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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의 나
유리창 밖으로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구나. 메마른 나뭇가지에 조금씩 설화가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설경에 대한 감탄보다 너희들의 움츠린 어깨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내가 선생이기 때문일까?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너희들 교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단다. 내 첫 시집에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야간자습’이란 제목으로 써서 수록한 것이 있는데 한 번 소개해 볼까.
투명한 유리창은/ 아이들의 상승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수많은 목소리에 눌려 작아질 대로/ 작아진 아이들의 소망은/ 가끔은 무지개빛 호랑나비가 되지만// 초록빛 자유로운 바람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날개를 찢어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초침은 멎어 있었다.// 영산홍꽃 꽃가지마다/불을 지핀 오월이/ 산 접동새 소리로 아이들을 데리러 왔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힘없이 비가 되었다.// 어둠을 태우는 형광등/ 환한 불빛이/ 우리 아이들에겐 오히려/ 진한 어둠이었다.
<야간자습> 전문
우리 예쁜 공주님들아!
또 한편 생각해보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하게 싸워나가는 너희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단다. 여자는 연약한 게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남자들과 당당하게 실력으로 맞설 수 있도록 자신을 닦아나가는 것이 현대 여성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육십 살쯤 되어가는 내 친구들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 일찍이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는 자기발전의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몇 번쯤 성공의 기회가 오는데, 미리 준비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기회를 잡아 성공하여 존중받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가 있단다.
3년 전 대전고 67회 제자들의 20주년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몇 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감격한 적이 있단다. 그 애들의 졸업 전 마지막 시간에 ‘20년 후의 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제출하게 했는데, 그 글을 쓰면서 정말로 20년 후의 영광스런 자신의 모습을 위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고 했지. 그때 비로소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다 보니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였다고 감사의 말을 하더구나. 한 학생의 말이라면 인사 삼아 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미래에 희망을 주는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너희들도 이 기회에 2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겠니? 그리고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보려므나. 그러면 20년 후 먼 발치에서 나를 보았을 때 달려와 자랑하고 싶을 만큼 성공해 있을 게다. 내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은 청소년 시기에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아가는 학생들이란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들을 일일이 깨워 세워놓고 수업을 한 것이란다. 노력하다 지나쳐 실수하는 삶은 희망이 있지만,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는 삶은 희망이 없는 것이지. 나는 정말 선생이 되고 싶어 교단에 섰고, 학생들을 위해 고집을 피우다가 큰 고난도 겪어본 사람이다. 지금도 내 큰 소망은 너희들이 내년에 가고 싶은 대학의 학과에 합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고, 미래에 자신의 주위나마 밝힐 수 있는 등불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란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고, 여름에 가꾸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단다. 우리 예쁜 공주님들, 20년 후에 모두 자기가 추구하는 부문에서만은 권위자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멈추지 말고, 고지를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20년 후, 아름답게 피어 세상을 향해 향기를 뿌리고 있을 너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2010년 12월 세모
엄 기 창(국어, 대전둔산여자고등학교)
글
만우절
엄 기 창
내가 둔산여고에 와서 1개월이 넘었지만 영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조회시간 수업시간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서 눈만 떼면 와글와글 떠드는 것이다. 출근 첫 날 급식 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나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갑자기 여학생의 뾰족한 비명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친구 하나가 갑자기 뒤에서 껴안았다고 그렇게나 크게 비명을 지르다니. 그 뒤에도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고 웃고 떠들고 서로 때리고. 마치 비오는 날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악을 쓰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 으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점심식사를 하고 나왔다.
그러나 교실에서만은 모두 요조숙녀 같이 정숙해서 흐뭇해 하기는 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조것들이 나하고 처음이니까 저렇지 언제까지 조용할까 하고. 아니나 다를까. 1주일이 지난 뒤부터 자습시간 수업시간 가리지 않고 못 말리게 떠들어댄다.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된다. “조용히 해” 이 말이 완전히 내 입에 붙어 버릴까봐.
세월은 소리 없이 달려 만우절이 왔다. 아이들의 만우절 장난이 심하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동료 선생님들에게 이미 들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긴장하였다. 바보같이 속아서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지. 아무리 그럴듯한 거짓말이라도 절대 속지 말아야지.
4교시 문학시간에 10반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흠칫 하였다. 아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다. ‘요놈들 봐라 내가 질 줄 알고’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속으로는 ‘같이 자지 뭐’ 하는 생각으로 배짱을 부려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한 놈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라! 그런데 고놈은 11반 우리 반 학생이었다. “야 임마”.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 하던 놈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까르르 웃었다. 모두 우리 반 놈들이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마실 왔나? 나는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지만 같이 놀아주면 큰일이 날 것 같아 정색을 한 얼굴로 혼을 내고 아이들을 다시 원위치 시키고 수업을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우리 반 수업이라 교실에 들어갔다. 평소보다 교실이 환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 울타리의 개나리꽃 몇 줄기를 꺾어 조금씩 나누어서 오른 쪽 머리에 꽂고 있었다. 깜찍하고 예쁘기는 했다. 그러나 그냥 놔두면 교정의 꽃을 꺾어 머리에 꽂는 것이 유행이 될 것 같아서 속마음을 감추고 소리를 크게 질러 혼을 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식들, 꽃을 머리에 꽂아놓으니 꽃만 돋보이잖아…….
12반 놈들은 한술 더 떠서 능청스럽기가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 반수 이상이 교재로 쓰는 프린트가 없어 뭔가 의심스럽다고 하니까 반장 놈이 정말 정직한 얼굴로 “선생님 저 못 믿으세요? 정말 아니예요.” 하길래 믿기로 했다. 그랬더니 수업 중간에 한 놈이 아파 양호실에 간다고 했다. 허락을 했더니 갑자기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고놈이 나가다가 복도에 쓰러져 버린 거였다. 예상했던 장난이지만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수업 받던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들고 한 놈이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빨리 업고 양호실 가셔야죠.” 나는 눈치 채고 “네가 업어라 임마” 하고 교실로 들어왔다. 교탁 앞에 서니 한 놈씩 겉옷을 벗었다. 그런데 벗는 놈마다 노란 명찰이었다. 1학년 놈들하고 반반씩 바꾸어 앉은 거였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에구, 조것들 얼마나 애교 있는 장난이냐! 참자, 참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또 14반에 들어갔더니 인사 끝나자 마자
"선생님, 바지 좀 내려주세요."
천연덕 스럽게 말하고 다른 놈들은 까르르 웃었다. 무슨 성희롱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웬 뚱단지 같은 소리람. 남자 선생님이 여학생 성희롱했단 소리는 들었어도 여학생이 남자 선생 성희롱했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었다. 황당해서 얼굴이 빨개졌나보다. 또 모두 소리를 모아
"빨개졌대요. 빨개졌대요"
합창들을 한다. 정신이 없는 중에서도 아이들 눈길을 보니 모두 칠판 위를 향하였다. 올려다보니 꾀죄죄한 체육복 바지가 하나 얹혀 있었다. 아하! 저거 내려달란 소리였어? 음흉한 놈들.
"알았어. 내려 줄께."
못 본 척 하고 지퍼로 손이 가니 모두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른다. 자식들이 까불고 있어. 어쨌든 하루 종일 무언가 일어날까봐 불안하게 보낸 하루였다. 남학교에만 근무하던 나에겐 참으로 지랄맞고 황당한 하루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도 아이들 장난에 박자를 맞춰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후회도 된다. 얼마나 애교 있는 장난인가. 조런 것들이 여학교에 근무하는 재미가 아닐까. 수업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싫기만 하니 나도 천상 옛날 선생인가보다. 며칠 전 식당에서 1학년 학생 한 놈이 “선생님, 선생님, SS501 멋지죠? 좋아하시죠?” 하고 물었을 때 “그거 먹는 음식 이름이냐?”하고 애들을 웃긴 일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그런 그룹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애들 세대의 일에 무심하였다. 새 시대 새 아이들에 맞는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마저도 아이들과 공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가장 아이들 같은 마음을 가진 가장 어른다운 교사. 지금은 그런 교사가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금도 후회되는 게 하나 있다. 애들이 놀라게 했을 때 좀 더 놀라줄걸…….
『한밭수필』제9호(2017)
글
체육시간에도 화철이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혼자 놀았다. 친구들은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였지만 늘 멀건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화철이를 자기 팀에 끼워주지 않았다. 하기는 헛발질만 하고, 때로는 자기 골문으로 볼을 차는 놈을 자기 팀에 끼워줄 사람이 있겠는가?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제멋대로였다. 어떤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서 어슬렁거리며 교실로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이제 급우들도 화철이 일이라면 아무리 웃기는 일이라도 웃지도 않았다.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화철이는 우리 학급에서 있어도 없는 존재였다.
한 번은 철봉 아래 모래밭에서 혼자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화철이를 불렀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왜? 왜 재미없어?”
“그냥 재미없어요.”
“누가 우리 화철이 때리는 사람 있어? 괴롭히는 사람 있어?”
화철이는 다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화철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야?”
화철이는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애들하고 놀고 싶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탁 막혔다. 불쌍한 놈. 화철이의 표정에는 애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소망이 간절하게 나타나 있었다. 머리가 부족한 놈에게도 외로움은 있는 거였다.
나는 쉬는 시간에 당장 반장을 불렀다. 그리고 화철이 이야기를 했다. 그 애가 얼마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지를 이야기 하고, 같이 놀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그 다음부터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뛰어다니는 화철이를 보았다. 뛰는 것은 어설퍼도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학급의 모든 일에 화철이를 참여시켰고, 그 때부터 화철이는 진정한 학급의 일원이 되었으며,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 늦게 등교하는 일도 줄어들고, 수업시간에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하루는 다시 화철이를 불러 미리 준비한 사탕을 주면서 물어보았다.
“화철아,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어?”
화철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즐거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뭐가 좋은데? 화철이 뭐가 그렇게 좋아?”
“애들이 잘 해줘요. 축구 재밌어요.”
나는 나의 말 한 마디에 그렇게 화철이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학급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내 조그마한 관심이 외로움의 그늘 속에서 즐거움의 양지쪽으로 한 아이를 꺼내 주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기뻤다.
가을이었다. 교정의 나무들에도 가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퇴근을 하려고 교문을 나서는데 담 뒤에 숨어있던 한 아이가 뛰어왔다. 화철이었다. 내 손에 무엇을 쥐어주고
“선생님, 좋아요.”
발음도 분명하지 않게 중얼거리고 뛰어갔다. 어설프게 싼 종이를 풀어보니 곱게 물든 단풍잎 한 가지였다. 나의 온 몸에 짜르르 환희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교사의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이 가을의 모든 아름다움이 화철이가 주고 간 단풍잎에 모여 고여 있는 듯했다. 억만금의 선물보다 더 귀하고 고마웠다.
뛰어가는 화철이의 등에 대고 나도 마음속으로 외쳤다.
“화철아, 나도 사랑해”
<한밭수필>2016(8호)
글
생각해보면 대전에 온 이후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분주한 나날이었다. 22년 동안 3학년 담임 11년, 3학년 부장 3년, 1, 2학년 부장 2년 등 16년을 일찍 퇴근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렇게 전깃불 아래서 태워 날려 버렸다. 분주한 만큼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얻은 여유 있는 시간에 나는 철저하게 자아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일만 해도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김 선생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고 하길래 궁금한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중간고사 일 중간에 휴일이 이틀 끼어 있다고 나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올려놓았다. 교직에 30년 넘게 몸담아 있었지만 이런 욕은 처음 들어보는 까닭에 참으로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학사일정은 내가 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고사 일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왜 나를 향해 욕을 했을까?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놈이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방학 중에도 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일찍 오는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 있는 교실 열쇠를 못 꺼낼까 걱정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신새벽에 출근하였다. 학교를 떠나 있으면 늘 아이들 걱정을 하였으며, 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었다. 아이들에게도 나의 이런 마음이 전달되었다 생각했고,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존경받는 교사일 것이라고 착각을 하였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사랑하였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체했던 것이 아닐까. 예쁜 아이는 예뻐하고, 미운 아이는 그냥 미워했었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사는 머리로만 아이들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진정 감동시키고 바르게 자라는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글
D고에 가던 첫해에 3학년 문과 여학생 반 담임을 했다. 시내의 다른 학교에 비해 성적도 뛰어나게 좋았지만, 극성스럽기도 또한 지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사이좋은 친구사이인데도 질투심은 또 왜 그렇게 많았던지……. 3월 첫날 누군가가 예쁜 꽃병에 꽃을 꽂아놓았다. 다음날엔 어떤 놈이 그 꽃병을 치워버리고 자기의 꽃병에 꽃을 꽂아 놓는다.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가져다 준 쟁반 위의 컵들도 수시로 바뀌었다.
4월 초였다. 처연하게 지는 매화꽃 옆에서 백목련 탐스럽게 피어나는 오후였다. 부반장 놈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인형을 하나 들고 왔다.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이었다. 배는 불쑥 나오고, 얼굴은 호빵처럼 둥글둥글하고, 양 볼은 볼그레하다. 인형을 내 옆에 같다 대더니
“선생님, 똑같아요.”
“뭐가?”
“선생님하고 이 인형요.”
모여 서서들 기를 죽이려는 듯 까르르 웃어댄다. 나쁜 놈들, 내가 뭐 저렇게 웃기게 생겼다고. 책상에 내려놓는 인형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정을 했다.
인형을 갖다 준 것이 음모였다는 것을 나는 다음날부터 금방 알아차렸다. 나한테 혼이 나거나 나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면 나 몰래 와서 인형을 팼다. 심지어 어떤 놈은 호빵맨 인형의 손목에 세균맨을 채워놓고 갔다. 교무실로 들어오다 호빵맨 인형을 때리는 놈을 보았지만, 나는 못 본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놈들의 애교 있는 반항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잘도 연락을 하더니 졸업 후엔 전혀 소식이 없다. 그놈들이 지어준 별명은 Y고로 건너와 이 곳 학생들도 부르고 있지만 고놈들 소식은 알 수가 없다. 호빵맨 인형을 내 집안의 책상 위에 소중히 간수해두고 아이들이 그리울 때면 어루만져 보며 생각한다. 지금 고놈들 시집간 놈은 있을까?
글
<교단일기>
토요일 오후였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나른한 오후의 주말을 즐기고 있는데 조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람이는 성품도 쾌활하고, 급우들을 위해 봉사할 줄도 알며, 공부도 곧잘 하는 아이다. 부모님들도 교양 있고, 집안도 부유한 편인데 어쩌다가 그 아이에게 그런 몹쓸 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깨어진 주말의 평화 때문에 불쾌한 마음으로 학교로 달려갔다. 교무실에 가 보니 가람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조 선생은 화 난 얼굴로 무엇인가 묻고 있다.
“조 선생, 가람이가 또 무슨 사고를 낸 모양이죠?”
“예. 우리 반 형태가 지갑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런데 가람이가 점심시간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왔었대요. 아이들 모두 가람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선생님, 저 정말로 성태 보러….”
“시끄러워 임마”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내가 사정을 했는데. 제 편에 서서 그렇게 힘썼는데. 그만하면 돌부처도 감동했겠다. 나는 가람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하여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갔을 때 맨 처음 말을 건 학생이 가람이었다. 모두 싫어하는 급식당번을 모집했을 때도 제일 먼저 지원을 했고, 회계를 모집했을 때도 주저 없이 손을 든 아이였다. 늘 얼굴이 환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서 사랑스런 마음이 절로 생겨나는 아이였다 . 그 날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나는 반장보다 더 가람이를 의지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학교에 가니 2학년 담임 한 분이 좀 만나자는 쪽지를 책상 위에 놓고 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즉시 달려가서 절망적인 그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어제 4교시 가람이가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현금과 핸드폰을 훔쳐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가람이를 믿고 있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가람이라고 확신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미련한 놈이 옆에 있는 헌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새 핸드폰과 현금들만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그 헌 핸드폰 임자가 자기가 운동장에 있는 시간에 자기 핸드폰을 쓴 사람이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기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가람이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들으신 교장, 교감선생님은 당연히 크게 노하셨고, 퇴학을 시키라 하시는 것을 간신히 사회봉사로 끝내었던 것이다.
“선생님, 이번은 정말 제가 하지 않았어요. 정말 억울해요.”
가람이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 눈물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 선생님 학급의 도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으로 가람이가 했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기에 그의 모든 행동들이 의심스러웠다.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의심스럽고, 가끔씩 저항적인 눈빛을 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래. 틀림 없어. 이번의 범인도 이놈일거야. 가람이에게 가지고 있던 한 가닥의 기대도 나는 몽땅 버려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 선생 앞에서 형태가 꾸중을 듣고 있는 걸 보았다. 내가 자리에 앉으니 조선생이 미안한 얼굴로
“엄 선생님, 이거 어쩌죠. 어제 이 놈이 글쎄 집에다 지갑을 놓고 왔대요.”
나는 가람이 얼굴 볼 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 번 의심하기시작하면 그 의심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심 생 암귀’의 고사가 문득 생각났다. 하나의 사건만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일은 교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글
<교단일기>
아침부터 가라앉은 마음으로 교무실을 열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자그마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할 때까지는 분명 없었던 물건이다. 궁금한 마음으로 종이뭉치를 풀었다. 그리고 피식 웃고 말았다. 쌍화차 한 봉지였다. 남학생의 솜씨임을 금방 알 수 있는 투박하지만 정성껏 싼 종이뭉치에서 나온 것은 쌍화차 한 봉지였다. 차 봉지 위에는 서툰 글솜씨지만 따스한 마음이 내비치는 글 한 구절이 붙어 있었다.
“피로하실 때 드세요. 음… 물은 종이컵의 이분의 일 정도 넣었다가 조금 맵다 싶으면 물을 조금 더 타서 드세요. 다방에서 파는 쌍화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찹니다. 3학년 8반”
즉시 따뜻한 물에 차를 타서 마셨다. 조금씩 눈을 감고 음미해가며 나는 그 아이의 정성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전달했으리라. 남모르게 수줍게 가져다놓은 순수한 마음이 싸아한 쌍화차 맛 속에서 상큼한 맛으로 떠돌았다.
누구의 정성인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묻지 않았다. 구태여 몰래 가져다 놓은 아이의 마음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때를 묻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정성이 칙칙한 아침의 내 기분을 환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까? 나의 말 없는 이 감동과 고마움이 그 아이에게 전해질까?
세상은 공교육을, 그 속에서 커 가는 아이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는 한 이 아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글
<교단일기>
마지막 모의고사를 마치고 자가 채점표를 걷어 교무실로 들어서자, 만섭이가 황급히 따라와 죽는 표정으로 호들갑을 떤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만섭이가 어두운 얼굴이 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만섭이는 2학년 때까지 학급의 반장을 했고 성품도 쾌활했던 아이였다. 그러던 것이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어머님의 부탁으로 반장을 출마하지 않았고, 반장이 되지 못했다는 허전한 마음속에 치렀던 첫 모의고사에서 형편없는 성적이 나오자 모든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행여나 하고 기대했던 두 번째 모의고사마저 실패하자 얼굴에 그늘이 들어앉기 시작했다.
“야 임마. 네 선배들도 다 실패를 딛고 컸어. 사내놈이 죽는 얼굴하고는. 너를 믿어. 자신감만 얻으면 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나의 이런 격려도 세 번 네 번 모의고사를 실패하자 약발이 떨어졌다. 이렇게 슬럼프에 빠졌던 학생이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만섭이에게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얼굴은 자꾸만 우울해지고. 그 때부터 만섭이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교 자습을 빠지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해 보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내 교직 경험들을 총동원한 어떤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 독서실에서 공부한 후 치른 시험 성적은 오히려 형편없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여름방학 특기적성 수업을 빠지고 지리산 기숙학원에 가서 한 달간 공부해보겠다고 했다.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얼굴의 그늘이나 걷고 오라고 허락했더니, 조금쯤 밝아졌던 얼굴이 2학기 첫 모의고사에서 실패하자 완전한 낙담으로 변해버렸다. 그때부터 자격지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여 친구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섭이의 의식은 작아져서 작아져서 완전한 난쟁이가 되어버렸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굴뚝 위에서 달나라를 향해 공을 쏘아 올리는 난쟁이처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기 보다 자꾸만 도망하려고 하였다.
“만섭아,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시험에 최선을 다하자. 네가 노력한 만큼 나오는 그 성적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내 무능이 정말 싫다. 잎도 피지 않은 초3월 3학년에 올라와서 잎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다시 단풍으로 물들었다 떨어져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한 길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 아이들. 피 끓는 청춘을 교실에 가둬두고 그 어떤 유혹에도 초연하며 구도자 같은 금욕의 생활로 보낸 1년.
수학능력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다. 11월 5일 저녁, 우리 아이들과 만섭이의 얼굴에 빼앗겼던 환한 웃음이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글
<교단일기>
추석 다음날이라 학교로 향하는 거리는 한산했다. 세상을 가리고 싶은 안개만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날은 자습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으리라. 한창 기운이 솟을 나이에 앉기만 하면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연휴 중에도 등교해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이 가엾게 생각되었다.
학교로 들어서는데 안개 속에서 혁이가 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서서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어라, 저 놈 왜 집으로 가지? 어디 몸이 아픈가? 나는 마음속으로 걱정을 하였다. 워낙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라 추석에 제사를 지낸다고 무리를 하였으리라 생각했다.
자습 시작종이 울리고 출석 체크를 하기 위해 교실로 갔다. 다른 날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혁이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출석 체크 후에 자리를 비운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야지.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았는데 웬만하면 등교하여 자습을 하라고 권해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선생님, 저 혁인데요. 여기 시골이걸랑요. 오늘 아침 출발하는데 한 두어 시간 늦을 것 같아요.”
참으로 능청스런 거짓말이었다. 아마 아침에 교문을 나오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깜빡 속고 말았으리라.
“거기 시골 어딘데? 오늘 아홉 시까지 나오라고 했잖아.”
“ 저도 일찍 오려고 했는데요. 엄마가 아파서 못 일어나서 늦어졌어요.”
멀쩡한 어머님까지 아주 환자로 만들고 있었다. 좀 더 놀아줄려고 하다가 나도 모르게 열이 뻗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야 임마. 너 빨리 못 와. 아침에 교문 밖으로 나가는걸 보았는데 언제 벌써 시골에 갔어? 잔말 말고 빨리 와. 오는 대로 나한테 들려.”
8분쯤 후 혁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얼굴이 사색이 다 되었다. 죄송한 마음을 얼굴 가득 떠올리면서도 제 2탄 거짓말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 책을 가질러 갔었는데요, 배가 막 아파서 잠깐 누웠는데요, 깜빡 잠이 들었지 뭐예요. 그래서 그만……”
나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근엄한 표정으로
“엎드려 뻗쳐”
기어이 종아리 몇 대를 때리고 말았다. 아침에 굳게굳게 맹세한 결심은 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어른들 사회가 거짓말이 만연된 사회인데 아이들에게만 정직하라고 권할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좀 더 의연했으면 좋겠다. 맑은 샘물이 되어 혼탁한 이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정화시켰으면 좋겠다. 아이들마저 혼탁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하루를 닫으며 하는 고백이지만, 늘 엄격함으로 포장된 내 마음속에서 아직까지 너희들이 밉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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