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4. 12. 09:00

죽음의 의미

淸羅 嚴基昌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연탄가스로 죽었다. 한여름내 등 밑을 적셔왔던 습기를 없앤다고 연탄을 피워놓고 잠든 사이에 죽음의 신은 그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끌고 가 버렸다. 팔팔 뛰던 사람이 밤사이에 웃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도 못하고, 나를 보아도 반갑다 말 한 마디 못하는 한 덩어리 굳은 물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 동안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