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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해설
삶의 향기와 자연의 조응
― 리헌석 시인의 시조세계
시인 엄 기 창
세월의 강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우리는 삶의 유역(流域)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나의 삶에 관여하여 나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만남이 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문학의 노정(路程)에서 리헌석 시인과의 만남은 나에게 진실로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리헌석 시인은 그 적극적이고 정력적인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언제나 나에게 자극을 주고, 멈춰 있으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주었으며, 소극적인 나의 삶에 지속적으로 활력을 주는 문학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리헌석 시인을 처음 본 것은 1967년 초봄, 매서운 꽃샘추위가 마음을 움츠리게 했던 영명고등학교 1학년 2반 교실에서였다. 나는 그때 시골 마곡사 근처에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 유학을 왔었는데, 누구 하나 말을 붙여볼 사람도 없는 매우 외로운 처지였다. 날씨마저 추워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그때 리헌석 시인이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었다. 사내다운 고집이 입가에 남아있기는 했지만, 도시 아이 답지 않은 순박한 눈망울과 친절한 말씨가 마음에 들었다.
알고 보니 그도 30리가 넘는 우성에서 등하교를 하는 시골 출신 아이였는데, 그는 늘 등하굣길에 만나는 자연을 나에게 자랑하였다. 풀꽃 숨어 피는 둑길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나루터, 전설이 서려 있는 고개와 성황당 나무 아래의 돌탑, 내게는 별 신기할 것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교내의 유일한 문학 동아리인 ‘팔각정문학회’에 입회하여 저녁놀 지는 봉황산과 공주 시내를 바라보며 시작(詩作)의 꿈을 키워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평생을 같이할 줄은 몰랐다.
40년 넘게 내가 지켜본 리헌석 시인은 《도가니》 창립 멤버로서 그 동인지를 《오늘의 문학》, 《문학사랑》으로 키워오면서, 문학을 포기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합평회, 세미나 등의 여러 사업들을 통해 대전 지역의 문학 실력을 일취월장 향상시킨 지대한 공헌자라는 것이 친구인 나의 솔직한 평가이다.
그는 1982년 《시와 의식》 신인상(시 부문)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갈채의 숲』, 『네가 시인이라 하니』, 『어부슴』, 『미완성 연가』, 『디디울나루』. 『반내림을 위하여』, 『은이의 인형』, 『새소리는 덤이다』, 『갈채하는 숲』 등 9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평론 부문)을 받고, 『한국 현대 서사시의 신지평』, 『우리 시의 얼개』, 『불심이 깃든 시 산책』, 『정훈 시 읽기』 등 4권의 평론집과 몇 권의 편저(編著)를 발간하며 문학적으로 성장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리헌석 시인의 시적 기반은 우리가 같이하던 고등학교 때부터 다져지고 있었는데, 비옥한 토양의 밑바탕엔 그가 등하굣길에 만났던 디디울나루 주변의 자연과 성황당 돌탑에 쌓여있던 전통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제 펴내려는 리헌석 시인의 시조집 속의 작품에도 이러한 자연과 삶의 향기가 조응되어 있다.
동양에서의 자연은 도가(道家)의 자연관 특히, 노자의 사상에서 잘 드러나듯이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즉 인간보다는 자연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했으며, 인간과 자연은 상호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고, 자연은 정복이나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했다. 또한 동양의 자연관은 유기체적이고 종합적이며 탈 인간 중심 주의적이다.
일찍이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道)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사람들은 이 상태가 저 상태보다 낫다는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에서 모든 경험이나 지각의 상대성은 ‘만물의 통일성(萬物齊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자는 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받자 장자는 개구리와 개미, 또는 그보다 더 비천한 풀이나 기와 조각, 더 나아가서 오줌이나 똥에도 도가 깃들어 있다고 단정했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장자의 도설에서 비롯된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서양의 자연관과 달리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자연관이다. 인위(人爲)보다 무위(無爲)를 중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이지 않은 것, 이것이 바로 동양의 자연관이다.
리헌석 시인의 시조에는 이러한 자연관이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이 적극적으로 자연을 간섭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삶, 자연을 통해서 욕망과 사랑, 인습마저도 초월하는 삶, 이러한 삶의 모습이 매력적 언어의 연금술 속에 녹아 있다. 리헌석 시인의 시조를 읽다 보면 나도 어느덧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에 몰입하게 된다.
계룡산 초가을
눈부신 아침 마당
쓰르라미 소리에
깃을 터는 연천봉
월견초
노란 꽃초롱에
그리움을 담는다.
―「계룡산 초가을」 전문
그의 시조를 읊조리며 눈을 가만 감으면 계룡산 연천봉의 전경이 눈에 가득 떠오른다. 이 시조엔 아침을 여는 쓰르라미 소리에 부르르 지난밤 꿈의 잔재를 털어내듯 깃을 터는 연천봉의 모습이 눈부신 감각의 전이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시인은 다시 카메라의 앵글을 바짝 당겨서 조그마한 월견초 봉오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꽃초롱에 그리움을 가득 담는다. 먼 연천봉 봉우리와 눈앞의 월견초 꽃초롱, 시인이 원근법을 통해 그려놓은 산수도의 여백마다엔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가득히 담겨있다.
시조 작법의 어려움이 너무도 짧은 형식 속에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는 이 짧은 평시조 한 수 속에 아기자기한 솜씨를 발휘하여 삶과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을 펼쳐 놓았다.
리헌석 시인의 시조에 나타나는 조화로운 자연은 남화풍(南畵風)의 관념(觀念) 산수도라기보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늘 보는 진경(眞景) 산수도이다. 그러기에 더욱 친밀하고 정감이 간다.
삼동 추위 이겨내신
파밭은 나비춤이다.
실뿌리 하얀 순수가
파랗게 힘을 얻어
눈부신 꽃대를 세우며
눈빛으로 마중한다,
어린 소녀 손톱처럼
다듬어진 꽃망울
맑은 영혼 나래 펴고
사랑으로 맺은 씨방
향마저 눈물 젖은 오월
꿈에서도 그립겠다.
―「파밭에서」 전문
자연의 일부인 파밭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의 시정신은 산, 강, 바다의 자연을 뛰어넘어 텃밭에 심어진 파밭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그래 어찌 수려한 용모를 뽐내는 산과 강, 바다만이 자연이랴! 우리가 늘 넘어 다니는 메마른 황토 고갯길도 자연이요, 파랗게 봄풀 짙어오는 논둑도 자연이요, 자줏빛 꽃망울 아롱진 감자밭의 모습도 자연인 것을. 더구나 그는 이러한 자연관이 몸에 배어 대청호변 한적한 곳에 조그마한 밭을 장만하고 틈이 날 때마다 자연과의 친화에 힘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몇 년 전 봄에 이 시인과 식장산 등산을 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든 후 그의 밭에 가서 한나절을 보낸 적이 있다. 밭 아래로 대청호 물결이 출렁거리고, 갈대밭은 이따금 새떼를 토해내는 아늑한 곳이었는데, 그 밭 가득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매화꽃 피는 봄날 술 한 잔 하면 그가 매화나무인지 매화나무가 그인지 알 수 없단다. 정말로 고추 밭에서 바람에 기울어진 고춧대를 세우며 풀을 뽑는 그의 모습이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리헌석 시인의 시를 보면 자연의 거울에 비춰진 삶의 모습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굴종(屈從)되지 않은 당당한 자세에서 차가운 겨울에도 변하지 않은 솔잎의 청청함을 발견한다. 또한 ‘파밭은 나비춤이다.’, ‘실뿌리의 하얀 순수’, ‘눈부신 꽃대를 세우며 눈빛으로 마중한다.’ 등의 비유와 감각을 통해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소재를 참신함과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경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읽는 이에게 순수하고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고타마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는 연기의 이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직 세상에 내어놓지 않은 리헌석 시인의 보석 같은 시조 작품을 먼저 읽으며 그와 동행했던 40년을 뒤돌아보니 인연이 참으로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84년 3월 대전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대전에 와 보니 리헌석 시인이 ‘오늘의문학회’ 회장을 맡아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와의 인연이 이렇게 끈질길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몸도 마음도 추울 때 처음으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 친구로 붙어 다녔지만, 졸업하면서 연락이 끊어졌을 때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권유로 《문학사랑》의 전신인 《오늘의 문학》에 가입하여 30년 가까이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 그가 목숨만큼 소중하게 생각했던 친구들의 배반으로 괴로워했을 때도 그의 곁에 있었고, 한국 문협 대전 지회장, 예술단체 회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할 때도 묵묵히 그의 곁에 있었다. 큰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늘 그의 편이었다. 그는 항시 그만큼 나에게 믿음을 주었으며, 배울 것이 많은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참으로 열정적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결정된 일엔 절대 망설이며 우물쭈물 하는 법이 없었다. 옆에서 보기에 불가능한 일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두 성취되었다. 또한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상대편이 배반하기 전엔 절대로 등 돌리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믿기 시작하면 끝까지 믿어주고, 한 번 도움을 주면 끝까지 보답하는 마음, 엄격함 속에 따뜻한 정을 감추고 세상을 위해 늘 기도하는 마음, 어찌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대자연의 마음이 아닐까!
그대를 마주하면
마음 또한 정갈하다.
어두워진 하늘을 기도로 씻어내며
깨끗한
세상을 바라
손을 모으는 새벽길.
―「별에게 1」 전문
이 작품에서 우리는 대자연인 하늘 앞에서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 앞에 서면 마음이 정갈해지고, 그 정갈한 마음으로 어둠을 씻어내어, 깨끗한 세상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 이것이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정신이다. 시가 바로 작가의 시정신의 분출이라면, 작가의 삶이 자연 앞에 얼마나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리헌석 시인의 자연에 대한 진지함은 때때로 그리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유소년 시절 건너다니던 나루터나 돌탑이 서 있는 고갯길, 물결 찰랑이는 호숫가에 그의 그리움이 있다.
갈대 잎 서걱이며
몸을 푸는 그리움
메밀꽃 수줍음도
광풍(狂風)에 쓸려가고
떨리는 여울을 건너
몰아치는 원초(原初)여
평생 동안 꿈꾸던
영혼의 동정(童貞)으로
물비늘 선율 위에
열망(熱望)의 날개 펴면
이르른 안식(安息)의 샘가
무지개로 돋는 정
―「디디울나루 만추(晩秋)」 전문
늘 돌아갈 푸근한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을 만나더라도 쉽게 주저앉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시의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어떤 극한상황을 만나더라도 시의 샘이 고갈되는 일이 없다. 리헌석 시인은 벌써 아홉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열 번째 시조집을 발간하려 하고 있다. 그의 이 왕성한 시작활동의 바탕에는 유년기의 꿈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는 그의 시의 고향인 ‘디디울나루’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특히 디디울나루를 소재로 해서 쓴 작품들이 많은데 한결같이 그 시들엔 사랑과 그리움의 빛깔이 가득 칠해져 있다.
내가 아는 리헌석 시인은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강해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아파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다. 자신이 정한 길은 한 치의 어김없이 걸어가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해 다친 사람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연민의 날개를 접지 않는 사람이다. 아직도 그의 시엔 눈부신 서정이 넘쳐나고 있는데, 비록 사공은 사라졌지만 그의 의식 속에 디디울나루의 강물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뜨거운 가슴마저
섬으로 띄워놓고
빛살 고운 바람을
마중하러
길을 찾네.
혼절한
사랑을 깨우쳐
천 년 사는 저 별빛
―「섬바위 연가」 전문
나의 문학적 행로에서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이 있다면 리헌석 시인과 더불어 《오늘의문학》에서 문학 활동을 하던 젊은 시절의 그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합평회가 끝나면 우리는 꼭 막걸리 집에 들러 술을 마시며 문학적 담론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 회원들은 언제나 2차를 가서 이야기 거리를 만들곤 했는데, 젊었던 그때는 미당도 목월도 우리의 혀끝에서 완전히 떡이 되곤 했다.
1년에 한두 차례 세미나를 갔는데, 대천에서의 세미나가 기억에 가장 남는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친교의 시간에 술 취한 우리는 백사장에 나와 광란의 밤을 보냈다. 그때 백사장 건너편 섬이 너무도 신비롭게 다가왔는데 앞 작품을 읽으며 왜 갑자기 그 섬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 나타난 ‘섬바위’는 어쩌면 실제의 바위가 아니라 작자의 의식이 그려놓은 가공의 섬바위다. 그 섬바위는 자그마하지만 거느린 이야기는 작은 거인처럼 거대하다.
뜨거운 열정이 뭉쳐 무너진 사랑을 일깨우고, 등대처럼 그 사랑을 천 년까지 끌고 가는 힘, 이 짧은 평시조 한 수에서 우리는 위대한 낭만과 서정을 발견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각과 부딪칠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이어령은 말하였다. 일찍이 리헌석 시인은 문학적 삶이냐 일상적 삶이냐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섰을 때 과감하게 문학적 삶을 선택하였다. 교사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가보지 않은 고갯길 같은 험준한 미지의 길을 선택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미련을 접고 문학에 정진하는 삶을 선택하였다. 교직을 그만두고 경험이 전혀 없었던 출판사를 차렸다. 그때는 ‘오늘의문학회’라는 모임에서 ‘나’와 ‘그’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을 때였지만, 심사숙고해 결정하라는 충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벌써 문학에 전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인들 모두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문학잡지 《문학사랑》을 훌륭하게 성장시켜 대전, 충남에서 문학서적을 가장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로 만들어 놓았다. 내가 아직도 바쁘다는 핑계로 두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을 때 그는 정력 좋게도 열세 권의 저서를 출산하였다.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바르게 결정을 내린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나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한 번 매달리면 밤낮을 잊는 그의 열정이 오늘의 성공을 가져오는 가장 큰 밑바탕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또한 정의감과 역사의식도 투철해서 민중에 대한 연민의 마음도 잊지 않고 있었는데, 《문학사랑》 회원들 중에서도 약하고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잘 살펴 도와주었다. 1년에 한두 번 있던 세미나 날이면 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포에서도 부산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심지어는 외국에서까지 달려와 세미나는 늘 흥청거렸다.
산처럼 늘 묵묵한 그의 삶의 모습 속엔 바른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너울로 헤살 짓는
가슴 아픈 꽃샘바람
농병들의 원혼이 꽃불로 살아나서, 휘도는 바람 속에 개혁도 날아갔다. 욕심을 더한 일로 아름답던 꿈이 부러졌다. 얼음 같던 세월도 금세 녹아내렸다.
천심(天心)을 찾아 헤매도
빈 하늘에 빈 걸음
세상 향해 터진 분노
도지는 가슴앓이
맑은 하늘 산줄기 고운 물빛을 지우며, 광란하듯 일어서는 모래바람이 있었다. 모래를 날리며 여린 떡잎 휘갈기고, 다시금 휘몰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순간을 몸부림쳐서
영겁으로 거듭나고.
―「우금치에서」 전문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해서 쓴 사설시조이다.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濫刑)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들불처럼 힘차게 남쪽 산하를 불태우다가 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 이 우금치는 농민들의 한과 피울음이 엉겨있는 곳이다.
시인은 이 역사의 현장 우금치에서 모래바람처럼 휘몰아쳤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농민들의 염원을 떠올리며, 그 원혼들이 꽃불로 살아나서 몸부림치며 역사 속에서 영겁으로 살아감을 발견한다. 바른 것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바른 것은 비록 소멸하더라도 천년을 살아가는 힘이 있음을 깨달았기에 감동을 준다.
[가]
꽃 피듯 잎이 지듯
돌에 담긴 백제 하늘
말을 타고 내달리던
갈대밭이 보이고
깃발에 나부끼던 역사
거친 함성도 들린다.
―「백제탑 앞에서」전문
[나]
미명(未明)의 안개 속에
길을 내는 그리움
복숭아 꽃 향으로
온밤 내 강을 건너
무령왕, 잠 속까지 찾아
환생하는 덧 여울.
―「무령왕릉에서」일부
[다]
천년 건너 깃발을
오늘 다시 찾습니다.
세월 멀리 새겨진 겨레의 웅지를 다시 새깁니다. 뜻을 일구신 겨레의 강역을 다시 살핍니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마당에 세운 빗돌 앞에서, 우리의 진취적 기상을 다시 읽습니다.
새롭게 세운 빗돌에
역사 청청 담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곁에서」일부
[가]는 백제탑 앞에서 말을 타고 너른 갈대밭을 내달리던 백제(百濟) 적 조상들의 힘찬 모습을 상상하는 시이고, [나] 또한 무령왕능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왕과 왕비의 못다 한 사랑을 아쉬워하고 있다. [다]는 ‘재단법인 계룡장학재단’ 이인구 이사장의 지원으로 중국 ‘지린(吉林)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비석을 독립기념관 마당에 세운 뒤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이다. 시인은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이규보는 그의 『논시』에서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씹을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뜻만 서고 말이 원활치 못하면/ 껄끄러워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요즈음 시인들은 너무 표현의 아름다움만 추구하다 뜻에 소홀하기 쉬운데, 리헌석 시인은 이렇게 깊은 역사의식을 기발한 발상과 표현방식을 취해 참으로 감동 깊게 꾸며 놓았다. 이는 그의 삶의 한 발이 우국(憂國)의 중심을 딛고 있으며, 옛 성현의 시 작법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는 처음 소년으로 만났는데, 어느새 세월은 그와 나의 머리를 하얗게 물들여 놓았다. 거울을 보면 흰 것만으로도 모자라 머리카락이 빠진 정수리가 겨울의 숲처럼 황량하다. 언젠가 리헌석 시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책상 유리판에 내 사진을 끼워놓은 것을 보고 약이 바짝 올랐던 일이 있다. 《문학사랑》축제 때 시상을 하는 사진이었는데 인사를 하느라고 허리를 굽혔을 때 전깃불에 얼비친 머리가 완전히 대머리처럼 찍힌 것이었다.
“엄기창 시인도 머리가 장난 아니게 빠졌는데…….” 하며 껄껄 웃는 그 모습이 꼭 내 머리 빠진 것을 보고 즐기는 것 같아 혈압이 올랐던 적이 있다.
우리도 벌써 회갑이다. 육체의 나이는 벌써 가을인데 그의 정신은 아직도 청춘이다. 불타는 도전 정신으로 시조 쓰기에 몰두하더니 새 시조집을 내놓는다. 미리 준 시조를 읽으며 그의 살아온 모습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향기 있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회오리바람처럼 질주하다가 호수처럼 잔잔해지기도 하고, 큰 산맥처럼 모든 것을 품었다가 작은 도랑물을 보내서 목마른 것을 축여주기도 하고, 유년의 통학 길에 만났던 자연들이 그의 몸으로 들어와서 그도 어느새 자연이 되어버렸다. 자연에 조응된 그의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시조를 읽는 동안은 참으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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