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시/제7시집 2024. 7. 11. 04:43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친구들 더러는 여의도에 가고

모두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신문마다 이름들 반짝반짝 빛나는 저녁

 혼자 앉아 김치 안주로

소주 몇 잔 꺾고 돌아앉는 어둠에

푸념처럼 슬그머니 떠오르는

벼린 초승달

무엇을 이루려고 젊은 날을 불살랐는지

권력놀음에 취해

서로에게 총질하는 서글픈 창문 너머로

삭막해진 산하를

그래도 촉촉하게 붙잡아주는 개구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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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

시조/제3시조집 2024. 7. 7. 09:33

가을하늘

 

 

코스모스 피었는데

세상은 어둡구나

 

잠자리 도망치듯

끝없이 올라간다

 

인세人世에 도가 없으니

하늘이라도 맑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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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서 보면

시조/제3시조집 2024. 7. 4. 07:39

산문에서 보면

 

 

속세에

물린 사람

향 피우러 올라가고

 

풍경 소리로 씻은 사람

말씀 들고 내려오고

 

오가다

서로 마주쳐

나리꽃으로 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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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새 물오리의 하루

시조/제3시조집 2024. 7. 2. 08:41

텃새 물오리의 하루

 

 

살포시 두 발 저어 엄마 얼굴 그려보고

북쪽 나라 어디쯤 있을 친구들도 그려보고

온종일 그린 그리움 마구마구 지워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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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를 보내며

시조/제3시조집 2024. 6. 22. 08:43

또 한 해를 보내며

 

 

제야의 종소리가

가슴을 때리누나

 

이뤄 놓은 것도 없이

또 한 해가 흘러갔네

 

올해는

후회 않으리

청홍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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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울음

시/제7시집 2024. 6. 18. 10:02

천 년의 울음

 

 

백제의 노을 새 옷처럼 걸치고

낙화암에 서서

강물의 흐름에 녹아있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보면

 

어떤 슬픔은 천 년을 가는 것도 있다

해가 갈수록 이끼처럼

푸르러지는 것도 있다

 

와당에 새겨진 눈부신 웃음에도

눈물은 숙성되어 짠해지고 있었다

 

고란사 종소리가 백마강에 윤슬로 반짝일 때면

잔잔하던 가슴의 깊은 어디쯤에선가

용암처럼 뭉클뭉클 솟아나는 인연의 울림

 

, 나는 피에서 피로

천 년의 울음을 물려받은

백제의 후손

 

부소산 그늘에 기대어 한참을 흐느끼다가

그 날의 함성을 떠올려 보니

 

궁녀들 울음도 천 년을 살아

낙화암 진달래는

핏빛으로 붉더라

 

슬픔 밴 백마강은 쉬지 않고 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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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착한 치매 중

시/제7시집 2024. 6. 13. 22:47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오월 산은 빛나는 에메랄드

꾀꼬리 노래가

송이송이 금계국 잎 사이에 꽃을 매달면

신바람 난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머스캣 한 줌씩 나누어준다

아내의 시계는 일곱 살로 돌아갔다

무의식 속에서도 빼앗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즐기는 아내

아내의 세상은 장밋빛인데

함께 걸어가는

나의 세상은 먹오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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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시조/제3시조집 2024. 3. 25. 22:26

기다림

 

 

배롱 꽃에 늦더위가

빨갛게 타는 오후

 

서둘러 식혀주는

한 줄금 매미 소리

 

앞 뜰엔

능금 알처럼

기다림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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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뻐꾸기

시/제7시집 2024. 2. 25. 21:46

남산 뻐꾸기

 

 

남도에서 온 사람도 북도에서

온 사람도

뻐꾸기 노랫소리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울이 온통 고향 산처럼

초록 물드는 오월이 오면

남산 뻐꾸기 짝을 부르듯

고향 사투리로 노래를 한다

 

봉수대에서 한 나절 초록을 품고있다가

팔각정으로 내려와서

도시의 소음들을 말갛게 씻어놓는다

 

남산 뻐꾸기 목소리

골목마다 구성지게 흘러넘치면

서울 사람들 모두 편안해진다

 

한 고향 사람처럼 어깨동무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이웃이 된다

posted by 청라

섣달 귀향

시조/제3시조집 2024. 2. 11. 15:26

섣달 귀향

 

 

겨울밤 내 고향은 함박눈으로 반겨주네

설레는 잠속에서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

온 밤 내 잠들다 깨다 어린 날로 돌아가네

 

아침에 문을 열면 우렁우렁 일어서서

눈꽃에 몸을 씻는 산바람 골물 소리

철승산 큰 품을 열어 포근하게 감싸주네

 

옛날을 그려보니 안 먹어도 배부른데

골목길 담 벽마다 쟁쟁한 어머니 음성

정들은 사람은 갔어도 마음 쉴 곳 여기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