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아리랑

 

 

늙은 가수 소프라노로

아리랑을 부르네.

 

호흡은 가빠져

박자는 이가 빠지고

 

높은 소리 갈라져

깨진 아리랑

 

깨어져 막걸리처럼

맛난 아리랑

 

 

2018. 10. 12

posted by 청라

산길

산길

 

 

산길을 오르는 것은

산에 물들어가기 위해서다.

산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몸으로 산이 되기 위해서다.

 

조그만 풀꽃으로 피면 어떠리.

초록빛으로 같이 물들다가

새들의 노래를 모아

자줏빛 내밀한 속말 한 송이로

서있으면 좋겠네.

 

솔잎 스쳐온 바람이

미움을 벗겨가고

꽃향기 다가와 욕심을 벗겨가고

 

말갛게 벗고 벗어

투명해져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떠리.

 

내가 정상을 향해 산길을

끝없이 올라가는 것은

모든 것을 발아래 두려는 것이 아니다.


품어 안고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2018. 9. 4

문예운동142(2019년 여름호)

현대문예105(20197,8월호)

 

 


posted by 청라

개화開花

개화開花

 

 

꽃필 때

꽃빛에

아침노을 마실 왔다.

시작은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2018. 8. 28

posted by 청라

둘이 먹는 밥

 

 

달도 덩그렇게 혼자 떠 있을 때는

죽고 싶도록 외로운 것이다.

하나 둘씩 별이 눈뜨고

온 하늘이 별들의 속삭임으로

수런거릴 때

달의 미소가 더 따뜻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들끓는 식당 안에서

식판을 들고 와 혼자 밥을 먹을 때

아무도 앞자리에 마주앉는 이 없는 사람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손잡고 같이 걸을 때

삶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아내여!

아침저녁 식탁에

나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다.

내 옆에서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당신의 호흡이 느껴질 때

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낀다.

 

자식들이 하나씩 제 둥지로 흩어져가고

어깨동무했던 친구들

남처럼 서먹해졌을 때

돌아서지 않고 언제나 내 옆 자리를 지켜준

밥을 같이 먹어준 아내여!

 

세월의 눈금이 눈보라처럼 거셀지라도

당신의 미소는

늘 솔빛처럼 싱싱해야 한다.

내 옆 자리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어야 한다.

 

2018. 7. 27

문학사랑2018년 가을호(125)

posted by 청라

아버지의 등

 

 

노송에 기대어 선다.

든든한 느낌이 아버지의 등 같다.

 

웃음 속에

늘 고뇌를 감추고

세상의 바람에 힘겨워하면서도

 

자식들에겐

산처럼 등을 맡기셨던 아버지.

 

그 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고

세월만큼 허약해진 등을 두드리면서

 

아이들이 힘들 때

믿음이 되고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서슴없이 기대오는

아버지의 등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추위에도 늘 푸르게

젊음을 벼려놓는 소나무처럼

눈물이 절반인 삶의 술잔 속에서도

해맑은 웃음의 알통을 세운다.

 

 

2018. 7. 20

대전문학81(2018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튤립 사랑

튤립 사랑

 

 

! 나는 튤립 꽃밭에서

한동안 숨을 멈추었네.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줄기를 위로만 곧게 세워

태양보다 더 뜨겁게 피워 올린

단 한 송이 튤립의 사랑

 

그래, 사랑은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한 삶의 곧은 줄기엔

온 생애를 태워

진액만으로 빚어낸

오직 진실한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절규絶叫보다 더 붉은

튤립의 꽃 바다에서

온 몸을 떨고 있었네.

 

 

2018. 5. 18

충청문화예술20195월호

posted by 청라

구절초 차를 마시며

 

 

움츠리고 있던

구절초 꽃 한 송이

찻잔 속에서 활짝 피어나면

 

기와집 가득 감싸 안는

가을의 향기

 

차 한 모금에

나도 향기가 되어

 

가을비 소리 타고

당신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

 

! 수많은 날들 중

가장 빛나는 하루

 

시월의 앞섶에는

뭉클뭉클 번져가는

오색 빛 함성

 

2018. 4. 26

충청예술문화91(201910월호)

posted by 청라

산사에서의 밤

 

 

골물소리에 몸을 헹굽니다.

열대야의 꼬리가

조금씩 잘려나갑니다.

속세의 일들 실타래로 엉켜

밤새도록 불면의 바다엔

별들만 섬광閃光처럼 반짝입니다.

무엇을 비는 것일까요.

독경소리 화단 끝에서

봉숭아꽃 한 떨기로 피어납니다.

부처님 눈에 담긴 미소처럼

어둠 속에서도 붉어서 따뜻합니다.

달빛을 뽑아 실을 감으며

목탁소리 한 바가지 머리에 끼얹으면

비누거품처럼

번뇌의 때를 벗겨낼까요.

속 비운 목어처럼 편히 잠들 수 있을까요.

태엽 풀린 시간은 여명을 깨워내도

나는 아무것도 비우지 못했습니다.

 

 

2018. 4. 20

순수문학201810월호(299)

posted by 청라

환한 세상

환한 세상

 

 

아침에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위층 처녀가

안녕하세요.”

나도 기분이 좋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수고하십니다.”

버스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어서 오세요.”

점심을 먹고 나오며 식당 주인에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작은 꽃잎이 모여 꽃밭이 되듯

반가운 인사가 모여

환한 세상이 된다.

 

 

2018. 4. 19

충청예술문화89(20198월호)

한글문학20(2020년 가을겨울호)

 

posted by 청라

봄날의 독백

 

 

비 그치자

봄꽃들이 한꺼번에 화르르 타올랐다.

계절이 서둘러 가는 산마루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본다.

우리들의 사랑은  옛날처럼

순차적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매화가 질 때쯤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질 때쯤 철쭉꽃이 피고

지천으로 널려 폈다

일시에 지고 마는 꽃이 아니라

질릴 때쯤 새 꽃으로

연달아 피어나는 사랑이고 싶다.

 

 

2018. 4. 9

문학사랑127(2019년 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