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미

시조/제3시조집 2024. 11. 7. 17:30

곡선미

 

 

어머니 버선볼에

일어선 선 하나가

 

기와집 처마 따라 나비처럼 너울대다

 

하늘에

높이 떠올라

반달 되어 걸렸다

 

달항아리 어깨선에

핏속으로 울려오는

 

조상님들 그 말씀이 옹이모양 박혀있다

 

자연과

한몸 되어라

혼자 튀지 말아라

 

posted by 청라

상강 무렵

시조/제3시조집 2024. 11. 1. 11:13

상강 무렵

 

 

하늘에 걸린 달은

세상을 비워내고

 

호수에 어린 달은

내 마음을 씻어낸다

 

첫 서리

때를 맞추어

세상 걱정 접으리

 

posted by 청라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시/제7시집 2024. 10. 29. 08:34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세상일들이

바싹 마른 북어 맛처럼 밋밋해지면

자작나무 숲으로 가자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하늘 끝에 팔랑대는 잎새들이 불타는 색깔로

옷을 갈아입듯이

사랑이 메말랐던 내 가슴에도 단풍이 익는다네

 

오오, 천둥이여

자작나무에 기대어 가을을 안아주면

쿠르릉 쿠르릉

몸속에서 일어서는 천둥이여

 

오랫동안 시들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세월에 속아서 차갑게 식었던 사랑이

봄풀처럼 손들고 일어서는 아우성이여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려서

미워했던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는

눈물 많은 나를 찾았다네

 

산이 속삭이는 말을 알아듣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젊어져서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를 찾았다네

 

posted by 청라

하일夏日 귀향歸鄕

시/제7시집 2024. 10. 3. 10:19

하일夏日 귀향歸鄕

 

 

골목은 사막처럼 비어있었다

분꽃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노인들

삭정이 마른 기침소리만 남아있었다

회재를 넘으면 언제나

된장찌개 냄새 마중 보내던 어머니

옛집 마당가에 돌절구로 서있고

저녁떄면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에

별 촘촘 달던

감나무 묵은 둥치엔 허기진 꿈들만 무성했다

그리운 얼굴들 하나씩 소환하며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추억은 늦여름 파장처럼 비틀거리는데

사람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 대문 닫히고

한 집 대문 닫히면 한 역사에 거미줄이 그어지고

풀들만 웃자란 건너 마을 초등학교에선

언제 또 담임 선생님처럼 종소리가 부르려는지

낯선 언어들로 삭막해지는

어린 날 손때 희미해진 거리에 가슴을 치며

홍시처럼 노을만

소멸되어가는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posted by 청라

산을 마시다

시/제7시집 2024. 9. 27. 10:15

산을 마시다

 

 

아침 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니

산은 가을 안개에 안겨있다

 

붙어산다고 꼭 정다운 것은 아니다

멀리서 손에 잡힐 듯 타오르는 초록을

한 모금 마신다

 

 

래미안아파트 17

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산과 한몸이 되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외로운 사람에겐 꾀꼬리소리를 보내주고

고달픈 사람에겐

고촉사 목탁소리를 보내 달래주고

 

세상의 바람소리 잠재운 내 가슴의

둥지에

이름 모를 새는 알을 낳는다

posted by 청라

주홍글씨

시조/제3시조집 2024. 9. 20. 18:07

주홍글씨

 

 

내 삶의 지류에서 침몰하는 꽃잎인가

소쩍새 울음 끝에 향기처럼 묻어와서

가슴을 뒤집어놓고 불꽃 접는 그 소녀

 

이 빠진 징검다리 일렁이던 인연의 줄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못 내려놓아

이름을 가슴에 새겨 질긴 형벌 되었다

 

물소리 풀 향기에도 울렁대는 돌개바람

흰 구름 가는 곳에 노을인 듯 익어있을까

청자에 상감으로 박혀 지울 수 없는 낙인

 

 

posted by 청라

소쩍새 우는 사연

시조/제3시조집 2024. 9. 13. 20:23

소쩍새 우는 사연

 

 

달빛이 비운 산을 노래로 채우는 새

소쩍쿵 소쩍소쩍 온밤 내내 들끓다가

정념이 흘러넘쳐서 초록이 더욱 깊다

 

슬픔도 길들이면 기쁨으로 피는 것을

오뉴월 소쩍새처럼 흥타령 살다 가세

온 세상 아픈 일들도 큰 박수로 닦아내세

 

 

posted by 청라

제비 나라

시조/제3시조집 2024. 8. 21. 15:02

제비 나라

 

 

말 한 마디 뿌려지면 살판났다 지지배배

옳고 그름 제쳐두고 꼴리는 대로 지지배배

인구는 줄어가는데 소음들로 꽉 찬 세상

posted by 청라

전언傳言

시조/제3시조집 2024. 8. 17. 20:18

전언傳言

 

 

된서리 고된 날도

아비는 늘 푸르다

 

세상의 모진 바람

웃음으로 싸안으며

 

닥쳐 올

겨울 눈보라

큰 산처럼 막아선다

 

힘들 때 아비 등은

기대라고 열려있다

 

머리가 좀 컸다고

혼자 아파 하지 마라

 

언제나

손 보태주라고

아비가 있는 게다

 

 

 

posted by 청라

혼자 사는 친구에게

시/제7시집 2024. 8. 14. 15:23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등 기대고 부대끼며 살다가

나들이 끝내고 돌아가는 것

손 흔드는 뒷모습 허전하지 않게

씨앗 몇 알갱이 떨어뜨리고

큰 나무로 자라게 거름이나 주면서

싸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

아이들 많은 집안은 가난해도 부자이다

자식들 꿈들은 모두 다 내 재산이다

허공 높이 소망을 연처럼 띄워놓고

하늘까지 오르도록 줄 함께 잡고 버티다 보니

이제 나는 알겠다

기르는 게 두려워 외롭게 사는 것보다

날마다 전쟁이라도

웃을 일 풍성한 게 행복이라는 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