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에

 

 

하늘에 올라갔으면

구름이 되어 떠돌 것이지.

하얀 솜털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허리 굽혀 내려오는가.

이제 기쁨의 노래가 되어

가장 낮은 곳을 흐를 것이다.

기가 부족해 황달로 삭아드는

나무의 뿌리에 온기를 전해주고

봉오리 터뜨리기에는 뒷심이 딸리는

풀꽃의 줄기에 숨결을 보탤 것이다.

겨울이 시들어 강산에 추위 풀리면

네 겸손한 하강下降으로 인해

온 천지에 푸른 새싹 돋아나고

꽃들 세상 밝히는 등을 켜들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머물러 양광陽光을 가리는

검은 구름으로 살기보다는

가장 낮은 곳을 흐르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웃음이 되고, 온기가 되고

말씀이 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가장 좋은 삶은 물과 같다는 말을 알 듯도 하다.

 

 

2017. 11. 24

시문학20183월호

posted by 청라

억새

억새

 

 

억새는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지를 안다.

외딴 산기슭 홀로 서 있을 때는

진한 울음이던 것이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모여서 아픈 살 비벼주니

얼마나 흥겨운 노랫소리냐.

깜깜한 밤에도 억새는 콧노래 흥얼거린다.

바람이 없어도 삶을 춤추게 하는 것

그것이 서로의 눈빛임을 안다.


시문학20183월호

 

 

 

 

posted by 청라

사람의 향기

          - 아름답게 살다 간 김영우 시인을 추모하며

 

            

꽃처럼 산 사람

지고 나서도 꽃

 

세상을 맑게 씻어주는

사람의 향기여

 



문학사랑126(2018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산책길에서

 

 

아침 길에서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 있고

 

인사를 해도

안 만나는 것만

못한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침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환한 꽃을 달아줄 수 있을까.

 

잎이 유난히 더 곱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산골 물 같은 하늘에 헹궈

웃음 한 조각

반짝반짝 닦아본다.

 

 

2017. 11. 7

시문학20183월호

posted by 청라

단풍

단풍

 

 

삶을 어떻게 가꾸어야만

저런 빛깔로 익어갈 수 있을까

 

산은

세상의 아픔들 모두 모아

담뿍장처럼 삭히고 있다.

 

빨강, 파랑, 노랑

하나씩 들춰 보면

톡톡 쏘는 뾰족한 것들인데

 

가마솥에 모아 끓이듯

젊은 날의 모든 아우성

저렇게 뒤섞여 녹고 있는가.

 

내 나이 칠십 언저리

바람이 차가울수록 짙어지는

산의 홍소哄笑에 함께 물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2017. 11. 5

 대전예술201712월호

순수문학201810월호(299)

 

 

posted by 청라

남가섭암 불빛

 

 

어머니 제사 지내러 늦은 날

회재를 넘어서면

철승산 꼭대기

남가섭암 불빛이 나를 반겨줍니다.

 

깜깜할수록 더 밝게

내 마음으로 건너옵니다.

 

등창만 앓아도 십이월 찬 새벽

눈 쌓인 비탈길 쌀 한 말 이고

남가섭암 오르시던 어머니

 

부엉이 울던 달밤

장독대 뒤에

물 한 사발 떠놓고 비시던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이 아들 고희 가까이 무탈하게

시인이 되어

시 잘 씁니다.

 

제사 지내고 고향 떠나며 다시

회재를 올라서면

앞길 비춰주려고 불빛이 앞장섭니다.


2017. 11. 1

문학사랑123(2018년 봄호)

posted by 청라

그리움 목이 말라 죽고 싶을 때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채로 그냥 놓아두자.

책갈피에 꽂아놓은 클로버 잎새처럼

푸른빛이 바래지 않게 그냥

추억의 갈피에 끼워만 두자.

봄날 아지랑이 피어올라

쿵쿵 뛰는 심장에 돛이 오를 때

그리운 것들 그립다고

세월 거슬러 불러내지 말자.

낙엽 지는 벤치에 노을 꽃 피어

그리움 목이 말라 죽고 싶을 때에도

눈물 나면 눈물 나는 대로

그리워만 하자.

그리움이

그대의 식탁 위에 오르는 순간

아름다운 날들은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문학사랑 122(2017년 겨울호)

 

 

2017. 10 29

posted by 청라

현충원에서

 

 

현충원에서

 

장미꽃을 꺾어서

비석碑石을 쓸어준다.

 

장미꽃 향기가

비문碑文마다 배어든다.

 

누군가 돌 꽃병에 꽂아두고 간

새빨간 통곡

 

뻐꾸기도 온종일

가슴으로 울다 

시드는 철쭉처럼 지쳐 있구나.

 

어느 산 가시덤불 아래

그대의 피 묻은 철모는 녹이 슬었나.

 

자식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남편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뱃속에 두고 온 아버지라는 이름도 버리고

 

그대는

나라를 위해 죽었지만

나라는 그대에게

한 뼘의 땅밖에 주지 못했구나.

 

외치고 싶은 말들이

초록의 함성으로 피어나는

묘역에 앉아

 

그대의 슬픔을 닦아주다가

나도 그만 뻐꾸기를 따라

목을 놓는다.

 

2017. 10. 19

대전문학78(2017년 겨울호)

나라사랑문학2

posted by 청라

이름

이름




내 아내는 이름이 없다.


평로 딸

기창이 부인 

성용 엄마


한국의 주부들에겐

이름이 없다



2017년 9월 23일

posted by 청라

백로 무렵

 

백로 무렵

 

귀뚜라미 노래로

씻고 또 씻어 하얀 이슬

 

백로 무렵부터

나라야

맑은 하늘이거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