 춤보다 더 격정激情적인 춤을 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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