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지犧牲枝

수필/서정 수필 2018.12.12 10:27

희생지犧牲枝

 

 

  정원수로 가꾸기 위해 소나무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원 둥치의 직경이 굵고 키 작은 소나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소나무 재배업자들은 소나무를 단기간에 굵게 키우고 싶어 한다.  줄기의 단면적은 그 줄기를 통해 왕래하는 물질들의 통과 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소나무를 빨리 굵게 키우기 위해서는 수관 부를 크게 키워야 한다. 수관 부를 빨리 키우려면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키워야 하는데, 원 둥치의 비대를 위해 당분간 키우고 있는 가지, 그 것이 바로 희생지犧牲枝이다.

  소나무가 완성목이 되기 전에 이 희생지犧牲枝는 반드시 잘려나갈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우거진 풀과 다른 나뭇가지들과 격렬한 전쟁을 치른다. 세상의 주역이 아님을 알면서도 불평 없이 원 둥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희생지犧牲枝. 그러기에 희생지犧牲枝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거룩하다.

  내게는 형님이 한 분 있었다. 6.25사변 중에 두 분의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와 열여섯 살 차이의 아버지 같은 맏형님만 집안을 지키고 계셨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사변 통에 북한군의 총탄에 부상당한 왼손을 잘 못 쓰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힘든 농사일은 형님께서 처리하셨다.

  내가 어릴 때의 우리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대부분의 농촌 청년들은 꿈을 찾아 도시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건너 마을 누구는 서울로 갔고, 장다리골 누구도 대전에서 큰 상점 점원으로 취직하여 출세를 했다는 소문이 부러웠던 그런 시절이었다. 형님의 꿈도 대도시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고 한 번 살아보는 거였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형님도 서울 큰 공장에 취직해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배움은 적었지만 원래 똑똑하고 성품이 좋았기에 주인에게 인정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갑자기 아버지께서 크게 편찮으셨기 때문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골로 내려온 형님은 실망하지 않고 산밭을 일구시었다. 기구도 변변치 않아 괭이와 삽만으로 완만한 산의 경사면을 파고 또 파시었다. 늘 형님의 손바닥은 피가 맺혀 있었고, 허리는 나이에 비해 일찍 구부정해지셨다. 계단밭을 만든 후 복숭아 묘목을 심어 과수원을 만드셨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키우셨다. 그 때부터 우리 집안의 형편이 좀 피었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형님의 그 따뜻한 말씀을.

  내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주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몸부림칠 때였다. 집안 식구 다 굶겨 죽이려 한다고 부모님은 요지부동이셨다. 나는 밭을 매다가 호밋자루를 놓고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은 따라 울면서도 그 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때 형님이 말씀하셨다. 자기가 좀 더 고생하겠노라고.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느냐고

  형님의 희생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합격하여 소망이던 교직에의 꿈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내가 놓은 다리로 동생들도 쉽게 건너가서 한 사람은 육군 중령으로 퇴역하였고, 막내는 삼성중공업 부장으로 퇴임하였으며 조카들도 줄줄이 대학에 가서 마을에서 대학 졸업생이 가장 많은 집안이 되었다.

  형님은 집안의 희생지犧牲枝였다. 나를, 아우들을, 집안을 살찌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셨다. 형님이 없었으면 우리 집안의 덩치가 이만큼 건강하게 굵어질 수 있었을까. H.G. 보운은 양초는  자신을 소비해서 남을 밝게 해준다고 했으며, 톨스토이는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며,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라 했다. 일찍 가셔서 보은할 길 없지만 희생지犧牲枝를 볼 때마다 형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2018. 12. 12

posted by 청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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