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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8 파란만장 치유治癒의 노래-한정민 시인의 시세계
- 2016.06.22 삶의 향기와 자연의 조응 ― 리헌석 시인의 시조세계
- 2016.06.16 유장한 리듬으로 직조織造한 인생 파노라마 -문희봉 시집 『상처의 향기』에 나타난 시세계
글
〔해설〕
파란만장 치유治癒의 노래
엄기창 시인
1. 시의 효용效用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시에는 어떤 효용效用이 있기에 독자들은 끊임없이 시를 읽고 있는가.
루이스는 “시란 무엇보다도 즐기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는 시의 효용效用을 문학의 원초적인 쾌락설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예술 활동의 정화작용(카타르시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즉, 시인은 한 편의 좋은 시를 창작함으로써 즐거움을 갖게 되며, 독자는 좋은 시를 읽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감동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간접적이고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시는 ‘재미’와 ‘감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고,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한정민 시인에게 있어서 시란 노년의 아픔과 외로움을 치유治癒해주는 친구 같이 소중한 존재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과 두 딸 모두 집 틀어 나가고, 자신도 방광암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황혼의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서시’에서
“나 혼자입니다./역전 마당/흔들리는 사람들 물결 속에서도/나 혼자입니다./장미꽃은 피어도/손을 내밀지 않습니다./비둘기 노래도/울음소리로만 들립니다./노숙자의 그림자 속에/혼자만 남았습니다./잠깐 스쳐온 여행이라 여겼는데/세월에 떠밀려온 황혼의 언덕에서/한 점 흔들리는 바람결에도/명치끝이 아립니다.” 라고 노년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만이 그의 친구였고, 애인이었고, 그를 웃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2. 한정민 시인의 삶의 발자취
내가 한정민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14년 9월 어느 날이었다. 40년 가까이 봉직하던 교직에서 물러나와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내게 ‘대전문예창작연구회’에서 시를 같이 공부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첫날 거기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이 한정민 시인이었다. 나보다 일곱 살 연상으로 칠십이 넘어 늦게 문학에 입문한 한정민 시인은 자신의 삶을 모두 태워 시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시인이었다. 2014년 1월『문학사랑』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이미 그 해 4월 『먼 훗날』이라는 시집을 발간하였고, 이어서 2015년 대중적 서정시의 매력이 넘치는 『진도 육자배기』, 2016년에 아내의 간병과 자신의 방광암 투병의 절실한 서정을 모아『한정민 병상일기』를 상재하였다.
그의 삶은 오로지 시에 몰입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쓰면 무엇보다 즐거워하고, 시가 써지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내가 본 어떤 시인보다 그는 가장 시인다운 생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1944년 4월 25일 진도에서 탄생한 한정민 시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풍족하고 만족할 만큼 행복한 삶은 아니었던 듯싶다.
“ 부잣집
아이들은 책가방을 들고
운동화를 신고
나는
책보를 메고 검정고무신 신고
중학교에 다녔다.
동네에서
읍내 학교까지는
시오리길
눈보라 치는 날이면
눈에 젖어 시린
발이 부르트도록 산길을 뛰었다
그 길이
꿈 찾아 서울로 줄행랑 친
내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검정고무신」전문
한정민의 시는 상황이나 시적 대상을 소박한 시어로 묘사하여 감성에 호소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의 고향 집은 화장실에 가면 바닷게들이 떼 지어 돌아다닐 만큼 바다와 가까웠다. 그의 어린 시절 별명이 ‘도추바’였던 것을 보면 그는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개구쟁이였던 것 같고, 그 당시 농촌이나 어촌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음직하던 집안에 대한 불만도 있었던 것 같다. “부잣집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었는데, 자신은 검정고무신 신고 눈 오는 날 언 발로 고개를 넘었다는, 그 것이 꿈 찾아 서울로 줄행랑을 치게 된 원인”이라는 이야기는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는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예고편이었다.
“ 책가방 팽개치고
서울로 가출
전라도 촌놈이라고
직장을 구하려고 해도
보증 서줄 사람이 없어
여인숙에서 호객을 하며 구두닦이를 했다.
뒤늦게
중국집 접시닦이로 취직하여
일 년간 일했건만
품삯은 한 푼도 주지 않고
(중략)
눈물 마시며 자란
전라도 촌놈
전라도를 빛내는 시인이 되었다.
삶의 태반을 타향에서 지냈지만
내 시 속에
황토 향기가 풍기는 건
내 피가
전라도 사랑을 담은
황토빛깔이기 때문이다.
-「전라도 촌놈」부분
이 시집 『전라도 촌놈』의 표제시다. 중학교 2학년이던 한정민 시인은 가난한 집안과 농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를 도와야 하는 농어촌 생활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이웃집 여고생을 짝사랑 했지만 그 여고생은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 딸인지라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 같다. “소쩍새 울음 울던/열다섯 시절/이웃집 여고생을 짝사랑했다.//좋아한다./말 한마디 못하고/가슴앓이 하다가//반백이 넘도록/내 마음 거울 속에 그리기만 했던/사랑//칠순에/둘 다 홀로 되었어도/이룰 수 없어//나 홀로/덩그러니 추억을 지우는/연습만 하고 있다.”라고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한정민 시인은 결국 어느 날 새벽 아버지의 소판 돈을 훔쳐 가출을 한다. 진도대교가 놓아지기 전이라 작은 배를 타고 울돌목을 건너면서 아버지가 쫓아올까봐 가슴을 졸였다 한다. 그러나 이 가출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깡패들에게 돈을 모두 빼앗기고 결국은 여인숙의 호객꾼이 되어 밤에는 호객을 하고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였다. 식당 주인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중국집 접시 닦이로 취직하였지만 주인은 품값을 한 푼도 안 주고 올 데 갈 데 없는 놈 밥 먹여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호통을 쳤다. 심술이 난 그는 어느 날 손님 신발 열다섯 켤레를 똥통 속에 집어넣고 도망을 나왔다. 이 가출이 그의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시작이었다.
눈물을 마시며 자랐지만 그는 이제 전라도를 빛내는 시인이 되었다. 타향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한정민 시인은 ‘전라도 촌놈’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황토빛 향기가 난다. 이것은 전라도와 진도를 사랑하는 한정민 시인의 마음이 시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월남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한국 정부에 월남 파병을 요청했다. 1965년 10월 13일 월남에 파병되는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한정민 시인이 참전하게 된 것은 그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이른 나이에 꿈에 부풀어 가출했지만 이룬 것 없이 타향살이의 신산만 경험하던 한정민 시인에게 월남참전은 일종의 탈출구가 된 것이었다. 소판 돈 훔쳐 나와 성공하지도 못한 죄책감에 전사한다면 전사 보상비라도 아버지께 전해지겠지 하는 막다른 심정으로 월남에 갔지만, 포탄 쏟아지고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다니는 전장은 너무도 무서운 지옥이었다.
하늘에선
고엽제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베트콩의 총신이 겨눠지고
눈을 감으면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있을지 몰라
잠을 잘 수가 없다.
고국이 천국이라면
여기는 지옥이다.
고국 사람들아
천국은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한다.
지옥이 되고 나면
후회할 틈도 없다.
-「지옥」
고엽제가 쏟아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지옥 같은 전쟁터, 눈을 감으면 누가 목을 베어갈 지도 모르는 위기의식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런 속에서도 천국은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지 지옥이 되고 나면 후회할 틈도 없다는 잠언적 교훈을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한정민 시인의 시에서 이렇게 아포리즘적 요소를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살짝 내비치는 이런 교훈들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소박한 표현 속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날카로움, 이것이 한정민 시가 지닌 매력이다.
한정민 시인은 이런 지옥 속에서 결국 살아나와 국가 유공자가 되었으며, 1967년 전매청(담배인삼공사)에 채용되어 유복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때로는 용기 있는 결단 한 번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에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겠다.
한정민 시인의 첫 번째 불행은 아내의 발병이었다. 건강하던 아내가 2002년 갑자기 페암 진단을 받은 후로 간신히 유지되던 그의 행복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아이들은 아직 어린데 직장은 다녀야 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극진히 간호했지만 아내는 200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엄마의 사랑을 잃은 어린 3남매를 다독이며 뒷바라지하여 잘 교육시키고, 이젠 모두 각자의 둥지를 마련하여 내어보냈다. 아내를 보낸 지 15년이 되었지만 한정민 시인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산다.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가슴 시릴 때마다
당신이 해 주던
보리밥 맛 잊을 수 없어
보문산 보리밥집을 찾습니다.
나 홀로 덩그러니
싱싱한 채소와 나물로
쓱쓱 비벼 먹습니다.
후식으로
부침개 한 접시
막걸리 한 사발
“여보 잔 받으시오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당신의
빈자리에
망초 꽃이 피어납니다.
-「아내의 망초 꽃」전문
아내를 잃은 슬픔을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 한다. 『장자』지락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아내가 죽은 후 물 단지를 두드리며 운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아내를 떠나보낸 후 그리움을 지울 수 없어 아내와 자주 가던 보리밥집에 간다. 둘이 먹던 보리밥을 혼자 먹으며 부침개 한 접시에 눈물 섞어 막걸리 한 잔을 마신다. 생전에 하던 대로 아내에게 막걸리를 권하니 빈자리에 망초 꽃이 피어난다는 시다.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인가. “여보 잔 받으시오/내 술 한 잔 받으시오.//당신의/빈자리에/망초 꽃이 피어납니다.” 사부곡思婦曲으로 얼마나 격조 높은 표현인가. 아내는 공기나 물과 같이 늘 우리 주위에서 함께하기에 평소에는 고마움을 모르다가 부재 시에야 그 귀함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또 다른 시 「첫눈」에서 더욱 상승된다. “창 밖에/첫눈이 내린다.//하얀 나비 날아오르다/창문에 부딪혀 녹아내린다.//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눈꽃으로 피어나/당신의 눈물 나비가 되었나 보다.//창문 열고/손 내민다.//바람으로 사르셨나./손에 잡히지 않는/내 마음 속 하얀 나비”
한정민 시인의 시에는 ‘망초 꽃’이나 ‘나비’와 같은 비유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참신한 비유가 한정민 시인의 시를 범속을 초월해 절구絶句로 이르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한정민 시인의 두 번째 불행은 어머니의 설암 발병이었다. 고향 진도에서 지적 장애자인 동생을 보살피며 살던 어머니를 대전으로 모시고 와 보훈병원에 입원시키고 극진하게 간호했다. 혼자 몸으로 온 정성을 다해 간호한 보람도 없이 어머니는 2013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정민 시인에게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 외에 또 하나의 간절한 그리움이 생기고 말았다.
첫닭 울면
잠 깨어나 평생 일만 하시다가
이승 떠나신
어머님 얼굴
부엌문 밀치고 나와
보리방아 찧던
저 주름살
울 어머니
곱던 얼굴에 늘어난
삶의 훈장
발길 끊겨
잡초만 무성한 고향집
마당 귀퉁이
주인 잃고 나뒹구는 절구통
-「절구통」전문
고향집 마당에 뒹굴고 있는 절구통을 보며 이승 떠나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곡진한 사모곡思母曲이다. 옛날 어머니들은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 가족들에게 먹이고는 하루 종일 들에 나가 노동을 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다시 저녁을 지어 먹이고, 빨래나 바느질 등 가사를 돌보느라 허리를 펼 새가 없었다. 절구통 역시 어머니를 괴롭히는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방앗간에 갈 만큼 넉넉한 집이 아니면 절구통에 곡물을 찧어 밥을 했다. 한정민 시인은 절구통에 보리방아 찧던 어머니 모습을 회상하면서 이제는 마당 귀퉁이에 버려진 절구통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정민 시인에게는 절구통이 어머니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한정민의 시는 이해하기 쉽다. 힘들여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아도 맑은 물처럼 그 내용이 환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삶의 체험을 비교적 친근한 비유와 상징으로 엮어가기 때문이다. 참신한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를 너무 멀게 하여 시인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한 지 모르는 난해시를 남발하는 시인들이 많은 요즈음 그렇기에 한정민의 시가 더욱 소중하다.
나는요
종합병원 전문의랍니다.
고혈압 십칠 년
전립선 비대증 십사 년
협심증 팔 년
방광암은
BCG 약물 투입
내시경 검사
치료중
온갖 병과 어울려 살다 보니
어느새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나는 전문의」전문
『진도 육자배기』에 실린 『나는 전문의」라는 시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고엽제를 마셨기 때문일까. 아내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한정민 시인에게도 온갖 병마가 찾아든다. 고혈압, 전립선 비대증, 협심증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에 어느 날 혈뇨가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병원에서 세포검사를 하니 방광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중첩되는 불행에 절망을 느끼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BCG 약물 투입 등의 치료를 받는다. “온갖 병과 어울려 살다 보니 어느새 전문의가 되었습니다.”는 시구에서 조지훈의 「병에게」라는 시 구절이 생각난다.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너무 자주 만나다 보니 전문의가 되었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조남익 선생님은 한정민 시인의 시집 『진도 육자배기』해설에서 “한정민의 시에는 시의 결구에서 고차원적 언어 표현이 유지된다. 이는 작시 상으로도 시의 태작駄作을 막고 성숙된 한 시인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한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한정민 시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따뜻하고 친근감 있는, 소통하기 쉬운 시적 전개에 종련 결구의 함축적이고 의미심장한 표현이 시의 격조를 스스로 높이고 있다.
3. 황혼의 외로움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다 인간만큼 고독한 존재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 명제이다. 인간은 태어 날 때도 혼자 외롭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도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인간이 외롭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을 이해 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있어 외로움은 우리가 매일 먹는 물이나 밥과 같다.”고 정호승 시인은 말한 바 있지만 인간은 혼자 태어나 결국에는 혼자만 남는 외로운 존재다. 삶의 격동기를 지나 한정민 시인도 어느덧 일흔일곱의 나이가 되었다. 아내와 사별한 지도 15년이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혼자이다. 아들과 두 딸들도 결혼하여 모두 가정을 꾸렸고, 손톱 밑의 가시처럼 늘 괴롭히던 방광암도 완치판정을 받았다. 황혼이 짙어지면서 그의 삶에 농도를 더해가는 것은 외로움이다.
김밥으로
아침을 열었습니다.
동태찌개
막걸리 한 사발로
점심을 때우고
어스름 저녁
식당 문을 밀치고
공복보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습관처럼 울리지 않는 휴대폰
누구라도 부르고 싶습니다.
아무라도 부르고 싶습니다.
저녁까지
세끼 혼밥이 싫어
더운 밥 마주하고
하루를
포만하게 보내고 싶습니다.
-「혼밥이 싫어」전문
한정민 시인의 대부분의 시처럼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시다. 요즈음 선진국에서 문제점으로 대두되는 것이 노인들의 외로움이다. 가족들이 파편화되어 둘이 살다가 하나가 가면 외로움을 씹어가며 남은 생을 보내야하는 것이다. 노인들의 도시락을 전달해 준다거나 고아원을 방문하는 등 봉사활동에 마음을 써 보기도 하고, 독거노인을 초청해 점심을 대접하기도 하지만 존재의 외로움은 사라지질 않는다. “주말은/
애들하고 함께 하고 싶다.//고희를 넘어/혼자 사니/ 사람이 그립다.//아들딸하고/밥이라도 먹고 싶은데/전화가 없다//외로울 때는/애들은 내 마음 속/ 보석이다.”라고 한정민 시인은 시「보석」에서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자손들이 관심을 가져준다고 원천적 외로움을 해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주 전화 속에서 손주들의 재롱을 보여주는 것, 반찬이라도 한 가지 가져다가 식사를 챙겨주는 것, 이런 인간 사이의 작은 정성이 모여 노인들의 고독사를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4. 아픔을 치유治癒해주는 시
시가 나를 살렸다고 한정민 시인은 자주 말하고 있다. 아내와 어머니가 불행한 일을 당하고 자신마저 방광암으로 극한상황에 처했을 때 『문학사랑』신인상으로 등단하고 『먼 훗날』, 『진도 육자배기』, 『한정민 병상일기』등의 시집을 출간하면서 그 기쁨의 에너지로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만길 높이로 치솟은 물결처럼 인생의 심한 기복을 시로 승화시켜 노년의 외로움마저 극복하고 평화를 찾았다는 것이다.
시에 꽂히면 인생에 꽃이 핀다. 노년에 극한의 슬픔이 온 몸을 지배할 때, 그 슬픔의 바다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가능성이 안 보일 때, 그 슬픔을 울부짖듯 시로 토해내고, 그것을 시집으로 묶어낸 후 말끔하게 가라앉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시에는 절망을 치유治癒해 내는 힘이 있다. 카타르시스를 통해 몸에 담긴 불순물을 모두 걸러내고 시들어가던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힘이 있다. 한정민 시인은 시가 지닌 힘을 깨달았으니 이제 그의 노래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불행을 닦아주는 묘약妙藥이 되리라.
좀 늦게 입문했으니 삶의 애환을 신명난 목소리로 풀어낼 때 친근하고 따뜻한 감정과 종연이 갖는 함축적 묘미를 살리고 투박한 표현을 조금 가다듬는다면 행복한 생활 속에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오늘도 한정민 시인은 시를 통해 얻은 생의 기쁨을 상기된 목소리로 노래한다.
어둠의 대궁 위에
아침의 꽃이 피듯
내일은
밝은 햇살로 오겠지.
시여!
불행을 쓸어내는
신의 날개여!
여명을 깨워내는
우렁찬 종소리로
햇살 고운 아침
창문 열어젖히고
두 팔을 힘껏 펼친다.
-「내일」
글
■해설
삶의 향기와 자연의 조응
― 리헌석 시인의 시조세계
시인 엄 기 창
세월의 강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우리는 삶의 유역(流域)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나의 삶에 관여하여 나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만남이 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문학의 노정(路程)에서 리헌석 시인과의 만남은 나에게 진실로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리헌석 시인은 그 적극적이고 정력적인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언제나 나에게 자극을 주고, 멈춰 있으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주었으며, 소극적인 나의 삶에 지속적으로 활력을 주는 문학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리헌석 시인을 처음 본 것은 1967년 초봄, 매서운 꽃샘추위가 마음을 움츠리게 했던 영명고등학교 1학년 2반 교실에서였다. 나는 그때 시골 마곡사 근처에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 유학을 왔었는데, 누구 하나 말을 붙여볼 사람도 없는 매우 외로운 처지였다. 날씨마저 추워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그때 리헌석 시인이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었다. 사내다운 고집이 입가에 남아있기는 했지만, 도시 아이 답지 않은 순박한 눈망울과 친절한 말씨가 마음에 들었다.
알고 보니 그도 30리가 넘는 우성에서 등하교를 하는 시골 출신 아이였는데, 그는 늘 등하굣길에 만나는 자연을 나에게 자랑하였다. 풀꽃 숨어 피는 둑길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나루터, 전설이 서려 있는 고개와 성황당 나무 아래의 돌탑, 내게는 별 신기할 것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교내의 유일한 문학 동아리인 ‘팔각정문학회’에 입회하여 저녁놀 지는 봉황산과 공주 시내를 바라보며 시작(詩作)의 꿈을 키워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평생을 같이할 줄은 몰랐다.
40년 넘게 내가 지켜본 리헌석 시인은 《도가니》 창립 멤버로서 그 동인지를 《오늘의 문학》, 《문학사랑》으로 키워오면서, 문학을 포기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합평회, 세미나 등의 여러 사업들을 통해 대전 지역의 문학 실력을 일취월장 향상시킨 지대한 공헌자라는 것이 친구인 나의 솔직한 평가이다.
그는 1982년 《시와 의식》 신인상(시 부문)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갈채의 숲』, 『네가 시인이라 하니』, 『어부슴』, 『미완성 연가』, 『디디울나루』. 『반내림을 위하여』, 『은이의 인형』, 『새소리는 덤이다』, 『갈채하는 숲』 등 9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평론 부문)을 받고, 『한국 현대 서사시의 신지평』, 『우리 시의 얼개』, 『불심이 깃든 시 산책』, 『정훈 시 읽기』 등 4권의 평론집과 몇 권의 편저(編著)를 발간하며 문학적으로 성장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리헌석 시인의 시적 기반은 우리가 같이하던 고등학교 때부터 다져지고 있었는데, 비옥한 토양의 밑바탕엔 그가 등하굣길에 만났던 디디울나루 주변의 자연과 성황당 돌탑에 쌓여있던 전통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제 펴내려는 리헌석 시인의 시조집 속의 작품에도 이러한 자연과 삶의 향기가 조응되어 있다.
동양에서의 자연은 도가(道家)의 자연관 특히, 노자의 사상에서 잘 드러나듯이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즉 인간보다는 자연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했으며, 인간과 자연은 상호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고, 자연은 정복이나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했다. 또한 동양의 자연관은 유기체적이고 종합적이며 탈 인간 중심 주의적이다.
일찍이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道)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사람들은 이 상태가 저 상태보다 낫다는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에서 모든 경험이나 지각의 상대성은 ‘만물의 통일성(萬物齊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자는 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받자 장자는 개구리와 개미, 또는 그보다 더 비천한 풀이나 기와 조각, 더 나아가서 오줌이나 똥에도 도가 깃들어 있다고 단정했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장자의 도설에서 비롯된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서양의 자연관과 달리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자연관이다. 인위(人爲)보다 무위(無爲)를 중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이지 않은 것, 이것이 바로 동양의 자연관이다.
리헌석 시인의 시조에는 이러한 자연관이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이 적극적으로 자연을 간섭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삶, 자연을 통해서 욕망과 사랑, 인습마저도 초월하는 삶, 이러한 삶의 모습이 매력적 언어의 연금술 속에 녹아 있다. 리헌석 시인의 시조를 읽다 보면 나도 어느덧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에 몰입하게 된다.
계룡산 초가을
눈부신 아침 마당
쓰르라미 소리에
깃을 터는 연천봉
월견초
노란 꽃초롱에
그리움을 담는다.
―「계룡산 초가을」 전문
그의 시조를 읊조리며 눈을 가만 감으면 계룡산 연천봉의 전경이 눈에 가득 떠오른다. 이 시조엔 아침을 여는 쓰르라미 소리에 부르르 지난밤 꿈의 잔재를 털어내듯 깃을 터는 연천봉의 모습이 눈부신 감각의 전이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시인은 다시 카메라의 앵글을 바짝 당겨서 조그마한 월견초 봉오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꽃초롱에 그리움을 가득 담는다. 먼 연천봉 봉우리와 눈앞의 월견초 꽃초롱, 시인이 원근법을 통해 그려놓은 산수도의 여백마다엔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가득히 담겨있다.
시조 작법의 어려움이 너무도 짧은 형식 속에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는 이 짧은 평시조 한 수 속에 아기자기한 솜씨를 발휘하여 삶과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을 펼쳐 놓았다.
리헌석 시인의 시조에 나타나는 조화로운 자연은 남화풍(南畵風)의 관념(觀念) 산수도라기보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늘 보는 진경(眞景) 산수도이다. 그러기에 더욱 친밀하고 정감이 간다.
삼동 추위 이겨내신
파밭은 나비춤이다.
실뿌리 하얀 순수가
파랗게 힘을 얻어
눈부신 꽃대를 세우며
눈빛으로 마중한다,
어린 소녀 손톱처럼
다듬어진 꽃망울
맑은 영혼 나래 펴고
사랑으로 맺은 씨방
향마저 눈물 젖은 오월
꿈에서도 그립겠다.
―「파밭에서」 전문
자연의 일부인 파밭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의 시정신은 산, 강, 바다의 자연을 뛰어넘어 텃밭에 심어진 파밭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그래 어찌 수려한 용모를 뽐내는 산과 강, 바다만이 자연이랴! 우리가 늘 넘어 다니는 메마른 황토 고갯길도 자연이요, 파랗게 봄풀 짙어오는 논둑도 자연이요, 자줏빛 꽃망울 아롱진 감자밭의 모습도 자연인 것을. 더구나 그는 이러한 자연관이 몸에 배어 대청호변 한적한 곳에 조그마한 밭을 장만하고 틈이 날 때마다 자연과의 친화에 힘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몇 년 전 봄에 이 시인과 식장산 등산을 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든 후 그의 밭에 가서 한나절을 보낸 적이 있다. 밭 아래로 대청호 물결이 출렁거리고, 갈대밭은 이따금 새떼를 토해내는 아늑한 곳이었는데, 그 밭 가득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매화꽃 피는 봄날 술 한 잔 하면 그가 매화나무인지 매화나무가 그인지 알 수 없단다. 정말로 고추 밭에서 바람에 기울어진 고춧대를 세우며 풀을 뽑는 그의 모습이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리헌석 시인의 시를 보면 자연의 거울에 비춰진 삶의 모습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굴종(屈從)되지 않은 당당한 자세에서 차가운 겨울에도 변하지 않은 솔잎의 청청함을 발견한다. 또한 ‘파밭은 나비춤이다.’, ‘실뿌리의 하얀 순수’, ‘눈부신 꽃대를 세우며 눈빛으로 마중한다.’ 등의 비유와 감각을 통해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소재를 참신함과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경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읽는 이에게 순수하고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고타마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는 연기의 이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직 세상에 내어놓지 않은 리헌석 시인의 보석 같은 시조 작품을 먼저 읽으며 그와 동행했던 40년을 뒤돌아보니 인연이 참으로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84년 3월 대전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대전에 와 보니 리헌석 시인이 ‘오늘의문학회’ 회장을 맡아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와의 인연이 이렇게 끈질길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몸도 마음도 추울 때 처음으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 친구로 붙어 다녔지만, 졸업하면서 연락이 끊어졌을 때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권유로 《문학사랑》의 전신인 《오늘의 문학》에 가입하여 30년 가까이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 그가 목숨만큼 소중하게 생각했던 친구들의 배반으로 괴로워했을 때도 그의 곁에 있었고, 한국 문협 대전 지회장, 예술단체 회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할 때도 묵묵히 그의 곁에 있었다. 큰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늘 그의 편이었다. 그는 항시 그만큼 나에게 믿음을 주었으며, 배울 것이 많은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참으로 열정적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결정된 일엔 절대 망설이며 우물쭈물 하는 법이 없었다. 옆에서 보기에 불가능한 일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두 성취되었다. 또한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상대편이 배반하기 전엔 절대로 등 돌리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믿기 시작하면 끝까지 믿어주고, 한 번 도움을 주면 끝까지 보답하는 마음, 엄격함 속에 따뜻한 정을 감추고 세상을 위해 늘 기도하는 마음, 어찌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대자연의 마음이 아닐까!
그대를 마주하면
마음 또한 정갈하다.
어두워진 하늘을 기도로 씻어내며
깨끗한
세상을 바라
손을 모으는 새벽길.
―「별에게 1」 전문
이 작품에서 우리는 대자연인 하늘 앞에서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 앞에 서면 마음이 정갈해지고, 그 정갈한 마음으로 어둠을 씻어내어, 깨끗한 세상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 이것이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정신이다. 시가 바로 작가의 시정신의 분출이라면, 작가의 삶이 자연 앞에 얼마나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리헌석 시인의 자연에 대한 진지함은 때때로 그리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유소년 시절 건너다니던 나루터나 돌탑이 서 있는 고갯길, 물결 찰랑이는 호숫가에 그의 그리움이 있다.
갈대 잎 서걱이며
몸을 푸는 그리움
메밀꽃 수줍음도
광풍(狂風)에 쓸려가고
떨리는 여울을 건너
몰아치는 원초(原初)여
평생 동안 꿈꾸던
영혼의 동정(童貞)으로
물비늘 선율 위에
열망(熱望)의 날개 펴면
이르른 안식(安息)의 샘가
무지개로 돋는 정
―「디디울나루 만추(晩秋)」 전문
늘 돌아갈 푸근한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을 만나더라도 쉽게 주저앉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시의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어떤 극한상황을 만나더라도 시의 샘이 고갈되는 일이 없다. 리헌석 시인은 벌써 아홉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열 번째 시조집을 발간하려 하고 있다. 그의 이 왕성한 시작활동의 바탕에는 유년기의 꿈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는 그의 시의 고향인 ‘디디울나루’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특히 디디울나루를 소재로 해서 쓴 작품들이 많은데 한결같이 그 시들엔 사랑과 그리움의 빛깔이 가득 칠해져 있다.
내가 아는 리헌석 시인은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강해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아파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다. 자신이 정한 길은 한 치의 어김없이 걸어가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해 다친 사람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연민의 날개를 접지 않는 사람이다. 아직도 그의 시엔 눈부신 서정이 넘쳐나고 있는데, 비록 사공은 사라졌지만 그의 의식 속에 디디울나루의 강물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뜨거운 가슴마저
섬으로 띄워놓고
빛살 고운 바람을
마중하러
길을 찾네.
혼절한
사랑을 깨우쳐
천 년 사는 저 별빛
―「섬바위 연가」 전문
나의 문학적 행로에서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이 있다면 리헌석 시인과 더불어 《오늘의문학》에서 문학 활동을 하던 젊은 시절의 그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합평회가 끝나면 우리는 꼭 막걸리 집에 들러 술을 마시며 문학적 담론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 회원들은 언제나 2차를 가서 이야기 거리를 만들곤 했는데, 젊었던 그때는 미당도 목월도 우리의 혀끝에서 완전히 떡이 되곤 했다.
1년에 한두 차례 세미나를 갔는데, 대천에서의 세미나가 기억에 가장 남는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친교의 시간에 술 취한 우리는 백사장에 나와 광란의 밤을 보냈다. 그때 백사장 건너편 섬이 너무도 신비롭게 다가왔는데 앞 작품을 읽으며 왜 갑자기 그 섬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 나타난 ‘섬바위’는 어쩌면 실제의 바위가 아니라 작자의 의식이 그려놓은 가공의 섬바위다. 그 섬바위는 자그마하지만 거느린 이야기는 작은 거인처럼 거대하다.
뜨거운 열정이 뭉쳐 무너진 사랑을 일깨우고, 등대처럼 그 사랑을 천 년까지 끌고 가는 힘, 이 짧은 평시조 한 수에서 우리는 위대한 낭만과 서정을 발견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각과 부딪칠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이어령은 말하였다. 일찍이 리헌석 시인은 문학적 삶이냐 일상적 삶이냐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섰을 때 과감하게 문학적 삶을 선택하였다. 교사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가보지 않은 고갯길 같은 험준한 미지의 길을 선택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미련을 접고 문학에 정진하는 삶을 선택하였다. 교직을 그만두고 경험이 전혀 없었던 출판사를 차렸다. 그때는 ‘오늘의문학회’라는 모임에서 ‘나’와 ‘그’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을 때였지만, 심사숙고해 결정하라는 충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벌써 문학에 전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인들 모두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문학잡지 《문학사랑》을 훌륭하게 성장시켜 대전, 충남에서 문학서적을 가장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로 만들어 놓았다. 내가 아직도 바쁘다는 핑계로 두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을 때 그는 정력 좋게도 열세 권의 저서를 출산하였다.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바르게 결정을 내린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나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한 번 매달리면 밤낮을 잊는 그의 열정이 오늘의 성공을 가져오는 가장 큰 밑바탕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또한 정의감과 역사의식도 투철해서 민중에 대한 연민의 마음도 잊지 않고 있었는데, 《문학사랑》 회원들 중에서도 약하고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잘 살펴 도와주었다. 1년에 한두 번 있던 세미나 날이면 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포에서도 부산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심지어는 외국에서까지 달려와 세미나는 늘 흥청거렸다.
산처럼 늘 묵묵한 그의 삶의 모습 속엔 바른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너울로 헤살 짓는
가슴 아픈 꽃샘바람
농병들의 원혼이 꽃불로 살아나서, 휘도는 바람 속에 개혁도 날아갔다. 욕심을 더한 일로 아름답던 꿈이 부러졌다. 얼음 같던 세월도 금세 녹아내렸다.
천심(天心)을 찾아 헤매도
빈 하늘에 빈 걸음
세상 향해 터진 분노
도지는 가슴앓이
맑은 하늘 산줄기 고운 물빛을 지우며, 광란하듯 일어서는 모래바람이 있었다. 모래를 날리며 여린 떡잎 휘갈기고, 다시금 휘몰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순간을 몸부림쳐서
영겁으로 거듭나고.
―「우금치에서」 전문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해서 쓴 사설시조이다.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濫刑)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들불처럼 힘차게 남쪽 산하를 불태우다가 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 이 우금치는 농민들의 한과 피울음이 엉겨있는 곳이다.
시인은 이 역사의 현장 우금치에서 모래바람처럼 휘몰아쳤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농민들의 염원을 떠올리며, 그 원혼들이 꽃불로 살아나서 몸부림치며 역사 속에서 영겁으로 살아감을 발견한다. 바른 것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바른 것은 비록 소멸하더라도 천년을 살아가는 힘이 있음을 깨달았기에 감동을 준다.
[가]
꽃 피듯 잎이 지듯
돌에 담긴 백제 하늘
말을 타고 내달리던
갈대밭이 보이고
깃발에 나부끼던 역사
거친 함성도 들린다.
―「백제탑 앞에서」전문
[나]
미명(未明)의 안개 속에
길을 내는 그리움
복숭아 꽃 향으로
온밤 내 강을 건너
무령왕, 잠 속까지 찾아
환생하는 덧 여울.
―「무령왕릉에서」일부
[다]
천년 건너 깃발을
오늘 다시 찾습니다.
세월 멀리 새겨진 겨레의 웅지를 다시 새깁니다. 뜻을 일구신 겨레의 강역을 다시 살핍니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마당에 세운 빗돌 앞에서, 우리의 진취적 기상을 다시 읽습니다.
새롭게 세운 빗돌에
역사 청청 담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곁에서」일부
[가]는 백제탑 앞에서 말을 타고 너른 갈대밭을 내달리던 백제(百濟) 적 조상들의 힘찬 모습을 상상하는 시이고, [나] 또한 무령왕능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왕과 왕비의 못다 한 사랑을 아쉬워하고 있다. [다]는 ‘재단법인 계룡장학재단’ 이인구 이사장의 지원으로 중국 ‘지린(吉林)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비석을 독립기념관 마당에 세운 뒤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이다. 시인은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이규보는 그의 『논시』에서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씹을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뜻만 서고 말이 원활치 못하면/ 껄끄러워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요즈음 시인들은 너무 표현의 아름다움만 추구하다 뜻에 소홀하기 쉬운데, 리헌석 시인은 이렇게 깊은 역사의식을 기발한 발상과 표현방식을 취해 참으로 감동 깊게 꾸며 놓았다. 이는 그의 삶의 한 발이 우국(憂國)의 중심을 딛고 있으며, 옛 성현의 시 작법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는 처음 소년으로 만났는데, 어느새 세월은 그와 나의 머리를 하얗게 물들여 놓았다. 거울을 보면 흰 것만으로도 모자라 머리카락이 빠진 정수리가 겨울의 숲처럼 황량하다. 언젠가 리헌석 시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책상 유리판에 내 사진을 끼워놓은 것을 보고 약이 바짝 올랐던 일이 있다. 《문학사랑》축제 때 시상을 하는 사진이었는데 인사를 하느라고 허리를 굽혔을 때 전깃불에 얼비친 머리가 완전히 대머리처럼 찍힌 것이었다.
“엄기창 시인도 머리가 장난 아니게 빠졌는데…….” 하며 껄껄 웃는 그 모습이 꼭 내 머리 빠진 것을 보고 즐기는 것 같아 혈압이 올랐던 적이 있다.
우리도 벌써 회갑이다. 육체의 나이는 벌써 가을인데 그의 정신은 아직도 청춘이다. 불타는 도전 정신으로 시조 쓰기에 몰두하더니 새 시조집을 내놓는다. 미리 준 시조를 읽으며 그의 살아온 모습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향기 있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회오리바람처럼 질주하다가 호수처럼 잔잔해지기도 하고, 큰 산맥처럼 모든 것을 품었다가 작은 도랑물을 보내서 목마른 것을 축여주기도 하고, 유년의 통학 길에 만났던 자연들이 그의 몸으로 들어와서 그도 어느새 자연이 되어버렸다. 자연에 조응된 그의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시조를 읽는 동안은 참으로 행복했다.
글
해설
유장한 리듬으로 직조織造한 인생 파노라마
-문희봉 시집 『상처의 향기』에 나타난 시세계
엄 기 창(시인)
1. 시의 리듬
시가 일반적인 산문과 다른 점은 운율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시의 생명력은 운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형성이 강조되는 시조나 한시에서는 시의 음악성이 절대적이었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형성에서 벗어나면 좋은 시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미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운율은 내재화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운韻이나 율격律格으로 나누어 두운, 요운, 각운, 음성률, 음수율, 음보율 등으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운율의 유려함이 반드시 좋은 시의 필수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가 우리 문학의 한 장르로 뿌리를 내리던 현대문학의 여명기엔 3,4조나 7,5조의 음수율에 맞추어 시를 쓴 분들도 많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산문시, 담시와 같은 유장한 내재율의 시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시의 장점은 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와 지성적 주제를 무리하지 않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시인들 중 특히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문희봉 시인이 있다.
둥글게 모여앉아 도란도란 피우는 이야기꽃
목젖을 넘는 맥주 한 모금이 어쩌면 이리도 부드러운가요
이골 저골 스쳐 견뎌온 난관 밀쳐버리고
밥숟갈 속에 녹아 흐르는 행복이 나를 어부바해 줍니다
고개를 드니 찬란한 자연풍광이 동공 속에 잠깁니다.
- 「센트럴파크 301동 1802호」 일부
<흩어져 사는 아들 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적막강산이던 집에 활기가 넘치>며 도란도란 모여앉아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한 서민의 단란한 모습이 전혀 급할 것 없는 담담한 리듬 속에 묘사되어있다. 이러한 시에서 여울물처럼 운율이 너무 급박하다면 편안함은 오히려 깨어질 것이다. 완만하고 유장한 리듬 속에 자신의 삶을 독백체에 담아 표현하였기에 오히려 신선한 것이다. 늘 유쾌하면서도 낙천적인 그의 성격이 삶의 파노라마를 펼쳐 가는데 가장 적합한 선율을 창조해낸 것일까. 이 시인의 시는 자신의 인생 모습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이토록 유장한 리듬으로 진화하였는지도 모르겠다.
2. 시심詩心의 고향 신석리
문희봉 시인은 1989년 『월간에세이』 수필 추천으로 먼저 문단에 등단하여 이듬해인 1990년 『한맥문학』 시 추천으로 시와 산문을 함께하는 시력 30년에 가까운 중견 수필가요 시인이다. 40여년의 교직생활동안 교감, 장학사, 교장 등을 두루 거치며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분이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고희古稀에 이르러 있다. 고희古稀라는 말은 두보杜甫가 지은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로서, 사람은 예로부터 70세까지 살기가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 70을 사는 것은 일상이 되었지만,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지난 삶을 회고하며 삶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그는 시집 『상처의 향기』를 상재한다. 이 시집에는 고희가 되어 되돌아보는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이 시인의 시심은 당진 신석리에서 발아發芽하고 있다.
창공을 닮았던 지붕
저녁노을 넉넉하게 흡수하고
아침 햇살 받아마시던 넉넉한 가슴
툇마루에 적막 앉히고
주름 새기던 세월
소국의 향기 묻어나온다
나라님이 기거하던 사랑舍廊
콜록콜록 기침소리 배어나오고
부지런했던 저녁 시간
왁자지껄 소쿠리가 걸어 나온다
물정 모르던 별빛
성호를 그으며 떨어지던 사랑
동네 아이들 웃음소리 새어나오고
갈 길 먼 나그네
피곤 풀며 웃음 짓던 곳
이미 무너진 것들
땅과 악수 준비하고
제 몸 부려놓으며 짓는 한숨
그 속에 내 유년이
파랗게 웃고 있다.
「신석리 시편 · 1 - 古家」 전문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평설은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년에 뿌리를 두면서도 형식미학과 표현감각이 돋보이는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인생 파노라마의 시작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정서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던 유년시절로부터 펼쳐지고 있다.
최형철은 그의 시집 『찔러본다』에서 자연의 순환 질서에 의해 직조해가는 생명의 직물織物과정을 통해 다른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문희봉 시인의 시 속에서도 생명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려는 시 몇 편을 발견할 수 있어 새로웠다.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찍힌 발자국들을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씨앗 좀 드리려고 조금 매달아 놓았으니 심어보세요.”
치마 대신 통바지 입은 아흔 된 노인이 건넨 온기 있는 입김
인생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는 문희봉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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