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해야겠다.

 

따뜻한 정종 몇 잔 함께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대전의 밤거리를 걸어야겠다.

 

서먹했던 마음의 골목

밝게 비추는 불빛

수만의 벌떼처럼 잉잉대는 눈발

 

고희古稀의 문턱인데

명리名利를 다퉈 무엇 하리.

 

묵은 둥치일수록

단단하게 붙어있는

잔나비걸상버섯처럼

 

겨울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가자고

손을 내밀어야겠다.

 

 

2019, 2, 2

충청예술문화20193월호

posted by 청라

사막을 일구다

 

 

사랑편지를 전했더니

사막을 보내왔다.

그녀의 답신答信은 사막의 달빛처럼

무채색이다.

내 사랑 어디 씨앗 하나 싹틔울 곳 없어

도마뱀처럼 납작 엎드려

기어도 기어도 꽃은 피지 않는다.

선인장 가시에 긁힌 바람만 몇 올

모래언덕을 헤집다 스러질 뿐.

사랑이여!

작은 생명 하나 움트지 못할

불모의 땅에 뿌리를 내려보자.

깊이 숨어있는 초록의 숨결을 모아

천둥 번개를 불러오겠다.

바삭거리는 당신의 가슴에

몇 천 번이라도 비를 퍼붓겠다.

나는 사막을 일궈

사랑 한 그루 푸르게 크게 하겠다.

 

 

2019. 1. 8

충청예술문화92(201911월호)

 

posted by 청라

간송澗松 미술관에서

 

 

일본 땅 어디쯤 헤매고 있겠지

빼어난 어깨 위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온유한 가슴에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당신의 열정

민족혼이 지켜낸 천학매병千鶴梅甁

 

! 천 마리의 학들이 날아오른다.

비취빛 하늘

편편이 날리는 구름을 뚫고

 

종소리처럼 솔향기처럼

보아도 보아도 눈을 뗄 수 없는

가녀리고도 질긴 힘이여!

 

오롯한 한 가지만 심어도 좋을

좁은 입 속에

야월 한설夜月寒雪 피어난 한 송이 매화꽃 같은

당신의 정신만 꽂아놓고 싶었다.

 

 

2019. 1. 4

시문학20193월호

posted by 청라

내 안의 박수

 

 

네가 쳐주는 박수보다

스스로 치는 박수가 아름답다.

 

내 안의 박수는 선인장 꽃 같아서

가시 끝에 매달려

더욱 빛이 나는 꽃

 

박수 한 번에

탑은 한 층 높아지고

박수 몇 번 치면 하늘 끝에 이른다.

 

스스로 치는 박수와

함께 달리다 보면

나는 태양의 아들

다시는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박수를 쳐라

마음으로 치는 박수

네가 쳐주는 박수보다

내 안의 박수가 더욱 붉다.

 

 

2018. 12. 8

posted by 청라

동무 소나무

 

 

나이테를 얼마나 헤집어야만

어머니 꾸중소리 거기 있을까

 

고희 가까운 날

문득 그 나이테 언저리 그리워져

고향 집엘 찾아갔다.

 

와락 껴안아도 말 한 마디 없는

웃음마저 아주 드문

무심한 놈

 

그래도 벼랑 끝에 서서

밀려오는 세상의 파도에 출렁거릴 때

제일 먼저 손을 잡아주던 친구

 

꾸중하는 사람 하나 없어

매운 꾸중 소리 더욱 그리운 날

솔가지 회초리 마음으로 끌어안으면

 

네 스스로 꾸짖으라고

부끄럽게 살지 말라고

한결같은 초록으로 말하고 있다.

 

 

2018. 12. 1

대전문학83(2019년 봄호)

posted by 청라

여승

여승

 

 

여승은

남탕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내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여승은 합장했다.

불법에 몸을 담근 승려에게는

남자냐 여자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남자들의 대가리가

힘차게 꺼떡거렸다.

남자란 저렇게 생긴 거구나

여승은 가을 달밤 귀뚜리 울 때

콩콩 뛰던

설렘 하나 또 씻어냈다.

문에 다다른 여승의 이마에

백호白毫가 돋아났다.

 

2018. 11. 20

posted by 청라

촛불 세상

촛불 세상

 

 

촛불은

열 개만 모여도

신문, 방송에 활화산 터진 것 같다.

 

태극기는

만 개가 모여도

가물치 콧구멍이다.

 

국경일에

태극기 대신

촛불을 달아야 하나?

 

 

2018. 11. 13

posted by 청라

은행잎의 노래

 

 

누군가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은행잎만 샛노랗게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은행잎엔 사랑이 있다.

새 잎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한 잎이 몸을 던지면

또 한 잎이 몸을 던지고

온 우주 가득

노란 치마 활짝 펴고 떨어지는 삼천궁녀들

 

뒷사람을 위해서 깨끗이 물러나는 일은

꽃이 피는 일보다 아름다워라.

 

누군가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사라짐의 날개로 세상을 덮으려는 듯

은행잎만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다.

 

 

2018. 11. 10

 

 

posted by 청라

부석사浮石寺 가을

 

 

잘 익어 울긋불긋

부처님 말씀

 

귀 열면 서해바다

피안彼岸이 코앞

 

향내 묻은 목탁소리에

씻고 또 씻어

 

다 벗은 벚나무처럼

말갛게 섰네.

 

 

2018. 11. 3

문학사랑126(2018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가을 길

가을 길

 

 

, 여름 아름답게 걸어온 사람은

쑥부쟁이 꽃 모여서

피어있는 의미를 안다.

연보랏빛 기다림이

불 밝히고 있으니 가을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반짝반짝 빛나니 가을이다.

사랑도 함빡 익으면 결국은

떨어지는 것을

끝나지 않는 잔치 어디 있으랴.

나뭇잎들 색색으로 물들어

결별訣別을 준비하는 가을 길을 걸으면

기다림도 때로는 행복임을 안다.

 

2018. 10. 23

대전문학85(2019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