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 밝히는 등불처럼…

엄기창 관련 기사 2020. 7. 7. 18:32

온 세상 밝히는 등불처럼…

  •  최일 기자
  •  승인 2020.07.06 17:10
  •  

엄기창 시인, 시조집 ‘거꾸로 선 나무’ 출간

 

꽃 피면 오마하고 손 흔들며 떠난 사람
물에 지는 꽃 그림자 쑥국새만 울고 가네
그리움 먼 하늘가에 구름으로 나부낀다

-‘그리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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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창 시인

코로나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세상은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정의롭지 않은 이가 정의를 앞세우고, 오물 범벅인 권력자가 위세를 떨친다.

어수선한 시절, 세월에 떠밀린 시인은 어느새 고희(古稀)의 고개에 접어들었고, 그는 거꾸로가 아닌 바로 선 나무를 꿈꾸며 세상을 관조(觀照)한다. 닫힌 마음을 다시 열고, 상처를 치유하는 노래를 한다.

청라(淸羅) 엄기창 선생이 2020년 여름 시조집 ‘거꾸로 선 나무’(오늘의문학사)를 출간했다. 지난 2016년 ‘봄날에 기다리다’에 이어 4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조집이다.

자신의 시조(時調)가 산골 물소리처럼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노래였으면 좋겠다는 그는 1부 ‘내 마음의 꽃밭’, 2부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3부 ‘참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4부 ‘미소가 따라와서’, 5부 ‘고희(古稀) 고개에서’ 등으로 구성된 이번 시조집에 ‘능소화’, ‘가시연’, ‘설일(雪日)’, ‘서해의 저녁’, ‘춘일(春日)’, ‘생가 터에 앉아’, ‘황혼 무렵’, ‘세월의 그림자’, ‘자연법’, ‘코로나에 갇힌 봄’ 등 총 90편의 작품을 담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다는 청라 선생은 슬픈 사람에게는 위안을, 기쁜 사람에게는 더 큰 환희가 되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시조를 독자들에게 선물하며 절절한 그리움을 전한다.

충남 공주가 고향으로 1975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은 대전문인협회 시분과 이사 및 부회장, 문학사랑협의회장 등을 역임했고, 대전시문화상·정훈문학상·대전문학상·호승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 ‘서울의 천둥’, ‘춤바위’, ‘세한도(歲寒圖 )에 사는 사내’ 등이 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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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와 나팔꽃

시/제5시집 2020. 7. 5. 08:27

갈대와 나팔꽃

 

 

한 길 넘게 자란 갈대를 감아 올라가

나팔꽃이 방끗 피었습니다.

갈대는 압니다.

저 환한 웃음이

나팔꽃의 미안한 마음이라는 걸

갈대는 잎을 내밀어

나팔꽃이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바람이 붑니다.

모든 갈대들 휘청거릴 때

나팔꽃은 살며시 갈대를 안아줍니다.

흘러가는 물은 알까요.

아주 작은 것끼리도 서로 손을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2020.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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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시/제5시집 2020. 7. 4. 09:01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설렘 등에 불 하나 켜는 것이다.

꽃잎 떨어지는 것도, 낙엽이 뒹구는 것도,

! 무심히 눈 내리는 것마저 왜 이리 가슴

떨리게 하는 것이냐.

내 안에 너를 그려 넣는 붓질 한 번에

무채색 내 인생이

환희歡喜 꽃밭으로 환하게 타오르는 것이 아니냐.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 하나 뜨는 것이다.

 

 

2020. 7. 4

posted by 청라

유성온천

시/제5시집 2020. 7. 3. 10:14

유성온천

 

 

나그네여

그대 삶의 발걸음 하루만 여기 멈추게.

오십 도가 넘는 라듐 온천에

때처럼 찌든 삶의 피로를 씻어내고

조금 남은 근심의 찌꺼기는

만년교 아래로 던져 버리게.

여기는

시생대 말기부터 지구의 심장에서 분출하던

뜨거운 피로

마음의 상처마저 치료해주던 곳

맛 집을 찾아 점심을 먹고

이팝꽃 마중 나온 거리

한 바퀴 돌고 와서 족욕足浴을 하면

그대의 인생 십 년은 젊어지리.

끓어오르는 알칼리성 열탕에서

섭섭함을 모두 풀어버리게.

사랑하는 사람과 밤새 정을 나누면

영원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리.

 

 

2020.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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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2

시/제5시집 2020. 6. 30. 05:15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2

 

  세상이 부르면 문이 없어도 나와야 한다. 네그루의 옛 솔과 옛 잣나무, 작은 집 하나, 선비는 적막으로 몸을 닦고 있다. 찾는 이 없어 눈길은 깨끗하다. 세상이 당신을 버릴 때에 당신도 세상을 버렸지만 둥근 창으로 넘어오는 바람 같은 소문, 세상은 갈등으로 타오르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뒤바뀌어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선비는 귀를 막고 있다. 몇 겹의 창호지로 막아도 끊임없이 울려오는 천둥 같은 소리. 입으로 정의를 앞세우는 자는 불의로 망하리라. 세상은 먹장구름으로 덮여있다. 양심 있는 사람은 입을 열지 않고, 부자들은 돈을 쓰지 않고, 아이들은 더 이상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세상이 너무 캄캄해서 씨를 뿌릴 수가 없다.

  고도孤島의 저녁은 파도소리로 일어선다. 세상은 그믐인데 달로 떠 비춰줄 사람 보이지 않는구나. 선비는 더 꽁꽁 숨어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다향茶香만 높고 맑은 정신처럼 떠돌고 있다. 사람의 집에 사람은 오지 않고 봄비로 쓴 편지에 먼 데 있는 친구만 곡우穀雨의 향기를 덖어 마음을 보낸다. 뜨거운 차를 마셔도 선비의 가슴은 언제나 겨울이다. 학문과 경륜은 하늘에 닿았는데 선비의 마음 밭엔 언제나 눈이 내린다. 사람의 말을 잃고, 사람의 웃음을 잃고 등 돌린 마을의 그리움도 무채색으로 잦아들고 있다.

  선비여, 이제 나와라. 나와서 세상을 갈아엎어라.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 나와라. 어서 나와라. 인간의 마을이 무너지는데 마을 밖 작은 집에서 솔빛의 기상만 닦고 있을 참이냐? 가꾸던 겨울을 집어던지고 제일 먼저 와 동백으로 피는 제주의 봄을 숙성시켜 팔도에 옮겨 심어라. 그대의 겨울에 이제 덩굴장미를 심고, 소나무 잣나무 위에 새 몇 마리 불러와서 사람의 마을을 사람의 마을답게 가꿔야 한다.

 

202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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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에

시/제5시집 2020. 6. 21. 09:37

스승의 날에

 

 

이팝나무에

아이들 얼굴이 조롱조롱 피어난다.

 

그 사람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그리워할 이름 많아서 좋다.

 

아이스크림 한번만 돌려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던 아이들

 

체육대회에서 꼴찌를 해도

미친 듯이 응원하던

그 흥은 아직 남았을까.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미워할 사람이 많은 것보다

얼마나 고마운 삶인가.

 

날마다 드리는

간절한 나의 기도가

제자들의 앞길을

꽃길로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이팝 꽃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들을 향해

뻐꾸기 노래로 박수를 보낸다.

 

 

2020.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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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같은 사람 - 장덕천 시인을 보며

시/제5시집 2020. 6. 11. 08:52

연꽃 같은 사람

                     장덕천 시인을 보며

 

 

당신은

새벽을 열고 피어난

연꽃 같은 사람

 

도시의 아픔은

그대 널따란 잎새에 앉았다가

아침 이슬로 걸러져

대청호 물빛이 되고

 

연향에 취해있던 호수의 바람은

향기의 지우개로

온 세상 그늘을 지워주러 간다.

 

영혼이 너무 따뜻해서

삶의 꽃술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다운 사람

 

오늘도 대청호는

그대 한 송이 피어있어서

찰싹이는 물결소리에서도

향내가 난다.

 

 

2020.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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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

초대장

 

 

그대가 사는 곳이

골 깊고 길 험해서

 

어스름 짙어지자

가는 길 망설였더니

 

험한 길 살펴오라고

둥그렇게 달 띄웠네.

 

2020. 6. 7

posted by 청라

장미 빛깔의 말

시/제5시집 2020. 5. 30. 08:29

 

장미 빛깔의 말

 

 

무슨 꽃이냐고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묻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장미꽃이라 대답합니다.

 

백 번 천 번을 물어도

지워진 백지에

다시 도장이 찍힐 때까지

 

장미 빛깔의 말로

대답할래요.

 

“사랑”이라고

 

 

202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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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아빠

동시 2020. 5. 27. 09:18

지렁이 아빠

 

 

날씨 좋은 날

지렁이가 길로 나왔어요.

 

개미 몇 마리 물어뜯을 때마다

옴찔거리는 지렁이

 

손으로 집기는 징그럽고

묵은 갈대를 꺾어 젓가락질 합니다.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풀숲 땅에 묻어주고는

해님처럼 환하게 웃어줍니다.

 

오늘 태균이는

지렁이 아빠

 

 

2020. 5. 27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