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울음

시/제7시집 2024. 6. 18. 10:02

천 년의 울음

 

 

어떤 슬픔은 천 년을 가는 것도 있다

 

백제의 노을 새 옷처럼 걸치고

낙화암에 서서

강물의 흐름에 녹아있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보면

 

지독한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잠들고 있을 뿐이다

 

와당에 새겨진 눈부신 웃음에도

눈물은 달콤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고란사 종소리가 백마강에 윤슬로 반짝일 때면

잔잔하던 가슴의 깊은 어디쯤에선가

용암처럼 뭉클뭉클 솟아나는 인연의 울림

 

, 나는 피에서 피로

천 년의 울음을 물려받은

백제의 후손

 

부소산 그늘에 기대어 한참을 흐느끼다가

그 날의 함성을 떠올려 보니

 

궁녀들 울음도 천 년을 살아

낙화암 진달래는

핏빛으로 붉더라

 

슬픔 밴 백마강은 쉬지 않고 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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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착한 치매 중

시/제7시집 2024. 6. 13. 22:47

아내는 착한 치매 중

 

오월 산은 빛나는 에메랄드

꾀꼬리 노래가

송이송이 금계국 잎 사이에 꽃을 매달면

신바람 난 아내는 만나는 사람마다

머스캣 한 줌씩 나누어준다

아내의 시계는 일곱 살로 돌아갔다

무의식 속에서도 빼앗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즐기는 아내

아내의 세상은 장밋빛인데

함께 걸어가는

나의 세상은 먹오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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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시조/제3시조집 2024. 3. 25. 22:26

기다림

 

 

배롱 꽃에 늦더위가

빨갛게 타는 오후

 

서둘러 식혀주는

한 줄금 매미 소리

 

앞 뜰엔

능금 알처럼

기다림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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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뻐꾸기

시/제7시집 2024. 2. 25. 21:46

남산 뻐꾸기

 

 

남도에서 온 사람도 북도에서

온 사람도

뻐꾸기 노랫소리 들으면 눈물이 난다

 

서울이 온통 고향 산처럼

초록 물드는 오월이 오면

남산 뻐꾸기 짝을 부르듯

고향 사투리로 노래를 한다

 

봉수대에서 한 나절 초록을 품고있다가

팔각정으로 내려와서

도시의 소음들을 말갛게 씻어놓는다

 

남산 뻐꾸기 목소리

골목마다 구성지게 흘러넘치면

서울 사람들 모두 편안해진다

 

한 고향 사람처럼 어깨동무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이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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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귀향

시조/제3시조집 2024. 2. 11. 15:26

섣달 귀향

 

 

겨울밤 내 고향은 함박눈으로 반겨주네

설레는 잠속에서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

온 밤 내 잠들다 깨다 어린 날로 돌아가네

 

아침에 문을 열면 우렁우렁 일어서서

눈꽃에 몸을 씻는 산바람 골물 소리

철승산 큰 품을 열어 포근하게 감싸주네

 

옛날을 그려보니 안 먹어도 배부른데

골목길 담 벽마다 쟁쟁한 어머니 음성

정들은 사람은 갔어도 나의 쉴 곳 여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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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

시조/제3시조집 2024. 2. 9. 11:14

홍매

 

 

허공 한 점에

은밀한 초경처럼

진홍빛 설렘이

살며시 벙글더니

봄 어서

오라는 손짓

하늘 가득 저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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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둔사 납월매

시조/제3시조집 2024. 2. 4. 20:33

금둔사 납월매

 

 

사랑을 

받아봐야

사랑 주는 법도 안다

 

금둔사 납월매는

지허스님 숨결로 커

 

매화야

정 담아 부르면

섣달에도 마음을 연다

 

햐아 이 맛에

중노릇을 하는기라

 

정 주듯

목탁소리 울림으로

피운 매화

 

참 도는

아득하지만

가슴마다 법열法悅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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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전한 날

시조/제3시조집 2024. 1. 29. 10:07

마음이 허전한 날

 

 

마음이 허전한 날

태화산 계곡에 가

 

물소리로 몸을 닦고

별빛으로 혼을 씻어

 

한 송이 산나리 꽃으로

노닐다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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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묘역에서

시조/제3시조집 2024. 1. 28. 10:19

애국지사 묘역에서

 

 

아 저기 창공에다 목소리를 달고 싶다

만주 벌판 말 달리며 나라 위해 몸 바치던

선조들 온몸으로 외친 그 기도를 올리고 싶다

 

피 흘리는 가슴 속에 꼭꼭 숨겨 간직했던

평화의 흰 바탕에 꿈틀대는 청홍 태극

온 세계 용틀임하는 그 자랑을 달고 싶다

posted by 청라

목줄

시/제7시집 2024. 1. 22. 16:32

목줄

 

 

아내가 목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다

파란 힘줄이 앙버틴 양 다리에서 소름처럼 돋아난다

눈 감고 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동행하는 나의 목에도 줄이 매어져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목엔 모두 굴레가 채워져 있다

인생이 개처럼 인연의 목줄에 꿰여

덧없이 끌려가는 운명이라 해도

가장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고 웃으면서 살아가자

지금은 혼자 다독이는 슬픔에 절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삶이라 해도

잘 말린 구절초 꽃잎처럼

우릴수록 향이 깊어지는 그런 사림이 되자

올무에 옭힌 세상은 온통 눈밭이지만

나 혼자만 매화로 피어날 수는 없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