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독수리

시/제7시집 2024. 12. 23. 10:00

가을 독수리

                          한화이글스 우승을기원하며

 

창공에 독수리가 날아올라야

가을이다

 

양 발톱에 호랑이 사자를 움켜지고

창날 같은 부리로

곰을 쪼아 물고

 

하늘 가장 높은 꼿

날고 있어야 가을이다

 

봄날의 비바람과 여름날의 천둥도

독수리 비상을 위한

하늘의 안배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라

 

가을 독수리는 목소리에도 힘이 올라서

한 번 호령하면

산천이 떨고

추풍낙엽으로 떨어져야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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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제7시집 2024. 12. 18. 09:24

약속

 

 

너라도 있어야 솜털만큼

꿈 꿀 수 있을게 아니냐

 

피는 꽃 뜨는 달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게 아니냐

 

곧바로

암흑으로 떨어져

숨을 멈추는 일이 없을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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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아프다

시조/제3시조집 2024. 12. 7. 17:31

남은 것은 아프다

 

 

찔레꽃 피는 길로

어머니 떠나던 날

 

뻐꾸기 하루 종일

눈물로 우짖었지

 

목숨의

피고 짐 사이

남은 것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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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共鳴

시/제7시집 2024. 11. 29. 08:19

공명共鳴

 

 

지우다 만 연지처럼

젊음이 다 못 바랜 단풍잎 위에

엄중한 선고인가 눈이 내린다

 

아내여

이룬 것 다 버리고

다섯 살로 돌아갔지만

 

당신의 웃음이 너무 맑아서

가슴으로 울린다네

웃음 속에 숨어있는 진한 통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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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미

시조/제3시조집 2024. 11. 7. 17:30

곡선미

 

 

어머니 버선볼에

일어선 선 하나가

 

기와집 처마 따라 나비처럼 너울대다

 

하늘에

높이 떠올라

반달 되어 걸렸다

 

달항아리 어깨선에

핏속으로 울려오는

 

조상님들 그 말씀이 옹이모양 박혀있다

 

자연과

한몸 되어라

혼자 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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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 무렵

시조/제3시조집 2024. 11. 1. 11:13

상강 무렵

 

 

하늘에 걸린 달은

세상을 비워내고

 

호수에 어린 달은

내 마음을 씻어낸다

 

첫 서리

때를 맞추어

세상 걱정 접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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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시/제7시집 2024. 10. 29. 08:34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세상일들이

바싹 마른 북어 맛처럼 밋밋해지면

자작나무 숲으로 가자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하늘 끝에 팔랑대는 잎새들이 불타는 색깔로

옷을 갈아입듯이

사랑이 메말랐던 내 가슴에도 단풍이 익는다네

 

오오, 천둥이여

자작나무에 기대어 가을을 안아주면

쿠르릉 쿠르릉

몸속에서 일어서는 천둥이여

 

오랫동안 시들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세월에 속아서 차갑게 식었던 사랑이

봄풀처럼 손들고 일어서는 아우성이여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려서

미워했던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는

눈물 많은 나를 찾았다네

 

산이 속삭이는 말을 알아듣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젊어져서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를 찾았다네

 

posted by 청라

여름날의 귀향

시/제7시집 2024. 10. 3. 10:19

여름날의 귀향

 

 

골목은 사막처럼 비어있었다

분꽃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노인들

삭정이 마른 기침소리만 남아있었다

회재를 넘으면 언제나

된장찌개 냄새 마중 보내던 어머니

옛집 마당가에 돌절구로 서있고

저녁때면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에 별 촘촘 달던

감나무 묵은 둥치엔 허기진 꿈들만 무성했다

그리운 얼굴들 하나씩 소환하며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그리움은 늦여름 파장처럼 비틀거리는데

사람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 대문 닫히고

한 집 대문 닫히면 한 역사에 거미줄이 그어지고

풀들만 웃자란 건너 마을 초등학교에선

언제 또 정다운 종소리가 부르려는지

낯선 나라 언어들로 삭막해져서

어린 날 손때 희미해진 내 골목길에 가슴을 치며

홍시처럼 노을만

소멸되어가는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posted by 청라

산을 마시다

시/제7시집 2024. 9. 27. 10:15

산을 마시다

 

 

아침 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니

산은 가을 안개에 안겨있다

 

붙어산다고 꼭 정다운 것은 아니다

멀리서 손에 잡힐 듯 타오르는 초록을

한 모금 마신다

 

 

래미안아파트 17

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산과 한몸이 되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외로운 사람에겐 꾀꼬리소리를 보내주고

고달픈 사람에겐

고촉사 목탁소리를 보내 달래주고

 

세상의 바람소리 잠재운 내 가슴의

둥지에

이름 모를 새는 알을 낳는다

posted by 청라

주홍글씨

시조/제3시조집 2024. 9. 20. 18:07

주홍글씨

 

 

내 삶의 지류에서 침몰하는 꽃잎인가

소쩍새 울음 끝에 향기처럼 묻어와서

가슴을 뒤집어놓고 불꽃 접는 그 소녀

 

이 빠진 징검다리 일렁이던 인연의 줄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못 내려놓아

이름을 가슴에 새겨 질긴 형벌 되었다

 

물소리 풀 향기에도 울렁대는 돌개바람

흰 구름 가는 곳에 노을인 듯 익어있을까

청자에 상감으로 박혀 지울 수 없는 낙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