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엄기창론에 해당되는 글 20건
- 2023.01.30 싱싱한 바다로의 항해를 꿈꾸는 연가-제5시집 해설
- 2021.05.29 여성 편향적 삶의 풍경
- 2021.03.04 시에 꽂히면 삶에 꽃이 핀다(릴레이/나의 시 쓰기 ) (4)
- 2020.09.01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시정신
- 2020.05.23 다시, 상징
- 2018.03.31 잃어버린 ‘자연’을 찾아 배회하는 상상력
- 2018.03.15 한국 명시조 감상 - 엄기창 편
- 2017.11.23 절제와 스밈의 시학 - 1시집 서울의 천둥 해설
- 2017.11.22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2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 해설
- 2017.10.27 엄기창 시인의 네번째 시집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를 읽고
글
<엄기창 시집 해설>
싱싱한 바다로의 항해를 꿈꾸는 연가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
지구는 하나다. 이 명제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단 하나인 지구가 파괴되거나 훼손당해 멸망한다면 다른 대책이 있는가? 소극적 대책으로는 지구 환경을 보존하며 오래도록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적극적 대책으로는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진 다른 혹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니면 지구와 동일한 조건의 혹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인 지구를 둘 이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책은 현재의 지구를 인류의 생존에 적절한 환경으로 유지 보존하는 것이다.
인류 생존의 가장 궁극적인 토대는 지구이다. 지구의 위기는 사실 다양한 상상력의 소산으로 제기된 바 있다. 가령 지구촌의 다양한 재난을 소재로 다룬 재난영화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기상이변을 다룬 「설국열차」, 지진해일을 소재로 한 「해운대」, 땅 꺼짐을 다룬 「터널」, 독가스의 폐해를 조명한 「엑시트」에서 지구의 위기를 제시하고 있다. 해외의 경우, 지구 온난화를 다룬 「투모로우」, 대지진과 화산폭발로 인한 해일의 충격을 소재로 한 「2012」, 기후 변화의 재해를 다룬 「페펙트 스톰」, 「지오스톰」 등이다. 이 영화들은 모두 현실에서 일어난 혹은 미래에 일어날 지구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지구의 멸망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이유는 금세기에 대두된 기후 변화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우리는 현실에서 다양한 기후 변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기후 변화의 주된 원인으로는 탄소 배출이 적시된다. 과학 문명의 발달과 산업화로 인한 석유와 석탄의 과다 사용이 탄소 배출을 주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기상 이변이 야기되고 있다. 기후 변화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는 그 대책으로 탄소 배출량을 감소하기로 기후협약을 공표하였다.
그럼에도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사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이 명제에 따르면 지구라는 혹성도 언젠가는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종말에 대한 대책은 우선 당장은 기후 변화로 인한 재해를 방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생태주의와 자연주의가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정립될 필요가 있다. 자연 환경 보호를 위하여 인류 모두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실생활에서의 실천력을 고양해야 할 것이다. 그 일상에서의 구체적 방안은 상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제시된 바 있다.
지구의 환경 중에서 바다의 오염과 훼손 문제 또한 심각하다. 태평양에 쓰레기로 만들어진 섬이 생겨났다는 뉴스는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우리나라 해변에서 목도되는 바다 오염 현상이 일상적인 현실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바다에 버려지는 쓰레기 혹은 유류 누출로 인한 환경 훼손의 뉴스도 반복되고 있다. 코에 스티로폼 빨대가 꽂힌 채 유영하는 바다거북이의 영상은 참말로 충격적이다. 또한 바닷물고기가 미세플라스틱을 플랑크톤으로 착각해 먹이 활동을 하여 생선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는 상황이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바다의 시간에서 “바다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다”고 말한다. 그는 바다를 전 인류의 공공재산으로 오랫동안 활용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폐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동식물의 어종 감소, 기온 상승으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 부족한 식수를 대체하기 위한 바닷물을 활용한 담수 개발, 탄소 배출량 감소를 위한 해양 광물 자원의 무분별한 개발 제한 등 인류의 대량절멸을 막기 위한 국제 사회의 협력이 긴급히 필요함을 강조한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 분포를 차지하고 있다. 인류는 이 바다를 통해 어업, 수산업, 해운업, 무역, 교통 등의 혜택을 입어 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고래로부터 동서남해를 통해 풍윤한 삶을 구가해 왔다. 그런데 산업과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바다가 지닌 순수 원형성이 손상 파괴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요즘 바다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각종 폐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인한 바다의 오염과 훼손의 문제는 지구의 위기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테마가 되었다.
엄기창 시인의 이번 시집 바다와 함께 춤을은 오로지 “바다”라는 시적 대상만을 집중적으로 끈질기게 형상화 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대상만을 집요하게 성찰하고 내면화 하는 작업은 매우 보기 드문 기획이다. 특히 시집을 4부로 편집한 의도 역시 매우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부는 바다의 현실 즉 오염과 훼손된 상황을 사실적 톤으로 제시하고 있다. 2부는 파괴된 바다 현실에 대한 대응 즉 보전과 개선 방안을 주창하고 있다. 3부는 개선된 바다에 대한 긍정적 전망과 희망찬 바다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4부는 기행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바다나 항구 등에 대한 기행의 기억 혹은 추억을 서정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1-3부는 바다의 환경오염과 훼손 현황, 바다의 생태 보전에 대한 현실적 대책, 그리고 환경 생태의 회복에 대한 미래의 긍정적 비전을 마치 르포 형식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바다 생태 보전에 대한 인과관계와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바다의 환경 문제에 대한 체험적 보고를 서정 양식을 빌어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4부는 바다에 대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 서정을 극대화시켜 노래하고 있다. 서정시의 관점에서 4부에 편재된 작품들의 완결성이 상대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하여 4부에는 서정적 감동을 담보하는 가편들이 집중되어 있다.
엄기창 시인은 시집의 1부에 “바다의 아픔”으로 소제목을 붙일 만큼 바다가 당면한 오염과 훼손의 문제를 다양하게 조망한다. 그는 구체적으로 적조, 해양쓰레기, 기름유출로 인한 해양오염, 온실가스, 방사능 유출, 공장의 폐수 등을 시적 소재로 차용한다. 그는 서정 양식을 통해 바다의 현실을 안타까운 어조로 고발하는 자세를 보인다. 그가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한 바다의 훼손 상황을 보고하는 어법은 구체성, 직접성, 현장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는다. 나아가 바다 환경 생태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하는 목적성도 아울러 성취한다.
바다는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
세상의 눈물 나는 일들은
모두 바다에 모여 있다.
작년에 아프리카에서 반란군에 살해당한
어미의 슬픔과
플라스틱 병을 삼키고 허연 배를 드러낸
고래의 눈물이
소용돌이로 울고 있다.
더 이상 버리지 마라.
아침 해를 띄워 올리는
저 바다의 싱싱한 웃음 뒤에
한 그루씩 죽어가는
산호의 비명이 포말泡沫로 부서지고 있느니.
바다는 스스로 늘 제 몸을 닦고 있지만
이미 흠뻑 젖어
더 이상 젖을 곳이 없다.
세상이 버리는 아픔
모두 꽃으로 피울 수는 없다.
「슬픈 바다」 전문
이 시는 제목 「슬픈 바다」에서부터 바다의 부정적 현실에 대해 느끼는 슬픔의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예컨대 화자는 바다가 처한 환경 생태의 위기 상황에 대해 슬픔의 정서로 반응하고 있다. 특히 객체 ‘바다’와 주체인 ‘화자’의 현실 인식이 슬픔의 정서로 합일되고 있는 점이 그 강도를 더욱 고양시키고 있다. 먼저 “바다는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은 바다의 극한 상황을 드러내는 역설이다. 여기서 ‘젖음’은 이미 충분히 젖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젖을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뒤에 나오는 시적 맥락을 고려하면 ‘젖음’은 정화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어서 바다의 무한 포용력에 대한 사례들이 중첩되어 제시된다. 바다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픈 일들을 포괄하는 웅숭깊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가령 아프리카 각 나라의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내란에서 가족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바다는 포용한다. 또한 바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플라스틱 병을 흡입하여 죽은 “고래의 눈물” 역시 바다는 끌어 안는다. 이처럼 바다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각종 비극적 상황을 보며 “소용돌이”치는 슬픔을 감내하고 있다.
에 화자는 “더 이상 버리지 마라”고 경고한다. 물론 생략된 목적어는 각종 폐기물, 오물, 환경폐수 등으로 추론 가능하다. 인간이 버린 각종 생활 오염물질로 인하여 훼손된 “산호의 비명”이 들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바다의 “싱싱한 웃음”을 소멸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바다는 근원적으로 지구를 정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포용한계를 벗어나 더 이상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다. 바다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이 버리는 아픔/ 모두 꽃으로 피울 수는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이 시는 바다 환경의 오염과 훼손으로 인하여 자정능력이 발휘될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을 경고하고 있다.
방조제들이 쇠사슬처럼
바다의 자유를 결박結縛하고 있다.
폐경기의 달거리 빛으로
바다는 노을을 베고 잠들어 있다.
방조제 밖의 물들은 까치발 서서
안쪽의 물들을 보며
격려의 박수를 치고 있지만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소망들이
조금씩 수척해지며
미라가 된 바다.
숨죽은 물결 소리 깨어진 칼날이 되어
새만금의 일몰日沒을 찢고 있었다.
「미라가 된 바다」 전문
이 시는 새만금방조제 구축으로 인해 자연스런 해류의 유통이 차단됨으로써 야기된 바다 생태의 파괴 문제를 형상화 하고 있다. 제목 “미라가 된 바다”가 함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방조제로 인해 바다는 생명성이 고갈된 상황으로 인지된다. 방조제는 “쇠사슬”로 은유되어 “바다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작동한다. 이러한 사유의 이면에는 자연주의와 생태주의의 관념이 바탕하고 있다.
나아가 바다는 생식능력을 상실한 “폐경기”의 여성으로 은유된다. 바다의 현실적 시간 역시 “노을”이 진 이후 밤이다. 바다는 잠든 상태로써 활력과 생기를 상실한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방조제 밖의 자유로운 해수들은 방조제 안에 갇힌 해수를 향해 자유로운 유통을 유도하지만 실패에 그치고 만다. 자유로운 해수 유통을 꿈꾸는 환경 생태의 “소망”/본질은 결국 “미라”에 직면한다. 이 시는 방조제 건설로 야기된 바다의 자유로운 생태 환경의 훼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바다의 비명이 무좀균처럼 발바닥 피부 사이로 스며든다. 멸치도 아파하고, 정어리도 아파하고, 상어도 고래도 아파한다. 바다는 작은 것도 큰 것도 온통 아파하는 것들뿐이다.
아시아의 강들은 오줌발도 걸레다. 쏟아내는 목청마다 모두 욕설뿐이다. 그들은 왜 공장마다 문을 강 쪽으로 열어놓았을까. 문마다 왜 그렇게 쌩욕들을 쏟아 부을까. 강들은 죽고, 죽은 강을 마시는 바다는 배가 아프다. 펄펄 뛰다 죽을 만큼 배가 아프다.
태평양 아열대 환류는 쓰레기로 섬을 만든다. 일조 팔천억 개의 플라스틱이 먹이처럼 떠돌고 있다. 배고픈 물고기들 덥석 먹어버리면 소화도 되지 않고, 뱉어낼 수도 없고. 바다엔 병원이 없다. 절대로 통증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팔라우의 산호는 지금도 죽고 있다. 온난화溫暖化로 육지는 물로 덮여가고, 빙산은 녹아서 북극곰은 갈 곳이 없다. 폐수로, 쓰레기로, 온난화로 펄펄 열이 끓는 바다
바다가 아프면 이제 사람도 아프다.
「연민憐愍」 전문
이 시는 환경의 오염과 훼손으로 인해 질병에 걸린 바다의 환부를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제시한다. 이 시의 상상력은 바다를 질병에 걸린 유기체로 은유하고 있다. 화자는 질환에 시달리는 바다를 “연민”의 정서로 조망한다. 먼저 바다는 “무좀”의 질병에 감염된다. 그리하여 바다의 가족인 “멸치, 정어리, 상어, 고래”도 통증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3연에서는 바다가 질환에 걸린 원인이 제시된다. 바다의 질병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다로 유입되는 강의 오염 때문이다. 산업화의 발달로 인해 각종 공장에서 배출하는 폐수가 강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강으로 유입되는 폐수와 환경오염 물질은 “걸레, 욕설, 쌩욕” 등으로 환치되고 있다. 그리하여 바다는 “펄펄 뛰다 죽을 만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4연은 태평양에 떠도는 “쓰레기 섬”을 주목한다. 인류가 쓰고 버린 플라스틱은 해류를 따라 떠다니다가 북태평양 환류 해역에 타원형 꼴의 거대한 섬을 만든다. 이 쓰레기 섬은 플라스틱 제품을 일상에서 쓰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이 완전 분해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린다. 플라스틱은 바다에 떠다니면서 많은 바다 생물의 몸에 들어가고 결국은 생선을 통해 우리가 섭취하게 된다. 바다 위를 떠도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바다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식생활을 통해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5연은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 온난화 현상을 적시하고 있다. 과도한 탄소 배출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올라서 북극과 남극의 빙산이 녹는다. 이로 인해 바다의 수면이 상승할 뿐 아니라 각종 해일과 태풍이 발생하여 재난 상황을 초래한다. 구체적으로 남태평양의 “산호”와 북극의 “북극곰”은 생존의 위기를 맞는다. 결국 지구는 “폐수, 쓰레기, 온난화”로 인해 질병에 걸린 상태에 직면한다. 이는 곧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인이 된다. 이 시는 바다의 질환을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보고서에 다름 아니다.
시집 1부는 바다가 처한 환경 생태 위기의 상황을 구체적인 현장의 사례를 들어 자세하게 진단하고 있다. 이어서 2부는 질환에 걸린 바다를 치료할 방안과 대책을 형상화 하고 있다. 예컨대 1부가 진찰이라면 2부는 처방과 치료 행위로 비유할 수 있다. 즉 환경 생태 위기에 빠진 바다를 치료하여 긍정적 미래를 지향하려는 의지적 면모를 드러낸다. 시인은 그 구체적 실천 행위로 바다의 환경 생태 위기를 시 쓰기 작업을 통해 경고하거나, 바다를 치유하는 구체적 사례를 시화하거나, 바다의 본질적 기능과 인류사적 가치를 제고한다.
고희古稀 넘어 바다의 방언方言도 술술 들리니
사는 일에 걱정이 더 많아졌다.
바다의 큰 병 앓는 신음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나 혼자 쩔쩔매며 약 한 첩 못쓰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래 바다를 사랑하는 게 약방문藥方文이다.
시詩로 외쳐서 세상을 바꿔보자 하고
처방處方을 내렸다.
바다는 어린애다.
다정하게 손잡아 주면 와락 안겨오다가도
조금만 섭섭해지면 토라져서 몇 날 며칠이고
태풍을 몰고 온다.
약이 쓰면 토해버리고 정을 떼면 아파한다.
가슴을 한없이 따뜻하게 데워놓자.
통통 튀지 못하도록 꼬옥 안아주자.
망팔望八의 길목에서 시詩로 처방전處方篆을 쓴다.
「처방전處方篆을 쓰다」 전문
이 시는 이 시집의 기획 의도를 총론적 차원에서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시인은 바다가 처한 생태 환경의 위기를 시 쓰기 작업을 통해 공론화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다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우선 처방전을 쓰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 쓰기는 처방전을 쓰는 것과 동일시된다. 처방전이 제시하는 구체적 치료 방안은 ‘바다 사랑’이라는 원론적, 본질적 지향을 보인다.
1연은 바다의 환경 생태 위기를 사랑을 통해 벗어나 보려는 발상의 과정을 소개한다. 바다 사랑의 구체적 실천의 방안은 시 쓰기 작업이다. 화자는 작시 활동을 통해 바다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노년에 이르러 “사는 일”/삶에 대해 고민과 걱정이 많아졌음을 고백한다. 그 고민 중 하나가 바다의 생태 환경의 훼손 문제이다. 그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직면한 바다의 위기를 보며 “안절부절” “쩔쩔매며” 방황하던 화자는 바다를 사랑하자는 목적의 시 쓰기 작업을 착안한다.
2연은 바다 사랑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상한다. 예컨대 “바다는 어린애다”는 은유를 통해 바다의 순수성을 표출하고, 나아가 무한한 애정을 주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다. 바다의 속성을 어린애의 성품으로 구체화 하는 것이다. 바다는 인류의 무한 애정을 받으면 순수하고 착한 성정으로 보답하지만, 애정을 주지 않으면 토라져서 “태풍을 몰고 오거나”, “토해버리고”, “아파한다.” 하므로 바다가 “통통 튀지 못하도록”, 즉 바다가 재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아낌없이 애정을 부여하자고 권유한다. 이러한 화자의 주장은 곧 바다의 환경 생태 위기를 벗어나는 시 쓰기 처방전이다.
갯바위들이 기름을 뒤집어쓴 채
박제剝製처럼 정지해 있다.
끓여낸 해물 탕 속의 식재료들처럼
게도 조개도 갈매기마저
검은 타르의 국물 속에 건더기로 떠있다.
방제복을 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에
장화를 신은 채
사람들은 졸도해있는 바다 곁으로 다가섰다.
끊어진 빨랫줄처럼 해안선이
바람에 출렁거릴 때
사람들은 바다의 절망을 퍼내 자루에 담고
한숨의 찌꺼기를 긁어내었다.
수평선이 푸르게 일어설 때까지
기도祈禱의 걸레로
바다를 닦고 또 닦아내었다.
먼 바다의 바람도 잊지 않고 달려와
새 숨을 나눠줬다.
말기 암 노인처럼 누워있던 바다가
저녁놀에 기대어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바다를 닦아내다」 전문
이 시는 기름 유출로 인해 오염된 바다 환경을 원상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요즘 유조선의 사고로 인한 기름 유출 환경오염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따금 지구의 여러 바다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충청남도 태안 앞바다에서 일어난 유조선의 기름 유출 사고가 떠오른다. 이 기름 유출 사고는 서남해안의 어장, 양식장, 해수욕장을 오염시켜 큰 피해를 야기했다. 당시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찾아와 기름 제거 작업을 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시는 태안 앞바다의 기름 제거 작업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유조선에서 유출된 기름으로 뒤덮인 서해안 바다의 광경이 사실적으로 제시된다. “갯바위”는 생명성이 소멸된 “박제”처럼 활력을 잃고 누워 있다. 검은 기름으로 범벅된 바다에는 “게, 조개, 갈매기”가 죽어 부유하고 있다. 비극적인 환경오염의 현장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기름 제거 작업을 위해 완전 무장을 한 사람들은 “졸도해 있는 바다”를 회생시키기 위해 분투노력한다. 바다는 “끊어진 빨랫줄”처럼 불구의 상황에 놓여 있다.
작업자들은 “바다의 절망”과 “한숨의 찌꺼기”를 제거해내고 있다. 바다를 되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기도의 걸레”로 끊임없이 기름을 닦아낸다. 이와 같은 인간의 노력에 공감한 “먼 바다의 바람”도 자연의 바다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동참한다. 처절한 사투 끝에 “말기 암 노인처럼 누워있던 바다”는 마침내 “봄꽃”으로 소생하게 된다. 이 시는 훼손된 바다를 싱싱한 원래의 바다로 복구하려는 희망의 작업을 실감나게 묘사한 작품이다.
바다 환경 생태의 오염과 훼손 현장을 안타까운 태도로 제시하고, 바다의 긍정적 미래를 위해 환경을 보전하는 노력을 주장한 다음, 3부에서는 바다와 더불어 사는 희망찬 삶의 풍경을 긍정적 시선으로 조망한다. 이 3부는 바다로 떠나는 항해의 설렘과 건강한 삶의 희망이 편재되어 있다. 그리하여 바다는 미래로 나아갈 긍정적 삶의 공간임과 동시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상적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일출日出을 예인曳引하러 떠났던 배들이
해당화 꽃밭처럼
눈부신 아침을 피워놓으면
부산항은
새벽 닭울음소리로 피곤을 털고 일어나
오륙도 너머 수평선으로 출항出港의 깃발을 단다.
닻을 올리고 뱃고동소리 항구를 울리면
이제 나는 바다의 사나이
동백섬에 봄이 왔다고
동백꽃 향기 나를 부르러 와도
손을 흔들어야 한다.
에메랄드빛 꿈을 잡으러 떠나야 한다.
바다를 품는 사람이 세계를 이끄는
신 해양시대
해양 르네상스를 이 손으로 꽃피우겠다.
항구야 잡지 마라.
파고波高 험한 길이라고 멈출 수 있나.
불끈 일어선 젊음이 시들기 전에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한 바퀴 돌아
바다의 주인이 되어 돌아오겠다.
「출항出港의 아침」 전문
이 시는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수부의 시선으로 삶의 강인한 의지와 희망을 역동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궁극적으로 바다에 대한 진취적인 기상을 발휘하여 “해양 르네상스”를 꿈꾸는 태도를 보인다. 자연의 이법인 일출조차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예인”하여 “아침”을 일으킨다. 자연의 시간인 “아침”은 “해당화 꽃밭”이라는 긍정의 밝은 공간으로 은유된다. 또한 밝아오는 아침의 “부산항”은 바다로 출항하는 배들이 부산하게 삶의 깃발을 올리고 있다. 배에 승선한 화자는 지상의 “동백꽃”의 유혹도 물리치고 출항을 감행한다.
바다로 나아가는 이유는 “에메랄드빛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 꿈은 “신 해양시대”를 구가하는 것이다. 화자는 “해양 르네상스”를 성취하기 위한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다. 비록 해양 강국을 실현하는 도정에 “파고 험한 길”이 장애가 될지라도 극복하겠다는 다짐도 피력한다. “젊음”이 사라지기 전에 “유럽, 아프리카”의 원정을 충실히 수행하고 “바다의 주인”이 되겠다는 진취적인 의지를 표명한다. 이 시는 바다를 긍정적인 삶의 장소이자 미래의 희망을 실현할 공간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바다가 그리울 땐
조개 집을 짓고 살리라.
내 방 안엔
파돗소리를 살게 하고
지붕은
갈매기 노래로 덮어
하루 종일 마음의 돌담 안에서
바다가 뛰어놀게 하리라.
텃밭에는
갯메꽃 몇 포기 웃음 짓게 하고
황혼이 피어날 때쯤
당신이 오면
가장 아끼던 술병을 열어
바다의 노래를 안주로
씹어가면서
바다에 취해 살리라.
「조개 집」 전문
이 시 역시 바다와 더불어 사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의 이상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 제시된 바다의 풍경은 몽환적인 동시적 분위기를 환기한다. 바닷가에 “조개 집”을 짓고 안빈낙도하는 삶은 바다의 순수한 자연 속성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삶은 먼저 “조개 집”을 건축하는 시도로 드러난다. 조개의 삶의 공간은 바다이다. 따라서 ‘조개 집’은 바다의 환경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화자는 바다 자체를 매우 긍정적인 특성으로 인지한다.
화자는 “조개 집”을 짓고 사는 몽환적인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그는 항상 “파돗소리”가 들리는 거주환경을 상상한다. 나아가 집의 외부 공간에 “갈매기 노래”가 들리는 친자연적 상황을 꿈꾼다. 화자는 온종일 순수한 바다와 더불어 평화롭고 안락하게 사는 자연의 삶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또한 울안 텃밭에 “갯메꽃”을 심어 자연과 동화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한다. 외롭고 맑은 자연의 삶을 이루다 이따금 친구가 찾아오면 더불어 바다의 순수성에 동화되리라는 희망도 지닌다. 이 시는 순수한 바다와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소박한 삶을 맑고 투명한 시심으로 읊조리고 있다.
4부에 편집된 작품들은 항해 중에 만나는 싱그러운 바다의 풍광, 아름다운 해변의 평화로운 정취, 해안도시에서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기쁨, 바닷가 여행에서 느끼는 신선한 감흥, 기행지에서 만나는 그리움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 순수서정 등을 유려하게 형상화 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긍정적 세계관과 낙관적 가치관에 힘입어 소소하고 순박한 삶에 대한 희열과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어찌 보면 1부에서 보여준 오염되고 훼손된 바다의 부정적 현실이 거세되고, 희망찬 미래의 바다와 더불어 사는 꿈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 세상 한 바퀴 돌아
사나이 할 일 다 마치고 돌아와선
그래도 바다가 못 잊어 하면
조선소造船所가 환히 보이는 거제도 바닷가에
작은 집 짓고
바다랑 도란도란 얘기나 하며 살겠네.
심심하면 가끔 조선소造船所에 가서
큰 배 만드는 거나 보면서
그 배 커다란 몸을 이끌고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이나 보면서
낮은 돌담에 장미 대신 해당화를 올리고
바다랑 지난 세월 사랑 얘기나 하며 살겠네.
저녁에 인생처럼 황혼이 깔리는
바다에 취해
막걸리 몇 잔 마시고 바다를 살며시 안아주면
아, 어린 곤충처럼
파르르 몸을 떠는 바다
내 몸 깊은 곳에 알을 낳는 바다.
먼 수평선에 운명처럼 달이 떠오르면
은빛 물결이 되리라
바다와 한몸이 되어 춤을 추리라.
아픔도 서러움도 달빛으로 씻어
온 바다 흥타령으로 푸르게 일어서게
플라멩코 춤보다 더 격정激情적인 춤을 추리라.
「바다와 함께 춤을」 전문
이 시집의 표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마지막 쪽에 실려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견고하고 치밀한 기획은 이 시집의 독창성이자 미덕이다. 바다 생태의 훼손 현실에서 시작한 다음, 개선과 보전의 의지를 다루고, 복구와 개선을 통해 원상회복된 바다의 기쁨을 노래한 뒤, 마지막 작품은 바다와 혼연일체가 된 기쁨과 희열을 구가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시인이 꿈꾸고 소망하는 이상적인 바다와의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기획은 주도면밀한 기승전결의 구조로 시집의 편집을 의도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시의 제목 “바다와 함께 춤을”이 암시하는 바는 바다와 함께 춤추듯이 행복하고 초월적인 삶을 이루자는 바람이다. 춤은 현실의 슬픔이나 분노를 망각하는 기쁨의 육체행위이다. 달리 말하면 춤은 현실적 삶의 조건을 초월하여 새로운 삶을 성취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바다와 더불어 춤추듯이 사는 인생을 통해 자유와 열락과 행복을 추구하리라 다짐하고 있다.
1연은 수부로 설정된 화자가 세계를 떠돌며 배 타는 일을 마친 뒤의 홀가분한 삶의 자세를 보인다. 그는 여전히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거제도 바닷가”에 거주하며 바다와 더불어 사는 꿈을 드러낸다. 2연에서 화자는 항해를 하는 대신 조선소에서 배 건조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출항하는 배를 응시하며 한가로운 은퇴의 삶을 꿈꾼다. 모두 배 타는 일에서 은퇴한 이후 안분지족하는 평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자세를 드러낸다.
3연은 은퇴 이후 늘그막에 바닷가에서 사는 소박하고 조촐한 삶의 정취를 표출한다. 그는 더 이상 물질적, 사회적 욕망 없이 바다의 자연 순리에 순응하며 단순하고 담백한 생활을 살리라 다짐한다. 4연 역시 바다와 혼연일체가 되어 사는 행복하고 완전무결한 삶을 꿈꾼다. 화자와 바다는 불가분리의 동일화 상태로 “한몸”이 된다. 화자는 현실의 “아픔도 서러움도” 망각하게 하는 열락의 “격정적인 춤”을 추며 완벽하게 이상적인 바닷가의 삶을 희구한다. 이 시는 바다와 일체화된 삶을 추구하는 소망과 바람이 서정적으로 순수하게 표상된 작품이다.
바다의 탁본拓本을 뜨러
삼척엘 갔네.
그믐밤의 어둠을 짙게 칠했다가
초하루 아침의 맑은 햇살로 벗겨내면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
삼척 사람들 다정한 미소가
해국海菊으로 피어있네.
태백을 넘어올 때 서둘러
손 흔들던 가을이
죽서루와 어깨동무로
빨갛게 타고 있는 곳
찍혀 나온 바다엔
좋아하면 모두 다 주는
삼척 사나이의 호탕한 웃음이
산호초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삼척에 가면」 전문
이 시는 바닷가 도시인 삼척에서 느낀 정회를 서정적으로 표상한 기행시이다. 여기에서도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삶의 풍경을 매우 긍정적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즉 바닷가 마을인 삼척은 행복하고 안락한 마을공간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아마도 도시에 사는 화자는 “바다의 탁본”을 뜨러 자유와 생기가 넘치는 항구도시를 방문한다. 그가 삼척에 가는 이유는 “그믐밤의 어둠”/현실의 시련과 고통을 제거해주는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를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삼척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미를 맛보기 위한 것도 이유가 된다.
화자가 방문한 바닷가 마을 삼척은 “해국”이 피어 있으며,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드는 공간이다. 화자는 삼척이라는 공간을 매우 화평하고 이상적인 장소로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삼척이 순수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삶을 이루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척 사나이”와 바다의 “산호초”는 서로 화응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자는 순수 이상의 공간인 삼척에 가서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삶에 동화되어 현실의 장애와 고통을 말끔하게 제거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때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두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홀로 커피를 마신다.
외로움이 커피 향으로 묻어난다.
창밖 먼 바다엔 어디로 가는지
배 한 척 멀어지고
유리창에
갈매기 소리들이 부딪혀 떨어진다.
이별을 말하던 날 빛나던 해당화는
다홍빛이 아직 다 바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노을 지는 저녁이면 여기에 와서
쓸쓸히 바다에 취해 있는가.
주인 없는 찻잔을 바라보며
긴 한숨 내뱉으면
그리움은 사랑보다도 달콤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전문
이 시는 인간의 근원적 정서인 그리움, 쓸쓸함, 외로움을 간명한 서정적 어조로 표상하고 있다. 화자가 머물고 있는 공간은 역시 “바다가 보이는 찻집”이다. 그는 미지의 바다를 조망하며 인간의 본질적 감성을 통해 존재론적 사색을 하고 있다.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일견 ‘바다’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바다는 다시 매우 포괄적인 내포적 의미를 지닌다. 바다는 화자 혹은 독자가 그리워하는 모든 대상을 환치하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마침내 인간의 본질적 정서인 쓸쓸함과 외로움을 포용하는 그리움의 대표적 공간으로 자리매김 된다.
엄기창 시인의 이번 시집 바다와 함께 춤을은 ‘바다’라는 하나의 시적 대상을 집요하고 끈질기게 탐구하여 형상화한 점이 매우 독특하다. 또한 시집의 구조를 기승전결(1-4부)의 포괄적 구성으로 기획한 점 역시 탁월한 편집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시사적 차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와 의의를 담보하고 있다. 이 시집은 바다의 환경 생태에 대한 고민과 우려를 교훈적이고 목적적 측면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오염되고 훼손된 바다를 원상회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의 광경을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다음으로 바다와 더불어 사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서정적으로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실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바다와의 교감과 공감을 긍정적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집의 미덕은 공소한 정서와 허황한 관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바다에 대한 현실 체험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 시집은 바다와 더불어 이루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의 진정성 있는 현장감을 획득한다. 또한 바다에 대한 구체적 현장 체험은 시인의 서정적 상상력을 통과한 아름답고 미려한 표현에 힘입어 수준 높은 시적 완성도를 성취한다. 시인은 결국 바다에 대한 다각도의 집중적인 시적 성찰을 통해 자연주의와 생태주의의 세계관을 표상하고 있다. 시인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삶의 모델로 순수한 ‘바다’와 더불어 사는 안빈낙도의 소박하고 조촐한 생활을 제시한다. 시인은 바다의 순수성을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자로서 유랑의 자유와 초월의 욕망과 도취의 행복을 꿈꾸고 있다.
글
이달의 문제작〈시〉
여성 편향적 삶의 풍경
한상훈〈문학평론가〉
『시문학』 5월호엔, 세월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들이 많았다. 황홀했거나 쓰라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 시점에서 호출해서 그 순간의 이야기를 원고지에 옮겨 시상을 마무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정밀한 시적 세공도 필요하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사건들이기 때이다.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 몇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우선 엄기창 시인의 작품부터 들어가 보자.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때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두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홀로 커피를 마신다.
외로움이 커피 향으로 묻어난다.
창밖 먼 바다엔 어디로 가는지
배 한 척 멀어지고
유리창에
갈매기 소리들이 부딪혀 떨어진다.
-엄기창,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부분
첫 구절에서 사랑에 대한 단정을 단호하게 내린다. 섣불리 규정할 수 없는 사랑 또는 삶의 오묘함에 대해 시인은 이미 도사처럼 터득한 듯하다. 겹겹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인생은 나의 욕망대로 되지 않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욕망의 종창역은 대부분 더 꼬이게 되고, 결국 인생은 추해지는 것이 아닌가. 나의 욕망을 비워내어 그냥 자연의 질서에 나를 맡겨보니, 그 자체로 아름답고 생의 여유가 생겨, 행복이 슬쩍 찾아온다. 그러기에 시인은 사랑하던 님이 가고 야속하기만 하지만 허전한 상태로 내 마음을 하염없이 풀어놓는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커피도 호사롭게 두 잔을 시켜 놓았다. 그만큼 상처의 시간은 지나갔다. 창밖을 보니, 저 멀리서, 넓고 푸른 바다에 점점 작아지고 있는 배 한 척이 보인다. 다시 외로워진다. 그러나 미소가 머문다. 완전한 사랑이 있겠는가. 사랑이 머무는 것도 잠시인 것을. 비록 외롭지만 달콤해지는 것이다. 애틋한 그리움은 서랍 속에 숨겨놓은 보석처럼 가끔씩 꺼내 보면서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빛날 수 있기에.
『시문학』2021년 6월호(599호)
글
릴레이/나의 시 쓰기
시에 꽂히면 삶에 꽃이 핀다
엄기창
1. 내가 시를 쓰는 이유
시는 왜 쓰는가?
예로부터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의문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세영 시인은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어 시를 쓴다”고 말했고, 정호승 시인은 “스스로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서”라 말했으며, 공자께서는 논어 위정편에서 “시 삼백 편이면 思無邪”라 했다. 그러나 나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남들 다 꿈나라에서 노니는 깊은 새벽, 문득 잠결인가 발상 한 가닥 떠오르고 몽환적 상태로 서재에 가서 시상을 다듬고 살을 붙여 완성했을 때의 그 기쁨, 이런 순간은 전율과도 같아서 내 삶에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값지다. 시를 쓰는 게 즐겁고 시를 쓰는 게 행복해서 시를 쓴다.
내가 시의 길로 빠져들게 된 원인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숙제 때문인 것으로 기억된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밀짚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밤하늘엔 별이 빛나고 어머니 베 짜는 소리가 들려오는 밤이었다. 귀뚜라미 노래를 들으며 문득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엄마가 안방에서 베 짜는 소리
나는 멍석에 누워 별세계 꿈을 꾸고
동생들은 소록소록 잠자는 달밤
귀뚤 귀뚤 귀뚤 뀌뚤
귀뚜라미 풀숲에서 울어대는 밤
계수나무 밑에서 떡방아를 찧던
아기 토끼들은 떡 먹으러 가는 밤
「달밤」 전문(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시가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상도 받고, 더구나 액자에 예쁜 그림과 함께 담겨져 복도 벽에 걸려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액자를 볼 때마다 ‘우주의 중심’이 된 것 같았고, 내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 다니는 것이 즐거워졌다. 이때부터 틈만 나면 노트에 시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2. 날개를 달다
대학에 가서 ‘수요문학회’에 가입했다. 수요일마다 모여 합평회를 하는데 선배들이 참으로 극성스러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잘 쓰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또 고등학교 때도 교내 문학회에 들어 활동을 했었는데, 작품을 내면 초보자 나무라듯 온통 난도질해서 걸레를 만들어놓았다. 나도 성질이 나서 그 선배 작품 낼 때 온갖 시론 책 뒤적이며 빨갛게 써가지고 가서 아주 혼을 내 놓았다. 그런데 합평회 끝나고 나선 늘 막걸리 집에 갔는데 그 날도 그 선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야, 엄기창 제법이던데.”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보니 평소 우러러보던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문덕수, 서정주, 박목월 같은 시인의 작품도 합평회에 나오면 완전 박살이 나는 것이었다. 에그, 작품은 개똥같으면서 입들만 살아서.
그런데 그 투지를 깨워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선배가 제법이라 했던 것도 선빵 맞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갈기를 세울 줄도 안다는 칭찬이었을 것이다. 선배들의 독려? 속에 시작 능력이 일취월장 하여 71년(2학년) ‘제1회 학내 지상백일장대회’에서 가작, 73년(4학년) ‘한국시인협회’ 주최 학생문예 우수상 등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 중 백미는 73년 22세의 나이에 시전문지 『시문학』이 창간 2주년의 기념사업으로 실시한 전국대학생들의 「전국대학시집」에서 「아침 서곡序曲」으로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그 작품을 보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현絃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음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구상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유경환, 김남조 두 분의 심사위원께서 생경할 정도로 참신한 표현이라 칭찬해 주신 이 시를 통해 초회 추천을 받았고, 1975년 울진 해안에서 해안소대장을 하면서 쓴 「아침바다」라는 시로 추천완료를 하여 시의 길로 날아오르게 되었다.
3. 절제와 스밈의 시학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의 해설을 써주셨던 조재훈 선생님은 내 시의 특징을 ‘절제와 스밈’의 시학이라 하셨다. 극도의 응축을 통해 표현하고 견고하며 단단한 구조이면서도 드라이하지 않게 촉촉한 서정을 이미지를 통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들게 해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의 경제 원리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감성이 풍부한 시를 쓴다는 것이다.
내 시엔 긴 것이 드물다. 그러나 내용마저 짧은 것은 아니다. 시는 짧지만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나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내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
내려올 곳이 너무 많아서
내리지 않고
북악北岳에서 남산南山으로 흐르며
울기만 한다.
대밭에 참새처럼 숨어
지저귀는
사람들은 알리라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룽 우르룽 울고 있는지….
번갯불보다 고운 어둠 밑에서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청홍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다.
「서울의 천둥」 전문
나의 시 가운데에는 특이할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조금도 격하지 않다. 차분한 가락과 상징을 통하여 할 말을 시로 드러내고 있다.
서울 하늘에 ‘천둥’이 ‘늘’ 울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울 하늘에만 어떻게 일 년 내내 비가 오고 천둥이 치겠는가. 그렇다고 과장도 허구도 아니다. 다른 의미를 뒤에 거느린 암시와 상징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온갖 악의 온상일 수 있다. 특히 고향의 시골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울’은 반 자연이며 반 고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리(天理)에 따른 한울님의 응징인 ‘천둥’이 항상 울기 마련이다. 내려와 인간들에게 응징할 곳이 ‘너무 많’으나 그냥 스스로 울 뿐, 가시적인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으로서의 ‘참새 떼’같은 인간들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하늘의 말 ―― 번갯불에 타면 그냥 없어지게 될 갖가지 욕망의 꿈을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다. 어둠이 번갯불보다 곱다는 시적 진술은 역설이다.
4. 행복을 노래하는 긍정의 시
조남익 선생님은 내 3시집 『춤바위』 해설에서 “본래부터 시는 진선미(眞善美)였다. 인간이 이상으로 삼는 ‘참다움 · 착함 · 아름다움’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셸리는 그의 「시의 옹호」에서 “시는 지복지고(至福至高)의 마음의 지고지복(至高至福)의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했다. ‘지극히 높고 지극히 행복한 기쁨’의 경지에서 시는 탄생할 것이라는 말이다. 시는 정신적인 극치의 환희인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극도의 슬픔을 노래하고 더러는 그로 인해 독자들의 큰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불행을 소재로 시를 써서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시는 대부분 따뜻하다.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
경적을 울리면
아기 비둘기 놀랄까봐…….
산을 오르다가
허리 구부러져 누운 들국화를 보면
발을 멈추고 튼튼한 이웃에 기대어 준다.
가벼운 바람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잠시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내 따스한 마음 머물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
단풍잎 붉은 기운이
핏줄을 타고 들어온다.
바람은 차도 가을은 따뜻하다.
「‘따뜻한 가을」 전문
비둘기들이 놀랄까봐 차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든가, 등산길에서 구부러진 들국화를 세워준다든가 등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노래하는 것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시의 자세이다.
5. 시에 꽂히면 삶에 꽃이 핀다
그러고 보면 내 주위엔 시를 통해 불행을 치유한 시인들이 많이 있다. 80세의 한 사람은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절망하다가 시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극도의 슬픔과 죽음에의 유혹마저 ‘여보 어디 있어요’라는 시집을 통해 털어낸 후 웃음을 되찾았다. 또 한 78세의 시인은 아내를 암으로 잃고 본인마저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시를 알게 된 후 치유 받았다 한다. 두 사람 모두 시가 없으면 자기들은 죽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 시에는 강한 힐링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외로운 사람, 불행한 사람, 노년에 할 일 없는 사람들 모두 시에 꽂히면 삶에 꽃이 핀다.
『시문학』596호(2021년 3월호)
글
이달의 문제작〈시〉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시정신
김기덕〈문학평론가〉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단 하나의 이론, 우주의 모든 섭리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찾고자 연구에 매진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인슈타인이 연구하던 통일장이론은 지상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끈이론이라는 새롭고 급진적인 이론을 통해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충격에 빠질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고, 현실은 실제와 공상과학이 뒤섞인 세계라는 것이다. 만물의 이론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끈이론의 기본 개념은 제일 작은 입자에서부터 머나먼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물질이 단 하나의 끈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 끈은 진동하는 에너지이며, 우주는 진동하는 끈들의 연주로 만들어낸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도록 배운다. 다양한 공동체 안에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구성원으로서 언어 소통을 통해 사회적 참여와 보편적 사고를 가지며, 자기 이해를 위한 모든 만물로 이루어진 끈을 향유한다. 세상 만물은 끈 아닌 것이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끈에 의해 연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끈의 에너지들이 인간을 구성하고 사고하게 한다. 세상에 충만한 끈의 에너지들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나의 삶은 독자적인 삶이 아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도 유기적 관계를 가지며 공동체적 관계를 이루고 살아간다. 인간은 공동체적 삶의 관계 속에서 오류가능성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고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 나간다. 그러한 자아성찰로 시인들은 언어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하나의 끈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삶의 거대한 융합을 거쳐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다.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중략)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엄기창,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일부
엄기창 시인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와 포크레인에 파괴되어 가는 고향마을을 대비하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다. 아내의 뇌 속에서 뇌세포들이 파괴됨으로써 금가루 같이 아름다운 기억들이 사라져간다. 그것은 어린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고향이 개발의 시대적 흐름에 밀려 파괴되는 것과 동일시된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자연의 파괴를 망각으로 환치시켜 아름다운 순간들이 다 지워진다 해도 아내의 수첩 속에서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삶은 절박한 현실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포크레인이 하전을 파괴할 때 엄기창 시인의 어린 날들이 파여져 나가고, 아내의 기억 속에서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리는 것은 운명공동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의 하천의 파괴는 곧 엄기창 시인의 추억의 파괴이며, 아내의 소중한 기억의 파괴가 된다. 그 속에서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 고향에 남듯 아내의 수첩 속에 남기를 소망하는 것은 아내와 동일화된 존재로서의 간절한 염원이 된다. 변하는 현실 속에서 엄기창 시인은 시간을 뛰어넘어 천륜적 사랑의 끈을 끝끝내 놓지 않으려 한다.
『시문학』2020년 9월호(590호)
글
이달의 문제작〈시〉
다시, 상징
김지숙〈시인、문학평론가〉
나이는 마음이다.
스물이라 생각하면 가슴에서
풀잎의 휘파람 소리가 나다가도
일흔이라 생각하면
은행잎 노란 가을이 내려앉는다.
일흔이라도
스물처럼 살자.
언제나 봄의 빛깔로 살아가자.
-엄기창, 「나이의 빛깔」전문
휠라이트는 언어의 긴장감의 정도에 따라 상징을 협의의 상징과 장력상징으로 나눈다. 협의로서의 상징은 관습적 상징을 또 다른 말로 칭한 것으로 사회나 조직 내에서 부르는 의미가 한정된 상징을 말한다면, 장력상징은 필연적으로 의미가 만들어지므로 다소 애매한 점을 특징으로 든다. 이는 개인에 의해 탄생되므로 반드시 개인의 내적 특징이 가미되어 의미가 조직되는 점이 필수 요소로 작용하는데 여기에는 개인만의 깊은 상상력과 연상이 관련된다.
상징은 어떤 내적 상상력에 힘입어 이미지가 창작되는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필요하며 이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지만 이들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것이 어떤 실체로 드러나는 지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완성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은 개인이 시에서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하므로 언제나 새롭게 탄생되며 그 대상은 늘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특징을 띤다. 물론 시인이 의도한 관념이나 비가시적인 이념을 암시하기도 하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이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에 비가시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고 이를 암시하는 구체적인 상징만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 단을 만들어 제자를 가르쳤기에 공장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을 ‘행단’이라 하고 후에 은행나무는 교육과 청렴의 상징으로 상징되었으며, 1억 5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살아왔으며 빙하기에도 살아남은 살아 있는 화석이라 칭하는 것도 은행나무가 지닌 상징성에 기인된다. 김수영의 ‘풀’(「풀」)은 인간을 상징하며 박성룡의 ‘풀’(「풀잎」)은 선한 자연의 힘을 표상한다.
엄기창의 시 「나이의 빛깔」에서 ‘은행나무’는 ‘풀’과 대조를 이루는 사물로 표상된다. 화자는 사람의 나이를 젊고 힘 있을 때의 사물은 ‘풀’로, 푸릇한 휘파람소리를 내는 ‘풀잎’으로 표상되고 나이든 때의 모습은 가을이 내려앉은 노란 ‘은행나무’에 견준다. 시에 나타나는 ‘풀’은‘젊음의 힘’ ‘유연성’ ‘승리‘ 등을 상징하며, ‘은행잎’(나이의 빛깔)은 퇴락의 의미를 지닌다. 노란색은 시각적 특성으로 보면 두 분류로 나뉜다. 그것은 ‘명랑’ ‘힘참’ ‘전진’ ‘행운’ 등을 의미한다. 또한 황금색으로 보면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 ‘부귀영화’ ‘역동성’ ‘즐거움’ ‘생동감’등을 뜻한다. 반면 차갑고 퇴락하는 의미와 연상되는 참회자로서의 성직자를 상징하는 색의 의미를 지닌다. 시에서 ‘은행나무’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푸릇한 ‘풀’의 나이로 살아가고픈 화자의 심정을 감안할 때에 후자의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한다.
『시문학』582호(2020년 1월호)
글
<이달의 문제작>
잃어버린 ‘자연’을 찾아 배회하는 상상력
양병호
(시인 ․ 전북대 교수)
빈 들에
바람의 살 내음이 가득하다.
하루의 일 다 마치고 황혼을 바라보는
아버지 야윈 뒷모습 같은 허수아비.
나는 겨울 녘 들풀들의 신음마저
사랑한다.
박제로 남아있는 풀벌레소리들의
침묵도 사랑한다.
황금빛 가을에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들
모두 마치고
부스러져야 할 땐 부스러지는
저 당당한 퇴임退任
눈부신 정적靜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먼 산사 범종소리 들을 채우면.
수만 개의 번뇌처럼 반짝이는 눈발
눈발 속으로 꺼지듯 지워지는 허수아비
-엄기창, 「겨울 허수아비」전문
이 시는 겨울 들녘의 허수아비를 통해 노년의 인생을 서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허수아비’는 노년에 이른 시적 화자의 마스크/아바타로 기능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노년은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와 상상력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소멸의 아름다움을 자연 사물과 풍경의 유려한 직조를 통해 감각적으로 구상화시키고 있다.
시인의 ‘자연’에 대한 인지는 “바람의 살 내음”이라는 감각은유를 통해 탁월한 표현효과를 성취한다. 여기서 “바람”은 화자의 살아온 생애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압축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나아가 무색무취의 “바람”에 “살 내음”이라는 구체적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을 구상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빈 들에/ 바람의 살 내음이 가득하다”는 화자의 열정적인 생애가 공허한 세계를 충만하게 변용하는 풍경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텅 빈 공허의 세계 속에서 “허수아비”에 주목한다. 그는 허수아비로부터 “아버지”를 환기한다. 물론 이러한 직관은 화자 자신에게로 전이되어 나아간다. 예컨대 시인의 상상력은 들판의 허수아비로부터 아버지로 또 다시 자아에게로 투영된다. 결국 화자는 노년에 이른 자신의 삶이 아버지의 살아온 생애와 겹치는 것임을 자각한다. 다시 말해 인생의 공통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 공통성은 “야윈 뒷모습”으로 표상된다. 다시 자신과 아버지 둘 사이의 인생의 공통분모는 “허수아비”로 수렴된다. “허수아비”는 삶/인생에 대한 허무적 페이소스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허수아비의 이미지와 같이 공허하고 운명론적인 것임을 감각적으로 표출한다.
노년에 이른 화자는 이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서를 드러낸다. 그의 시선은 죽음의 계절에 당도한 “들풀의 신음”과 “풀벌레 소리의 침묵”에까지 확산되어 나간다. 화자는 이렇게 소멸이 예정되어 있는 자연 사물들이 자아의 존재론적 상황과 유사함을 이해한다. 화자는 궁극적으로 자연 사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사랑하는 자연 사물의 소멸의 운명은 결국 자신의 삶으로 치환된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론적 소멸의 상황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상징/죽음 앞에 당도한 자연 사물들은 “삶의 과제들”을 수행한 뒤 순연히 운명을 맞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당당한 퇴임”으로 표상된다. 자연 사물들의 퇴임은 기실 화자의 존재론적 운명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존재론적 소멸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의연하고도 강직하다. 그러한 당당한 태도는 “부스러져야 할 땐 부스러지는”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이법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상징을 수긍하는 화자의 의연한 자세는 “눈부신 정적”의 순간에 삶의 번뇌를 해탈하는 “범종소리”와 조우한다.
이 시는 허수아비라는 사물을 통해 존재론적 고뇌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 존재론적 고민은 허무와 소멸의 관념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화자의 존재의소멸과 허무를 자연의 이법으로 “당당하게” 수긍한다. 그리하여 존재론적 허무와 소멸에 대한 고뇌는 긍정적인 수용의 태도로 인하여 맑고 투명한 정서로 승화된다. 이 시의 이러한 관념과 정서는 다채롭고 선명한 자연 사물과 이미지를 통하여 구체성과 감각성을 훌륭하게 성취한다.
「시문학」 2018년 3월호 ‘이달의 문제작 <시>’
글
한국 명시조 감상
- 엄기창 편
석야 신웅순
1.
시조와 시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3장 6구 12소절 형식의 유무? 맞다. 그러나 그만으로 말할 수 없는 구석이 시조에게는 있다.
시조는 시조시가 아니라 그냥 시조이다. 그것이 다르다. 음악과 함께 있던 시조가 1920, 30년대부터 읽고 짓는 시조로 탈각, 지금은 원 의미와는 달리 자유시와 대가 되는 정형시의 한 형태로 굳어졌다.
시는 자유시라 사용 공간이 매우 넓다. 규격화된 시조와는 견줄 바가 못 된다. 애초에 음악이었던 시조창에서 시만 빼내 형식에 맞게 사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조를 시조시라고 하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맞다. 시조에 내재된 가락을 배제하고 나왔으니 시조는 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형시일 수만 없는 것이 또한 시조의 숙명이기도 하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합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는 시다워야하고 시조는 시조다워야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시조가 시가 되어가고 있는 작금에 적절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시조시를 시조로 회복시킬 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회복제가 언어의 음악성이라고 말들하고 있다. 자유 시인들이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
모 원로 비평가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유 시인들이 이제 철이 드는구먼”
흘려들을 수만 없는 가슴 치는 말이다. 일단 논의는 뒷담으로 미뤄둔다.
2.
어느 날 엄 시인께서 『봄날에 기다리다』라는 시조집을 부쳐왔다. 자유 시인이 웬 시조집을? 언젠가 같이 한 식사 자리에서 필자한테 ‘저도 시조를 씁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냥 흘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조집을 보내왔다. 엄 시인이야 대전에서 시 잘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시조도 잘 쓸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시인 시조를 알아야하고 사랑해야한다는 당위성, 그 하나만으로도 필자의 졸필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의 하이꾸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가. 얼마나 세계에 많이 알려져 있는가를 생각하면 시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참으로 낯 들기가 부끄럽다.
3.
차 마시다 창 너머로
봄빛 새론 산을 본다
표구하지 않아도
늘 거기 걸린 풍경
상큼한 녹차 맛처럼
가슴으로 다가온다
한사코 초록빛을
놓지 않는 산이기에
시드는 난을 위해
창 열고 산을 맞다
성긴 잎 사이에 꽃대
혼불 하나
켜든다
- 「경칩일기」전문
조지훈의 「파초우」를 읽는 듯하다. 봄빛이 새롭다. 멀리 있지 않은, 녹차 맛처럼 가슴으로 다가오는 산. 표구하지 않아도 늘 거기에 풍경이 걸려있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어느 선비의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이다.
선비는 난을 키우고 있다. 한번도 초록빛을 놓지 않는 산이기에 난을 위해 창을 열었다. 겨우내 동안거에 들었던 난 하나가 산을 맞으며 꽃대를 세워 혼불 하나 켜들었다. 난도 산에서 산빛을 빌려오고 물소리를 빌려와야 꽃대를 세우고 꽃을 피울 게 아닌가.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은 사람을 그윽하게 한다. 산과 마주한 어느 젊잖은 충청도 선비의 수묵화 한폭이다.
이렇게 엄시인은 시조 한 수를 시조집 첫장에 앉혀놓았다. 몇 장을 더 넘겼다.
시집 제목으로 쓴「봄날에 기다리다」에 눈이 멎었다. 박용래 시인의 「구절초」를 생각나게하는 시조이다. 돌아가신 누님을 위한 헌정 시조이다.
작은 누님,
오셔요.
버들피리 불게요
회재 높아 못 온다 해서
낮게 깎아 놓았어요.
산굽이
돌아 돌아서
아지랑이만 날리네요.
산그늘이
내려와서
장막처럼 드리우고
남가섭암 불빛이
별빛으로 일어서요.
밀양땅
산자락에 누운
누님 기다리는 봄 하루
-「봄날에 기다리다」전문
그렇다. ‘누님’은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겨운 말이다. 시인은 몇 년 전 누님의 부음을 듣고 대구까지 울면서 갔다. 밀양 땅에 묻고 돌아와서는 봄날 앵두꽃 필 때쯤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하염없이 누님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어머니, 누님만한 정 많은 이가 천지 어디에 있을까.
버들피리 불 테니 누님은 이 소리를 듣고 오라는 것이다. 회재가 높아 못 온다 해서 산도 낮게 깎아놓았다는 것이다. 누님의 첫제사에 누님이 좋아하던 고향의 솔바람소리, 뻐꾸기 울음소리를 선물로 가져와 누님의 무덤가에 심어 드렸다고 한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그 산굽이. 산자락에 누운, 정 많은 오지 않을 누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굽이굽이 정 많은 시인. 이도 잔잔하고 그윽한 산자락 같은 수묵화 파스텔톤 한 폭이다.
계룡산 산행 길에
단풍잎 하나 따서
아내의 화장대에
몰래 올려놓았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내 가을 편지이다.
얼핏 연 책갈피에
내게 보낸 연서 한 장
곱게 말린 단풍잎에
배어있는 따스한 정성
아내도 날 사랑한다는
홍조 어린 답신이다.
- 「가을편지」전문
시화가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어야 한다. 시인은 계룡산 갑사를 다녀오신 모양이다. 춘마곡, 추갑사라하지 않던가. 갑사만큼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은 없다.
계룡산 산행길에 단풍잎 하나 따서 아내 화장대에 올려 놓았다. 아내에게 쓴 가을편지이다. 시집이었나 싶다. 책갈피에 연서 한장 곱게 말린 아내의 따스한 정성, 단풍잎이 들어있다. 아내의 홍조 어린 답신이다. 단풍잎 하나가 사랑의 편지가 되고 사랑의 답신이 되는 평범한 것 같지만 비범한 신의 한 수이다.
책이 있으면 책을 읽어야 하고 술이 있으면 술을 마셔야한다. 재자가인이 있으면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해야한다. 아내가 있으니 지극히 사랑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잘 쓰는 사람은 이렇게 시를 쉽게 쓴다.
벽을 비워 놓았더니
산이 들어와 앉아 있다
꽃 향기
골물 소리
집안 가득 피어난다
채우고 채워진 세상
하나 비워 얻은 평화
- 「여백」전문
벽에 장롱을 비웠더니 산이 대신 들어와 앉았다. 산이 들어오니 꽃향기, 골물소리 집안 가득 피어나지 않는가. 세상이 채워진 기분이다. 하나를 비워 얻은 커다란 평화이다.
자연 합일, 안빈낙도의 경지랄까. 김장생의 시조가 생각난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 두고/강산은 들일 데가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가난하지만 가지지 못할 뿐이지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지금인들 못 누릴 게 무엇이 있는가. 이를 두고 누가 시조를 싸잡아 ‘음풍농월’이라고 말들을 하는가.
물에서 나는 소리가 네가지 있는데 폭포 떨어지는 소리,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여울물 지는 소리, 붓도랑 흐르는 소리가 그것이고,바람이 내는 소리도 세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솔바람 소리, 가을 잎 지는 소리, 물결치는 소리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에 와 이런 여유의 참맛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아깝고 서러운 것이랴. 한낱 시를 치유거리로만 생각할 것인가.
4.
시조창은 뻗는 음이 있고 떠는 음이 있고 흔드는 음이 있다. 속청소리도 있고 막는 소리도 있고 푸는 음도 있다. 가곡창에는 처내는 음이 있고 굴리는 음이 있고 짚고 넘어가는 음도 있다. 밀어올리는 음도 있고 잇고 끊는 음이 있고 강하게 내는 음도 있다.
시조는 이런 음악성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시조는 시와는 판연 다르다. 언어만 같을 뿐 태생 자체가 다른 것이다. 시에도 음악성이 있는데 시조에 있어서 더더욱 말해 무엇하겠는가. 필자의 우문일지 모르나 최소한 그런 생각을 갖고 시조를 써야 맛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겨울 시인의 훈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휴머니티한 시조 한편이다.
눈 녹는 시장 골목
비둘기는
맨발이다
신발 전 털신 한 짝
사 신기고 싶구나
종종종
서둘러 가는
머리 위엔 하얀 눈발
-「비둘기- 시장풍경 5」첫수
엄기창 시인은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공주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5년 월간 시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2014년 퇴임, 정훈문학 대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다.
엄시인의 시조를 소개한 것은 시재 있는 많은 자유 시인들이 시조를 많이 사랑하고 많이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시조 쓰는 일이 새채비이기는 하나 조금만 익숙해지면 쓸 수 있는 것이 또한 시조이기도 하다. 시조는 우리 선인들이 수백년을 배앓이 하며 낳은 옥동자가 아닌가. 그 옥동자가 지금까지 700여년을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여기라도 좋다. 많은 이들이 쓰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 시인들은 필히 시조를 쓸 지언저.
한국문협 이사장 문효치 시인도 필자에게 신작 시조집 『나도 바람꽃』을 보내왔다. 주옥같은 명편들이다. 뽑아 한 수 소개한다.
바람 속
파도 소리
못 말리는
몸살이다
누구를 사모하여
바다 끝에 기대섰나
뒷산이
우루루 몰려와
물속으로 뛰어 든다
-「우루루 - 수송나물」전문
-시조문학,2018.봄호,92-98쪽.
글
☐嚴基昌 作品解說
절제와 스밈의 시학
조 재 훈
<시인. 공주대학 국어과 교수>
시인의 연장선상에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T.S.엘리어트는 그의 여러 논문 가운데에서 힘주어 말했고, 그 영향으로 이른바 영 ․ 미의 이십세기 초반 분석 비평가들은 무슨 의도의 오류라든가 영향(정서)의 오류 등을 내세우면서 작품으로부터 작자와 독자를 단절시킴으로써 작품의 유기체적 자율성을 강조한 바 있다. 윤리 ․ 도덕 또는 역사적 비평이 지배하던 당대 문학연구 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이해된다. 가령 소쉬르의 언어이론도 십구 세기 유럽의 언어학을 지배하던 독일 라이프니츠대학 중심의 낭만주의적 역사비교언어학의 거부에서 태어난 것이며 그것은 둘 모두 자본주의 발흥과 기계문명의 첨단화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기초하여 생겨난 파리의 구조주의나 기호학은 가장 적정한 최신의 그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문화를 지탱하는 역사, 경제 등을 살펴,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따라서 작품 안에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필요 ․ 충분조건이 다 들어 있다는 견해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역사의 왜곡이 심한 제삼세계 등의 겨레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이러한 말을 늘어놓는 까닭은 엄기창의 사람됨과 나와의 인연을 조금이나마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서다.
공주교육대학에서 일년 쯤 근무하다가 내가 공주사범대학으로 옮긴 것은 천구백칠십 년 오월이었다. 그 이전에도 사 ․ 오년간 시간강사로 나왔던 터라 그리 낯선 느낌은 주진 않았다.
전임이 되어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는 『수요문학』동인들과의 자리였다. 최병두, 노동섭, 심규식, 조동길, 구중회 등 쟁쟁한 젊음들이 동나도록 공주의 막걸리를 퍼마시며 공주 좁은 골목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해박(?)한 이론의 싸움이 그칠 줄 몰랐고, 그 싸움의 불꽃으로 조금씩은 저린 가슴들을 태우곤 하였다. 후끈 달아오른 이런 열기 속에 그들의 후배로서 뛰어든 사람 가운데에 유병환, 엄기창 등이 있었다. 그들의 객기는 동인지, 시화전, 문학의 밤 등 쉬임없이 나타났으며 무슨 『허당집』인가 하는 이름의 괴짜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발바닥이 땅 위에서 몇 뼘은 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속에서 엄기창은 유난스럽게도 촌색시처럼 조용했고 수줍어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편이었으며 그리고 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 방(연구실)을 찾아와 마곡사 근처에 있는 가교리 고향마을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바람에 나도 촌 태생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의 이야기를 여러 시간 맞장구를 치면서 그야말로 열심히 들은 적이 있었다. 수태극으로 휘돌아 흐르는 냇물과 그 물 속에서 노는 가지가지 물고기 이야기, 무성산의 허물어진 성곽과 그 곁에 있는 샘물 그리고 거기에 얽힌 홍길동 전설, 화전신 이야기 등이었는데, 이번 시집의 원고를 통독하다 보니 그는 아직도 유년의 고향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느긋한 말씨와 부처님의 미소인 듯 따사로운 그의 소리 없는 웃음이 그의 사람됨과 문학의 성향을 모두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겸허한 순결성이라고나 할까? 노자가 일찍이 갈파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처럼 낮은 데서 표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엄기창이란 선생님이자 시인이다. 73년이던가 74년이던가, 엄기창은 『시문학』에서 주최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공모에서 당당히 당선되었으나 그런 것에 자만하지 않고 묵묵히 시작에 전념함으로써 일년 후(75년)문단 데뷔의 관문을 거쳤다. 요즈음 너도 나도 무슨 자격증을 얻듯이 추천입네 뭐네 하여 ‘문단’이라는 흙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나는 우리 문학의 건강을 위하여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 말은 엄기창이 이른바 소정의 절차를 밟아 문단이라는 데에 나갔으나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진지하고 겸허해진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의 문학』동인에서 핵심적인 위치로 활약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엄기창을 ‘조용하고 맑은 香’의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펴내는 이 시집에는 그런 향내가 은은히 스며 있다.
시는 아무래도 응축이 그 바탕이다. 산문이 진술을 통하여 확산을 하는 장거리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시는 압축을 통하여 사물의 핵심을 전광석화로 드러내려는 최단거리의 장르라 이를 만하다. 산문에서는 할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비교적 마음 턱 놓고 차근차근 이야기할 수 있으나 시는 그럴 수가 없다. 직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상황에의 설명이 아니라 존재에의 부가이다. 모울튼이 시를 일러 산문의 토의문학과 대비하여 창조문학이라고 한 것은 소박한 대로 정곡을 찌른 견해이다. 지금은 덜 하지만 오래 전에 나는 시를 무슨 보석처럼 생각하였고 또 무슨 향수의 가장 진한 원료라고 여겼다. 흙의 정(精)으로서의 보석은 견고하고 빛나며 아름답다. 물의 정으로서의 향료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온 방안이 향내로 가득해진다. 둘 다 최대의 밀도로 농축되어 있다. 역시 시도 그래야 한다고 믿어 왔으며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언어의 경제원리를 철저히 지키는 것――다시 말하여 최소한의 언어를 선택하여 최대한의 감동과 충격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접은 시각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에 따라 어휘 하나, 토씨나 어미 하나, 쉼표 ․ 마침표 하나에 숨을 불어 넣으며 그것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상허가 그의 널리 알려진 『문장강화』의 앞머리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는데 존재의 환기 또는 그 번역으로서 ‘시’에 있어서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여러 날, 여러 달 또는 여러 해 고심 끝에 문자화 한 시를 거개의 독자는 신문기사를 읽듯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고 나서 무슨 수작을 하는지 모른다고 투덜댄다. 물론 작품에도 그 근본 원인이 있겠으나, 어느 면에서는 속도와 피부적 향락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독자에게 책임이 더 크다.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어느 작품의 경우나 마찬가지다.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
내려올 곳이 너무 많아서
내리지 않고
北岳에서 南山으로 흐르며
울기만 한다.
대밭에 참새처럼 숨어
지저귀는
사람들은 알리라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룽 우르룽 울고 있는지....
번갯불보다 고운 어둠 밑에서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다.
그의 「서울의 천둥」의 전문이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특이할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조금도 격하지 않다. 차분한 가락과 상징을 통하여 할 말을 시로 드러내고 있다.
서울 하늘에 ‘천둥’이 ‘늘’ 울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울 하늘에만 어떻게 일년내내 비가 오고 천둥이 치겠는가. 그렇다고 과장도 허구도 아니다. 다른 의미를 뒤에 거느린 암시와 상징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온갖 악의 온상일 수 있다. ‘항구’라는 언어의 의미군에 ‘숨어 있다’는 다른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고향의 시골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울’은 반 자연이며 반 고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리(天理)에 따른 한울님의 응징인 ‘천둥’이 항상 울기 마련이다. 내려와 인간들에게 응징할 곳이 ‘너무 많’으나 그냥 스스로 울 뿐, 가시적인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으로서의 ‘참새 떼’같은 인간들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하늘의 말 ―― 번갯불에 타면 그냥 없어지게 될 갖가지 욕망의 꿈을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다. 어둠이 번갯불보다 곱다는 시적 진술은 역설이다.
시인 스스로의 내면을 향할 때에는 더욱더 응축의 정도가 심해진다. 그의 연작시「短歌」는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눈 위에 떨어진
피 한 방울처럼
너와 나는 남남이다.
새벽부터 木鐸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다.
宇宙를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고
後光에 싸여 온 너의
하얀 손
그 하얀 손의 고갯짓
四十九日 밤낮을 눈 안 붙이고
나를 위해 木鐸만 두드리더니
너는 하얗게 昇天하고
아직 붉은
나와, 너는 남남이다.
―― 「短歌 ․ 3」
나와 너 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적 시상의 작품이다. 삶은 사실상 ‘너와 나’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너의 존재와 나의 욕망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고독의 숙명, 그것이 삶의 거짓 없는 모습일지 모른다. 이 시는 그러한 절망과 벽의 문제를 담담히 그러나 깊이 있게 드러내 주고 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곧 하얀 눈과 붉은 핏방울의 선명한 대비는 백설공주의 그것처럼 찬연히 아름답다. 그러나 하는 거부(흰색은 배제이니까)요, 차가움이며 다른 하나는 타오름(붉은 색은 불의 이미지를 지니므로)과 뜨거움으로서, 서로 단절되어 있는 상태다. 이것이 이 시인이 본 존재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讀解)의 결론은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벽 목탁 소리’를 배음(背音)으로 하되 그것은 ‘우주를 목도리처럼 목에 두른’ 하얀 손, 너의 나를 향(向)한 간절한 염원이다. 그러나 지상에 내린 눈이 곧 소멸하듯이 하얀 눈의 그 하얀 손은 사라지게 된다. 나는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리하여 ‘너’와 ‘나’는 영원히 ‘남’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러한 시적 요소들에 의하여 이 시는 진부함을 벗어나 그 나름의 빛을 얻는다.
엄기창의 시를 눈여겨보면, 잠언풍이다. 짧은 서정시 같아도 그 속에서 그 나름으로 삶의 의미가 종교적으로 천착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엄기창이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의 하나이다.
견고한 시 쳐놓고 건조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미지스트의 시들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명석하고 선명하지만 그런 만큼 깊이가 빤히 드러나 ‘울림’이 적다.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시 읽는 시법독해의 재미는 줄지언정 감동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랜슴 같은 이가 그런 유의 시를, 뿌리 없이 모래 위에 꽂아 놓은 시라고 빗대면서 ‘물질시’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럴듯하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있어서 상징주의적인 시보다는 투명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울림’은 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지 위주의 시는 울림을 통하여 스민다기 보다는 금속성으로 빛난다 할 것이다.
엄기창의 시는 단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결코 드라이하지 않다. 봄비처럼 촉촉이 스미는 그 무엇이 있다. 그 자력(磁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바탕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시적 형상화의 성공이라고 생각된다. 대체로 문학은 말하기(telling)보다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 구체성으로 나타내야 하며 그것은 시에서 극치를 이룬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형상화 또는 육화(incarnation)라 부른다. 관념의 노출이 시가 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관념이 용해된 시적 ‘육체’를 얻을 때 공감대가 넓고도 깊어진다. 육화와 더불어 또 하나 지적할 일은 시의 서정성이다. 우무래도 시는 감성의 문학이며 직과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부분이다. 엄기창의 시는 잔잔한 서정을 예외 없이 배음처럼 깔도 있다. 거기에다가 시의 호흡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하나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바탕위에 그가 가진 시정신의 취향이 보여주는 친화력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자연 친화의 경향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보내는 태도는 고금 시인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특히 동양시의 전통이서 엄기창의 자연 친화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예찬이 아니고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계문명의 세계에 대한 거부와 농촌(고향) 붕괴에 대한 연민의 정을 포괄한다. 둘째로는, 미세한 것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벌레 한 마리, 새 한 마리, 들꽃 한 송이에 대해서도 그는 애정을 보낸다. 주로 그의 애정은 자연에 향해 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라 대체로 작고 힘없는 것들이다. 셋째로는, 삶의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쪽의 보이지 않는 데를 투시하여 의미를 드러내려는 예지가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시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때, 엄기창의 시는 시로서의 품격을 지닌다.
이러한 여로 통로를 통하여 오는 엄기창의 시가 지닌 ‘스밈’의 친화력은 소중하다.
[가] 溪谷으로 돌 돌
연두빛 生命 굴리는 십자매 울음
그 울음소리로도
일어서지 않는
산……
――「K화백 화실 풍경」
[나] 굳게 입다문 산그늘 허물어진
반달만한 양지에
初産으로 낯 붉힌 진홍빛
저 간절한
말 한 마디
――「三月」의 한 연
[다] 한 여자가 끊고 지나간
길,
눈발이 날린다.
滿月처럼 둥근 배가 쫓아와서
앞길을 막아서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절의
끈 한 편에
풀꽈리처럼 조그맣게 매달린
내 금간 하루
――「끈」의 앞부분
[라] 막차는 차갑게 식어
어둠에 풀린다.
――「막차 안에서」첫 부분
[마] 하나의 離別은
별처럼 반짝이지만
두 개의 離別, 세 개의 離別,
수많은 이별들은 반짝이지 못한다.
――「短歌 ․ 5」첫 부분
그의 시에는 신선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시 구절은 꽤 많다. 그 이미지들이 단순히 장식적인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의도하는 시상과 튼튼히 그러면서 기발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적 효과를 배가하고 있다.
위의 인용은 극히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윗 시 중 [가]~[다]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연은 섬세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으며 그것은 단아한 호흡에 얹혀 독특한 시적 이미지로 전이된다. 특히 [가]와 [나]가 그러하다. 귀엽고 앙징스러운 십자매의 울음소리와, 봄이 되어 얼음 풀린 계곡의 물이 연두빛으로 오버랩 되면서 그것을 아직은 철이 이른지 그냥 묵중한 채 웅크리고 있는 산에 연결시키고 있다. 제명에 의거하건대 아마 어느 화가의 화실에 걸린 그림의 인상이 아닌가 싶다. [나]도 진달래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굳게 입 다문 산’ 그 그늘 ‘허물어진’ ‘반달’ 크기의 작은 양달에 피어 있되, 겨울 지나 피어 있는 그 어려움과 경이스러움이 여인의 초산과 같다고 말한다. 초산의 비유는 신선하면서도 적절하다. 어려움, 경탄, 생명에의 외경, 피, 핏덩이 탄생 등의 연상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간절한/말 한마디>는 초산의 긴장과 염원으로 충전된다.
[다] ․ [라]는 퍼스나의 고독이 자연 속에 용해되어 있는 예이다. ‘한 여자’가 단절시키고 떠나가 버린 길은 적막과 좌절의 그것이다. 그리하여 차가운 ‘눈발’이 사정없이 볼을 때린다. 하얗게 눈 덮인 벌판처럼 세상은 없음으로 꽉 차 공허할 따름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배는 아직 보름달처럼 둥글지만 그래도 역시 앞을 가로막는다. <은빛 반짝이는 단절>일 밖에 없다. 퍼스나의 고독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그맣게 풀 꽈리로 매달린 그 이미지가 단절의 처절성을 상당부분 완화시킴으로써 <금간 하루>정도로 머물게 해주고 있다.
‘무던하다’는 말이 있다 엄기창에게 꼭 들어맞는 말로 여겨진다. 고등학교 시절의 『팔각정』동인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의 24~26년간 시에 열정을 쏟은 셈이며, 많은 재능들을 물리치고 문단이라는 데에 첫 선을 보인 지도 거의 20년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안달복달하면서 시집 간행과 발표에 눈독을 드릴 테인데, 그냥 묵묵히 누구를 부러워 할 것도 없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시만 다듬다가 이제 멱이 찼다고 느꼈는지 그동안 발표한 것들을 정리하여 한 권으로 묶게 되었다. 오늘날 문학 공해의 시대에 나는 그런 엄기창의 겸허와 진지성에 대하여 신뢰감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고전적인 시작 태도에 관해서도 긍정적이다. 모던이니, 포스트모던이니 해도 역시 시의 올바른 길은 엄격한 언어의 절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의 적절한 절제에서 압축성을 갖게 되며 그 압축에서 리듬이 태어나고 그 리듬은 힘이 되어 우리를 울린다. 어떤 평자가 정지용의 시를 언급하면서 정곡을 찌른 말처럼, 언어의 절제는 욕구의 억제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턱없는 미지에의 동경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절제 잃은 언어의 분류로 나타난다면, 고전적인 엄격한 자아의 통제는 자연히 언어의 절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엄기창이 보여 주는 언어의 절제도 실은 그가 가진 세계관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 엄기창 문학의 한계가 있으며 극복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엄기창의 시는 예외 없이 짧다. 서정적이며 아름답고 또 거부감 없이 잘 스며들지만 작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서정의 소품이 그의 시가 지닌 대체적인 인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작다>는 사실은 다양성의 결여와도 연루되어 있다. 소재의 선택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서 두루 마찬가지다.
시인은 늘 틀을 깨부수는 자이며, 새것을 찾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열정이 늘 따라야 된다. 삶의 문제에 관하여 세계에 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이 무엇인가, 선이 무엇인가, 미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추구해야 한다. 시인이 불안해 보이고, 불온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랜만에 그동안 써온 시편들을 일단 정리하면서 이 시인에게 나는 답답할 정도로 꼼꼼한 ‘시학’으로서의 모범적인 시 쓰기의 구속에서 좀 벗어나는 그런 용기를 갖도록 주문한다. 튼튼한 엄기창의 시학을 토양으로 하여 변모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글
▪해설
눈부신 서정과 맑은 향기
― 엄기창 시인의 시세계
리 헌 석
(시인, 문학평론가, 대전문인협회 회장)
1.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어릴 때 떠내려간/ 태화산 그림자를 건지려고/ 서해 바다에 갔었네>(「세월」일부)라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1951년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그곳에는 태화산이 있고, 그 자락에서 곱고 맑은 향토적 서정을 익힌다.
그는 세월을 거슬러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풀꽃’을 그리워한다. 맨발에 신겨 주던 ‘꽃신’과 날려보낸 연(鳶)의 추억이 아직도 ‘그림자’로 가슴에 남아 있다. 아련하게 그리운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에 머물려고 몸을 추슬러 보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초승달’이 오히려 그리움의 정서를 일깨운다.
번지 없이 띄워 보낸
내 풀꽃은
흔적이 없고
맨발 위에 신겨준
꽃신만 한 짝
파란 하늘 보고 돌아누워 있었네.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연(鳶)처럼
영원히 잃어버린 내 그림자여,
물빛 흔들어 몸을 감추고
닫아 거는 가슴엔
날선 초승달 하나.
―「세월」 일부
산촌에서 소년기를 지난 그는 중소도시 ‘공주’로 유학을 한다. 그 곳에서 그는 학업에 정진함과 동시에 문학의 꿈을 가꾸게 된다.
공주영명고등학교 재학 시절 ‘팔각정문학회’의 일원으로 문학 청소년기를 보낸다. 당시 대학에 재학 중인 윤석산 시인이 자주 찾아와 문학혼을 일깨우고, 유병학 시인은 국어 지도교사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선배인 문희봉, 김영훈, 전영관 등으로부터 문학 창작의 열기를 이어받는다. 필자는 그와 동기동창이면서 같은 서클 동인으로, 문학의 꽃을 함께 가꾼 지기지우(知己之友)였는데, 80년대에 다시 만나 문인의 길을 같이 가고 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한다. 당시 공주사대에는 ‘수요문학회’가 치열하게 활동할 때여서, 그의 문학혼은 일찍 개화하게 된다. 임헌도 조재훈 한상각 시인을 교수로 만나고, 선배인 임강빈 임성숙 최원규 김명배 등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명수 구중회 윤강원 등의 선배 동인을 만난다. 당시 수요문학회는 작품 합평회를 통해 작품 수준을 높이고자 절차탁마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수련을 거쳐 그는 재학 중인 1974년에 《시문학》 주최 제1회 전국 대학생 시 공모에서 당선하여 1회 추천의 대우를 받는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군 복무 중인 1975년에 완료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는 중등학교 청년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의 삽질을 쉬지 않는다. 1980년대에는 ‘오늘의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예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1993년에 첫 시집 『서울의 천둥』을 발간한다. 향토적 서정이 넘치는 작품 성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제목의 시집이지만, 이 시집에는 엄기창 시인의 결 고운 서정이 가득하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현(絃)을 베고 누운 음(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음(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음(音)들로 구상(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서곡(序曲)」 전문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노래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그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인지, 혹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인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스스로 노래에 일가견을 가진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현을 통해 생성된 소리들이 그의 목젖을 통해 노래로 거듭난다는 표현에 이르면, 그는 노래를 듣는 수준에서 주체가 되어 부르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노래는 ‘새’의 노래와 동일시되고 있다. 즉 새의 울음소리로 상징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음들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한다. 여기에서 노래라고 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정형화된 예술 행위로 수용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를 읊거나 짓는 행위 또한 ‘노래한다’고 하는 점에 이르면, 그의 노래는 시 창작 행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어떻든 그는 고운 서정과 맑은 향기가 넘치는 작품을 빚고 있다. 그러한 작품이 최근에는 우리 고유의 정가(正歌)인 ‘시조’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에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연륜을 가늠하게 한다. 다작(多作)과 과작(寡作)을 뛰어넘어, 쉬지 않고 창작에 전념하여, 둘째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2. 금강의 여울소리를 찾아
<그대 속삭임 들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돋움하는/ 키 큰 나무가 되고 싶다.>(「금강」일부)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금강을 주제로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에 있는 무성산․태화산․철성산에서 흘러내린 태화천 계곡의 물은 구불구불 흘러서 유구천에 이른다. 다시 이 냇물은 산 그림자와 들녘의 바람을 데리고 금강에 이르는데, 바로 이 지점이 금강의 디디울나루 아랫녘이다. 디디울나루는 금강의 여울과 유구천의 여울이 만나서 이룬 ‘덧여울’이었는데, ‘더뎌울’ ‘데디울’ ‘디디울’로 변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는 금강의 상류에서부터 ‘곰나루’(디디울나루의 약간 상류)에 이르기까지를 맑은 서정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어서 그의 시혼(詩魂)은 금강의 하류인 황산나루나 백제의 역사가 잠겨 있는 부여의 백마강을 거쳐 서해 바다에 이르러 결곡한 서정을 형성하기도 한다.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
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금강」 일부
그는 또 다른 작품 「금강」에서 <하늘의 맑은 마음 한 자락/ 내려와 손을 씻는 비단가람>이라고 노래한다. 그의 의식 속에는 세세한 추억과 삶의 양상이 금강과 맞닿아 있다. <어릴 때 잃어버린 내 따오기 소리>도 금강에서 찾아내고, 상류에 있는 무주구천동의 물소리처럼 반짝이는 여울도 찾아낸다. 또한 그는 <오래 보지 않아도/ 그 노래 그 물빛 마음에 젖어/ 눈감으면 나직이 우는 가람>과 함께 살아간다.
금강은 나직하게 울면서 아름다운 산 그림자를 싣고 내려간다. 「산수도(山水圖)」에서 그는 개나리꽃에 불을 붙이는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기도 하고, 시인 스스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온갖 골물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는 낚시를 하는 노옹(老翁)에 시선을 멈춘다. 그 노옹의 낚시 끝에 걸린 ‘청청한 산그림자’를 발견하는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낚시터에서」라는 작품을 통해 <빈 바구니에/ 달빛만 가득 채워도/ 세상을 늘 사랑할 수 있다.>고 노래하여 동양적 세계관, 즉 허정(虛靜)의 시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허정의 시심은 자연을 관조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직접 노래하지 않고, 제3자적 관찰자 입장을 취하기도 하는데, 비유적 감각이 눈부시다.
하얀 돛단배가
아침의 건반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파도에 몸을 던지고
잊었던 리듬을 생각하는 갈매기,
쾌적한 바람이 햇살 층층을 탄주한다.
미역 숲에서 멸치 떼들이
오선의 층계를 올라간다.
갈매기 노란 부리가
번득이는 가락을 줍고 있다.
밤내 뒤척이던
허전한 어둠의 꿈밭
소라껍질이 휘파람 불며
모래알 손뼉을 쳐 뿌리고 있다.
얼비친 하늘의 푸른 물살을 타는
갈매기 눈알에
잊었던 리듬이 내려앉는다.
하늘 속의 빛이랑이 내려앉는다.
―「아침 바다」 전문
어찌 보면 단순한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난해한 것 같기도 한 이 작품은 바다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아침 바다에 하얀 돛단배가 지나가고, 갈매기가 먹이 사냥을 한다. 이미 생명을 잃은 소라껍질은 모래알이 묻은 상태로 해변에 버려져 있는데,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갈매기는 바다와 하늘을 유영한다. 이런 서경을 독자적인 시어와 문학적 감수성으로 빚어낸 절창이라 하겠다.
그는 강에 대한 사랑도 특별하지만,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바다에 대한 노래도 곡진하다. 「어촌」에서 그는 <물비늘 번득이는 바다의 자유>, 까치집처럼 열려 있는 아낙들의 빈 가슴, <돛대 끝이 휘저어 놓는 하늘>, 투시의 눈을 반짝이는 하얀 갈매기, 바다의 노래를 실러 떠나는 바다의 노래, 등의 특별한 형상화를 보인다.
또한 「후리」를 통해 <달빛 아래 퍼덕이는 절망의 바다>를 찾아내기도 하고, 「섬」에서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를 찾아내기도 한다. 「제주해협」에서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을 통해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을 찾아 <무릉도원>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이렇듯이 물의 이미지에 특별한 자질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태화천의 맑은 물소리에 연유하는 것 같다.
3. 눈물 빛 사친가(思親歌)에 같이 울며
<상여 뒤 따르며 울 때는/ 솔방울마다 요령 소리로 울어/ 하늘이 무너지더니/ 남같이 낯설어진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아버님 무덤>(「성묘(省墓)」 일부)에 머리 숙여 눈물 흘리는 엄기창 시인은 절절한 슬픔을 예술적 서정으로 승화시킨다.
<저승은 늘 춥고 바람 불 텐데/ 제 염려 거두시>라고 말씀드리며 절을 해 보지만, 생전의 아버지 음성이 들려 오는 것만 같다. 머리 위 상현달은 바로 아버지의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별세하신 육친에 대한 그리움은 시인의 의식을 사물의 테두리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온갖 사물들이 육친과 연결되고, 그 범주에서 연상의 구체화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엄기창 시인은 격정적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격조를 지킨다. 그 서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고,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를 형성한다.
아버님 목소리 땅에 묻던 날
대밭에서는
하루종일 대순이 돋았습니다.
한 줄금 내린 소나기로
목타던 대지가 젖어
취나물 향기 이내처럼 번지고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며
개나리꽃 빈 가지에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착하게 사신 생애 기름으로 태워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셨나,
철성산 풀빛 짙어오는
풀빛 속에나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태화천
물소리 속에
아버님 모습을 늘 뵙니다.
―「아버님 전 상서」 전문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는 봄날에 그는 선친께 편지를 쓴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신 아버지를 그린다. 이 작품은 후에 시조로 거듭나기도 한다.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무덤가에// 눈시울 적시며/ 절하고 돌아서면// 내딛는 발자국마다/ 밝혀주는 초승달>(「성묘」 전문)이라고 사친(思親)의 절절함을 노래한다. 이 시조는 앞에서 예를 든 서정시의 다양한 표현 요소 중에서 핵심 요소만 추출하여 형상화한 작품이어서 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애절한 사친가(思親歌)는 사모10제(思母十題)를 비롯한 사모의 정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다. 어머니가 별세한 때부터 열 가지 과정을 통해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 바로 ‘사모 10제’인 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어머니에 대한 작품들을 통해 눈물 어린 사모곡(思母曲)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안수」에서 <찢어진 문틈으로 보던 어머님의 합장한 손> <살포시 지은 미소에 성스러운 그 눈빛> <정안수 대접에 담긴 어머님의 큰사랑> 등은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담아낸다.
둘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가슴에 묻은 이름」에서 그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도 꺼지지 않으려고/ 날개 파닥이는 등불을 보며/ 어머니의 생애를 접어/ 가슴에 묻는>다고 노래한다. 현실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산에 묻지만, 사실은 그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엄기창 시인 역시 선자(先慈)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어머님 이름이 지워지자
고향 빛깔은
막막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임종(臨終)」(思母十題 1) 일부
오르막길 오를 때마다 상여는 멈춰 서고
상주들은 너도나도 돈을 거는데
어머님은 빈 손 맨발로 떠나
저승의 어느 주막에서 울고 있을까.
―「운상(運喪)」(思母十題 2) 일부
사잣밥상 아래
백목련 꽃 두어 이파리
어머님이 벗어 던진 이승의 신발
―「고무신」(思母十題 3) 일부
자식 둘 앞서 보낸 눈물의 생애를 묻고
맨발로 헤쳐 온 아픈 역사를 묻고
어머니의 향기를 묻는다.
―「하관(下官)」(思母十題 4) 일부
생전에 못 사드린 과일로
제사상을 채우며
이제는 장식에 지나지 않음에 가슴 아파합니다.
―「사십구재(四十九齋)」(思母十題 5) 일부
부모를 여읜 자녀라면 누구나 체험했을 가슴 아픈 노래이면서, 엄기창 시인의 진실 어린 고백이기도 하다. 누구나 이러한 애절함을 느꼈을 터이지만, 그 애통함을 그냥 가슴에 묻어둔 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노래한 이 작품들은 애상적 정서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슬픈 노래를 계속한다. <어머님 아린 가슴에/ 뽑혀지지 않는 대못>(돌무덤), <산천에 봄이 왔지만/ 내 가슴은 겨울입니다>(기다림), <어둠을 환히 태우고도 남을/ 시퍼렇게 날 선 눈물을 보았습니다.>(눈물), <살아생전 마음 한 번/ 편하게 못해 드린/ 내 마음의 빛깔은/ 잿빛 후회입니다>(어머니), <어머님 눈동자에 맑게 고인 하늘로/ 하얀 구름 되어 떠나셨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흑백사진 속에서/ 어머님의 나이는/ 언제나 서른입니다>(흑백사진) 등 그의 사모곡은 그칠 줄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아내가 채운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사랑이 가득 담긴 축시(祝詩)를 빚는다. <생활의 아픈 멍울 가슴으로 싸 안으며/ 얼굴엔 항시 햇살 같은 웃음으로 어둠을 밝혀/ 바라보면 고향같이 편안한/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일곱 살 철부지>가 된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아내로부터 모성을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속에 묻어 둔 사랑의 촛불>을 밝혀 아내에게 씌워진 <생활의 짐>을 벗기고자 한다.
이렇듯이 그는 사랑 안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어린 소년과 같다. 지천명(知天命)의 연치(年齒)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년과 같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다.
4. 생명의 원천을 지키기 위해서
<강물은 그저/ 헐떡이고만 있었다.// 키 큰 미루나무 가지 사이/ 거미줄 속엔/ 강물의 핏빛 울음만 걸려 있었다//…// 검게 썩은 물빛 문둥이처럼/ 강의 신음소리>(「강변 야영」일부)가 밤새 시인의 꿈 밭으로 흘러든다고 노래하는 엄기창 시인은 자연 환경의 중요성을 작품으로 환기시킨다.
오염된 강에서 시인은 환경 파괴의 무서움을 토로한다. 「갑천 붕어」는 아파트 그림자를 산 그림자로 알고 올라온다. 그러나 상류로 오를수록 <검은 폐수만 흘러내려/ 앞길은 깜깜하게 막혀> 있다. 그래서 <붕어의 눈물 속에서/ 납물>이 흐를 정도로 오염된 상황을 만난다. <등뼈 굽은 새끼를 안 낳으려고/ 붕어는 자갈밭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고 노래한 부분에서 그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엿보게 된다.
강물만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소나무」에서도 <찢어진 살갗에서/ 중금속 피가 흘렀다>고 고발한다. 그런 소나무를 보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멀어지는 산의 마음>을 찾아내며 시인은 절망한다. 특히 일급 자연으로 유명한 지역, 수려한 산촌의 대명사로 알려진 ‘청양’마저 오염되었다는 데에 이르면 삶의 위태로움을 예견하게 한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개구리 울음 하나 지나갔다.
별똥별처럼
타버리고 다시는 반짝이지 않았다.
칠갑산 큰 어둠은
돌 틈마다 풀꽃으로
개구리 울음을 품고 있지만
기침 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
가슴을 닫았다.
차창을 더 크게 열어봤지만
청양을 다 지나도록 청양 개구리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청양 개구리」 전문
환경 오염에 의한 개구리의 감소를 밝히는 것인지, 혹은 무차별 개구리를 포획하여 보신하는 세태를 고발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의 부재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의 중심 제재는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는 <청양 개구리>라 할 때, 자연 파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는 노래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실망은 인간 삶의 양식으로 전이된다. 우리 나라 도시의 표상인 서울에 대해 시인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서울의 천둥」에서 그는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고 진술한다.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우르릉 울고 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부정적 시각을 표출한다. 서울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지만, 그의 시심은 절망적 색채에 싸인다. 이러한 절망은 꼭 ‘서울’이라는 특수 지명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넘치는 ‘도시’의 일반화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여 거듭나고자 한다. 극복의 매체로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주문한다.
꽃도
꽃의 마음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황홀한 몸짓의 장막 뒤엔
말라 시들은 노래도 있겠지
꽃잎을 먹고사는 어둠의 벌레들이
고랑처럼 파 놓은
상처들도 있겠지.
날 선 눈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아름다운 눈으로 보아야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 보기」 전문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성싶다.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더럽고 부정적인 사물까지 아름답게 노래한다면, 그것은 진실의 은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둔 현실에서도 아름다운 시심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 같다. 「빈 접시」에서 그는 <내가 꽂아 주는 억새꽃으로/ 오늘밤 네 고향 산에/ 칠색 영롱한 무지개를 걸>라고 청하기도 한다. 「달맞이꽃」에서는 자녀들에게 <올해는 헐벗은 가슴에/ 전설 같은/ 이 애비의 어릴 적 보름달을 안>으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세상을 지탱하는 벼릿줄이고, 순수를 지킬 수 있는 대안(代案)임을 노래하여 맑은 시심을 견지하고 있다.
5. 연화교에서 부는 바람처럼
<잠 못 드는 노승의/ 천수경에 달은 지고// 불심은 태화천에 녹아/ 사바세계로 흐른다>(「마곡사」 일부)고 노래한 엄기창 시인은 어릴 때부터 불교적 환경에서 자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작품에는 불교적 시심이 짙게 깔려 있다. ‘마곡사’는 그의 고향 마을에 있는 천년 고찰(古刹)로 조계종의 본사 중의 하나인데,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여러 분 배출되어 유명한 절이다.
큰 절이 대부분 그렇듯이 마곡사에도 연화교와 오층석탑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연화교 건너서면/ 솔바람 풍경소리// 향내 서린 잎새마다/ 불경 소리 담겨 있고// 법계를 지키고 서서/ 침묵하는 오층석탑>을 노래한다. 불심이 태화천에 녹아 흐른다거나, 나무 잎새마다 불경 소리가 담겨 있다는 관점은 바로 온갖 사물에 불심(佛心)이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해당한다. 또한 사물과 불성(佛性)을 하나로 보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목탁소리 눈을 뜨면
안개 낀 다리를 건너
손짓하는 사바의 마을
―「연화교에서」 전문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1연(시조의 초장)이라 하겠다.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는 시각은 대상과 본질의 역설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시냇물이 흘러가고, 나는 다리에 서 있는데, 다리에 서서 바라보면 그와 달리 착시(錯視) 현상에 빠지게 된다. 시인은 이런 현상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밝힌다. 즉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선어(禪語)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한다.
이런 시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매일 아침 되씹는 절망을 접으며/ 오늘도 나는 웃는 연습>(비온 날 아침)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또한 <더운 피 온 몸을 태워/ 어둔 세상 밝>(해돋이)히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에 이른다.
향일암 석등(石燈) 안
찰람찰람 고인 고요를
새벽달이 갸웃이 훔쳐보고 있다.
파도 소리에 씻겨진
동백꽃 봉오리마다
세상 밝히는 꽃불을 켜면
먼 수평선 일어서는 눈부신 평화(平和)
관음상 입가에 살포시
미소로 번진다.
―「향일암 일출」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며, 엄기창 시인은 눈부신 평화를 위하여, 늘 관음상 입가에 번지는 미소처럼 맑은 마음을 지향할 것 같다. 그리하여 어둔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자리할 것 같다. 이제까지 고운 서정과 맑은 향기가 넘치는 작품을 창작하였듯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본다. 이런 기대와 믿음으로 그의 작품 기행(紀行)을 마친다.
글
엄기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를 읽고
시 인 차 승 열
우편함에서 누군가 보내준 책을 꺼내보는 일은 썩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요즈음 같은 디지털 시대에 새하얀 종잇장에 찍힌 갓 세상에 나온 활자 냄새를 맡는 일은
아련한 향수마저 불러온다.
"세한도에 사는 사내"라~
먼저 시집을 상재하신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시집 <세한도에 사는 사내>, 도서출판 이든북, 2017.9.27 | 암마저 나았다는 한 시인님의 말을 들으며, 시가 어떤 사람의 삶에는 밝은 등불이 될 수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시에 꽂히게 했으면 좋겠다. |
엄 시인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80년대 중반 <오늘의문학회>에서 일이니
선배님과 교분을 이어온 지도 줄잡아 30년은 넘었지 싶다.
엄 시인은 '엄부처'라는 별명처럼 천성적으로 온화한 인품을 타고 나신 그야말로 충청도 양반 중에
양반이시다. 시풍도 그가 태어난 공주 마곡사의 수려한 땅 기운을 받았음인가
결 고운 서정으로 채색된 그의 시편들에는
세상의 바라보는 깊고 따뜻한 시선이 담긴 느릿한 충청도 말씨가 담겨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은퇴의 졸업장을 받아들고 그야말로 은빛으로 빛나는 날들을 보내고 계신
엄 시인님의 네 번째 시그릇에는 어떤 시들이 담겨있을까?
엄 시인이 살고 계신 세한도의 달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스승
김정희를 위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구해온 귀한 책들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편지에
그려진 작은 그림으로, 제자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한 문인화이다.
추사는 전과 다름없이 스승으로써 자신을 섬기는 고마운 제자에게 이렇게 썼다.
"더구나 온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ㆍ이익만을 붙쫓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허비하고도 권세ㆍ이익에
돌리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외의 한 초췌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돌리기를 마치 세상이 권세ㆍ이익에
붙쫓는 것과 같이 하니 어인 일인지요."
그렇다면 엄 시인님에게 세한도는 무엇이었을까?.
작품해설을 쓰신 문학평론가 조혜옥 님의 말처럼, 엄 시인님에게 세한도란?
"한 사내의 기개와 청청한 외로움'을 간직한 시적 공간이라는데 동의한다.
엄 시인님은 권세와 이익을 좇는 화려함과 거짓됨으로 치장된 세상을 초월한 세한도의 달집에 은둔해
살면서 시집 <세한도에 사는 사내>에 실린 여러편의 시에서 보듯이
부모에게는 착한 자식으로써, 아내에게는 믿음직한 남편으로써, 자식에게는 인자한 아비로써,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후학양성에 평생을 몸바쳐온 교사로써 선비로써,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서예가, 금석학자, 화가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세상의 버림을 받아 긴 세월 동안 유배지를 떠돌아야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추사처럼 자신만의 기상과 지조를 키워왔던 것이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열려진 달집의 작은 문을 통해 시로써 세상과 소통해왔던 것이다.
엄 시인님을 쏙 빼어닮은 시 몇 편을 더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