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수

수필/서정 수필 2007. 5. 2. 09:00

정화수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전으로 검정고시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가 부엉이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문틈으로 열여드레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갔다. 으스름 달빛은 온 세상에 넘실거리고, 검게 가라앉은 산의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꼍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산 밑 장독대 앞에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계신 것이 아닌가.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를 만큼 어머니는 기도에 몰두하고 계셨다. 하얀 사발 안에 우물에서 갓 길어낸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어머님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꼭 감긴 두 눈가엔 간절한 염원처럼 맑은 달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아들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들만은 그 어렵다는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빌고 계실 터였다. 온 새벽의 경건함이 새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님 등 뒤에 둘러져 있고, 찬란한 달빛은 모두 어머님의 두 손끝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온몸이 달빛을 받아 후광에 싸여 있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에 못 박힌 채 살아오신 어머님이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나를 낳고는 겨우 웃음을 찾으시었고, 내가 등창만 앓아도 아버지 밥상에도 놓기 어려운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남가섭암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시던 어머님이다.

  나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감동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죽여 바라보았다. 잘못 움직이면 어머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깨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살금살금 방으로 뒤돌아올 때도 달빛 아래 그림처럼 그렇게 앉아 계셨다.


한밭수필9(2017)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