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시/제7시집 2023. 12. 12. 17:05

낮달

 

 

새 신을 사시고도

어머닌 오래도록 헌 신을 기워 신으셨다

 

찢어진 데가 또 찢어져 발가락이 나와도

시렁 위에 모셔둔 신발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저 건너로 가시고 난 후

 

너희들이나 신으라고 어머니 벗어놓고 간

하얀 고무신 한 짝

 

어머니

저승의 주막집까지 

맨발로 절뚝이며 가셨는가요

 

오늘도 끼니 거르신

창백한 얼굴이 가을 하늘에 슬프다

posted by 청라

두 석상의 하나 되기

시/제7시집 2023. 12. 10. 09:11

두 석상의 하나 되기

 

 

통일 전망대 내리는 비엔 소금기가 배어있다

갈 수 없는 마을이 그리워 울다 떠난 사람들의 눈물과

높새바람에 펄럭이던 수많은 소망들이

포말처럼 부서져서 해당화로 피는 곳

남해에서 달려온 꽃바람이 철조망에 막혀

한숨으로 시드는  곳

겨울만 사는 동네는 봄이 와도 쪽문을 열지 않는다

산 하나 넘으면 저기가 고향인데

나의 그리움은 늘 우연雨煙에 가로막힌다

두고 온 어머니의 따뜻한 웃음과 고향 마을의

학 울음소리

나의 어린 시절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봄이면 제비처럼 찾아와 울던 고향이 함흥이라는

그 할아버지

발걸음 뚝 끊긴지 오래인데

아직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닿지 못하였는가

미륵불 성모 마리아 두 석상의 기도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소망처럼 끝까지 매달렸던

마지막 잎새 툭 하고 떨어지고

국토는 아직도 굳게 동여맨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

 

posted by 청라

가을 산

시조/제3시조집 2023. 12. 8. 08:26

가을 산

 

 

시든 몸 빛바랜 얼굴

저리 고울 리가 없다

 

한여름 모진 신열

용암처럼 들끓다가

 

갈바람

서리로 식혀

아우성을 놓는 자태

posted by 청라

소리의 틀

시/제7시집 2023. 11. 25. 07:13

소리의 틀

 

 

다듬이 소리

봄날 배꽃 피어나는 달밤 산골 물소리처럼

마을 골목을 쓸고 가던 그 소리엔

누나가 수틀에 그리던 꿈이 살고 있다

 

빨래방망이 소리는 어머니 한숨

밤낮으로 일을 해도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는

평생 푸념 같은 아픔이 배어있다

 

베 짜는 소리 속엔 할머니

삶의 여유가 들어있다

눈물도 웃음도 날줄로 쌓여

오래 묵은 대추나무 같은 세월이 거기 있다

 

사랑방에는

아버지 기침소리가 살고 있어야

제 맛이다

 

고달픈 삶을 기워 짜놓은 자리만큼

질기지만 위태롭던

아버지의 등

 

소리에도 틀이 있다

세월의 강물에 다 쓸려가 아득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가두어놓은

그리운 것들은 다 소리 속에 있다

posted by 청라

묻히는 노래

시/제7시집 2023. 11. 17. 09:40

묻히는 노래

 

 

철모르는 철쭉꽃이

눈보라를 맞고 있다

 

새빨간 절규가 눈에 묻힌다

 

덧없이 피었다 지는

내  노래처럼

posted by 청라

행복을 파는 찻집

시/제7시집 2023. 11. 13. 21:51

행복을 파는 찻집

 

 

심각한 인생사도 저녁나절 안개와 같다

 

차 한 잔 마시고

창밖 산기슭 바라보니

 

가득 차서

텅 비어버린 풍경화 한 폭

 

입안에 고이는 차향이 단풍을 닮아

무지개 빛깔로 현란하다

 

얽힌 매듭처럼 풀리지 않던 사랑도

갓 잣은 실처럼

가지런해지는 찻집

 

세사의 근심들도 행복으로

말갛게 우러나는 찻집

 

 

posted by 청라

명량의 북소리

시/제7시집 2023. 10. 26. 20:14

명량의 북소리

 

 

울돌목에 나가 바다를 살포시 안아보아라

반천 년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북소리

가슴에 단심丹心이 화인火印처럼 찍혀있는

진도 사람들은 알리라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한 충무공의 염원이

울돌목 북소리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진도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숨을 쉬듯이

저 소리를 마시며 자랐기에

나라 사랑의 마음이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진도 사람들 피는 진달래 꽃빛이다

나라가 불의로 덮여있을 때 명량의 북소리로 일어서서

해일처럼 온 나라를 쓸어내는 저 간절한 의지

진도 사람들 목소리엔 천둥이 들어있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정수리에

벼락을 내리치는 강렬한 용기

황토마을 사람 중에 나라 사랑의 빛깔이 더 붉어서

충무공의 큰 칼이 오래 입은 옷처럼 편한 진도 사람들

진도에 살아서 진도 사람이 아니다

타지에 나가서도 혈맥을 통해 명량의 북소리가 울려오니까

진도 사람이다

명량의 북소리가 첨찰산 상봉에 닿아 봄이면 동백꽃 향기

피어오르는 것을 멀리서도 그리워하니 진도 사람이다

 

 

posted by 청라

<엄기창 시집 해설>

 

 

밝고 맑고 깨달음의 향기가 생동하는 따뜻한 시편

                                                                        - 공 광 규

 

 

1.

 

엄기창 선생은 1975시문학으로 등단했다. 그동안 시집 서울의 천둥』 『가슴에 묻은 이름』 『춤바위』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 『바다와 함께 춤을과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 『거꾸로 선 나무를 냈다. 대전광역시문화상 문학부문, 정훈문학상 대상, 대전문학상, 호승시문학상 대상, 하이트진로문학상 대상, 문학사랑 인터넷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은 대전문인협회 시분과 이사와 부회장, 문학사랑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클럽 회원이다.

선생의 시들은 따뜻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그의 시 문장은 밝고 맑고 아름답고 행복한 기운과 향기가 맴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현재가 참으로 추운 세상이라고 한다. 추운 이유가 정치판 때문이고 세상인심 때문이다. “서로 아껴주고 도와주고 끌어안아 주는 미덕이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 자기 욕심만 채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에 그가 시집을 내놓는 이유다.

필자는 선생의 시집 속에서 꽃을 중심 화소로 하는 맑고 밝고 아름다운 심상의 시들과 아내를 대상으로 쓴 시, 어머니와 아버지를 호명한 시, 다수의 불교제재 시를 살펴보도록 한다.

 

2.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문장은 곧 그 사람이다. 일상의 산책길에서 어떻게 하면 오늘 아침/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환한 꽃을 달아줄 수 있을까”(<산책길에서>)를 고뇌하는 엄기창 선생의 시를 읽어가다 보면 꽃, 아름다움, 반짝임, 향기에 걸려 넘어진다. 넘어져서 한동안 꽃, 아름다움, 반짝임, 향기의 숲에 머물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런 어휘들은 독자에게 행복한 울림을 가져다준다.

특히 선생의 시에는 꽃이 많이 출연한다. <사람의 향기>세상을 맑게 씻어주는 사람을 향기에 비유하고, <갈대와 나팔꽃>에서는 갈대를 감아 올라가서 꽃을 피우는 나팔꽃과 같이 흔들리는 모습을 아주 작은 것끼리도 서로 손을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는 협력을 통한 동반상승을 강조한다. <환한 세상>에서는 인사를 잘 하는 처녀를 통해 작은 꽃잎이 모여 꽃밭이 되듯/ 반가운 인사가 모여/ 환한 세상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콘크리트 틈에서 피는 제비꽃에서 착상을 얻은 시가 <제비꽃에게>인데, 선생은 단단한 벽을 허물고 깃발 세운/ 네 눈빛만으로도 골목이 환하다, “너희들 웃음만으로도/ 온 세상이 생생하게 살아 오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명자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절뚝거리며

한사코 도망가는 비둘기와

 

붕대를 들고

쫒아가는 소녀 하나

 

비둘기는 알 리가 없지요.

걱정스러운 소녀의 마음을

 

쫓기다 쫓기다

포르르 날아가는 비둘기 뒤로

 

소녀 울음만

명자꽃처럼 빨갛게 익었습니다.

- <사월 아침> 전문

 

<사월 아침>은 동화적 서정과 울림이 가득한 명품이다. 명자꽃이 핀 광장과 발가락이 잘려 절뚝거리며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비둘기. 붕대를 들고 비둘기를 쫓아가는 소녀의 모습. 소녀의 마음을 모르고 비둘기가 날아가자 울고 있는 소녀의 착한 심성이 빨간 꽃으로 핀 것이 명자꽃인 것이다. 비둘기와 소녀의 사건을 명자꽃으로 전환한 기교가 빛나는 시다.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주름지고 멍투성이 수선화같이 늙은 아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인생이 꽃피던 날상대를 헤아려주지 못한 것을 돌아보고 연민과 사랑을 바치는 아름다운 시다.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면 감흥이 남다를 것 같다.

 

귀뚜라미 소리가 깨워서

문득 눈을 떴습니다

시간의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당신의 잠든 얼굴에 눈물을 떨구게 합니다

영혼은 아이 때로 돌아갔지만

자글자글 주름에

멍투성이 수선화 같은 당신

꽃피던 날에는

당신의 아픔을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겨릅대처럼 바싹 마른 다리에

이불을 덮어주면서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

내가 태어났나 봅니다

-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 전문

 

이 시는 시집의 표제시다. 인생이 꽃피던 날, 한창 젊었을 때는 자신의 젊음을 뽐내고 발산하느라 상대의 아픔을 눈치 채지 못한다. 생동하는 기운이 빠지는 나이가 되어서야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보게 되고, 그동안 배려하지 못했던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게 된다. “자글자글한 주름멍투성이 수선화” “겨릅대처럼 바싹 마른 다리는 현재의 늙고 치매에 걸린 가엾은 아내의 모습을 대유한다. 화자는 아내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당신의 아픈 날을 감싸주라고/ 내가 태어났나 봅니다라며 자성을 통해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꽃을 뿌려야 꽃이 피지><세한도를 사는 사내2>는 상당히 시사적이고 풍자적이다. 고희를 넘어 사회의 어른이 된 선생은 앞에 시에서 계속 하락하는 출산율 저조로 인한 인구 감소를 걱정한다. 국가의 미래가 인구 감소와 상관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초등학교 운동회에 참석한 경험을 통해 퀭한 운동장에/ 그믐달만큼/ 모인 아이들// 응원 소리도/ 측백나무 울타리를 넘어가다/ 금방 사그러졌다며 비판한 뒤 씨를 뿌려야/ 꽃이 피지라고 출생을 하지 않는 현재 세태를 비판한다. 시인은 이러다가 한 명의 아이조차 낳지 않아 텅 빈 운동장에서 잡초만 무성해질 대한민국을 보았다고 한다.

동백과 장미덩굴이 출연하는 시 <세한도에 사는 사내2>의 발상은 사뭇 유가적 지성으로 체화된 충청도인의 기개와 지사적 풍모까지 보여준다. 선비로서 인간의 마을이 무너지는것을 보고 분심에 차 있는 시인은 양심 있는 사람은 입을 열지 않고, 부자들은 돈을 쓰지 않고, 아이들은 더 이상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꾸짖는다. 국가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선비라면 귀를 막지 말고 세상이 부르면 문이 없어도 나와” “세상을 갈아엎으라고 강조한다. 사회개혁을 위한 실천을 추동한다. 문단에서 이런 기개가 사라진지 오래다.

 

3.

 

아마 부모를 시의 소재로 언급하지 않은 시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모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부모가 없으면 내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혜가 크고 깊음을 설명하는 경전이 있는데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다.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이다.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한다.

엄기창 선생의 시에서도 아버지, 어머니를 제재로 한 시가 여러 편 등장한다. 앞에 언급한 <남가섭암 불빛>을 비롯해 <동무 소나무> <어머니라는 이름> <동치미를 무치며>에서는 어머니를, <팔월의 눈> <겨울 허수아비> <아버지의 등>에는 아버지가 언급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름은

어머니다.

(중략)

어머니, 어머니

부를수록 그리워지는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이름이 바로

어머니다.

- <어머니라는 이름> 부분

 

나이테 얼마나 헤집어야만

어머니 꾸중소리 거기 있을까.

 

고희 가까운 날

문득 그 나이테 언저리 그리워져

고향집에 찾아갔다.

- <동무 소나무> 부분

 

유년을 같이 보낸 고향은 어머니와 동격이다. 고향 하면 어머니가 생각나고, 어머니 하면 고향이 떠오른다. 이런 어머니는 경전에서 아이를 낳을 때는 3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가 한량 없는 것이다.

부를수록 그리워지고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이름을 가진 시인의 어머니는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쪽진 머리와 흰 옥양목 치마저고리가 백목련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머니는 화자에게 보리 누룽지를 싸주셨고, 찬 서리가 내리는 날 장독대 앞에서 기도를 하다가 감기에 걸린 자애와 희생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화자가 타향에서 서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달려가고 싶은 품이다.

화자에게 어머니는 된장찌개 냄새처럼 제일 먼저 다가오는 존재다. 나이 많은 아들도 부모에게는 언제나 어린이다. 고희에 가까운 화자는 고향집을 찾아가면서 부끄럽게 살지 말라던 생전의 어머니의 꾸중소리를 떠올린다. 화자가 세파에 시달릴 때 제일 먼저 손을 잡아주었던 것이 어머니다. 현실에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 화자는 고향의 소나무 가지를 회초리 삼아 끌어안고, 항상 부끄럽게 살지 말라는 한결 같은 어머니의 말씀을 회고한다.

 

그 날 아버지는 구급차를 타고

눈보라치는 연미산 고개를 넘으시면서

하얗게 덮인 금강의 백사장이며 빨랫줄처럼 흔들거리는

공산성의 성벽들을 샅샅이 눈에 담으셨다.

내가 이제 여기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아버지의 쉰 목소리에서 눈바람소리가 울렸다.

쉰아홉에 휘몰아친 팔월의 눈보라

간이 돌처럼 딱딱해져서

수술도 할 수 없다는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몇 마지기 땅뙈기로 아들 셋을 대학 보내며

꿈꾸었을

아버지의 무지개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나는 벌판처럼 쓸쓸해진 그의 시선을 피해

너무도 일찍 와버린 아버지의 겨울을 생각했다.

- <팔월의 눈> 부분

 

아버지는 집안을 떠받치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기둥과 같은 존재다. 이런 아버지들은 집안을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일으키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그러나 아무리 튼튼한 기둥도 언젠가는 무너지듯 아버지도 무너진다. 동시에 집안에 떠 있는 무지개는 사라진다. 이 시의 서사는 노송처럼 든든했던 화자의 아버지가 쉰아홉에 병을 얻어 구급차를 타고 연미산 고개를 넘어 병원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아버지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기는 금강의 백사장과 공산성의 성벽들,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스산하다. 가장인 아버지가 병을 얻으면 집안에 한여름에도 눈보라가 친다. 너무 일찍 와버린 눈보라, 팔월의 눈보라다. 화자는 아버지의 이른 병이 혹시 자신이 첫 월급으로 선물한 한약재가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을 한다.

엄기창 선생은 시 <겨울 허수아비>에서 겨울 빈 들에 서 있는 허수아비에서 하루 일을 다 마치고 황혼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아버지의 등>에서는 노송을 아버지의 등에 비유한다. 아버지는 웃음 속에 고뇌를 감추는 존재이며, 세파에 힘이 겨워도 표현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등이 되는 존재다. 화자는 생전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등이 될 수 있을까하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눈물이 반인 삶의 술잔을 앞에 두고 자신을 벼리고 벼리는 겸양을 시를 통해 보여준다.

 

4.

 

엄기창 선생의 시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불교제재의 시들이다. 불교는 중국을 통해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순서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축적된 연구 결과 한반도 남쪽 고대국가인 가야에는 이들 세 나라 보다 앞서 인도에서 해안을 통해 불교가 직접 건너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적어도 2천년 이상 불교가 이 땅에 와서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심성에 불교가 체화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충청도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선생의 문장에서도 불교는 고스란히 문장에 자주 발현된다. 이를테면 <해우소에서> <산사에서의 밤> <고사古寺에서> <부적> <달빛 기도> <백마강 물새 울음> <대청호> <은적암 가는 길> <청우정에서> <남가섭암 불빛> <벌레의 뜰> <내 고향 가교리> <겨울 허수아비> 등의 시다. 선생의 불교는 어머니로부터 전승된 모태 신앙이다.

 

어머니 제사 지내러 늦은 날

회재를 넘어서면

철승산 꼭대기

남가섭암 불빛이 나를 반겨줍니다.

 

깜깜할수록 더 밝게

내 마음으로 건너옵니다.

 

등창만 앓아도 십이월 찬 새벽

눈 쌓인 비탈길 쌀 한 말 이고

남가섭암 오르시던 어머니

 

부엉이 울던 달밤

장독대 뒤에

물 한 사발 떠놓고 비시던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이 아들 고희 넘어서도 무탈하게

시인이 되어

시 잘 씁니다.

 

제사 지내고 고향 떠나며 다시

회재에 올라서면

앞길 비춰주려고 불빛이 앞장섭니다.

- <남가섭암 불빛> 전문

 

화자가 어머니 제사를 지내러 화재를 넘어가면 철승산 남가섭암 불빛이 반짝반짝 마중 나온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거나 작은 우환이라도 생기면 어머니가 쌀을 이고 찾아가서 기도를 하던 암자다. 화자는 등창을 앓았을 때 어머니가 십이월 찬 새벽/ 눈 쌓인 비탈길을 공양미 이고 오르던 일화를 기억한다. 그러기에 화자를 맞아주는 암자 불빛은 어머니가 생전에 화자를 맞아들이듯 반갑다.

시골의 불빛은 깜깜할수록 더 빛난다. 더 빛날수록 따뜻해진 이 불빛은 생전 부엉이가 울던 밤 장독대 뒤에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의 안녕을 간절히 빌었던 어머니로 연상되고, 그런 어머니의 기도로 화자는 고희가 넘어서도 무탈하게 지내며 시를 잘 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회재를 액자 프레임으로 설정 사건의 시작과 종말을 구성하고 있다. 회재는 서사가 시작되는 곳이자 끝나는 곳이다. 화자는 어머니 제사 지내러 회재라는 고개를 넘어 갔다가 다시 암자를 나와 회재를 넘어 고향을 떠난다. 불빛은 화자가 고향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반겨주는 어머니의 혼령과 같다. 어머니는 지수화풍으로 돌아가셨어도 불빛이 되어 화자의 앞길을 응원하며 밝혀준다.

암자가 있는 철승산은 시 <청우정晴雨亭에서>도 언급된다. 시인은 청우정에 누워 빗소리나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비구름에 젖은 철승산에서 휘파람 울거든/ 삶에 찌든짐을 벗으라는 당부인줄 알라고 한다. 시인의 노련한 필력이 가져다주는 전략적 구성 틀을 보여주는 시가 <남가섭암 불빛>이라면, 고도화된 언술의 기교를 통한 서정의 백미를 보여주는 시는 <달빛 기도>.

 

마곡사 부처님께

백팔배 하고 돌아온 저녁

부처님 입가의 미소처럼

초승달 따라왔네

그대 빗장 지른 가슴에

달빛 한 가닥 스치거든

마음의 문 활짝 열어달라는

달빛 기도인줄 아소서.

- <달빛 기도> 전문

 

이 시는 표현과 내용이 쉬우면서도 상당한 표현력이 없으면 써내기 불가능한 시다. 화자는 고향 근처 마곡사에 가서 백팔 배를 하고 돌아와 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따라와 부처님 미소처럼 웃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전반부가 묘사 중심의 서경이라면, 후반부는 시인의 서정적 충동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대는 불특정 다수를 가리킨다. 개인의 백팔 배 경험을 불특정 다수를 향한 기도로 확장하고 있다. 거기다 달빛과 부처님 미소로 문장을 아름답게 장엄한다.

마곡사는 시 <청우정晴雨亭에서><내 고향 가교리>에서도 언급된다. 청우정은 마곡사에서 띄워 보낸/ 염불소리가/ 사람들 마음 밭에 풀꽃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는 곳이며, 고향인 가교리는 마곡사에서 떠내려 온/ 염불소리가/ 마음마다 법당 하나씩 지어주는 곳이다.

선생은 시 <고사古寺에서> “사랑은 저 대웅전처럼/ 목탁소리 쌓여서/ 바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랑의 문제를 통찰한다. 사랑은 법당의 향내처럼 묻어나는 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익숙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선생의 시에는 아직도/ 백제 말로”(<백마강 물새 울음>) 우는 백마강 물새와 고란사 종소리가 있으며, 시들했던 자신의 삶이 연꽃처럼 환하게/ 들을 수 있”(<대청호>)는 대청호가 있다.

<은적암 가는 길>에서 선생은 부처님 눈빛에선/ 산수리치 냄새가 풍겨야 제 맛이지라는 후각을 발견하고, 초승달에서 부처님의 상큼한 미소를 발견한다. <벌레의 뜰>에서 선생은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생을 내려놓으며 벌레하고 함께 사는자신의 서재가 수미산이라고 한다.

이렇듯 엄기창 선생은 시 문장에 남가섭암이나 은적암 등 사찰 이름, 산사와 독경, 목탁과 번뇌, 염불과 해우소, 고해와 속세, 부처님과 백팔 배, 고사와 대웅전 단청, 풍경소리와 법당, 연화문과 종소리, 초파일과 연꽃 등 불교 어휘를 제재로 활용해 자신의 감성과 의식을 투영하고 있다.

 

5.

 

엄기창 선생의 시들을 읽으면 마음이 밝고 맑고 아름답고 따뜻해진다. 세상을 자상하고 따뜻하게 사랑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준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잃어버린 세상을 걱정하는 선비의 풍모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더하여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 체화된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 삶의 근원과 인생을 조망하는 힘을 갖게 한다.

특히 필자는 선생의 시를 읽어가면서 고희를 넘겼는데/ 명리를 다퉈 무엇하리”(<첫눈 오는 날>)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단풍>)노을에 물들면 노을이 되고/ 가을에 물들면/ 가을이 된다”(<내려가는 길>)세상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내 스스로도 더없이 행복해지는 일이다”(<행복론>)는 문장을 만나면서 깨달은 바가 크다.

이 시집에 묶인 밝고 맑고 깨달음의 향기가 생동하는 따뜻한 시편들은 모닥불처럼 활활 타올라 이 세상을 따뜻하게 데워줄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선생의 시를 만나 시 한 편 읽고 좋은 일 하나 생기고, 두 편 읽고는 더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시처럼 마음속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 피워 사람의 향기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길 바란다. #

 

posted by 청라

사랑이 반이다

시/제7시집 2023. 8. 17. 08:51

사랑이 반이다

 

 

꽃이 없는 봄은 봄이 아니다

봄이라는 이름엔 꽃이 반이다

산수유 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만개해야만 우리는

기나긴 겨울을 털어냈다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삶이라는 이름의 절반은 사랑이다

그리움과 아픔도 사랑에서 온다

어느 날 파뿌리처럼 하얘진 머리카락

거울에 비춰 보며

흘러간 시간의 유역 한 지점을 그리워하거나

기쁠수록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일찍 시들어서 이젠 웃을 일이 없다

우리의 인생길엔 사랑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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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를 보며

 

 

저렇게 익을 대로 익었으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게다

늦가을 천둥이 울다가 가고

눈보라가 서너 번

흔들고 가도

그믐달처럼 한사코

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게다

 

저렇게 삭을 대로 삭았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게다

산다는 게 때로는 시들해지고

아픔이 술래인 듯

잡으러 와도

고목처럼 봄이면

싹을 틔우는 이유가 있을 게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