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시/제7시집 2025. 7. 12. 09:40

인생

 

 

자다가 문득 일어나서

당신의 얼굴 바라보니

새벽 달빛 더 환하게

주름살마다 새겨진 우리 세월을

쓰다듬어 주네

다 늦게 사랑을 알 만하니

번뇌 한 아름 따라오고

아픔과 동무로 살다 보니

인생을 알게 되네

인생은

꽃길만 가는 게 없더라

비틀비틀 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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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당신을 위해 피었나보다

시/제7시집 2025. 7. 2. 08:52

꽃도 당신을 위해 피었나보다

 

 

사람은 몰라봐도

꽃은 알아보나 보다

 

꽃의 마음이 향기롭다는 것은

아직 잊지 않았나 보다

 

활짝 웃는 그 모습을 보면

아내는 아이처럼 박수 치며

반겨주기에

 

우리 아파트 산수유 꽃은

겨울을 뿌리치고

서둘러 당신을 향해 달려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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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시월

시/제7시집 2025. 6. 11. 16:33

불타는 시월

 

 

친구는 혼자 화를 내다

절교를 선언하고 돌아가고

나는 접시에 고기처럼 쌓인 폭언을

안주삼아

눈물로 소주를 마신다

창밖엔 우리 나이만큼의 가을이 익고 있다

불판의 열기처럼 분노로 달궈졌던 친구

다 늙은 나이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시국 얘기 한 마디에 산산조각 낸

오십년 우정

한 쪽으로만 배가 기운다는 건

침몰하고 있다는 일이다

몇 잔 마신 취기에 어지럽게 뒤섞여

노을인양 출렁거리는

불타는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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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산행

시/제7시집 2025. 6. 11. 16:31

5월 산행

 

 

산은 한사코

나를 반겨 손을 흔들고

안개는 품을 벌려

감싸 안으려 한다

찔레꽃 향기가 불러서 왔는데

세상의 근심 말끔히 살라주는

초록빛 불길

느닷없는 뻐꾸기 소리에

딸꾹질하는 산

풀썩이는 송홧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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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서 손을 흔들다

시/제7시집 2025. 3. 9. 08:25

보길도에서 손을 흔들다

 

 

마지막 배는 떠나가고

포구는 적막에 젖는다

이별이 숙명이라면

기쁘게 손을 흔들자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는

담배연기처럼

외로움을 즐기자

안개는 눈물인 듯 섬을 채우려 하고

가로등 하나 한사코

절망을 벗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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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외출

시/제7시집 2025. 2. 16. 19:44

아내의 외출

 

 

노을 걸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없고

애들 엄마도 없고

색동옷 입은 아이만 하나

 

반겨주던 웃음도

외출을 했나

 

거실엔

주인처럼 들어와 자리잡은

쓸쓸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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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밤에

시/제7시집 2025. 2. 3. 07:10

눈 오는 밤에

 

 

한 사흘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평생 쌓아올린 이름도 벗어놓고

예닐곱 살 어린 날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눈 속에 고구마를 몰래 묻어놓으면

길어도 헛헛하지 않던 겨울밤

화롯가에 모여앉아

할머니 옛 얘기에 눈을 반짝이며 가슴 졸이던

추억의 도화지에

평생을 그리운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밤새도록 꿈 밭에서 서성이고

형이 뒤척이면 이불 밖에서 내 다리가 얼던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들 모두 막아놓고

예닐곱 살 그 날에 갇혀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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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독수리

시/제7시집 2024. 12. 23. 10:00

가을 독수리

                          한화이글스 우승을기원하며

 

창공에 독수리가 날아올라야

가을이다

 

양 발톱에 호랑이 사자를 움켜지고

창날 같은 부리로

곰을 쪼아 물고

 

하늘 가장 높은 꼿

날고 있어야 가을이다

 

봄날의 비바람과 여름날의 천둥도

독수리 비상을 위한

하늘의 안배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라

 

가을 독수리는 목소리에도 힘이 올라서

한 번 호령하면

산천이 떨고

추풍낙엽으로 떨어져야 가을이다

posted by 청라

약속

시/제7시집 2024. 12. 18. 09:24

약속

 

 

너라도 있어야 솜털만큼

꿈 꿀 수 있을게 아니냐

 

피는 꽃 뜨는 달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게 아니냐

 

곧바로

암흑으로 떨어져

숨을 멈추는 일이 없을게 아니냐

posted by 청라

공명共鳴

시/제7시집 2024. 11. 29. 08:19

공명共鳴

 

 

지우다 만 연지처럼

젊음이 다 못 바랜 단풍잎 위에

엄중한 선고인가 눈이 내린다

 

아내여

이룬 것 다 버리고

다섯 살로 돌아갔지만

 

당신의 웃음이 너무 맑아서

가슴으로 울린다네

웃음 속에 숨어있는 진한 통곡이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