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암 가는 길

 

 

절은 산에 깃들고

부처님 눈빛에선

산수리치 냄새가 풍겨야 제 맛이지

 

지난달 초승에 본

부처님 미소가 너무 상큼해서

몰래 길어놨던 한 모금만 마셔도

비탈길 오르는 발걸음에 날개를 단다.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에는

햇살에도

향내가 난다.

 

뻐꾸기 소리가 붙잡아서

잠깐 앉았다 가는 바위 위엔

맑은 정적靜寂

 

산에 취해 길을 잃을 때쯤

목탁소리가 마중 나와서

그래 오늘은 부처님 말씀으로

때 묻은 온 몸 씻고 가야지.

 

 

2018. 3. 10

대전문학84(2019년 여름호)

현대문예105(20197,8월호)

posted by 청라

폭로 공화국

 

 

은밀한 것들 모두 끄집어내어

빨랫줄에 걸어놓는 일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들 모두 지나가면서

흙 묻은 작대기로 수도 없이 후려치는 일

빛나는 일인지 모르겠다.

 

지나온 길 되돌아보면

부끄러움 하나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

 

아름답던 것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일요일 아침

꽃은 피어서 무엇 하나.

 

 

2018. 2. 25

posted by 청라

맹지盲地

맹지盲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씩 끊는 일이다.

 

사방으로 열려있던

사람들 속에서

조금씩 문을 닫아거는 일이다.

 

어느 날 새벽 바람결에

나는 문득

내 목소리가 혼자라는 걸 느낀다.

 

무한히 열려있던 세상 속에서

한 군데씩 삐치고 토라지다가

물에 갇힌 섬처럼 내 안에 갇히고 말았다.


아, 타 지번地番의 군중들로 둘러싸여서

나는 그만 맹지盲地가 되고 말았네. 

겨울 들 말뚝처럼 

적막에 먹히고 말았네.

 

 

2018. 2. 10

대전문학80(2018년 여름호)

시문학20193월호

posted by 청라

해우소解憂所에서

 

 

들어갈 땐 고해苦海에 찌든

얼굴을 했다가도

해탈한 듯

부처님 얼굴을 하고 나온다.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얼마나 더 눈부신 일이냐.

 

염불 소리도 하루 몇 번 씩은

해우소解憂所에 와서

살을 뺀다.

 

배낭에 메고 온

속세의 짐을 모두 버리고

한 줄기 바람으로 돌아가 볼까.

 

냄새 나는 삶의 찌꺼기들 모두 빠져나간

마음의 뜰에

산의 마음이 새소리로 들어와

잎으로 돋아난다.

 

 

2018. 2. 6

문학사랑131(2020년 봄호)

posted by 청라

금동관음보살입상

 

 

백제의 미소는 황홀하다.

금동관음보살입상 앞에 서면

온갖 근심 씻겨 나가고

 

팔 엽 연화대좌 위에 삼보 관

탄력적 몸에서 봄바람 같은 말씀

흘러나올 듯도 하다.

 

통통한 두 뺨에 둥근 얼굴

백제사람 모습으로 현신現身했구나.

 

천 년을 지나도 변치 않는

자비로운 얼굴

보고 있으면

 

삶의 독한 매듭도 술술

풀릴 것만 같다.

 

 

2018. 1. 30

posted by 청라

백제 금동대향로

 

 

향불은 꺼져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 상 앞뒤

백제로 통하는 다섯 개의 구멍은 막혀있고,

활짝 피어난 연꽃 봉오리 표면에는

불사조와 사슴, 그리고 학

낯선 전등불 아래 쭈볏거리고 서있다.

용과 봉황이 음양으로 갈라서서

연꽃을 피워내어 봉래산을 받쳐 들고

스물 세 개의 중첩된 산골짜기로

계곡물처럼 속삭이며 흐르던

피리, 소비파, 현금, 북소리 멈춰있다.

역사는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일 뿐이런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올 줄 모르지만

향로에 향불 피어오르면

봉황이 여의주를 품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찬란한 백제가 다시 열릴 것만 같다.

 

 

2018. 1. 27

 

posted by 청라

환향녀

 환향녀

 

 

소녀가 눈보라 속에 앉아 있다.

청동의 어깨 위에 쌓이는 겨울,

그녀의 삶은 늘 바람 부는 날이었다.

풀 수 없는 옷고름 안쪽에

부끄럼처럼 감춰졌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짐승 같은 울음

그녀의 오열嗚咽 속에는 늘 열대의 태양이

핏덩이처럼 거꾸로 떨어지고 있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내버린 건

정조貞操였다.

여인들의 절망이 까마귀처럼 날아올랐다.

행복은 호국胡國의 삭풍 속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고

필리핀 열대우림 지옥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돌아올 곳이 없었다.

나는 환향녀요, 위안부였다.


가랑잎을 덮은 꿩처럼 몸을 숨겨도

언제나 겨눠지는 손가락 칼날

화냥년 화냥년 화냥년

나를 버린 건 아버지였다남자였다

그리고 조국이었다.

저희들이 살기위해 나를 버리고

삭정이처럼 마른 내 몸에 멸시의 화살을 쏘고 있느냐.

 

부끄럽지 않은 자 와서 돌로 쳐라.

세상은 눈으로 지워져 적막하고 모든 길들은 막혀있다.

꽃을 놓고 가는 아이도 눈물을 주고 가는 노인도

힘없는 정의보다는 거룩하다.

살아서는 아버지의 딸도 아니고, 조국의 딸도 아니고

그냥 더러운 몸뚱이었던 것을

동상으로 앉혀준 것이 정말 나를 위해서이냐.

 

파헤칠수록 더욱 붉어지는 상처를 보며

옛날에도 지금도 그냥 조신한 여자이고 싶다.



시문학20183월호

문학사랑130(2019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새해의 기원

 

 

무술년戊戌年 첫 새벽에 풍등風燈 하나 띄웁니다.

어둠을 뚫어내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부상扶桑까지 날아가서

밝고 뜨거운 태양을 불러오십시오.

이 땅의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주십시오.

 

정유년丁酉年 한 해는 너무도 추웠습니다.

북녘 땅에서 연이어 미사일이 날아가고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폭탄이 덩치를 불렸습니다.

대륙은 사드를 핑계삼아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바다건너에선 이 땅을

전쟁터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우리끼리라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촛불과 태극기가 서로 높이를 겨루고

세월호의 망령은 창으로 아직도 민족의 가슴을 찌릅니다.

대통령은 탄핵을 당해 어둠 속에 갇히고

겨레의 결속은

갈가리 찢겨졌습니다.

 

사랑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증오를 부풀려서 빚은 나라입니다.

 

각 부처部處에는 전문가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공신功臣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에

신명身命을 바쳐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는 과거를 단죄하느라 진을 빼기보다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차례입니다.

 

억새들도 서로의 등을 지키는 것이

혼자 바람을 견디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미움보다는 용서와 사랑으로 뭉쳐서

어깨동무하고 바람을 헤쳐갑시다.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는

무술년 이른 새벽에 풍등을 띄우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노니

희망 잃은 대한민국에 날개를 주셔서

금빛 날개로 온 하늘을 덮게 하소서.

 

 


2018년 1월 1일

충청문화예술 20181월호

posted by 청라

겨울 허수아비

 

 

빈들에

바람의 살 내음이 가득하다.

하루의 일 다 마치고 황혼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 같은 허수아비.

나는 겨울 녘 들풀들의 신음마저

사랑한다.

박제로 남아있는 풀벌레소리들의

침묵도 사랑한다.

황금빛 가을에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들

모두 마치고

부스러져야 할 땐 부스러지는

저 당당한 퇴임退任

눈부신 정적靜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먼 산사 범종소리 들을 깨우면.

수만 개의 번뇌처럼 반짝이는 눈발

눈발 속으로 다 벗은 채

지워지는 허수아비

 

 

2017. 12. 17

시문학20183월호

대전문학82(2018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달빛 기도

달빛 기도

 

 

마곡사 부처님께

백팔 배百八拜 하고 돌아온 저녁

부처님 입가에 피었던 미소

초승달로 따라왔네.

그대 빗장 지른 가슴에

달빛 한 가닥 스치거든

마음의 문 살짝 열어달라는

달빛 기도인 줄 아소서.

 

 

2017. 11. 29

대전문학79(2018년 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