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차 한 봉지

수필/교단일기 2007. 4. 5. 09:00

<교단일기>

쌍화차 한 봉지

淸羅 嚴基昌
 월요일 아침. 안개 자욱한 만년교를 건넜다.  오늘 아침 유성은 안개도시다. 갑천에서 일어난 몽롱한 안개가 빌딩을 덮고, 가로수들을 덮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가려 버렸다.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개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안개가 주는 축축함이 싫다. 기분마저 축축해져서 마음이 나른해지고, 아무 것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침부터 가라앉은 마음으로 교무실을 열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자그마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할 때까지는 분명 없었던 물건이다. 궁금한 마음으로 종이뭉치를 풀었다. 그리고 피식 웃고 말았다. 쌍화차 한 봉지였다. 남학생의 솜씨임을 금방 알 수 있는 투박하지만 정성껏 싼 종이뭉치에서 나온 것은 쌍화차 한 봉지였다. 차 봉지 위에는 서툰 글솜씨지만 따스한 마음이 내비치는 글 한 구절이 붙어 있었다.

 “피로하실 때 드세요. 음… 물은 종이컵의 이분의 일 정도 넣었다가 조금 맵다 싶으면 물을 조금 더 타서 드세요. 다방에서 파는 쌍화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찹니다. 3학년 8반”

 즉시 따뜻한 물에 차를 타서 마셨다. 조금씩 눈을 감고 음미해가며 나는 그 아이의 정성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전달했으리라. 남모르게 수줍게 가져다놓은 순수한 마음이 싸아한 쌍화차 맛 속에서 상큼한 맛으로 떠돌았다.

 누구의 정성인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묻지 않았다. 구태여 몰래 가져다 놓은 아이의 마음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때를 묻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정성이 칙칙한 아침의 내 기분을 환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까? 나의 말 없는 이 감동과 고마움이 그 아이에게 전해질까?

 세상은 공교육을, 그 속에서 커 가는 아이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는 한 이 아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