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파편

 

 

조그만 은행잎엔

오롯이 가을이 담겨있다

 

속삭이는 햇살과 나른한 눈빛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의 마음

 

나는

가을이 가장 눈부시게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 가슴에 깔고

세상에 반짝이는 모든 슬픔들

널어 말린다

 

꽃처럼 떨어진 젊음들과

레일에 깔린 비명

노릇노릇 향기롭게 말라갈 때쯤

 

!

세상의 눈물들아 이젠 모두 가자고

나비처럼 모여 팔랑대는 가을의 파편

 

posted by 청라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날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posted by 청라

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posted by 청라

4월의 눈

4월의 눈

 

 

잠 안 오는 밤 접동새 불러

배나무 밭에 가면

4월에도 눈이 온다

보아라!

푸른 달빛 아래

다정한 속삭임의 빛깔로 내리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사위

외로움 한 가닥씩 빗겨지며

비로소 지상에는 빛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배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손 흔들고 떠난 사람 얼굴마저 흐릿한데

사월 분분히 날리는 눈발 아래 서면

왜 홀로 슬픔을 풀어 춤사위로 녹이는가

접동새 울음은 익어

은하수는 삼경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는 언약처럼

분분히 무유의 흙으로 떨어지는 꽃잎

돌아서서 눈물을 말리는 것은

다정도 때로는 병이 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청라

꽃으로 피고 싶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털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posted by 청라

내려가는 길

 

 

인생길 내려가다가

길가 풀밭에 편하게 앉아

풀꽃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서두를 일이 없어서 참 좋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못 들었을까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생명들의 속삭임

 

올라가는 길에서는

왜 못 보았을까

반겨주는 것들의 저 반짝이는 눈웃음

 

아지랑이 봄날에는 투명한 게 없었지.

서둘러 올라가

하늘 곁에 서고 싶었지.

 

모든 걸 내려놓고 앉은 후에야

아름다운 것 아름답게 보고 듣는

눈귀가 열려

 

노을에 물들면 노을이 되고

가을에 물들면

가을이 된다.

 

 

 

2021. 5. 5

대전문학93(2021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고사古寺에서

 

 

사랑은 저 대웅전 단청처럼

목탁소리 쌓여서

바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염불하는 저 노승의 얼굴처럼

풍경소리에 쓸린다고

자글자글 주름만 파여지는 것이 아니다.

 

옅어지며 법당의 향내가 묻어

더욱 익숙해지고 정이 가는 것

갈피마다 세월이 익어

더욱 깊어지는 것

 

소나무 길로 둘이 손잡고 걸어가면

넘어가는 노을도

지나온 발자국을 식지 않게 덮어주는 것

 

문학사랑137(2021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그리움은

그리운 채로 그냥 남겨두자.

밤하늘 별들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어 신비로움이 살아있기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사랑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만나자는 말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만나서 그리움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마음속의 보석 하나를 잃는 것이다. 

 

2021. 1. 30

 

 

posted by 청라

 

수련睡蓮피는 아침

 

 

당신의 웃음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의 향기는

물속에서도 씻겨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낮은 쪽에서

수줍은 미소로 피어

 

생우유 빛 살결과

밀어가 녹아있는 불타는 꽃술

 

! 당신은

한 번 빨려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늪 같은 사람.

 

 

2021. 1. 20

문학사랑136(2021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찔레꽃 피던 날

 

 

찔레싱아 꺾어 먹다

소쩍새 소리에 더 허기져서

삶은 보리쌀 소쿠리로 달려가

반 수저씩 맛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밥보자기 치워놓고

정신없이 퍼먹다 보니

밥 소쿠리 텅 비었네.

서녘 산 그림자 성큼성큼 내려올 때

일 나갔던 아버지 무서워

덤불 뒤에 숨어 보던

창백한 낮달 같은 얼굴 

하얀 찔레꽃.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