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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6시집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에 해당되는 글 110건
- 2022.11.12 가을의 파편
- 2022.09.23 꽃
- 2022.09.02 벌레의 뜰
- 2022.08.31 4월의 눈
- 2022.08.21 꽃으로 피고 싶다
- 2021.05.05 내려가는 길
- 2021.04.24 고사古寺에서
- 2021.01.30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 2021.01.20 수련睡蓮이 피는 아침
- 2020.12.25 찔레꽃 피던 날
글
가을의 파편
조그만 은행잎엔
오롯이 가을이 담겨있다
속삭이는 햇살과 나른한 눈빛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의 마음
나는
가을이 가장 눈부시게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 가슴에 깔고
세상에 반짝이는 모든 슬픔들
널어 말린다
꽃처럼 떨어진 젊음들과
레일에 깔린 비명
노릇노릇 향기롭게 말라갈 때쯤
아!
세상의 눈물들아 이젠 모두 가자고
나비처럼 모여 팔랑대는 가을의 파편
글
꽃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날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글
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글
4월의 눈
잠 안 오는 밤 접동새 불러
배나무 밭에 가면
4월에도 눈이 온다
보아라!
푸른 달빛 아래
다정한 속삭임의 빛깔로 내리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사위
외로움 한 가닥씩 빗겨지며
비로소 지상에는 빛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배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손 흔들고 떠난 사람 얼굴마저 흐릿한데
사월 분분히 날리는 눈발 아래 서면
왜 홀로 슬픔을 풀어 춤사위로 녹이는가
접동새 울음은 익어
은하수는 삼경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는 언약처럼
분분히 무유의 흙으로 떨어지는 꽃잎
돌아서서 눈물을 말리는 것은
다정도 때로는 병이 되기 때문이다
글
꽃으로 피고 싶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털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글
내려가는 길
인생길 내려가다가
길가 풀밭에 편하게 앉아
풀꽃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서두를 일이 없어서 참 좋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못 들었을까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생명들의 속삭임
올라가는 길에서는
왜 못 보았을까
반겨주는 것들의 저 반짝이는 눈웃음
아지랑이 봄날에는 투명한 게 없었지.
서둘러 올라가
하늘 곁에 서고 싶었지.
모든 걸 내려놓고 앉은 후에야
아름다운 것 아름답게 보고 듣는
눈귀가 열려
노을에 물들면 노을이 되고
가을에 물들면
가을이 된다.
2021. 5. 5
『대전문학』93호(2021년 가을호)
글
고사古寺에서
사랑은 저 대웅전 단청처럼
목탁소리 쌓여서
바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염불하는 저 노승의 얼굴처럼
풍경소리에 쓸린다고
자글자글 주름만 파여지는 것이 아니다.
옅어지며 법당의 향내가 묻어
더욱 익숙해지고 정이 가는 것
갈피마다 세월이 익어
더욱 깊어지는 것
소나무 길로 둘이 손잡고 걸어가면
넘어가는 노을도
지나온 발자국을 식지 않게 덮어주는 것
『문학사랑』137호(2021년 가을호)
글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그리움은
그리운 채로 그냥 남겨두자.
밤하늘 별들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어 신비로움이 살아있기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사랑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만나자는 말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만나서 그리움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마음속의 보석 하나를 잃는 것이다.
2021. 1. 30
글
수련睡蓮이 피는 아침
당신의 웃음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의 향기는
물속에서도 씻겨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낮은 쪽에서
수줍은 미소로 피어
생우유 빛 살결과
밀어가 녹아있는 불타는 꽃술
아! 당신은
한 번 빨려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늪 같은 사람.
2021. 1. 20
『문학사랑』136호(2021년 여름호)
글
찔레꽃 피던 날
찔레, 싱아 꺾어 먹다
소쩍새 소리에 더 허기져서
삶은 보리쌀 소쿠리로 달려가
반 수저씩 맛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밥보자기 치워놓고
정신없이 퍼먹다 보니
밥 소쿠리 텅 비었네.
서녘 산 그림자 성큼성큼 내려올 때
일 나갔던 아버지 무서워
덤불 뒤에 숨어 보던
창백한 낮달 같은 얼굴
하얀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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