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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6시집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에 해당되는 글 110건
글
홍시를 보며
저렇게 익을 대로 익었으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게다
늦가을 천둥이 울다가 가고
눈보라가 서너 번
흔들고 가도
그믐달처럼 한사코
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게다
저렇게 삭을 대로 삭았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게다
산다는 게 때로는 시들해지고
아픔이 술래인 듯
잡으러 와도
고목처럼 봄이면
싹을 틔우는 이유가 있을 게다
글
남자
남자는 교목喬木처럼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높이 올라
세상을 넓게 보고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굽히지 않고 뚝심 있게 나아가야 한다
끊임없는 정진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크게 세우고
백 사람이 백 말을 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역사의 입이 두려워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끝까지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글
명량의 아침
아직도 그 때 그 목소리로
바다가 우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라가 요 모양 요 꼴로
저희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저 소용돌이치는 운명의 물살에
배를 띄우랴
남도의 피는 천년을 한결같이
황토 빛깔인데
열두 척의 배는
철쇄로 단단하게 묶여있구나
동녘 바다에 해가 떠오른다
잠 못 들고 서서 새우는 충무공의
칼을 빌려
불의를 자른다 큰 외침 토해낸다
글
충청도 사람
충청도 사람은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 말을 하고
경상도에 가면 경상도 말을 한다
밸도 없다고 욕하지 마라
충청도 사람은 진짜다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
자기들 끼리만 붙안고 사랑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허리를 굽혀
모난 손들을 하나로 모을 줄도 안다
타고난 피 빛깔이
황토처럼 붉은 색이 아니고
동해바다처럼 푸른색도 아니라서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적 청이 한반도의 테두리 안에서
함께 어우러진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
경부선과 호남선이 충청도에서 만나
하나가 되듯
다 같이 손잡고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가자
글
대보름달 떴다
우리들의 아픈 시간은
해가 지고 나서 다시 달이 뜨는 시간만큼의
잠깐이었으면 좋겠다
불 깡통에서 눈썹 센 별들이
은하처럼 쏟아지는 만큼의 찰나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마음에 둥그렇게 달이 떠오를 때
달집을 사른다
코로나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겨울을 태우고
먹을 것이 없는 마을의 막막한
그믐밤의 절망을 태우고
액운이 깃든 영혼의 저고리 동정을 태우듯
세상의 모든 아픔을 불속에 던져 넣는다
보아라!
망월굿 춤사위 속
그림처럼 살아나는 우리의 산하
먼 산이 검은 그림자 딛고 일어서고
나무들 찬바람 속에서도 분분이 손 흔들어
봄을 부르노니
시대의 밤아 가거라
우리들 마음 가장 높은 곳 어느새 하늘만한
새 정월의 대보름달이 떴다
글
도자기 무덤에서
흠 있는 것들끼리 거기 모여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다
깨어진 것들끼리 거기 모여서
서로의 절망을 다독여준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은 모르리라
이렇게 어둡고
추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삶의 받침대에
손때 한 번 못 묻히고
지옥 불 나오자마자
산산이 깨어진 목숨이 있다는 것을
글
징검다리
하나쯤은
이가 빠져 있어도 좋다
네가 내게 들어와
삶을 춤추게 하던 그 다리 같이
등이 간지러운 시간만큼
설렘이 부풀어 올라
그 날 산바람에 묻어오던
뻐꾸기 소리처럼
올 것만 같다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아
글
팔월의 눈
그 날 아버지는 구급차를 타고
눈보라치는 연미산 고개를 넘으시면서
하얗게 덮인 금강의 백사장이며 빨랫줄처럼 흔들거리는
공산성의 성벽들을 샅샅이 눈에 담으셨다.
“내가 이제 여기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아버지의 쉰 목소리에서 눈바람소리가 울렸다.
쉰아홉에 휘몰아친 팔월의 눈보라
간이 돌처럼 딱딱해져서
수술도 할 수 없다는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몇 마지기 땅뙈기로 아들 셋을 대학 보내며
꿈꾸었을
아버지의 무지개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나는 벌판처럼 쓸쓸해진 그의 시선을 피해
너무도 일찍 와버린 아버지의 겨울을 생각했다
첫 월급을 타서 보낸 한약 한 재가
아버지의 삶에 이른 눈보라를 불러왔을까
아들의 첫 선물에 너무도 좋아하던 환한 얼굴 너머로
죄책감처럼 몰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꺼질 듯 꺼질 듯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삶의 된서리에도 푸르게 견뎌가던
명아주 한 포기 시들어가는 소리였다.
그 해에는 눈도 참 일찍 왔다
글
득음得音
상수리나무 잎새에 매미 소리가 박혀있다
한 달의 득음得音을 위해
칠 년을 침묵의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한
고단한 생애가 판화처럼 찍혀있다
매미는 알았을 것이다 때로는 덧없는 길도
묵묵히 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노래 한 곡 반짝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명가수의 뒷모습이나
하루의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우화羽化가
결코 부질없는 생애는 아니라는 것을
매미가 한 달을 소리쳐 울기 위해
칠 년을 고행 하듯이
시 한 편 남기기 위해 메아리 없는 외침
수도 없이 외쳐대는 시인들이여
모아이 석상처럼 매미는 시력을 반납한 채
껍질로 남아 지켜보고 있다
자신의 득음得音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려줄 것인지
사람들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인지
세상에 무의미한 생애란 없다
글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가을은
오래 묵혀두었던 그리움을
꺼내보게 하는 계절
은행잎마다 내려앉은
노란 그리움에 같이 물들다 보면
서랍 속에 넣어둔 편지를 읽게 된다
그리움은 나비이다
보고싶다보고싶다보고싶다
갈바람 한 줌에도
무수히 날아오르는 그리움의 군무
진정한 그리움은
너에게 닿지 못 한다
간절함의 무게로 떨어져 흙이 된다
줍지 마라
흘러간 사랑은
흙이 묻은 채 그냥 놓아두어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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