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귀향

시/제7시집 2024. 10. 3. 10:19

여름날의 귀향

 

 

골목은 사막처럼 비어있었다

분꽃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노인들

삭정이 마른 기침소리만 남아있었다

회재를 넘으면 언제나

된장찌개 냄새 마중 보내던 어머니

옛집 마당가에 돌절구로 서있고

저녁때면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에 별 촘촘 달던

감나무 묵은 둥치엔 허기진 꿈들만 무성했다

그리운 얼굴들 하나씩 소환하며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그리움은 늦여름 파장처럼 비틀거리는데

사람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 대문 닫히고

한 집 대문 닫히면 한 역사에 거미줄이 그어지고

풀들만 웃자란 건너 마을 초등학교에선

언제 또 정다운 종소리가 부르려는지

낯선 나라 언어들로 삭막해져서

어린 날 손때 희미해진 내 골목길에 가슴을 치며

홍시처럼 노을만

소멸되어가는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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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마시다

시/제7시집 2024. 9. 27. 10:15

산을 마시다

 

 

아침 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니

산은 가을 안개에 안겨있다

 

붙어산다고 꼭 정다운 것은 아니다

멀리서 손에 잡힐 듯 타오르는 초록을

한 모금 마신다

 

 

래미안아파트 17

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산과 한몸이 되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외로운 사람에겐 꾀꼬리소리를 보내주고

고달픈 사람에겐

고촉사 목탁소리를 보내 달래주고

 

세상의 바람소리 잠재운 내 가슴의

둥지에

이름 모를 새는 알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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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시조/제3시조집 2024. 9. 20. 18:07

주홍글씨

 

 

내 삶의 지류에서 침몰하는 꽃잎인가

소쩍새 울음 끝에 향기처럼 묻어와서

가슴을 뒤집어놓고 불꽃 접는 그 소녀

 

이 빠진 징검다리 일렁이던 인연의 줄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못 내려놓아

이름을 가슴에 새겨 질긴 형벌 되었다

 

물소리 풀 향기에도 울렁대는 돌개바람

흰 구름 가는 곳에 노을인 듯 익어있을까

청자에 상감으로 박혀 지울 수 없는 낙인

 

 

posted by 청라

소쩍새 우는 사연

시조/제3시조집 2024. 9. 13. 20:23

소쩍새 우는 사연

 

 

달빛이 비운 산을 노래로 채우는 새

소쩍쿵 소쩍소쩍 온밤 내내 들끓다가

정념이 흘러넘쳐서 초록이 더욱 깊다

 

슬픔도 길들이면 기쁨으로 피는 것을

오뉴월 소쩍새처럼 흥타령 살다 가세

온 세상 아픈 일들도 큰 박수로 닦아내세

 

 

posted by 청라

제비 나라

시조/제3시조집 2024. 8. 21. 15:02

제비 나라

 

 

말 한 마디 뿌려지면 살판났다 지지배배

옳고 그름 제쳐두고 꼴리는 대로 지지배배

인구는 줄어가는데 소음들로 꽉 찬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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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傳言

시조/제3시조집 2024. 8. 17. 20:18

전언傳言

 

 

된서리 고된 날도

아비는 늘 푸르다

 

세상의 모진 바람

웃음으로 싸안으며

 

닥쳐 올

겨울 눈보라

큰 산처럼 막아선다

 

힘들 때 아비 등은

기대라고 열려있다

 

머리가 좀 컸다고

혼자 아파 하지 마라

 

언제나

손 보태주라고

아비가 있는 게다

 

 

 

posted by 청라

혼자 사는 친구에게

시/제7시집 2024. 8. 14. 15:23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등 기대고 부대끼며 살다가

나들이 끝내고 돌아가는 것

손 흔드는 뒷모습 허전하지 않게

씨앗 몇 알갱이 떨어뜨리고

큰 나무로 자라게 거름이나 주면서

싸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

아이들 많은 집안은 가난해도 부자이다

자식들 꿈들은 모두 다 내 재산이다

허공 높이 소망을 연처럼 띄워놓고

하늘까지 오르도록 줄 함께 잡고 버티다 보니

이제 나는 알겠다

기르는 게 두려워 외롭게 사는 것보다

날마다 전쟁이라도

웃을 일 풍성한 게 행복이라는 걸

 

posted by 청라

하일夏日 점묘點描

시/제7시집 2024. 8. 2. 07:53

하일夏日 점묘點描

 

 

매미소리 한 줄금

골목을 쓸고 간 후

배롱나무 가지에 타오르는

늦더위 송이송이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마을회관 공터에는

고추잠자리만 하루 종일 맴돌다 간다

소 울음 닭소리도 잦아든 지 오래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씩

사립문 닫히는 마을

봉숭아꽃 몇 번을 피었다 져도

금줄 걸린 집 하나 찾을 수 없고

접동새 흐느낌만

어둠처럼 내리고 있다

 

 

posted by 청라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시/제7시집 2024. 7. 11. 04:43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친구들 더러는 여의도에 가고

모두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신문마다 이름들 반짝반짝 빛나는 저녁

 혼자 앉아 김치 안주로

소주 몇 잔 꺾고 돌아앉는 어둠에

푸념처럼 슬그머니 떠오르는

벼린 초승달

무엇을 이루려고 젊은 날을 불살랐는지

권력놀음에 취해

서로에게 총질하는 서글픈 창문 너머로

삭막해진 산하를

그래도 촉촉하게 붙잡아주는 개구리 소리

posted by 청라

가을하늘

시조/제3시조집 2024. 7. 7. 09:33

가을하늘

 

 

코스모스 피었는데

세상은 어둡구나

 

잠자리 도망치듯

끝없이 올라간다

 

인세人世에 도가 없으니

하늘이라도 맑아야지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