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창 「초도에 내리는 별빛」

엄기창론 2023. 6. 24. 11:22

엄기창 초도에 내리는 별빛

 

 

꽃들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애써서 예쁘게 꾸미려 하지 않는다

대충대충 피어도 꽃은 꽃인가

다 떠나고 남은 집 혼자 지키는

앵두나무 야윈 가지에 봄이 환하다

육지가 있는 수평선 쪽으로는

보이지 않는 붉은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칠이 벗겨진 지붕과 빈 마당 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돌 절구통 적막 위에

십자가가 내려진 교회 터에 떠도는

찬송가와

무너지다 만 벽마다 지워져가는

아이들의 낙서도

곧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지

소멸의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는

인간의 발자국 위로 별이 내린다

초도에 내리는 별빛은 갓 씻어낸 호롱불 같다

앵두꽃에 별빛이 내려 별이 꽃인지

꽃이 별인지 알 수 없는 밤

낚시로 잡은 붉바리 회에 술 한 잔 걸치고 보니

원래 혼자였던 섬의 옷깃 한 자락

내가 지팡이 삼아 잡고 있구나  

   

-엄기창 초도에 내리는 별빛전문  

 

 

 

        

  E.H.Carr에 따르면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와의 대화라고 하여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현재의 가치에 비추어 의미 있는 역사가 진정한 역사라 하였다 한 개인의 기억 역시 자신을 둘러 싼 주변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생겨난 자신의 심리에서 야기된 기록이 현재의 상황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상황이나 자신이 선택적으로 기억한 과거의 일들에 더 강한 영향을 받으며 현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실들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에게 주어지고 해결된 일들과 특별한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보다 잘 기억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갖기도 하며 자신이 속했던 집단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 경우, 낙관적인 요인과 결합되기도 하는데, 낙관이 늘 좋은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냉철한 현실이 필요하며 문화의 맥락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Martin Seligman) 

  시의 화자는 초도에 들면서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자연 환경을 바라보며 이들의 과거로 돌아가는 생각을 열어 놓았다.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생각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다 떠나고 남은 집에서 화자는 장소가 가져다주는 공허함을 만나게 된다. 주인이 없어 손보지 않은 칠이 벗겨진 지붕과 빈 마당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빈 십자가가 내려진 교회 터에 떠도는 찬송가에서는 이미 장소의 구실을 할 수 없고 흔적만 남은 한 때 교회였던 곳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초도는 무너지다 만 벽마다 지워져가는 아이들의 낙서에서 이미 이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고 홀로 늙어 가는 장소가 되어버린 점을 읽을 수 있다. 한때 초도는 사람들이 꽤 살았지만 삶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섬 초도의 주민들이 모두 떠난 섬이다 이렇게 늙어버린 섬 가운데 서서 현재의 자신은 그 늙은 땅의 지팡이로 서 있다고 한다. 비록 장소에 대한 긍정화와 자긍심과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한 때 소중하던 모든 것들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상황에 대한 냉철함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의 집 해월당

posted by 청라

사랑은 익모초 맛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3. 6. 14. 18:48

사랑은 익모초 맛이다

 

 

당신의 노을이 더 아프게 서편하늘을 물들이면

사랑은 익모초 맛이다

쓰디써도 마실 수밖에 없던  그리움의 맛

어린 시절 장독대 위 하얀 사발에 곱게 찌어 밤새도록 찬이슬 맞혀

새벽 댓바람에 억지로 마시게 하던  어머니의 그 엄하던 눈빛의 향내

더위 먹은 배앓이를 낫게 하느라 쓴맛 속에 감추었던 당신의 사랑

지금도 내 가슴 따뜻하게 해

어머니처럼 날 정말 위해준 사람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길 잡은 손을 놓지 않던 사람

발맞추어 걸어오면서 무심하게 버렸던 것들

왜 이리 가시 되어 가슴을 찌르나

당신이 탄 인생열차 마지막 칸에서 조금씩 더 빨리 달리는 당신을 보면서

무엇으로도 막아주지 못해 속으로 울고 있는 나를 보면서

사랑은 너무 써서 마실 수 없네

 

posted by 청라

성묘를 하며

카테고리 없음 2023. 6. 4. 10:58

성묘를 하며

 

 

나무가 저리 곧은데

그림자라고 구부러지랴

 

상석 위에 술잔 대신

환한 웃음 차려놓고

 

아버지 아들이라

반듯하게 잘 삽니다

posted by 청라